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사회와 경제를 외면하는 1차원적인 변화 본문
"기술과 섹스 분야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는 듯합니다. 우리는 달을 여행할 수 있고 유전 공학으로 불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이나 다른 무엇과 섹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경제 분야를 보세요. 거의 대부분 것들은 불가능한 듯합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서 위와 같이 슬라보예 지젝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와 경제 변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슬라보예 지젝은 우주 탐사와 유전 공학과 이질적인 섹스를 언급했을 겁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는 세계화 자본주의에 항거합니다. 2008년 금융 대란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일으킨 경제 공황입니다. 2008년 금융 대란은 자본주의에서 비롯했습니다. 따라서 월스트리트 시위는 자본주의에게 항거하는 시위입니다. 어쩌면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저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월스트리트로 달려갔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가 2008년 경제 공황을 터뜨렸기 때문에 월스트리트 시위는 자본주의에 항거하는 시위가 되어야 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걸 촉구합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시위대가 계속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대안 사회를 고민하기 바랍니다. 월스트리트 시위는 그저 순간적인 분노에 불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지속적인 저항과 고민이 되어야 합니다. 시위 현장에서 지젝이 말한 것처럼, "한때 우리는 아름다웠지."라는 문구는 그저 과거 미화에 불과할 겁니다. 설사 적극적인 운동가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고민할 수 있어야 하겠죠.
어쩌면 적극적인 운동보다 일상적인 고민은 훨씬 중요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시위 현장에서 운동가들이 고래고래 떠든다고 해도, 일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고민할 때, 마침내 대안 사회는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겠죠. 시위 현장은 다소 특별합니다. 거기는 일상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대안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세상은 좀 더 달라질 겁니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구들과 연인들과 지인들과 이야기하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시위 현장은 특별한 공간입니다. 시위 현장이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람들은 대안 사회를 떠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특별한 공간은 사라집니다.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은 함께 분노하고, 함께 저항하고, 함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상에는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일상에는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일상에는 분노하고 저항하는 사람이 아예 없을지 모릅니다. 시위 현장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구들과 연인들과 지인들을 만나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을 고민하고 이야기하기가 쉬울까요? 좌파 정당 모임에서 마음이 맞는 좌파 당원들과 함께 자본주의를 까기는 쉬울 겁니다. 하지만 명절에 수구 보수적인 친척들 앞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기가 쉬울까요?
심지어 우리를 둘러싼 일상적인 요소들 역시 변화를 가로막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은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것들이 변화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안락한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이건 피상적이고 1차원적인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안락한 변화에 빠지고 안락한 변화가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우리는 완전히 보편적인 기본 소득과 노동자 평의회와 일터 민주주의와 공유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본격적인 변화일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본격적인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고작 최저 임금 인상을 둘러싸고 왈가왈부할 뿐입니다. 수구 보수 언론들이 최저 임금 인상이 파격적인 변화라고 부르짖을 때, 사람들은 고개들을 끄덕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최저 임금 인상만 바라볼 뿐이고 훨씬 멀리 전망하지 못합니다.
SF 소설들 역시 이런 안락한 변화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심지어 언제나 전복적인 미래를 추구함에도, SF 소설들은 안락한 변화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SF 독자들은 SF 소설들이 전복적인 미래를 묘사한다고 감탄합니다. SF 독자들은 현실에 안착하는 평범한 사고 방식을 거부합니다. SF 세상에는 전복적이고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시선들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정말 SF 세상에 전복적이고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시선들이 존재할까요? 그건 꽤나 회의적입니다. 아무리 SF 세상에 전복적이고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시선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런 시선들은 사회와 경제를 외면합니다. 그런 시선들은 다른 것들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SF 독자들이 까탈스럽게 진부한 사고 방식을 벗어나기 원한다고 해도, 결국 SF 독자는 안락한 변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alt.SF 같은 웹진이 온갖 욕설들을 쏟는다고 해도, 결국 alt.SF 웹진은 안락한 변화를 추구합니다.
