SF 생태주의
<석조 하늘>, 최후의 만찬과 바이오 돔 본문
※ 이 게시글은 노라 제미신 소설 <석조 하늘>의 치명적인 내용 누설을 포함합니다.
우와~, 이 게임 스크린샷은 신비롭고 환상적입니다. 하늘에서 별빛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오로라가 휘몰아치기 때문에, 이 게임 스크린샷은 얼마나 우주가 신비롭고 환상적인지 부각하는 것 같습니다. 찬란하고 무한한 밤하늘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우주로 승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 스크린샷은 오직 우주만 부각하지 않습니다. 이 스크린샷은 비단 우주만 아니라 생명 현상을 부각합니다. 스크린샷 하단은 다양한 식물들과 버섯들을 보여줍니다. 오른쪽 하단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습니다. 하단 가운데에는 극지 지의류가 있습니다. 이 게임 스크린샷은 툰드라 생물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이 게임 스크린샷에서 상단은 신비로운 우주를 부각하고, 하단은 다양한 생명체들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우주와 생명 현상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혹한 우주에서 (고등) 생명체가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혹한 우주에서 곰벌레 같은 몇몇 생명체 이외에 다른 많은 생명체들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우주와 생명 현상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달을 향한 모험>의 '녹색 손가락'은 인상적인 SF 단편 소설입니다. <달을 향한 모험>처럼, 만약 우주선이 바이오 돔을 장착한다면, 이것 역시 우주와 생명 현상을 대조할 테고, 이 대조는 인상적일 겁니다. 우주는 신비로우나, 우리는 생명체입니다.
우리가 생명체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신비로운 우주로 진출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명 현상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준비해야 합니다. 우주에서 생명 현상이 살아남을 때, 우리 역시 살아남을 겁니다. 특히, 여기에서 자급자족은 가장 중요한 화두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궤도 정거장, 장거리 우주선, 불모지 외계 행성에서 바이오 돔은 자급자족을 담당합니다. 생명 현상에게 신진 대사는 가장 근본적인 과정입니다. 생명체는 먹고 삽니다. 수마트라 호랑이는 먹고 삽니다. 장수 거북은 먹고 삽니다. 물수리는 먹습니다. 줄무늬 다람쥐와 꿀벌들은 먹습니다. 스테고사우루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비롯해 많고 많은 생명체들은 먹고 삽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때문에, 바이오 돔은 자급자족을 담당합니다. 바이오 돔은 심지어 가혹하고 신비로운 우주에서조차 우리가 필연적으로 먹고 산다고 시사합니다. 지구에서 우리가 살아가든, 장거리 우주선에서 우리가 살아가든, 불모지 외계 행성에서 우리가 살아가든, 우리는 먹습니다. 이건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아무리 자크 데리다가 차이(차연)를 주장한다고 해도, 먹고 살기는 차이와 상대성보다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만약 불모지 행성에서 자크 데리다가 풍족하게 먹고 산다면, 먹고 살기는 고정적이지 않을 겁니다.
바이오 돔과 테라포밍 없이, 만약 불모지 외계 행성에서 자크 데리다가 얼마든지 먹고 산다면, 먹고 살기보다 차이와 상대성은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불모지 행성에서 자크 데리다는 먹고 살지 못합니다. 자크 데리다는 굶어죽습니다. 자크 데리다가 굶어죽는 것처럼,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먹고 삽니다. 차연이고 상대성이고 나발이고, 먹고 살기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먹고 살기는 여자를 배제하지 않고, 장애인을 배제하지 않고, 동성애자를 배제하지 않고, 흑인을 배제하지 않고, 소수 민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먹습니다. 장애인은 먹고, 동성애자는 먹고, 소수 민족은 먹습니다.
