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대혼란>과 거대 괴수와 총체적인 해석 본문
[이런 삼림 건물이 코로나 19 사태로 이어질 수 있나요? 소설 <미친 아담>과 거대 괴수는 어떤가요?]
많은 기본 소득 지지자들은 기본 소득이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는다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억압적인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어떤 사상이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을 수 있나요? 만약 시민 배당이 자본주의에 도움이 되거나 자본주의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이건 우파적인 시민 배당이 될 겁니다. 만약 시민 배당이 자본주의에 작은 타격을 입히거나 천천히 임금 노동 제도를 잠식한다면, 이건 좌파적인 시민 배당이 될 겁니다. <공산당 선언>은 낮은 단계 공산주의, 높은 단계 공산주의를 구분합니다. 인간성이 바뀌기 전에, 사람들이 완전히 바뀌기 전에, 높은 단계 공산주의는 도래하지 않습니다.
낮은 단계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 성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지 모르나, 이런 사회에서 무산자 민중 독재는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이건 상당히 오랜 기간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19세기 공산주의자들이 하루 아침에 해방 사회가 찾아온다고 부르짖는 동안, <공산당 선언>은 이게 너무 순진한 사고 방식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만약 낮은 단계 공산주의, 과도기, 이행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오랜 기간을 요구한다면, 시민 배당 역시 여기에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만약 시민 배당 덕분에, 임금 노예 제도에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보수 우파 역시 시민 배당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위해 보수 우파는 시민 배당을 지지합니다. 만약 시민 배당이 나타나고 국가 복지 정책이 사라진다면, 복지 분야는 민영화에 가까워질 겁니다. 영리 기업들은 복지 민영화를 추구할 겁니다. 복지 분야는 시장 경제에 들어갈 테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영역을 넓힐 겁니다. 복지, 의료, 교육 민영화는 아주 첨예한 문제입니다. 어설프고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갑갑한 공교육보다 다양한 대안 교육들을 찬양하나, 정말 다양한 대안 교육들이 좋은가요? 하지만 만약 비싼 대안 교육들이 널리 퍼진다면, 공교육은 너무 크게 무너질지 모릅니다.
공교육이 탄탄해질 때, 다양한 대안 교육들에는 가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공교육이 탄탄해질 수 있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교육은 자본주의 만만세를 불러야 합니다. 자본주의 만만세를 부르기 위해 교육은 시시껄렁해져야 합니다. 학교 교육들은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거짓말해야 합니다. 학교 교육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학생들을 세뇌시켜야 합니다. 세뇌가 열린 교육인가요? 아니, 세뇌는 그저 추잡한 미친 짓거리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이 탄탄해질 수 있나요? 정말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대안 교육들이 '대안'인가요?
그 자체로서 대안 교육은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본주의 세뇌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갑갑하고 지루한 공교육보다 다양한 대안 교육들이 낫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억압적인 자본주의가 기준이 된다면, 다양한 대안 교육들은 교육 민영화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 좌파들은 의료 민영화에 반대합니다. 심지어 어설프고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조차 의료 민영화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어설프고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교육 민영화에 찬성합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왜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이 어떤 민영화에 찬성하고 어떤 민영화에 반대하나요? 민영화가 좋은가요?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자본주의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억압적이나, 이게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어떤 민영화에 찬성하고 어떤 민영화에 반대합니다. 그 자체로서 민영화는 문제가 아닙니다. 민영화에는 '배후'가 있습니다. 우리가 민영화를 판단할 때, 우리는 '기준'을 고려해야 합니다. 민영화 배후와 기준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세뇌하고 오직 이윤 극대화만 추구합니다. 그래서 의료 민영화와 교육 민영화는 똑같이 나쁩니다. 똑같이 양쪽은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배후'와 '기준'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복지 민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민 배당은 복지 민영화가 될지 모릅니다. 만약 국가 정부가 적은 시민 배당을 시행하고, 여러 복지들을 없애고, 복지 분야에서 국가 정부가 물러난다면, 시장 경제는 복지 분야를 접수할지 모릅니다. 복지 분야는 시장 경제 상품이 되고, 영리 기업들은 이것을 민영화할지 모릅니다. 자본가 계급은 이것을 환영할 겁니다. 이것을 위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시민 배당을 주장할 겁니다. 만약 시민 배당이 임금 노동 제도를 약화시키고, 영리 기업들과 민영화가 힘을 잃는다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이것을 환영할까요? 정말 그들이 미약한 임금 노동 제도를 환영할까요?