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상흔>과 <백경>, 공동체로서 선박 항해 본문
※ 이 게시글에는 차이나 미에빌이 쓴 <상흔>과 허먼 멜빌이 쓴 <백경>의 치명적인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소설 <상흔>은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동시에 이 소설은 해양 모험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에서 주된 배경 무대는 선단 도시 아르마다입니다. 작은 요트부터 거대한 증기선까지, 수많은 배들은 아르마다를 구성합니다. 그 자체로서 아르마다는 거대한 선박이고, 동시에 아르마다는 도시입니다. 아르마다가 선박이기 때문에, 아르마다는 움직입니다. 스팀펑크 바다에서 선단 도시 아르마다는 끊임없이 항해합니다. 비록 속도가 빠르지 않다고 해도, 다양한 바다들에서 아르마다는 다양한 사건들을 겪습니다. 특히, 아르마다에게는 거대 괴수 아방이 있습니다. 아방은 아르마다를 이끌기 위한 동력원입니다.
말이 마차를 이끄는 것처럼, 아방은 아르마다를 이끕니다. 하지만 마차와 달리, 아방과 아르마다는 훨씬 웅장하고 경이롭습니다. 아방이 거대 바다 괴수이기 때문에, 아르마다가 선단 도시이기 때문에, 아방에게 말과 마차는 비교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구조가 비슷하다고 해도, 위용과 규모 측면에서 아방과 아르마다는 말과 마차를 압도합니다. 하지만 아르마다는 아방을 쉽게 길들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선단 도시가 대단하다고 해도, 어떻게 사람들이 거대 바다 괴수를 쉽게 통제할 수 있나요? 아방을 소환하기 위해 선단 도시 사람들은 온갖 난리법석들을 일으켜야 했고 시행 착오들을 거처야 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 과정이 소설 <백경>과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백경>에서 모비 딕을 잡기 위해 포경선 피쿼드는 온갖 난리법석들을 거쳤습니다. 모비 딕은 거대 바다 괴수입니다. 비록 <백경>은 SF 및 판타지 소설이 아니나, 소설 속에서 이스마엘을 비롯해 여러 선원들은 모비 딕을 신화적으로 가공합니다. 소설 속에서 모비 딕은 해룡, 바다뱀, 크라켄, 레비아탄 같은 신화적인 존재들과 비슷한 위상이 됩니다. 비록 크라켄에게 어깨가 없다고 해도, 모비 딕과 크라켄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습니다. 아방과 아르마다, 모비 딕과 피쿼드는 비슷한 관계입니다. 아방과 모비 딕은 똑같이 거대 바다 괴수입니다.
아르마다와 피쿼드는 똑같이 선박입니다. 양쪽 모두 거대 바다 괴수를 잡기 원합니다. 이건 아르마다와 피쿼드가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르마다는 아방을 죽이기 원하지 않습니다. 아르마다에게는 아주 강하고 빠른 동력원이 필요합니다. <백경>에서 스텁은 '호랑이 꼬리가 깡통을 매다는 것'처럼 고래가 포경 보트를 이끌고 빠르게 헤엄친다고 소리칩니다. 이런 비유처럼, 아방은 아르마다를 이끌고 바다를 빠르게 가로지릅니다. 반면, 피쿼드는 모비 딕을 처치하기 원합니다. 에이허브 선장은 복수에 두 눈이 멀었습니다. 비록 에이허브 선장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지옥에서 에이허브는 모비 딕의 심장을 찌를 겁니다.
아르마다는 아방을 성공적으로 소환하고 길들입니다. 아르마다와 달리, 피쿼드는 모비 딕을 만나나, 다른 포경선들이 침몰한 것처럼, 피쿼드 역시 해저를 향해 비참하게 침몰합니다. <백경>에서 모비 딕은 불가해한 거대 바다 괴수이고, 인간은 감히 거대 바다 괴수에게 덤비지 못합니다. 아무리 에이허브 선장이 복수에 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에이허브 선장은 그저 인간에 불과합니다. 인간으로서 에이허브 선장은 거대 바다 괴수를 이기지 못합니다. "심지어 지옥에서조차 나는 네놈의 심장을 찌르겠다!" 하지만 에이허브 선장은 지옥에 닿지 못할 겁니다. 에이허브 선장이 지옥에 닿기 전에, 모비 딕은 에이허브를 물어뜯습니다.
결국 소설 <백경> 마지막 장면에서 피쿼드는 비참하게 침몰합니다. 소설 화자 이스마엘은 피쿼드가 침몰하는 장면을 바라봅니다. 피쿼드와 달리, 아르마다는 침몰하지 않습니다. 소설 <상흔> 후반부에서 아르마다는 아주 거대한 위기에 부딪히나, 아르마다는 항로를 돌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아르마다는 항로를 돌리고 안전하게 항해합니다. 아르마다와 달리, 피쿼드는 항로를 돌리지 못했습니다. 에이허브 선장이 모비 딕에게 작살을 던지기 전까지, 피쿼드는 항로를 절대 돌리지 않습니다. 1등 항해사 스타벅은 피쿼드가 항로를 돌리고 일반적인 포경 항해로 돌아가야 한다고 계속 설득하나, 에이허브 선장은 듣지 않습니다.
