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생태학 SF 덕질을 위한 3단계 본문
[영화를 사랑하기 위한 반복, 해석, 재생산, 창작처럼, 삼림 건물 덕질에게도 순환 과정이 있을 겁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기 위한 3가지 방법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똑같은 영화를 계속 보기. 둘째, 영화를 이야기하기. 셋쩨, 영화 감독이 되기. 프랑수아 트뤼포가 정말 이것들을 말했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으나, 많은 사람들은 프랑수아 트뤼포가 이것들을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3가지 방법들은 3가지 단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방법보다 둘째 방법은 어렵고, 둘째 방법보다 셋째 방법은 어려울 겁니다. 영화 관람보다 영화 평론은 어렵습니다.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은 뭔가를 직접 만들지 않습니다. 관객은 영화를 일방적으로 바라봅니다.
만약 관객이 똑같은 영화를 여러 번 관람한다면, 관객은 새로운 사실들을 파악할지 모릅니다. 만약 관객이 똑같은 영화를 계속 관람한다면, 사소한 물품이나 등장인물 동선, 대사 하나 역시 관객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관객은 영화를 훨씬 자세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관객은 뭔가를 생산하지 않습니다. 관객은 혼자 느끼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고민합니다. 하지만 만약 관객이 평론을 쓴다면, 관객은 뭔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관객은 뭐라고 자신이 느꼈고 생각했고 고민했는지 정리해야 합니다. 관객은 언어를 이용하고 이것을 표현해야 합니다. 더 이상 관객은 혼자가 아닙니다.
만약 관객이 평론을 쓰기 원한다면, 관객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해야 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관객(이 쓴 영화 평론)에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관객이 틀렸다고 지적하거나 관객이 알지 못했던 것을 추가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수많은 관객들이 똑같은 영화를 본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 똑같은 해석에 이르지 못할 겁니다. 수많은 관객들에게는 수많은 개인적인 경험들과 세계관들과 사고 방식들이 있습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들은 이것들을 이용하고 영화를 해석할 겁니다. 어떤 관객에게 어떤 장면은 외로움을 상징할지 모릅니다. 다른 관객에게 그 장면은 독립을 상징할지 모릅니다.
또 다른 관객은 그것이 무관심을 상징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만약 영화 배우가 "제가 그 장면을 촬영하는 동안, 저는 외로움을 상정했어요."라고 인터뷰한다면, 첫째 관객은 옳고, 둘째와 셋째 관객은 틀릴 겁니다. 하지만 정말 둘째와 셋째 관객이 틀리나요? 인터뷰에서 영화 배우가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한다고 누가 장담하나요? 누가 영화 배우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만약 배우가 외로움을 상정했다고 해도, 영화 감독이 독립을 표현하기 원했고, 시나리오 작가가 무관심을 표현하기 원했다면? 배우와 감독과 작가가 영화 촬영에 똑같이 참가한다고 해도, 세 사람들은 합의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배우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얼마든지 틀어질지 모릅니다. 만약 영화가 원작 소설에 기반한다면, 원작 소설 작가와 영화 감독은 싸울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들이 오직 배우만 100% 믿어야 하나요? 그래서 관객들은 수많은 해석들을 늘어놓을 겁니다. 만약 이렇게 관객들이 뭔가를 생산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훨씬 멀리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정말 영화를 촬영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관객이 평론을 쓰는 동안, 관객은 어떻게 영화가 의미를 생산하는지 파악했습니다. 관객은 감독이 되고 의미를 직접 만들기 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평론과 영화 촬영은 다릅니다. 영화를 직접 촬영하기는 훨씬 어려울 겁니다.
만약 영화 감독이 영화를 내놓는다면, 평론가는 그걸 이용하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평론은 그림자입니다. 영화라는 빛이 있기 때문에, 평론이라는 그림자는 나타납니다. 평론이 예술 사조, 장르를 후천적으로 만든다고 해도, 평론보다 영화는 선천적입니다. 영화 감독은 그림자보다 빛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촬영하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영화 감독이 스스로 빛나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기 위한 3가지 방법들을 이야기합니다. 영화 사랑 3단계에는 반복, 해석, 재생산, 창작이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비단 영화 사랑, 영화 덕질만 아니라 다른 많은 덕질들에게도 비슷한 과정이 있을 겁니다.