여자가 먹고, 장애인이 먹고, 동성애자가 먹고, 소수 민족이 먹는 것처럼, 흑인은 먹습니다. 먹고 살기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먹고 살기가 예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강자가 약자를 차별하기 원한다고 해도, 먹고 살기는 차별하지 못합니다. 예외 없이, 모두가 먹고 살기 때문에, 먹고 살기는 '존재 이유'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먹거리를 선사한다면, 이건 이 사람이 존재하기 위한 이유, 근본을 선사한다는 뜻입니다. 먹거리가 존재하기 위한 이유, 근본이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먹거리를 선사한다면, 이 행위는 아주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기독교 신화에서 나사렛 예수가 수난을 당하기 전에, 예수가 무엇을 했나요?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 참가했습니다. 예수가 수난을 당하기 전에, 예수는 다른 무엇보다 만찬에 참가했습니다. 만찬은 먹거리들을 선사합니다. 예수는 먹거리들을 선사합니다. 왜 예수가 먹거리들을 선사하나요? 이 행위가 고귀하고 숭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먹기 때문에, 먹거리는 존재하기 위한 이유가 되고, 예수는 존재하기 위한 이유를 선사합니다. 예수가 근본을 선사하기 때문에, 이 행위는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그래서 메시아 예수는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심지어 예수는 자신의 육체를 먹거리에 비유합니다. 예수는 포도주가 자신의 피이고 빵이 자신의 살이라고 말합니다. 포도주와 빵은 먹거리입니다. 먹거리는 예수의 육체가 됩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먹습니다. (비록 예수가 육체를 무시한 적이 있다고 해도) 예수는 먹거리와 자신의 육체를 비유하고 우리가 먹는다고 주장합니다. 먹거리가 존재하기 위한 이유이고, 예수(의 육체)가 먹거리이기 때문에, 예수는 존재하기 위한 이유가 됩니다. 존재하기 위해 인간은 메시아 예수를 추구합니다. 예수가 포도주와 빵이기 때문에, 예수는 고귀하고 숭고한 구원자입니다.
인간이 무엇으로 사나요?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예수는 주장합니다. "인간은 비단 빵으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이 문구는 신의 뜻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한편으로 이 문구는 인간이 먹거리에게 기반한다고 상정합니다. 인간이 신의 뜻을 따르기 전에, 이미 인간은 먹고 삽니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이 '비단'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건 인간이 필연적으로 먹는다고 전제를 깝니다. 이 전제처럼, 예수는 먹거리를 중시합니다. 만약 인간이 오직 신의 뜻으로만 살고, 먹거리가 근본이 아니라면, 예수는 많은 사람들이 불쌍하게 굶주린다고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인간이 오직 신의 뜻으로만 살고, 먹거리가 근본이 아니라면, 예수는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겁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먹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입니다. 이 행위는 비단 놀랍고 신기할 뿐만 아니라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먹거리가 존재하기 위한 이유이고, 예수가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위한 이유를 선사했기 때문에, 오병이어 기적은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예수는 바늘 구멍과 낙타를 운운했고 부자들을 비판했습니다. 반면,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동정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아, 모두 나에게로 오라."
구원자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먹입니다. 먹거리가 존재하기 위한 이유이기 때문에, 구원자 예수는 먹거리를 선사합니다. 이 행위는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기술이 고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술은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먹지 못한다면, 의술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풍부한 영양분은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밑거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먹거리를 선사할 때, 의술이 고귀한 기술인 것처럼, 이 행위는 숭고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병자를 고치고, 동시에 예수는 자신이 먹거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먹거리를 선사합니다.
예수가 먹거리를 선사하는 것처럼, 먹거리는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먹거리가 숭고한 구원이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먹거리를 선사한다면, 이 사람은 자부심을 느낄지 모릅니다. 소설 <석조 하늘>에서 에쑨은 자신의 젖가슴을 석화(石化)합니다. 호야는 석화한 젖가슴을 우적우적 먹습니다. 호야가 스톤이터이기 때문에, 호야는 석화한 젖가슴을 먹습니다. 에쑨은 이 장면을 보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왜 에쑨이 자부심을 느끼나요? 젖가슴이 먹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젖가슴은 아기를 먹입니다. 아기를 먹이기 위해 젖가슴은 진화했습니다. 먹거리는 존재 이유, 근본입니다. 젖가슴은 존재 이유입니다.