스타벅은 피쿼드가 항로를 돌려야 한다고 설득하고, 설득하고, 설득하고, 다시 설득합니다. 심지어 스타벅은 에이허브를 죽이기 위한 기회를 엿봅니다. 만약 스타벅이 에이허브를 죽였다면, 이건 선상 반란이 되겠으나, 피쿼드는 미친 복수를 포기하고, 항로를 돌리고, 일반적인 포경 항해로 돌아갔을 겁니다. 스타벅은 수많은 선원들과 피쿼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타벅은 너무 조심스러웠고 에이허브를 찌르지 못했습니다. 에이허브가 바라는 것처럼, 결국 피쿼드는 모비 딕을 만납니다. 하지만 이제 에이허브 선장조차 모비 딕 사냥이 미친 짓거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사냥에서 에이허브는 스타벅이 피쿼드를 지키기 원합니다. 에이허브는 선량한 스타벅이 사악하고 미친 짓거리에 휘말리지 않기 원합니다. 스타벅과 에이허브는 마지막 악수를 나눕니다. 스타벅은 눈물들을 글썽이고 "아아, 존경하는 선장님, 가지 마세요. 제발 가지 마세요."라고 간절하게 외칩니다. 하지만 에이허브 선장은 일등 항해사의 간청을 뒤로 하고 모비 딕에게 향합니다. 웅장한 바다 괴수는 보트들을 박살내고 피쿼드를 들이받습니다. 스타벅은 고래 사냥에 끼어들지 않았으나, 선량한 스타벅은 비극에 휘말립니다. 결국 피쿼드는 기우뚱하고 바다 밑바닥을 향해 가라앉습니다.
애니메이션 <인어 공주>에서 세바스찬은 "저 바다 밑~♬"이라고 흥겹게 노래부르나, 피쿼드 선원들에게 바다 밑바닥은 흥겹지 않습니다. 이스마엘 이외에 모든 피쿼드 승무원은 가라앉고, <백경>은 완벽한 비극이 됩니다. 반면, <상흔>이 희극이 아니라고 해도, <상흔>에서 아르마다는 항로를 돌립니다. 피쿼드는 항로를 돌리지 못했으나, 아르마다는 항로를 돌릴 수 있었습니다. 왜 아르마다가 항로를 돌릴 수 있었나요? 피쿼드와 아르마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나요? 어쩌면 사회 구조는 항로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피쿼드와 아르마다는 다른 사회 구조를 보여줍니다.
피쿼드에서 선원들은 에이허브에게 복종합니다. 에이허브는 강렬한 웅변을 이용해 선원들을 포섭합니다. 선원들은 에이허브에게 복종하고, 에이허브와 선원들은 함께 모비 딕에게 향합니다. 결국 에이허브는 파멸하고, 에이허브와 함께 선원들 역시 파멸합니다. 에이허브는 선량한 스타벅을 지키기 원했으나, 스타벅 역시 파멸합니다. 스타벅은 파멸을 막기 원했으나, 스타벅은 너무 소심했습니다. 대부분 소심한 지식인들이 지배 계급을 비판하지 못하는 것처럼, 스타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타벅은 지식인과 비슷합니다. 만약 지식인이 민중들을 선동하고 급진적인 혁명을 지지한다면, 민중들은 혁명을 일으킬 테고 지배 계급은 무너질 겁니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소심합니다. 지식인들은 민중들보다 지배 계급에게 들러붙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런 지식인들이 '집을 지키는 개'라고 표현합니다. 어려운 냉전 시대에서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는 너무 성급하게 당파성을 드러내나, 가장 유명한 철학자로서 두 사람은 '집을 지키는 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사르트르/보부아르와 달리, 스타벅은 상황을 관망합니다. 스타벅은 에이허브를 찌르지 않고, 선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선원들을 선동하지 않습니다. 스타벅은 그저 눈물들을 호소할 뿐입니다. 그래서 에이허브와 함께 피쿼드는 모비 딕을 만나야 했습니다. 거대 바다 괴수는 피쿼드를 들이받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스타벅을 변호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에이허브가 스타벅을 인정한다고 해도, 선상 반란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만약 스타벅이 선원들을 선동질했다면, 스타벅은 범죄자가 되었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쳐가는 상황에서 스타벅이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아무리 지식인이 시대의 양심이라고 해도, 만약 국가 전체가 미쳐돌아간다면, 지식인이 세계 대전을 혼자 막을 수 있나요? 개인보다 사회는 압도적입니다. 개인은 사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아무리 지식인이 영민하다고 해도, 지식인은 개인입니다. 지식인이 민중들을 선동하고 급진적인 혁명을 지지하기 원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사회적인 기반이 있어야 합니다.