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임금 노동 약화를 거부할 겁니다. 그들은 시민 배당이 영리 기업들과 시장 경제와 임금 노동 제도를 뒷받침하기 원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시민 배당이 우파를 뛰어넘을 수 있나요? 만약 시민 배당 덕분에, 무산자 민중들이 영리 기업들에게 저항할 수 있다면, 비정규직 주부 사원이 정규직 임원 부장 아재에게 대들 수 있다면, 노동 조합들이 파업을 훨씬 쉽게 결의한다면, 시민 배당은 '좌파적인 시민 배당'이 될 겁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이것을 원할까요? 자본가 계급이 이것을 원할까요? 정말 그들이 원할까요? 어떤 자본가들은 시민 배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만약 시민 배당이 임금 노동 제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자본가들이 시민 배당을 계속 지지할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 사회 전체가 시민 배당을 지지할 수 있을까요? 시민 배당 논의에서 재원은 핵심 문제입니다. 만약 임금 노동 제도에서 무산자 민중들이 (어느 정도) 자유롭기 원한다면, 비정규직 주부 사원이 정규직 임원 부장 아재에게 대들기 원한다면, 노동 조합들이 파업을 훨씬 쉽게 결의하기 원한다면, 시민 배당 액수는 어느 정도 커져야 합니다. 어떻게 국가 정부가 재원을 마련할 수 있나요? 국가 정부는 거대 자본가 계급을 압박해야 합니다. 국가 정부는 거대한 이윤을 뚝 떼어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 정부가 거대한 이윤을 정말 뚝 떼어낼 수 있나요? 국가 정부는 자본주의를 편듭니다. 이런 국가 정부가 거대한 이윤을 쉽게 가져올 수 있나요? 그래서 무산자 민중들은 자본가 계급을 압박해야 합니다. 만약 무산자 민중들이 오직 국가 정부만 바라본다면, 국가 정부는 자본주의를 계속 편들 겁니다. 무산자 민중들이 자본가 계급을 압박할 때, 국가 정부는 (씨부렁거리며) 거대한 이윤을 가져올 겁니다. 결국 계급 투쟁은 시민 배당을 뒷받침합니다. 계급 투쟁 없이, 시민 배당은 없습니다. 계급 투쟁 없이, 시민 배당은 복지 민영화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계급 투쟁은 시민 배당 '배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시민 배당을 언급할 때, 사람들은 '배후'를 고려해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기준 없이, 시민 배당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시민 배당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민 배당은 자본주의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본주의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건 우파적인 시민 배당입니다. 시민 배당은 임금 노동 제도를 약화시키거나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계급 투쟁 없이, 시민 배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좌파적인 시민 배당입니다. 이렇게 시민 배당에는 '배후'가 있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중립적이고 초월적인 시민 배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립적이고 초월적인 시민 배당은 멍청한 헛소리입니다.
비단 시민 배당만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말할 때, 우리는 '배후'와 '기준'과 '의도'를 고려해야 합니다. 복지 민영화를 위해 보수 우파가 시민 배당에 찬성하고, 임금 노동 제도를 약화시키기 위해 사회주의가 시민 배당에 찬성하는 것처럼, 어떤 개념에게는 배후, 기준, 의도가 있습니다. 어머니 자연은 어떤가요? 그 자체로서 어머니 자연이 뭔가를 가리키나요? 왜 사람들이 여자와 자연을 연결하나요? 여자와 자연이 똑같이 생명체를 낳기 때문에? 이게 전부인가요? 여왕 에일리언은 알을 낳습니다. 여왕 에일리언은 엄청나게 많은 알들을 낳습니다. 여왕 에일리언이 어머니 자연인가요?
여왕 에일리언은 어머니 자연이 아닙니다. 많은 관객들은 이것을 부정할 겁니다. 아무리 어머니 자연과 여왕 에일리언이 생명체들을 똑같이 낳는다고 해도, 관객들은 여왕 에일리언이 어머니 자연이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 식물 아내가 번성하는 외계 식생을 바라볼 때, 이게 어머니 자연이 되나요? 네, 이건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모나크 사이언스가 모스라를 '자연 세상의 어머니'라고 부를 때, 이게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나요? 네, 이건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독자들과 관객들은 식물 아내와 모스라가 어머니 자연이라고 말할 겁니다. 여기에 '돌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돌봄'이 뭔가를 가리키나요? "그래, 여자는 아기를 낳고 아기를 먹이지. 그래서 여자는 아기를 반드시 돌봐야 해.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아기를 돌봐야 해." 만약 어머니 자연 개념이 이것을 주장한다면, 어머니 자연 배후에는 가부장적인 편견이 있을 겁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이다. 자연처럼, 여자는 아기를 낳는다. 여자의 육체를 왜곡하지 말라. 재생산 노동은 댓가를 받아야 한다." 만약 어머니 자연 개념이 이것을 주장한다면, 어머니 자연 배후에는 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이 있을 겁니다. 어머니 자연은 그저 상징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배후'와 '기준'과 '의도'입니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를 언급합니다. 사실 주요 언론 매체들에서 코로나 19 사태는 대부분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전염병 사태라고 '분류'합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전염병 사태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인가요? 아니, 코로나 19 사태는 단순한 전염병 사태보다 거대한 생태 재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생태 재앙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배후'와 '기준'과 '의도'가 무엇인가요? 대답은 자유 무역들과 기후 변화입니다. 자유 무역들은 자연 생태계를 교란하고, 기후 변화는 바이러스를 훨씬 퍼뜨립니다.
