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생체 강화복과 새로운 생명체 본문
[게임 <헤일로> 시리즈의 노블 분대. SF 세상에서 대부분 강화복들은 기계 장비들입니다.]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와 <영원한 전쟁> 이후, 강화복은 밀리터리 SF 장르에서 빠지지 못하는 소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우주 전쟁을 다룬 이야기들이 전부 강화복을 애용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강화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스페이스 오페라나 우주 전쟁물도 많아요. 하지만 강화복은 분명히 밀리터리 SF 장르가 사랑하는 소재입니다. 각 창작물들마다 (이름과 형태는 다르지만) 다양한 강화복들을 선보이죠. 모든 강화복들의 공통점이자 기본적인 조건은 말 그대로 '근력을 강화해주는 옷'이라는 겁니다. 누가 강화복을 입든, 강화복은 옷이어야 합니다. 착용자는 강화복에 탑승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착용합니다. 이게 여타 인간형 보행 장비와 강화복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겁니다. 그렇다면 '입는다'는 개념은 뭐를 뜻할까요. 저는 강화복이 착용자의 움직임에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착용자는 동작으로 강화복을 조종합니다. 다른 조종기가 아니라. 강화복 내부에 단추 몇 개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기본적으로 착용자는 운전대나 조종 단추가 아니라 동작으로 강화복을 움직입니다.
강화복의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고릴라 같은 묵직한 인간형 병기를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창작물은 매우 가볍거나 간단한 형태를 표현하고, 어떤 창작물은 그야말로 중세 기사의 갑주 같은 형태를 표현합니다. 가까운 미래를 다루는 테크노 스릴러 창작물은 단순한 외골격 강화복을 보여줄지 몰라요. 아마 이런 외골격 강화복은 가장 현실적인 강화복 중 하나일 겁니다. 과연 언제 병사들이 로버트 하인라인의 저 육중한 강화복을 입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나, 외골격 강화복은 몇 십 년 안에 상용화가 될지 모릅니다. 사실 이런 외골격 강화복은 '옷'이라고 부르기 좀 어색합니다. 말 그대로 뼈대입니다. 착용자는 강화복을 입지 않고, 대신 뼈대를 자기 몸에 덧붙입니다. 이런 외골격은 팔이나 허리, 다리의 근력을 강화하고, 덕분에 병사는 묵직한 짐을 어렵지 않게 들 수 있어요. 외골격 강화복은 방어력이 낮고 별다른 인터페이스나 기능이 없지만, 그래도 병사의 무장을 늘려줍니다. 병사는 더 많은 무기와 탄약, 물품을 휴대할 수 있어요. 당연히 병사의 전투력도 올라가겠죠.
육체 노동자들도 이런 외골격을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노동자가 외골격을 입는다면, 무거운 짐을 훨씬 쉽게 나를 수 있겠죠.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나 장애인들도 외골격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요. 이런 외골격들은 우리 생활에 깊숙히 들어온 듯하지만, 본격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나 밀리터리 SF 장르는 저런 외골격에 별로 관심이 없을 겁니다. 그보다 밀리터리 SF 창작물은 갑옷 형태의 강화복을 선호하겠죠. 갑옷 형태의 강화복은 강화복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지만, 각 작품마다 설정은 다릅니다. 어떤 작가는 보다 날씬하고 가벼운 것을 묘사하고, 어떤 작가는 보다 두껍고 육중한 것을 묘사합니다. <스타십 트루퍼스>의 강화복은 후자 같습니다. 단순한 갑옷 형태가 아니라…. 아주 우람한 거인처럼 보인다고 할까요. 물론 <스타십 트루퍼스>에는 분명히 정찰 강화복이 존재하고, 이건 비교적 빠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투 강화복은 육중하지만, 정찰 강화복은 날씬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주로 전투 강화복만 등장했죠. 날씬하든 육중하든, 이런 갑옷 형태의 강화복은 언뜻 로봇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실 겉모습만으로 인간형 로봇과 갑옷 형태의 강화복을 구분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만큼 갑옷 형태의 강화복은 다양한 성능을 갖추었습니다. 장갑이 두껍기 때문에 적군의 공격을 튕겨낼 수 있고, 컴퓨터를 탑재했기 때문에 각종 전술적 정보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강화복 착용자는 심해나 우주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을 테고, 강화복은 외부 환경의 위험에서 착용자의 생명을 유지해줄 겁니다. 만약 착용자가 부상을 입는다면, 강화복은 스스로 착용자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강화복은 인공 지능을 탑재할 수 있고, (착용자가 의식을 잃었을 때) 이런 강화복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겠죠. 음, 이건 강화복이 아니라 로봇이군요. 아니, 로봇과 강화복의 혼합이라고 할까요. 사실 강화복의 형태는 고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창작가마다 강화복의 형태를 이렇게 저렇게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외골격 강화복과 갑옷 형태의 강화복을 적당히 조합할 수 있겠죠. 전체적으로 육중하고 묵직하지만 전신을 완전히 감싸지 않는 강화복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강화복은 외골격과 갑옷의 혼합이 되겠죠. 어쨌든 이런 강화복들은 다양한 성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의 사랑을 듬뿍 받는 듯합니다.
