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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스팀펑크 비행선과 검마 판타지의 조합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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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펑크 비행선과 검마 판타지의 조합

OneTiger 2017. 9. 16. 20:00

[게임 <건스 오브 이카루스>의 한 장면. 스페이스 오페라의 우주선처럼, 스팀펑크는 비행선을 내세울 수 있겠죠.]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무슨 장면을 떠올릴까요. 은하 제국의 황제? 광선총으로 무장한 어마어마한 병사들? 기이한 외계 괴수? 개인적으로 우주 활극이라는 별명처럼 우주선이 먼저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우주선들. 아주 거대한 우주 항모부터 작고 빠른 개인용 우주선까지.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수많은 행성들이 존재하고, 이 우주선들은 그런 행성들 사이를 누빕니다.


우주선들은 (아주 작은 개인용 우주선 역시) 웜홀을 통과하거나 초공간을 도약할 수 있고, 그래서 머나먼 행성에 쉽게 도달할 수 있죠. 종종 이런 우주선은 주인공들 못지않은 존재감을 뽐냅니다. 사실 주인공들은 우주선에서 지낼 때가 많고, 따라서 주인공들에게 주연 우주선은 제2의 집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런 우주선들이 나름대로 우주와 미래를 향한 진보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과학적 고증은 미약하지만, 그 속에 우주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담겼다고 할까요. 우주선은 그야말로 우주를 항해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우주선은 우주를 향한 동경을 담기에 적합한 그릇이죠.



사이언스 픽션의 울타리 안에 스페이스 오페라가 있다면, 판타지의 울타리 안에는 검마 판타지가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비교하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와 검마 판타지는 쌍둥이 같습니다. 양쪽은 활극이나 모험을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고, 영웅 신화와 고대 전설에 적극적으로 의존합니다. 일반적인 다른 SF 소설들과 달리 스페이스 오페라는 과학자들의 패러다임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댄 시몬스나 피터 해밀튼이나 켄 맥레오드처럼 좀 더 모던하게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스페이스 오페라들도 많으나, 여러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과학자들의 패러다임보다 영웅 신화를 더 중시합니다.


그런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모험과 활극과 전쟁을 위해 존재합니다. 검마 판타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판타지 장르들은 모두 영웅 신화나 고대 전설에 의존하나, 그 중에서 검마 판타지는 전형적인 공식을 충실히 따라갑니다. 전형적인 공식들 위에서 거대한 서사나 전쟁을 펼치기 위해 애씁니다. 위기에 처한 대륙, 불을 뿜는 드래곤,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 전쟁을 이끄는 전사, 위대한 마법사와 압도적인 주문, 다양한 유사 인종들. 이런 상투적인 공식들은 검마 판타지를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검마 판타지는 이런 공식들에 너무 얽매인다고 비판을 받곤 합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와 검마 판타지가 닮았다면, 스페이스 오페라가 우주선을 내세우는 것처럼 검마 판타지는 뭔가를 내세울 수 있을까요. 검마 판타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 사람들은 장검을 휘두르는 전사나 불덩이를 날리는 마법사나 활을 당기는 명사수를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군대를 떠올리지 모르죠. 이렇게 압도적이고 어마어마한 군사력은 검마 판타지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어쨌든 스페이스 오페라와 달리 검마 판타지에서 '이동 수단'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아니, 스페이스 오페라가 우주선을 내세운다면, 검마 판타지는 말을 이동 수단으로 내세울 수 있겠군요. 검마 판타지에서 말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우주선만큼 중요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주인공들은 다양한 행성들을 누비지만, 검마 판타지에서 주인공들은 다양한 지역들을 누비기 때문입니다. 고대부터 명마는 영웅의 미덕 중 하나였습니다. 고대 전설에는 여러 말들이 등장하고, 그래서 검마 판타지의 주인공은 뛰어난 말을 얻습니다. 일부 말들은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페가수스 전설을 따온 듯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드래곤 기사라면, 드래곤을 타고 날아다닐지 모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우주선 선장이 중요하듯 검마 판타지에서 드래곤 기사는 굉장한 오라를 발휘합니다. 드래곤은 최강의 생명체이고, 그런 드래곤을 타고 다니는 주인공은 상당한 존중을 받겠죠. 하지만 이런 드래곤은 이동 수단보다 등장인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의 우주선과 검마 판타지의 드래곤을 직접 비교하기가 좀 어색하군요.


대신 스페이스 오페라에 다양한 우주선들이 있다면, 검마 판타지에는 다양한 말들이 있어요. 스페이스 오페라의 주인공이 주연 우주선을 타고 다니는 것처럼 검마 판타지에서 주인공은 명마를 타고 다닙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 이외에 좀 더 거대하고 육중한 이동 수단은 없을까요. 검마 판타지에는 멋진 범선들이 많겠으나, 이런 범선들은 주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해양 모험 소설을 제외하면, 검마 판타지 소설이 범선을 적극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드물 듯합니다. 주인공이 바다를 건너거나 해전에 참가할 때 범선은 그저 잠깐 등장할 뿐이죠.



그렇다면 비행선은 어떨까요. 범선은 바다만 누빌 수 있으나, 비행선은 지상과 수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비행선은 왕국의 대도시를 떠나 평야와 울창한 숲을 가로지고 높은 산맥을 넘고 넓은 바다를 건너고 다른 왕국의 대도시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비행선은 검마 판타지에서 드문 설정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비행선들이 아주 쉽게 주연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검마 판타지 소설들을 많이 알지 못하지만, 비행선을 주연으로 내세우는 검마 판타지는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검마 판타지에서 주된 이동 수단은 말이겠죠.


