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사이언스 픽션, 일상과 비일상이라는 비빔밥 본문
[게임 <오더 1886>의 한 장면. 19세기 유럽에 이런 비행선들은 없었으나,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재미있어요.]
13세기 중세 유럽에는 로봇 공학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기술자들은 로봇이라는 개념을 몰랐어요. 따라서 만약 보행 병기가 중세 유럽 도시를 걷는다면, 그건 꽤나 이상한 장면일 겁니다. 스팀펑크를 도입하는 몇몇 검마 판타지는 그런 장면을 연출하지만, 어쨌든 그건 일반적인 풍경이 아닐 겁니다. 장검, 사슬 갑옷, 활과 쇠뇌, 마차, 수레. 이런 것들은 13세기 유럽과 어울릴 수 있겠으나, 보행 병기는 절대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러 창작가들은 중세 검마 판타지에 로봇이나 보행 전차를 집어넣고, 어떻게든 스팀펑크와 검마 판타지를 조합하려고 애씁니다. 덕분에 이런 검마 판타지에서 해괴한 장면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보행 병기가 걸어다닐 만큼 기계 공학이 발달했음에도 모험가 일행은 횃불을 들고 다닙니다. 이들은 손전등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보행 병기가 거리를 쏘다니고 이 보행 병기는 전기 불빛을 비추지만, 반면, 모험가 일행은 던전에서 (손전등이 아니라) 횃불을 밝힙니다. 뭐, 창작가 역시 변명을 댈 수 있을 겁니다. 드워프들만 기계 공학을 알고, 인간들은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죠.
만약 드워프들이 철저하게 기계 공학을 숨긴다면, 인간들은 그걸 연구하지 못할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손전등을 만들지 못하고, 인간 모험가들은 던전을 탐험할 때 횃불을 밝혀야 할 겁니다. 드워프들은 안보나 기타 이유로 기계 공학을 널리 퍼뜨리지 않을지 몰라요. 자신들만 보행 병기를 제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죠. 만약 드워프들과 인간들이 전쟁을 벌인다면, 드워프들은 보행 병기틑 투입하고 전장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보행 병기를 만들 수 있다면, 드워프들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드워프들은 기계 공학을 숨길지 모르고, 그래서 인간 모험가들은 횃불을 밝혀야 할지 모릅니다. 창작가는 보행 병기와 횃불을 동시에 창작물 속에 집어넣기 위해 저런 변명을 둘러댈지 모릅니다. 창작가는 저런 변명을 지어내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야 할 테지만, 덕분에 저런 검마 판타지는 좀 더 독특하게 보일 겁니다. 일반적인 중세 유럽 검마 판타지보다 훨씬 독특하게 보이겠죠. 일반적인 검마 판타지는 마법사들이 불덩이를 던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나, 저 검마 판타지+스팀펑크에서 보행 병기들은 마법사들을 몰아낼 수 있겠죠. 창작가는 이런 독특한 느낌을 위해 얼마든지 골머리를 싸매려고 할 겁니다.
이처럼 스팀펑크 창작물은 어울리지 않는 기술들을 조합하고 변주하고 배치하곤 합니다. 스팀펑크 창작물에서 서로 맞지 않는 기술들이 어울리곤 합니다. 저는 13세기 스팀펑크를 사례로 언급했으나, 19세기 스팀펑크 역시 다르지 않을 겁니다. 19세기 스팀펑크는 오토마톤이니 안드로이드니 이런저런 로봇들을 떠들지만, 사실 19세기에는 로봇이 없었습니다. 로봇을 운영하기 위한 인공 지능 역시 존재하지 않았어요. 19세기 사람들은 인공 지능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이브>는 인조인간에게 인공 지능을 집어넣지 않고, 대신 영혼을 주입하는 흑마술을 펼칩니다.