소설 <상흔>에서 아르마다에는 사회적인 기반이 있습니다. 아르마다는 난민들과 천민들을 받아줍니다. 아르마다는 억압을 받는 사람들이 이룩한 도시입니다. 아무리 리메이드 여자가 성 노예라고 해도, 아르마다에서 리메이드 여자는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뉴크로부존 함대가 아르마다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음에도, 아르마다 시민들은 뉴크로부존 해군 포로들이 아르마다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난민들, 천민들이 아르마다를 이룩하기 때문에, 전쟁 포로들 역시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사회적인 기반입니다. 이미 이게 든든한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이건 쉽게 흔들리지 않고 돌변하지 않습니다. 이건 굳건한 토대입니다.
심지어 아르마다 지도부가 뉴크로부존 해군 포로들을 죽이기 원할 때, 아르마다 시민들은 반대합니다. 뉴크로부존 함대가 아르마다에게 너무 비극적인 피해를 입혔음에도, 아르마다 시민들은 뉴크로부존 포로들이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도시 지도부가 강력하다고 해도, 그들은 사회적인 기반을 뒤흔들지 못합니다. 아르마다가 천민들의 도시, 난민들의 도시이기 때문에, 아르마다에서 진정한 힘은 천민들, 난민들에게서 나옵니다. 그래서 도시 지도부가 위험한 항해를 고집한다고 해도, 피쿼드 선원들과 달리, 아르마다 시민들은 위험한 항해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도시 지도부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에이허브와 달리, 아르마다 지도부는 아르마다 시민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아르마다 시민들에게는 스타벅 같은 중간 계급, 지식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서 도울은 스타벅 같은 중간 계급, 지식인인지 모릅니다. 분명히 우서 도울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르마다는 항로를 돌리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스타벅과 우서 도울이 비슷한 위치라고 해도, 스타벅은 실패했고, 우서 도울은 성공했습니다. 사회적인 기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타벅은 선원들을 선동질하지 못합니다. 우서 도울은 선동질할 수 있습니다. 천민들과 난민들이, 밑바닥 사람들이 선단 도시 아르마다의 사회적인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흡혈귀 시장 브루콜랙이 강조하는 것처럼, 아르마다는 문자 그대로 도시입니다. 피쿼드 역시 도시, 국가,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 문학 평론가들은 피쿼드가 일종의 국가라고 간주합니다. 에이허브는 지배 계급, 항해사들은 중간 계급, 선원들은 피지배 계급입니다. 만약 아르마다와 피쿼드가 공동체라면, 독자들은 <백경>과 <상흔>을 다른 공동체 이야기들에 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어슐라 르 귄이 쓴 <빼앗긴 자들>은 어떤가요? 이 소설 역시 사회적인 기반이 밑바닥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허우대가 멀쩡하다고 해도, 만약 사회적인 기반이 밑바닥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 사회는 억압일 겁니다.
<빼앗긴 자들>에는 선단 도시가 없고, 바다 괴수가 없고, 환상적인 항해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르마다가 도시이기 때문에, 도시로서 사회적인 기반이 밑바닥 사람들이기 때문에, 독자는 <상흔>과 <빼앗긴 자들>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비단 <빼앗긴 자들>만 아니라 현실 속의 세계화 자본주의와 <상흔>을 대조할 수 있습니다. 언뜻 세계화 자본주의는 부유롭고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빼앗긴 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건 그저 가식에 불과합니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빈곤에서 진보는 비롯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밑바닥 사람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부유합니다.
하늘에서 자본주의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17세기~18세기에서 초기 상업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18세기~19세기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는 동안, 19세기~20세기에서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확장하는 동안, 언제나 자본주의는 착취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런 과정에서 수많은 저항 세력들은 학살을 당하고, 몰락하고, 탈선하고, 변질됩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대표적인 사례이나, 소비에트 연방 이외에 다른 수많은 세력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메갈리아 역시 성 해방 운동이 너무 극단적으로 바뀐 사례에 해당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메갈리아가 심한 폭언들을 쏟는다고 해도, 이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착취를 멈추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삐뚤어지고, 저항 세력들 역시 삐뚤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메갈리아는 나타났습니다. 아무리 메갈리아가 심한 폭언들을 퍼붓는다고 해도, 이건 그저 표면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세계화 자본주의입니다. 오히려 메갈리아는 얼마나 자본주의가 폭력적인지 반증합니다. 그래서 대안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착취 경제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피쿼드가 해저를 향해 비참하게 침몰한 것처럼, 인류 사회는 "저 바다 밑~♬"을 향해 신나게 침몰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