젖가슴은 아기를 위한 근본입니다. 먹거리가 존재 이유이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먹거리를 선사한다면, 이 행위는 고귀하고 숭고할 겁니다. 여자는 젖가슴으로 아기를 먹입니다. 여자는 젖가슴으로 먹거리를 선사합니다. 그래서 수유는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여자가 먹거리를 선사하기 때문에, 여자는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여자가 고귀하고 숭고하기 때문에, 여자(엄마)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자는 자신의 육체로 먹거리를 선사합니다. 예수는 포도주와 빵이 자신의 피와 살이라고 말했으나, 이건 그저 비유에 불과합니다. 구원자 예수는 자신의 육체로 먹거리를 선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예수가 숭고하다고 해도, 예수는 자신의 육체로 먹이지 못합니다. 예수와 달리, 여자는 자신의 육체(젖가슴)로 먹입니다. 이 지점에서 예수보다 여자는 숭고합니다. 만약 예수가 남자보다 여자였다면, 만약 예수가 어머니와 젖가슴을 언급했다면, 예수는 먹거리와 육체를 훨씬 긴밀하게 연결했을 겁니다. 애석하게도 삼위일체는 여자를 간과했고 실수(?)했습니다. 삼위일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언급하고 외아들보다 외동딸을 인간 세계에 보내야 했습니다. 예수보다 여자가 숭고한 것처럼, 에쑨 역시 자신의 젖가슴으로 세 아기들을 먹였습니다. 에쑨은 비단 세 아기들만 아니라 호야를 먹였습니다.
에쑨이 자신의 육체로 비단 세 아기들만 아니라 호야를 먹였기 때문에, 에쑨이 자신의 육체로 먹거리를 선사했기 때문에, 고귀하고 숭고한 에쑨은 자부심을 느꼈을 겁니다. 이건 에쑨이 젖을 먹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호야는 스톤이터입니다. 스톤이터는 석화한 육체를 먹습니다. 스톤이터는 모유를 먹지 않습니다. 젖가슴이 석화했기 때문에, 스톤이터 호야는 그저 석화한 육체를 먹었을 뿐입니다. 이건 수유가 아닙니다. 하지만 비록 젖가슴이 석화했다고 해도, 젖가슴이 수유 기관이기 때문에, 호야가 젖가슴을 우적우적 씹었을 때, 에쑨은 먹거리와 육체와 숭고함을 연결했고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에쑨이 자부심을 느낀 것처럼, 소설 독자는 이 장면을 읽고 먹거리와 육체와 숭고함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건 먹거리와 육체와 숭고함을 연결하기 위해 우리가 SF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소설 없이, 우리는 먹거리와 육체와 숭고함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소설이 비현실 설정들(석화한 육체, 스톤이터, 오로진)을 보여주기 때문에, 비현실 설정은 먹거리와 육체와 숭고함을 부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의 육체를 포도주와 빵에 비유했을 겁니다. 이건 비현실 설정입니다. 아무리 예수가 신성하고 경이롭다고 해도, 예수는 자신의 피와 살을 직접 주지 못합니다.
예수의 살은 빵이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가 신성하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이건 비(非)현실 설정입니다. 왜 예수가 비현실 설정을 동원하고 육체가 포도주와 빵이라고 표현하나요? 비현실 설정이 먹거리와 육체와 숭고함을 부각하기 때문입니다. 비현실 설정은 주제를 부각할 수 있습니다. 장거리 우주선과 바이오 돔을 보세요. 우주선 사람들에게 바이오 돔은 '자연'입니다. 이건 유일한 자연입니다. 우주가 가혹하고 막막하기 때문에, 만약 바이오 돔이 망가진다면, 우주선 사람들은 자연에게 기반하지 못할 겁니다. 우주선 사람들이 자연 환경에게 기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굶주립니다.
지구 생물권이 아주 드넓기 때문에, 지구에서 우리는 자연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상상하지 않습니다. 반면, 바이오 돔이 망가진 이후, 가혹하고 막막한 우주에서 사람들은 자연에게 기반하지 못합니다. 장거리 우주선과 바이오 돔은 자연이 무엇인지 부각합니다. 장거리 우주선과 바이오 돔 없이, 우리는 자연과 먹거리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거리 우주선과 바이오 돔이 자연을 부각하기 때문에, SF 독자는 자연과 먹거리를 훨씬 깊게 고민할 수 있습니다. 비록 현실에서 인류 문명이 장거리 우주선을 건조하지 않았고 바이오 돔을 장착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아주 매력적입니다.