작가 빌리에 드 릴라당은 인조인간을 제작하기 위해 온갖 설정을 늘어놓지만, (인공 지능을 몰랐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인조인간에게 영혼(!)을 불어넣어야 했습니다. 19세기 스팀펑크에서 크고 작은 비행선들은 대도시를 떠돌지만, 그건 꽤나 어색한 장면입니다. 기구들은 분명히 그 시절에 존재했지만, 그런 거대한 비행선들은 없었습니다. 보행 병기가 13세기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오토마톤이나 거대 비행선은 19세기 시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19세기 스팀펑크 설정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런 것들에게서 로망이나 매력을 느낍니다.
좀 더 일반적인 사이언스 픽션은 어떨까요. 아이작 아시모프는 <아이 로봇>을 썼죠. 소설 속에서 인류는 로봇을 만들고, 우주선을 만들고, 다른 행성들로 날아갑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컴퓨터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아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태블릿 컴퓨터를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태블릿 컴퓨터는 일상과 떨어지지 못하는 요소이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중독됩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는 로봇들이 돌아다닐 만큼 공학이 발달했음에도 아무도 태블릿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이작 아시모프가 태블릿 컴퓨터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모프가 <아이 로봇>을 쓸 때, 스마트폰은 아직 세상에 등장하지 않았죠. 스마트폰은 2000년대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아이 로봇>은 1960년대 소설이고 그래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컴퓨터를 묘사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아시모프가 쓴 소설에서 사람들은 천공 카드를 사용합니다. 네, 천공 카드입니다. 디스크가 아닙니다. 아시모프는 천공 카드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디스크를 묘사하지 못했습니다.
비단 아시모프만 아니라 수많은 SF 작가들이 저런 실수(?)를 저지릅니다. SF 작가들은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SF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다른 행성을 방문하고, 기술적 특이점을 지납니다. 하지만 천공 카드처럼 엉뚱한 요소들이 소설 안에 존재합니다. 가끔 SF 작가들은 미래를 예언하지만, 그건 그저 우연에 불과해요. 소가 뒷걸음질치다가 쥐를 밟는 것처럼 SF 작가들은 우연히 미래를 예언할 뿐입니다. 아무리 아서 클라크가 뛰어난 미래학자라고 해도 아서 클라크 역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컴퓨터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보행 병기가 13세기 유럽을 활보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SF 작가들 역시 시대적인 착오를 소설 속에 집어넣곤 합니다. 아니, 스팀펑크 작가는 보행 병기와 13세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독특한 느낌과 재미를 위해 일부러 13세기 유럽에 보행 병기를 집어넣습니다. 반면, 일반적인 SF 작가들은 미래를 전혀 모릅니다. 아무도 미래를 제대로 예상하지 못합니다. 뛰어난 과학자들마저 미래를 자세히 그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SF 작가들은 용감무쌍하게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그 미래는 분명히 진짜 미래와 다를 겁니다.
수많은 SF 소설들은 미래를 잘못 묘사했습니다. SF 작가들은 현재의 과학적 패러다임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미래의 과학적 패러다임을 알지 못합니다. SF 작가들은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를 예상할 뿐입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얼마든지 빗나갈지 모릅니다. SF 작가들 역시 이런 사실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최대한 미래학과 각종 최신 기술들을 공부하고, 그것들을 소설 속에 집어넣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불규칙하게 흘러가고, SF 작가들은 모든 변수를 고려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일부 과학 기술만 고려할 뿐입니다. 당연히 SF 소설들은 미래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합니다. 시대적인 오류들은 소설 곳곳에서 튀어나옵니다.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왜 SF 소설을 써야 하나? 우리가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고, 자꾸 시대적인 오류를 되풀이한다면, 왜 SF 소설을 써야 하나?" 흠, 하지만 SF 작가들은 미래를 맞추기 위해 소설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언자가 아니라 소설가입니다. SF 소설들이 미래를 맞춘다면 좋겠으나, 그건 원래 목적이 아닙니다.