이런 '기준'에서 코로나 19 사태는 생태 재앙 범주에 들어갑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생태 재앙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생태 재앙 범주에서 우리는 코로나 19 사태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단 코로나 19 사태만 아니라 다른 생태 재앙들을 함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러 환경 전문가들은 원 헬스와 기후 변화와 전염병 사태와 생태 재앙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생태학 SF 장르가 환경 오염들을 중시하기 때문에, 비록 많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이 대대적인 전염병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거시적인 '기준'에서 SF 팬들은 코로나 19 사태와 생태학 SF 장르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전염병이 심각해진다면, 국가 정부는 국경을 폐쇄하고 병자들을 강제로 격리할 터이다. 국가 정부는 공공 시설과 대학을 임시 병원과 시체 안치소로 개조할 터이다. 대중 집회와 스포츠 경기가 금지되고, 집안에서 대중들은 노심초사하며 기도를 올리거나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죽어갈 터이다. 감염자가 발생한 집 대문은 빨간 페인트칠로 표시되고, 접근은 차단된다.” 이 문구들은 코로나 19 사태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혼란>에서 앤드류 니키포룩은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를 예상합니다. 그리고 이 예상은 들어맞았습니다. <대혼란>은 자연 생태계 교란과 자유 시장 경제를 비판합니다.
동시에 <대혼란>은 환경 아포칼립스 분위기를 강렬하게 풍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생태 재앙이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생태 재앙은 인류 사회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하지만 세계화 자본주의가 생태 재앙에 제대로 대처하나요? 기후 변화는 생태 재앙입니다. 코로나 19 사태보다 기후 변화는 훨씬 심각한 재앙일 겁니다. 기후 변화는 훨씬 심각하나, 세계화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경계하지 않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오직 이윤만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생태 재앙을 절대 막지 못하고 생태 재앙에 절대 대처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그저 생태 재앙을 부추길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염병 사태 앞에서 좌파와 우파가 나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염병 사태 앞에서 당파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건 얄팍한 시각입니다. 심각한 재앙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공공 의료를 늘리지 않고, 시민 배당을 지급하지 않고, 사회적인 약자들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재난 상황에서 돌봄 노동들은 심각한 위기에 부딪히나, 자본주의 국가 정부들이 지속적인 시민 배당을 지급하나요? 아니, 자본주의 국가 정부들은 돌봄 노동 위기를 주시하지 않습니다. 공공 의료 확대, 돌봄 노동 위기처럼, 전염병 앞에서 당파성은 아주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염병이 심각하다고 난리법석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봄 노동 위기를 걱정하나요? 만약 기후 변화가 훨씬 심각해진다면, 코로나 19 난리법석보다 기후 변화 난리법석은 훨씬 엄청난 문제들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사회적인 약자들을 제대로 돌볼 수 있나요? 평소에 자본주의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합니다. 만약 심각한 재앙이 덮친다면, 사회적인 약자들은 훨씬 험난한 고통에 부딪혀야 할 겁니다. 돌봄 노동 문제는 훨씬 심각한 위기에 부딪혀야 할 겁니다. 코로나 19 사태에서 돌봄 노동 문제가 위기에 부딪히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난리법석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생태 재앙들을 열심히 부추길 겁니다.
자본주의가 생태 재앙을 부추기기 때문에, <에코토피아 뉴스> 같은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자본주의 환경 오염들을 비판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선구적인 생태학 SF 소설입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이 한창 성장하는 동안, <에코토피아 뉴스>는 유토피아 로망스를 계승하고 생태 유토피아를 제시합니다.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처럼,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는 많은 환경 아포칼립스들이 있으나, <에코토피아 뉴스>가 초기 생태학 SF 소설이기 때문에, SF 팬들은 많은 환경 아포칼립스들과 <에코토피아 뉴스>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소설은 가부장적인 편견을 드러냅니다.