에쑨이 자부심을 느낀 것처럼, 먹거리는 필수적입니다. 바이오 돔과 테라포밍 없이, 외계 행성에서 자크 데리다가 굶어죽는 것처럼, 먹고 살기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반다나 시바와 마린 르펜이 대조적이라고 해도, 반나다 시바와 마린 르펜은 필연적으로 먹고 삽니다. 먹고 살기가 아무도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먹고 사는 관점에서 반다나 시바와 마린 르펜은 다르지 않습니다. 반다나 시바와 마린 르펜은 똑같습니다. 자크 데리다와 미셸 푸코 역시 똑같습니다. 노라 제미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예수가 삼위일체라고 해도, 예수가 인간의 육체가 된 이후, 예수는 먹고 삽니다.
먹고 살기가 아무도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반다나 시바와 마린 르펜과 자크 데리다와 미셸 푸코와 노라 제미신은 똑같습니다. 심지어 인간으로서 예수조차 똑같습니다. 심지어 노라 제미신과 인간 예수조차 똑같은 것처럼, 먹고 살기는 차별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먹거리는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급자족하기 위해 우주선 사람들이 바이오 돔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생태계 테라포밍 없이, 불모지 외계 행성에서 자크 데리다와 미셸 푸코가 사이좋게 굶주리는 것처럼, 자연 속에서 인간은 먹거리를 얻습니다. 자연 환경 없이, 공허 속에서 인간은 먹거리를 얻지 못합니다.
자급자족하기 위해 우주선 사람들이 바이오 돔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자연에서 먹거리는 비롯합니다. 자연 없이, 인간은 먹거리를 얻지 못합니다. 자연에서 먹거리가 비롯하고, 먹거리가 존재 이유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에게 의지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는 자연이 필요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자연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연을 공유해야 합니다. 공유 사회는 필수적입니다. 바이오 돔과 최후의 만찬과 <석조 하늘>은 공유 사회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공유 사회를 거부합니다. 자본주의가 사유 재산을 중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공유 사회를 탄압합니다.
공유 사회를 탄압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공유지의 비극을 나불거립니다. 오랜 동안, 여러 인류 사회들은 공유지에게 기반했습니다. 원주민 부족들과 농업 코뮨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공유 사회는 지속 가능합니다. 오히려 서구 제국주의가 원주민 부족들과 농업 코뮨들을 짓밟았기 때문에, 공유 사회들은 사라졌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확장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공유 사회를 짓밟았습니다. 이 비열한 양아치 짓거리를 감추기 위해 자본주의는 공유지의 비극을 나불거립니다. 공유 사회는 숭고하나, 자본주의는 비열한 양아치입니다.
먹거리가 존재 이유이고, 공유 사회가 먹거리를 선사하기 때문에, 공유 사회는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에쑨이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공유 사회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고귀하고 숭고한 공유 사회를 짓밟고 모욕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비열한 깡패 양아치입니다. 19세기 후반 파리 코뮌부터 21세기 초반 인디언 사회주의까지, 언제나 자본주의는 공유 사회를 짓밟았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유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가장 거대한 시도였으나, 서구 제국주의는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을 연이어 저질렀고, 가장 거대한 시도 소비에트 연방은 비참하게 몰락했습니다.
비록 소비에트 연방에게 많은 한계들과 단점들이 있었다고 해도, 소비에트 연방은 세계 대전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반면, 제국주의는 세계 대전을 저질렀습니다. 제국주의가 1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을 때, 심지어 소비에트 연방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블라디미르 레닌은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오직 소비에트 연방만 악랄하다고 나불거립니다. 이건 너무 부당한 비난입니다. 자본주의는 공유 사회를 너무 부당하게 비난합니다.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바이오 돔과 최후의 만찬과 <석조 하늘>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시사합니다.
※ 게임 <타이토 에콜로지> 스크린샷 출처: Dakotaraptor,
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2030347932
※ 사진 <Sweet … Chocolate Icecream Toast> 출처: kandykand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