어떻게 덕질에서 이런 과정(반복, 해석, 재생산, 창작)이 나타날까요? 첫째, 덕후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 덕후는 왜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셋째, 덕후는 자신이 그것을 이용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만약 아랫집 수진이 비디오 게임 <블록후드>를 연이어 플레이한다면, 이게 무엇을 뜻하나요? 이게 아랫집 수진이 <블록후드>를 좋아한다는 뜻인가요? <블록후드>는 건설 게임입니다. 수진이 건설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수진이 <블록후드>를 연이어 플레이하나요? 어쩌면 아랫집 수진은 정말 건설 게임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은 다른 건설 게임들을 플레이하기 시작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롤러코스터 타이쿤>, <아노 1503>, <파라오>, <레디스 Lethis>, <배니시드> 같은 여러 비디오 건설 게임들을 플레이합니다. 하지만 아랫집 수진은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아노 1503>, <파라오>, <레디스>, <배니시드>는 좋은 건설 게임들이나, 아랫집 수진은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수진은 <블록후드>를 재미있게 플레이했습니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반복을 말하는 것처럼, 아랫집 수진은 <블록후드>를 여러 번 플레이했으나, 아랫집 수진은 왜 자신이 <블록후드>를 좋아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블록후드>에 무슨 특성들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직 아랫집 수진은 덕질하기 위한 첫째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500시간 동안 수진이 <블록후드>를 플레이한다고 해도, 아직 수진은 1단계 덕후가 아닙니다. 어느 날, 우연히 아랫집 수진은 보드 게임 <테라포밍 마스>를 플레이합니다. <테라포밍 마스>는 개척 세력들이 화성을 지구화하고 화성에서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테라포밍 마스>를 아주 재미있게 플레이했습니다. 특히, 아랫집 수진은 새로운 생태계 조성이 흥미롭다고 느낍니다.
여기에서 아랫집 수진은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외계 개척 게임 <테라포밍 마스>에는 대대적인 환경 변화, 새로운 자연 생태계가 있습니다. <테라포밍 마스>에서 대대적인 환경 변화, 새로운 자연 생태계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블록후드>에서도 아랫집 수진은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해야 했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삼림 건물들을 만들고, 환경 오염들을 정화하고, 삼림들을 늘리고, 야생 동물들을 배치해야 했습니다. <블록후드>에서 시민들은 생태 공동체를 이룩합니다. <블록후드>와 <테라포밍 마스>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대대적인 환경 변화,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아노 1503>, <파라오>, <레디스>, <배니시드>는 좋은 건설 게임들이나, 이런 게임들에는 새로운 자연 생태계, 대대적인 생태계 조성이 없거나 미약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자신이 새로운 생태계 조성을 좋아한다고 깨닫습니다. 이제 아랫집 수진은 덕질 1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나는 대대적인 환경 변화, 새로운 자연을 좋아한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것들이 흥미롭나요? 왜 아랫집 수진이 새로운 생태계 조성을 흥미롭다고 느끼나요? 사람들은 자연이 신비롭고 감동적이고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연 이외에 다른 수많은 것들 역시 신비롭고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것들이 신비롭고 감동적이고 아름다움에도, 왜 아랫집 수진이 다른 수많은 것들보다 자연 생태계를 좋아하나요? 아랫집 수진은 알기 원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덕질 2단계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이유를 밝히기 위해 아랫집 수진은 여러 생태학 서적들과 자연 다큐멘터리들을 참고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생태학 SF 소설들을 읽기 시작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프랭크 허버트가 쓴 <듄>, 어슐라 르 귄이 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과 <빼앗긴 자들>, 패트리스 앤 머피가 쓴 <식물 아내>,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야생종>, 아서 클라크가 쓴 <라마와의 랑데부>,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오로라>, 마이클 크라이튼이 쓴 <쥬라기 공원>, 마가렛 앳우드가 쓴 <미친 아담>을 읽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자연'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깨닫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연에는 수많은 위협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직 인간에게 유리한 것들만 자연이라고 가리킬 뿐입니다. 우리 인류는 자연에게 어떤 상징들, 의미들, 가치들을 부여합니다. 그 자체로서 자연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 인류가 상징들, 의미들, 가치들을 부여하기 때문에, 자연은 아름답습니다. 자연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지구에서 생명 진화 역사는 여러 변화들을 거쳤습니다. 앞으로 생명 진화 역사는 계속 바뀔지 모릅니다. 만약 미래 인류가 다른 행성들을 테라포밍한다면, 지구화 행성들에서 생명 진화 역사들은 개성적인 진화 과정들을 새롭게 선보일 겁니다.