[모래송어 외피가 강화복이 될 수 있을까요? 만약 이게 강화복이라면, 이건 생체 강화복이 되겠죠.]
하지만 강화복이 항상 딱딱하거나 육중하다고 할 수 없겠죠. 육중한 우주복이 있는가 하면, 날씬한 쫄쫄이 우주복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외골격이나 갑옷 이외에 '쫄쫄이 강화복'도 존재합니다. 이걸 강화복으로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강화복의 울타리 안에 넣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쫄쫄이 강화복은 일반적인 기계 장치를 탑재하지 못하는 대신 나노 머신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나노 머신 같은 설정이 아니라면, 쫄쫄이 강화복을 만들 방법이 없을 듯하군요. 쫄쫄이 강화복은 <스타십 트루퍼스>가 묘사하는 전통적이고 육중한 강화복과 너무 달리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강화복 역시 착용자의 동작을 모방하고 근력을 키워주고 착용자가 험지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요. 쫄쫄이 강화복은 갑옷 강화복보다 약해보지만, 나노 머신들이 한데 뭉치면 방호력을 높일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나노 머신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어쩌면 착용자의 몸 안에 들어가고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지 모르겠습니다. 음, 피터 와츠 같은 작가에게 잘 어울리는 소재가 아닐지…. (사실 피터 와츠는 게임 <크라이시스>의 소설판을 썼다고 하죠.)
이런 쫄쫄이 강화복도 이질적이지만, 그보다 훨씬 이질적인 강화복은 아마 생체 강화복일 겁니다. 말 그대로 강화복이 생체 조직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프랭크 허버트의 <듄의 아이들>과 존 발리의 <노래하라, 춤추라>가 있군요. 두 소설 모두 생체 강화복이라는 개념이 무슨 뜻인지 보여줍니다. 우선 <듄의 아이들>에서 레토 2세는 수많은 모래송어들과 결합합니다. 모래송어들은 레토의 전신을 감싸고, 덕분에 레토는 초인으로 각성합니다. 엄청나게 빨리 달리고, 무거운 물체를 집어던질 수 있고, 벼랑을 순식간에 기어오르고…. <노래하라, 춤추라>에서 주인공 역시 생체 강화복을 뒤집어 썼습니다. 이런 생체 조직은 주인공의 전신을 감싸고, 덕분에 주인공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거나 심지어 우주 공간에서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생체 강화복은 자기 의식이 있기 때문에 주인공과 소통하거나 만담을 나눌 수 있어요. 소설 속에서 이렇게 생체 강화복을 입은 사람을 인간-공생체 같은 것으로 부르나 봅니다. 레토 2세와 인간-공생체는 전통적인 기계 강화복을 입은 사람만큼 뛰어난 능력과 생존력을 자랑하죠.
어쩌면 누군가는 이게 무슨 강화복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생체 조직들은 전형적인 강화복과 다르죠. 하지만 모래송어 피부와 공생체는 착용자의 전신을 뒤덮습니다. 강화복 역시 착용자의 전신을 감싸죠. 그리고 이런 생체 조직들과 전통적인 강화복 모두 착용자의 동작을 모방하고 증폭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체 조직들을 강화복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체 조직이기 때문에 작동 원리는 전혀 다르지만, 이런 생체 강화복이 착용자의 행동을 모방하고 증폭하는 방식은 기계 강화복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이런 생체 강화복은 그저 강화복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사실 레토 2세가 모래송어와 결합한 순간 레토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진화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새로운 생명체가 되었죠. 결국 레토 2세는 거대한 인간-모래벌레 생명체가 되었고, 인간성을 잃어버립니다. 아마 폴 아트레이드도 이렇게 인간-모래벌레가 될 수 있었겠으나, 폴은 인간성을 잃어버리기 싫었을 겁니다. <노래하라, 춤추라>의 주인공 역시 인간이 아닙니다. 원본(?)은 인간이지만, 공생체 조직과 결합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본인은 자신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거야 본인의 생각일 뿐이죠.
그렇다고 해서 생체 강화복이 반드시 착용자를 다른 생명체로 바꾼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벗는 것처럼 생체 강화복을 입고 벗는 설정 역시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설정보다 <듄의 아이들>이나 <노래하라, 춤추라>가 훨씬 인상적이군요. 강화복이 그저 강화복으로 머물지 않고, 착용자의 몸에 직접 침투합니다. 그리고 인간과 강화복은 하나로 합치고, 새로운 생명체가 됩니다. 다른 강화복들과 달리 생체 강화복은 새로운 생명체의 등장을 이야기할 수 있죠. 물론 나노 강화복 역시 새로운 인간이나 새로운 기계의 등장을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나노 머신들이 착용자의 몸 속에 들어가고 적응한다면, <노래하라, 춤추라>의 인간-공생체 주인공처럼 인간-나노 머신 사이보그가 되겠죠. 인간-공생체든 인간-나노 머신이든, 저는 평범한 강화복들보다 이런 설정이 훨씬 도발적이고 전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외부의 생체 조직과 결합한다는 설정은…. 음, 좀 징그럽군요. 솔직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설정은 아닌 듯합니다.
[게임 <크라이시스 2>의 나노 슈트 역시 어느 정도 생체 강화복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