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과 과학의 관계 본문
중세 판타지는 판타지 장르의 하위 분류이고, 상당한 인기를 자랑합니다. 종종 검마 판타지, 서사 판타지, 하이 판타지와 함께 동의어로 쓰이죠. 중세 판타지가 무조건 하이 판타지나 검마 판타지라고 할 수 없으나, 이 하위 장르들의 관계는 결코 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가깝고, 때때로 하나의 창작물을 동시에 중세 판타지, 검마 판타지, 하이 판타지 등으로 분류할 수 있어요. <반지 전쟁>으로 대표되는 작품들이 그러하고, <던전스 앤 드래곤스> 같은 게임 덕분에 중세 검마 서사 하이 판타지(…)는 판타지의 대표자로 자리 매김합니다.
아마 사람들이 '판타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13~16세기 유럽 무대를 금방 떠올릴 겁니다. 때때로 판타지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들은 이런 중세 판타지를 화려하고 웅장하거나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그리곤 합니다.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성채, 갑주를 입은 기사들의 대열, 번쩍이는 무구를 입은 왕과 장군들은 중세 판타지의 웅장함을 상징합니다. 아늑하고 고요한 마을, 인간미가 넘치는 술집과 예쁘장한 종업원 아가씨, 황금빛 들판과 살가운 주민들은 판타지의 고즈넉함을 상징하죠. 물론 모든 중세 판타지가 이런 화려함이나 고즈넉함만을 묘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풍경들은 분명히 중세 판타지 분야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요.
하지만 한편으로 중세는 암흑기로 알려졌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무식하거나 야만적이고, 위생은 불결하거나 추잡했고, 차별과 멸시와 학살이 만연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중세의 이런 무식하고 지저분한 측면은 상식으로 널리 퍼졌고, 중세 판타지의 화려함이나 고즈넉함과 크게 대비됩니다. 이런 상식은 어느 정도 맞을 겁니다. 실제 중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화려하거나 고즈넉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차별과 누추함과 질병과 불결함이 만연한 시대였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세가 완전히 지옥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가 그렇듯 중세 역시 나름대로 가치가 존재하고, 중세가 몰상식하고 더러운 시대였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겁니다. 중세가 암흑기라는 편견과 웅장하고 고즈넉한 중세 판타지는 모두 실제 중세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죠. 사실 중세 판타지의 사상, 배경, 기술, 철학 등은 진짜 중세 유럽과 딴판일 겁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중세의 아주 낭만적인 부분만 강조했다고 할 수 있겠죠. 아무리 사람들이 중세 판타지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실제 중세에서 산다면 그리 환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 중세 사람들은 (현대인보다 못하겠으나) 나름대로 사상이나 철학이나 과학을 꾸준히 연구하고 발달시켰습니다.
어쩌면 사이언스 픽션과 과학의 관계 역시 중세 판타지와 실제 중세의 관계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중세 판타지가 실제 중세의 낭만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도 과학의 낭만적이거나 끔찍한 부분만을 강조할지 모릅니다. 제임스 발라드의 말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네이처>나 <사이언스>가 아니에요. 물론 과학 논문들은 가끔 SF 소설을 인용한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SF 소설가들은 미래학자들처럼 미래 세계를 예측하고, 그 예측은 맞아떨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의 설정이 곧장 과학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최대한 과학답게 보일 뿐입니다. SF 소설가 이반 예프레모프는 뭔가 과학적인 연구를 하던 도중, 과학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걸 이용해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결과를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논문을 쓰지 못했고, 대신 소설을 썼죠. SF 소설이란 그런 것입니다. (예프레모프의 저 연구는 나중에 사실로 판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SF 소설이 실제 자연 과학으로 이어진 경우죠.)
물론 하드 SF 소설의 엄중함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가들의 고민을 무시할 수야 없을 겁니다. 과학은 사이언스 픽션 분야에서 아주 다양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과학적인 주제와 분위기를 담을 수 있으나, 한편으로 과학을 빙자한(?) 마법이나 초능력이나 로망이 될 수 있어요. 중세 판타지가 말 그대로 중세의 환상적인 면모인 것처럼요. 과학적 상상력의 다양한 면모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뒤섞이죠. 그래서 하드 SF 독자와 스페이스 오페라 독자가 싸울 때도 있고요. 하지만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쁜지 구분하는 것은 힘들고, 사실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엄중한 하드 SF 소설도 좋지만, 과학적인 은유나 상징, 로망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이 로망을 충족하는 수단이라면, SF 소설은 과학적인 로망을 충족할 수 있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