자연은 계속 바뀝니다. 게다가 자연은 원초적입니다. 인류 문명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생물 다양성은 놀라운 생명체들을 낳았습니다. 인류는 자연을 직접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연에서 인류는 비롯했습니다. 인류가 자연을 직접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에는 영성이 있습니다. 자연 이외에 다른 수많은 것들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인류는 목성의 눈을 직접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목성의 눈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목성의 눈은 생명 현상이 아닙니다. 자연은 비단 원초적일 뿐만 아니라 살아있습니다. 특히, (지구) 자연이 풍요로울 때, 우리 인류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자연과 먹고 사는 문제는 절대 별개가 아닙니다.
아랫집 수진은 생물학 서적들을 참고하고 생명 현상이 무엇인지 정의합니다. 생명 현상을 규정하기는 다소 까다로우나, 아랫집 수진은 무엇이 생명 현상인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랫집 수진은 덕질 2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만약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수진아, 네가 무엇을 좋아하지?"라고 묻는다면, 아랫집 수진은 "저는 생태계 변화와 새로운 자연을 좋아해요."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만약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수진아, 왜 네가 생태계 변화와 새로운 자연을 좋아하지?"라고 묻는다면, 수진은 "자연이 원초적이고, 살아있고, 풍성한 먹거리이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인가요? <블록후드>는 삼림 건물을 제시합니다. 삼림 건물, 생태계 변화, 새로운 자연 환경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게 아직 삼림 건물은 완전하게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왜 아랫집 수진이 일반적인 자연 생태계보다 비일상적이고 새로운 자연을 좋아하나요? 아랫집 수진은 일반적인 자연 다큐멘터리를 감상하고 자연이 원초적이고 살아있고 풍성하다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랫집 수진은 일반적인 자연 다큐멘터리보다 <블록후드>, 삼림 건물, 새로운 자연, 비일상적이고 생태적인 상상력을 향해 감탄사들을 늘어놓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삼림 건물이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삼림 건물은 자연 환경이 무엇인지 강조할 수 있습니다. 녹색과 적색이 보색 대비이기 때문에, 적색이 녹색을 강조할 수 있는 것처럼, 삼림 건물이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삼림 건물은 일상을 뛰어넘고 자연이 무엇인지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블록후드>에서 건물 옥상이 삼림이 되고 멧돼지가 돌아다니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어머, 이런 자연 환경이 정말 가능한가?"라고 물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환경을 새롭게 바라볼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일반적인 자연 다큐멘터리보다 <블록후드>를 좋아합니다.
게다가 새로운 자연은 새로운 사회를 부릅니다. 자연과 사회는 별개가 아닙니다. 자연 속에서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새로운 자연은 새로운 사회를 부릅니다. 비단 <블록후드>만 아니라 다른 많은 생태학 SF들은 새로운 자연과 함께 새로운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게도 새로운 사회가 필요합니다. 현실 속에서 환경 오염들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기후 변화는 생물 다양성을 엄청나게 파괴할 겁니다. 인류 사회는 바뀌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자연 다큐멘터리는 이런 전복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반면, <블록후드>를 비롯해 생태학 SF 장르는 전복, 새로운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자연은 새로운 사회를 부릅니다. 생태학 SF 덕질은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사회를 함께 고민합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아랫집 수진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권유할 겁니다. 아랫집 수진은 생태계 변화와 새로운 자연, 새로운 사회를 떠들기 원합니다. 어떻게 아랫집 수진이 이것들을 떠들 수 있나요? 새로운 자연, 새로운 사회는 소재입니다. 이야기에는 비단 소재만 아니라 주제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주제가 되어야 하나요? 생태계 변화와 새로운 자연, 새로운 사회라는 소재가 무슨 주제를 이야기할 수 있나요? 아랫집 수진은 급진적인 환경 운동이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왜 기후 변화가 나타납니까? 보수 우파 지식인들, 얄팍한 과학자들과 진보들은 인류가 탐욕스럽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얄팍한 환경 운동가들은 윤리적인 소비를 운운합니다. 정말 인류가 탐욕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소비하지 않기 때문에, 기후 변화가 심각해지나요? 이미 거대 독점 기업들이 막대한 자연을 소유했음에도, 생산보다 소비가 문제인가요? 2008년 금융 대란을 보세요. 이게 소비 문제인가요? 기후 변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훨씬 많은 상품들을 만들고 잉여 자본을 해소하기 위해 거대 자본가 계급은 자연 환경을 수탈하고 자연 환경을 상품화합니다. 그래서 환경 오염들은 심각해집니다. 하지만 계급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인류가 탐욕스럽다고 운운합니다.