SF 소설은 미래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SF 소설이 미래를 바라보는 이유는 현재를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반드시 시선을 현재로 제한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미래를 바라본다면, 현재 상황을 더욱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숲 속을 방황하는 사람은 때때로 나무 꼭대기 위에 올라가야 합니다. 나무 꼭대기 위에서 그 사람은 전체적인 지리를 파악할 수 있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신할 수 있죠. 자신의 발만 쳐다보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에른스트 블로흐가 사용한 미래적인 방법론을 SF 작가들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SF 작가들은 과감하게 미래를 바라봅니다. SF 작가들은 얼마든지 틀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SF 작가들이 미래를 바라볼 때, SF 소설은 현재 문제를 더욱 강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환경 오염을 강조하고 싶다면, SF 작가들은 미래 아포칼립스 소설을 쓸 겁니다. 그런 아포칼립스 소설은 오늘날을 더욱 혹독하게 경고할 수 있어요. 우주 항해, 기술적 특이점, 유전자 조작, 기타 등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SF 작가들은 (자신이 틀리다는 사실을 인식함에도)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습니다. 미래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게다가 어슐라 르 귄은 SF 소설 역시 은유라고 말했습니다. 상상 과학을 이용한 은유죠. 은유를 이용한다면, SF 작가는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만약 어떤 SF 작가가 우주 괴수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작가는 그 우주 괴수가 정말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아서 클라크는 어떤 단편 소설에서 아주 기이한 우주 생명체를 이야기했습니다. 아서 클라크는 그런 생명체가 진짜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하지만 독자가 그런 이야기를 읽는다면, 독자는 생명이 걸어온 기나긴 역사를 감동적으로 반추할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우주라는 장대하고 신비한 공간을 바라볼 수 있을 거고요. 일반적인 천문학 소설이나 일반적인 소설은 이런 감동을 전달하지 못하죠.
그래서 아서 클라크는 그런 이야기를 썼겠죠. 즉, SF 소설이 미래를 잘못 예상한다고 해도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상상 과학은 은유가 될 수 있고, 그런 은유는 소설 주제를 더욱 생생하게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2001년에 유인 우주선을 다른 행성에 보내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2001 우주 대장정>은 여전히 감동적입니다. 이 소설이 하나의 은유이기 때문입니다. 지구 바깥을 바라보는 매개체이자 창문이죠. 인류가 정말 2001년에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는지 그건 절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사 아서 클라크가 우주선을 잘못 고증했다고 해도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듯 SF 작가들은 시대 착오적인 오류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결국 그런 시대 착오적인 오류는 부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래 기술을 이용해 현재의 과학 패러다임을 반추하거나 미래 기술을 이용해 은유할 수 있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자신의 소임을 완수했다고 할 수 있겠죠. 게다가 그것보다 훨씬 커다란 즐거움이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은 뭔가를 상상할 때 크나큰 기쁨을 느낍니다. 13세기와 보행 병기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나, 그 두 가지가 공존할 때 스팀펑크는 요상한 매력을 자아냅니다. 스팀펑크 작가들처럼 SF 작가들은 각종 미래 기술을 짬뽕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크나큰 기쁨을 느낄 겁니다.
비단 작가들만 아니라 독자들 역시 그런 조합에서 독특한 재미를 누리겠죠. 일상과 비일상을 혼합하는 것. 그런 조합을 상상하는 것. 사실 이런 조합과 상상이 사이언스 픽션이 선보일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이고 재미일 겁니다. 인간은 어울리지 않는 일상과 비일상을 비빔밥처럼 조합할 수 있고, 사이언스 픽션은 그걸 대변하는 비빔밥입니다. 다른 것을 떠나, 주류적인 사고 방식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이언스 픽션은 가치가 있을 겁니다. 미래를 잘못 예언하든, 과학적 고증을 틀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