중세 판타지라는 용어처럼 여러 검마 판타지들은 12~14세기 유럽을 무대로 삼습니다. 아니면 코난이 활약하는 것처럼 고대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고대 및 중세와 비행선은 그리 어울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비행선은 20세기 초기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소설이 비행선을 묘사한다면 뭔가 그럴 듯하게 보일지 모르고, 사실 수많은 스팀펑크 소설들은 비행선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검마 판타지 소설은 고대나 중세를 배경으로 삼기 때문에 비행선과 어울리지 않아요. 시대적인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죠.



만약 비행선이 등장한다면, 검마 판타지 특유의 분위기가 깨질지 모릅니다. 검마 판타지의 고색창연하거나 고즈넉한 분위기가 흔들릴지 몰라요. 사람들이 비행선을 건조할 수 있다면, 그 기술을 이용해 다른 것들도 만들 수 있겠죠. 검을 휘두르는 대신 수발 소총을 쏠지 모르고, 횃불을 높이 드는 대신 램프를 이용할지 모릅니다. 성채 주변에 이런저런 비행선들이 날아다닐지 모릅니다. 이런 풍경들은 검마 판타지의 고즈넉함을 망칠 테고, 그래서 여러 독자들은 이런 꼴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멋진 검술이 등장하지 않는 검마 판타지를 누가 보고 싶어할까요. 말 그대로 '검마' 판타지입니다. 물론 비행선이 나올 여지는 충분합니다. 검마 판타지에서 드워프들은 각종 장비를 만들고, 때때로 비행선을 만듭니다. 폐쇄적인 드워프들이 자기네 기술을 널리 퍼뜨리지 않는다면, 기술적 진보가 정체된다면, 검마 판타지 속에서 검술과 횃불과 비행선이 서로 공존할 수 있겠죠. 검마 판타지의 비행선은 스팀펑크의 비행선보다 낡아 보일 겁니다. 그리 세련되지 않겠죠. 창작가는 시대적인 차이를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 이렇게 비행선들을 내세우는 검마 판타지 창작물들은 많은 편이고요.



스페이스 오페라의 우주선들이 서로 다른 것처럼 검마 판타지의 비행선들 역시 똑같지 않습니다. 우주선들이 타키온 엔진이나 웜홀 드라이브나 초공간 도약을 이용하는 것처럼 비행선들도 각자 다르죠. 어떤 것은 기낭과 증기 엔진을 이용합니다. 기낭으로 선체를 띄우고, 증기 엔진으로 추진력을 얻습니다. 어떤 것은 프로펠러를 이용할지 모릅니다. 여러 개의 프로펠러가 선체를 띄운다는 뜻입니다. 이것들은 아주 전형적인 스팀펑크 설정입니다. 특히 프로펠러 비행선은 검마 판타지와 별로 어울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어떤 것은 기낭과 돛을 이용할지 모릅니다. 기낭으로 선체를 띄우고, 돛으로 추진력을 얻습니다. 음, 이건 스팀펑크와 거리가 좀 멀군요. 하지만 증기 엔진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검마 판타지의 분위기와 좀 더 잘 어울리겠죠. 굴뚝도 없고, 화로도 없고, 매연도 없고, 각종 유압 기기들도 없고…. 어떤 것은 부유석이나 부유 마법 같은 설정을 이용할지 모릅니다. 마법사가 선체에 부유 주문을 건다면, 배는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겠죠. 이건 정말 검마 판타지답군요. 어떤 것은 비행 괴수의 신체 조직을 이용할지 모르죠. 비행 괴수의 신체 조직을 선체에 이식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비행 괴수에 선체를 매달거나. (이런 것도 비행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이렇듯 창작가들은 다양한 비행선들을 상상했으나, 비행선들은 여전히 검마 판타지에서 비주류적인 요소일 겁니다. 비단 비행선만 아니라 자동 인형이나 잠수함이나 수발총 같은 요소들은 검마 판타지에서 독보적인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최대한 액션을 추구하는 미니어처 게임들이나 비디오 게임들은 전투 비행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비행선은 검마 판타지에서 제한적인 요소일 겁니다. 독자들은 고풍스러운 검마 판타지 풍경에 웬 비행선이 날아다니는 꼴을 보고 싶어하지 않겠죠.


앤 매카프리의 <아르코나> 시리즈나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나 댄 시몬스의 <일리움>처럼 과학과 마법을 기묘하게 뒤섞는 작품들은 많습니다. 이렇게 판타지와 과학을 조합할 수 있고, 검마 판타지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19세기 기술과 13세기 분위기가 어울리는 그런 검마 판타지…. 하지만 여러 독자들은 좀 더 순수한 중세 판타지를 원할지 모릅니다. 게다가 비행선을 보기 원하는 독자는 스팀펑크 소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 소설들은 열심히 비행선들을 묘사하고, 구태여 검마 판타지 작가가 비행선을 소설 속에 집어넣을 이유가 없어요. 비행선들을 집어넣을 여유가 있다면, 그 시간에 좀 더 독특한 마법을 상상하는 편이 나을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이 살짝 아쉽습니다. 저는 검마 판타지에서 비행선이나 잠수함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검마 판타지의 비행선은 스팀펑크의 비행선과 다르고, 자신만의 풍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음, 어쩌면 제가 검마 판타지 그 자체를 좋아하기보다 '검마 판타지의 스팀펑크 요소'를 좋아하기 때문에 저런 상황을 아쉬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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