서구 문명이 제3세계를 일방적으로 수탈함에도, 남자들이 여자들을 일방적으로 폭행함에도,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고립시킴에도,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계급 문제를 감추고 인류의 저질성을 나불거립니다. 얄팍한 과학자들, 진보 지식인들, 환경 운동가들은 보수 우파 지식인들에게 동조하고, 인류를 개무시하고, 지배 계급 앞잡이가 됩니다. 이런 헛짓거리는 삐뚤어진 민족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대기업 회장과 비정규직 주부 사원이 절대 똑같지 않음에도, 대기업 회장이 비정규직 주부 사원을 일방적으로 착취함에도, 삐뚤어진 민족주의 속에서 양쪽은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이 됩니다.
삐뚤어진 민족주의는 계급 문제를 은폐하고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똑같은 민족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비정규직 주부 사원은 파업해서는 안 됩니다. 민족, 국가가 우선이기 때문에, 국가 경제를 위해 대기업 회장과 비정규직 주부 사원은 대한민국에 똑같이 충성해야 합니다. 국가 정부가 비정규직 주부 사원보다 대기업 회장을 일방적으로 편든다고 해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주부 사원은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주부 사원은 국가에게 충성하고 파업을 부정해야 합니다. 해외 경기에서 박항서 감독이 1승을 따낼 때, 주부 사원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외쳐야 합니다. 민족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우선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주부 사원은 일본 국민들을 반드시 혐오해야 합니다. 일본에서도 자본가 계급은 비정규직들을 착취하나, 민족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주부 사원은 계급 착취를 무시하고 일본 비정규직 주부 사원들을 반드시 혐오해야 합니다. 민족 문제가 계급 문제를 은폐하는 것처럼,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인류의 저질성을 운운할 때, 인류의 저질성은 계급 문제를 은폐합니다. 미국 기업 남자 사장과 부르키나파소 시골 흑인 할머니는 똑같이 저질스러운 인류가 됩니다. 하지만 이건 지랄염병 헛소리입니다. 진짜 환경 운동은 이런 헛소리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 오염들을 막기 위해 아랫집 수진은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을 연구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생태계 변화를 이용하고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수진은 덕질 3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만약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수진아, 네가 생태계 변화와 새로운 자연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어?"라고 묻는다면, 아랫집 수진은 "저는 마르크스주의와 새로운 사회를 말해요."라고 대답할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아랫집 수진은 훨씬 멀리 나갈 수 있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식물 아내>와 <오로라>, <테라포밍 마스>, <블록후드> 같은 생태학 SF 창작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랫집 수진이 생체 우주선 만화를 그리거나 수경 재배 농장 게임을 만든다면, 다른 누군가는 (아랫집 수진이 창작한) 생태학 SF를 연이어 즐기고 또 다시 덕질 과정에 들어설지 모릅니다. 이런 덕질 과정은 또 다른 덕질 과정을 낳을 겁니다. 이렇게 덕질은 순환 과정을 거칩니다. 이건 모든 덕질이 이런 과정을 반드시 거치거나 거쳐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런 과정은 그저 일면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러 덕질들은 이런 순환 과정을 포함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