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사이언스 픽션의 보편성과 상대성 본문
<유레카>는 청소년 교양 잡지입니다. 이런저런 사회 문제들과 철학을 이야기하는 잡지죠. 이번 4월호의 기사 중 하나는 영화 <콘택트>더군요. 드니 빌뇌브 감독이 테드 창의 소설을 영화화했죠. 해당 기사는 영화를 설명하면서 사이언스 픽션을 함께 이야기하는데…. 사이언스 픽션의 인기 요인을 '보편성'으로 꼽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이언스 픽션이 아무리 외계인과 우주와 낯선 시대를 묘사한다고 해도 그 안에 인간들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인기를 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볼 여지가 있겠으나, 저는 왜 사이언스 픽션에서 결국 인간의 이야기를 강조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웹진 알트 SF가 지적했듯 사이언스 픽션은 유일하게 인간 이외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는 수많은 외계인, 인공지능, 돌연변이 등이 등장합니다. 또한 지구만 아니라 다른 항성계의 행성들을 둘러보고, 자본주의 세상만 아니라 사회주의 세상이나 페미니즘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사이언스 픽션의 인기 요인이 결코 보편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이언스 픽션은 그런 보편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말고 외계인을 바라보라고 말한다면, 그게 보편적일까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외친다면, 그건 보편적이지 않고 전복적이죠.
그렇게나 인간의 이야기가 읽고 싶다면, 훌륭한 세계 고전 문학들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것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걸 읽으면 됩니다. SF 독자들이 많고 많은 고전 문학들을 놔두고 SF 소설을 읽는 이유는 외계인이나 다른 항성계나 사회주의 세상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SF 소설만이 그런 전복적인 것들을 논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SF 소설에서 보편성을 강조한다면, 결국 인간의 이야기만 강조한다면, SF 소설은 주류 소설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SF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SF 작가들이 고정 관념을 깨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히기 위해 애썼는데, 왜 저 기사는 그런 요소들을 무시하고 보편성에 주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단 저 기사만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도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물론 모든 문학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당연히 사이언스 픽션도 인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모든 문학은 인간을 이야기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것으로 귀결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을 특정한 장르로 구분할 이유가 없어요. 저는 SF 소설이 인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들과 다른 존재들이 '함께 어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SF 소설이 인간들을 말한다면, 그 인간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간 군상이 아닐 겁니다.
아, 사회주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유레카> 4월호는 인간 소외도 잠깐 이야기하더군요. 그런데 정작 인간 소외를 이야기하면서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와 카를 마르크스를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인간 소외를 논의한다면, 당연히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가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해당 기사는 자본주의 체계가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체계인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 자본주의 체계가 각종 코뮨이나 생태 공동체를 짓밟고 부수는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어요. 흠, 청소년 교양 잡지인 것을 감안해도 내용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뭐, 어차피 짧은 기사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겠죠. 어쨌든 사이언스 픽션의 보편성도 그렇고, 마르크스를 쏙 빼놓은 인간 소외도 그렇고, 여러 모로 아쉬움이 남는 기사였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의 특수성을 강조하거나 인간 소외를 논하기 위해 <경제학 철학 초고>를 언급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요. 그렇다고 해서 저 <유레카> 잡지가 엉터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유레카>는 읽을거리도 많고, 좋은 잡지입니다. 저 두 기사가 완전히 잘못 되었다는 뜻도 아니고요. 그저 두 기사에 부분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부분을 보완했다면, 훨씬 유익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