19세기 상류층 백인 남자 작가로서 윌리엄 모리스는 시대적인 한계, 가부장적인 편견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가부장적인 편견을 미화합니다. SF 팬들은 이런 단점을 강렬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이런 단점을 강렬하게 비판하기 위해 SF 팬들은 <식물 아내>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식물 아내>처럼, 다행히 생태학 SF 울타리에서 여러 소설들은 가부장적인 편견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울타리 안에서 SF 팬들은 코로나 19 사태, 환경 아포칼립스들, <에코토피아 뉴스>, <식물 아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 설정 역시 이 울타리에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 무토는 대대적인 전염병이 아닙니다. 하지만 생태 재앙 범주에서 양쪽은 비슷한 위상입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생태 재앙 주제는 다소 희미해졌으나, 전작 2014년 영화 <고지라>는 자연 정복, 핵 발전소, 생태 재앙을 이야기합니다. 핵 발전소가 무토를 깨웠고, 무토가 도시를 파괴하기 때문에, 이런 도시 파괴는 생태 재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전염병이고, 동시에 이게 생태 재앙에 속하는 것처럼, 무토와 도시 파괴는 괴수 난동이고, 동시에 이건 생태 재앙에 속합니다. 그래서 세리자와 박사는 자연 정복을 경계했을 겁니다. 비록 2014년 <고지라>는 대대적인 전염병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나, 거대 괴수 무토와 무너진 도시는 대대적인 전염병과 비슷한 위상입니다.
만약 SF 팬들이 거대 괴수 무토와 무너진 도시와 대대적인 전염병과 코로나 19 사태를 함께 고찰한다고 해도,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닐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대혼란>과 <와인드업 걸> 같은 환경 아포칼립스들과 거대 괴수 무토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SF 팬들은 이런 연결 고리들을 부정할지 모릅니다. 2014년 <고지라>가 대대적인 전염병을 직접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SF 팬들은 <대혼란>과 <미친 아담>과 코로나 19 사태를 2014년 영화 <고지라>에 대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런 반박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SF 팬들은 배후, 의도, 기준을 파악하고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총체적인 시각은 너무 거창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부터 코로나 19 사태, 생태 재앙, <식물 아내>, 기후 변화, 자본주의 비판, <와인드업 걸>, 환경 아포칼립스들, 자연 생태계 교란, 거대 괴수와 무너진 도시, <대혼란>과 자유 무역까지. 이런 흐름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는 너무 어려울지 모릅니다. 이런 총체적인 해석은 너무 낯설지 모릅니다. 왜 이런 총체적인 해석이 중요한가요? 생태학이 전체론이기 때문입니다. 생태학은 지엽적인 부분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전체론으로서 생태학은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하고, 생태학 SF 평론 역시 이런 총체적인 시각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게시글이 시민 배당 배후를 지적하는 것처럼, 다른 분야들에서도 총체적인 시각은 중요합니다. 왜 총체적인 시각이 중요한지 설명하기 위해 이 게시글은 사례로서 시민 배당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생태학 SF 평론이 문자 그대로 생태학을 이야기하고, 생태학이 전체론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생태학 SF 평론은 전체론을 추구해야 합니다. 전체론을 추구하기 위해 생태학 SF 평론은 얄팍한 관념론, 보수적인 실증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생태학은 '체계'입니다. 싸이-파이 채널 드라마 <듄>에서 챤니가 설명한 것처럼, 생태학은 체계이고, 체계는 지엽적인 부분, 얄팍한 관념론, 보수적인 실증주의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를 너무 얄팍하게 바라봅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판데믹 등급 위기가 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하늘을 단순하게 올려다보고 동쪽에서 태양이 뜨고 태앙이 지구 주변을 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직 두 눈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게 전부인가요? 이게 생태학이 되어야 하나요? 단순한 시각, 얄팍한 관념론이 생태학이 되어야 하나요? 생태학이 단순한 시각이기 때문에, 생태학 SF 평론 역시 오직 두 눈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고 말해야 하나요? 아니, 챤니는 이걸 비판할 겁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평론은 배후, 의도, 기준을 파악하고 이것들을 총체적으로 분류하고 엮어야 합니다. <식물 아내>부터 <대혼란>과 <미친 아담>과 코로나 19 사태와 거대 괴수 무토까지, 이것들은 개별적인 요소들 같습니다. 하지만 폭넓은 그물망을 짜는 것처럼, 총체적인 생태학 SF 평론은 이것들을 함께 바라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