안락한 변화는 자본주의를 뒤집는 변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위에서 안락한 변화는 미래를 바라봅니다. 자본주의가 옳다는 신념 위에서 안락한 변화는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우주를 탐험하거나 새로운 생물종이 되거나 기계와 섹스한다고 해도, 결국 자본주의가 옳다는 신념은 바뀌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무조건 옳은 것이고 영원불멸한 것입니다. 안락한 변화는 그렇다고 상정합니다. 안락한 변화는 자본주의 이외에 수많은 것들을 바꾸고 싶어합니다. 수많은 것들이 바뀐다고 해도, 오직 자본주의만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설사 자본주의가 바뀐다고 해도, 그건 민중들이 의식적으로 도전하는 혁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본주의가 바뀐다고 해도, 그 원인은 자연 재해나 과학 기술이나 다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안락한 변화 속에서 민중들은 절대 함부로 자본주의에게 도전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주의는 신성하고 영원불멸하고 무조건 옳습니다. 우주 전체를 뒤집기 원한다고 해도, 안락한 변화는 절대 자본주의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안락한 변화는 자본주의를 바꿀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전복적이라고 운운하는 숱한 SF 독자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는 전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건 SF 소설들이 무조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대안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소설들에게는 그런 의무가 없습니다. 오직 자본주의 이외에 모든 우주를 바꾼다고 해도, 그건 SF 작가의 자유입니다. 아무도 그런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함부로 개입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우주 전부를 바꿀 수 있음에도, 왜 SF 소설들이 유독 자본주의를 바꾸지 않을까요? 왜 우주 전부를 바꿀 수 있음에도, SF 소설들이 유독 자본주의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왜 유독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SF 소설들이 안락한 변화를 추구할까요? 왜 일상을 둘러싼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이 안락한 변화를 이야기할까요?
만약 학교 교육들이 아이들에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제대로 가르친다면, 아이들은 자본주의를 의심하기 시작할 겁니다. 자본주의는 식민지 학살과 원주민 수탈과 열대 우림 파괴(플랜테이션 농업)에서 비롯했습니다. 인디언 학살이 좋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없을 겁니다. 아이들은 자본주의 농업이 본격적으로 열대 우림을 파괴하기 시작했다고 비판할 겁니다. 당연히 아이들은 자본주의가 이상하다고 의심할 겁니다. 아이들이 훨씬 깊게 공부한다면, 아이들은 자본주의를 버리고 대안 사회를 고민하고 싶어하겠죠. 지배 계급에게 이런 상황은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아이들이 고민하기 원한다면, 지배 계급은 끝장날 겁니다.
따라서 자본가 지배 계급에게 안락한 변화는 아주 유리합니다. SF 소설들 역시 이런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겁니다. SF 작가들 역시 인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SF 작가들은 자본가 지배 계급에게 유리한 사상을 배우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무리 SF 소설들이 파격적인 변화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런 파격적인 변화는 대안 사회를 주목하지 못합니다. 그런 파격적인 변화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제대로 지적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alt.SF 같은 웹진이 까칠하게 진부한 사고 방식을 비판한다고 해도, 결국 자본주의가 옳다는 신념 위에서 alt.SF는 까칠합니다.
그런 까칠함은 절대 자본주의를 지적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까칠함은 지배적인 관념에게 굽신거릴 겁니다. 이건 너무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 무엇보다 SF 소설들은 전복을 꿈꾸고 대안 사회를 꿈꿀 수 있습니다. SF 소설들에는 그런 가능성과 잠재력이 충만합니다. 하지만 SF 소설들 역시 안락한 변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을 유지하기 위해 SF 소설들은 크게 떠듭니다. 정말 파격적인 변화를 부정하기 위해 SF 소설들은 크게 떠듭니다. 설사 파격적인 변화를 떠드는 SF 소설들이 있다고 해도, 그런 소설들은 제한적입니다.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SF 소설들은 변화를 부정합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SF 소설들을 많이 읽었을까요? 슬라보예 지젝이 하드 SF 소설들이나 우주 4X 게임들을 좋아할까요?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슬라보예 지젝은 하드 SF 소설들을 별로 읽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지젝은 우주 4X 게임들을 제대로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슬라보예 지젝은 아픈 구석을 찔렀습니다. SF 소설들은 정말 '파격적이고 위험한 변화'를 말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적어도 SF 소설들은 안락한 변화가 전복적인 미래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