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사람의 아이들>과 피상적인 사회 비판 본문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가 쓴 <사람의 아이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소설 속에서 엄청난 재난은 인류 문명을 무너뜨립니다. 희한하게도 이 재난은 전면 핵 전쟁이나 거대한 운석이나 환경 오염이나 (아쉽게도) 거대 괴수가 아닙니다. 소설 속에서 재난은 불임입니다. 여자들은 임신하고 못하고, 그래서 인류 문명은 다음 세대를 잇지 못하고, 결국 인류 문명은 망합니다. 여자들이 아이들을 낳지 못하기 때문에 이건 전염병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람의 아이들>은 전염병 아포칼립스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의 아이들>은 메리 셸리가 쓴 <최후의 인간>과 다릅니다.
전세계적인 불임 현상, 이른바 오메가 현상은 전염병과 비슷하나, 한편으로 이건 전염병과 다릅니다. <사람의 아이들>은 왜 전세계적인 불임 현상이 나타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 테오 역시 거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이들>은 비단 이것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미래 시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이들>은 미래 시대를 이야기하나, 소설 속의 미래는 별로 미래 같지 않습니다. 포장지만 그저 미래일 뿐입니다. 오히려 <사람의 아이들>은 고리타분한 박물관이나 시골 농가를 보여줍니다. 소설 주인공 테오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입니다.
<사람의 아이들>에서 미래 시대는 199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는 21세기 메트로폴리스 따위가 없습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나 사이보그 역시 없습니다. 인공 지능 컴퓨터나 휴대 컴퓨터 역시 없습니다. 소설 주인공 역사학자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의 아이들>은 미래보다 과거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는 구태여 미래 시대와 메트로폴리스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필리스 제임스는 미래 시대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이들>은 미래 시대보다 그저 암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필리스 제임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고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이들>은 SF 소설보다 사변 소설에 가깝습니다. <사람의 아이들>처럼, 작가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종종 작가들은 사변 소설들을 씁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전문적인 SF 작가가 아니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썼습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자신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계보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말과 소리>를 썼을 때, SF 작가로서 옥타비아 버틀러는 자신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쓴다고 의식했을 겁니다. 하지만 주제 사라마구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옥타비아 버틀러와 달리, 주제 사라마구처럼,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는 자신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쓴다고 의식하지 않았을 겁니다. 필리스 제임스에게는 그저 가장 암울한 분위기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인류 문명이 몰락한다면, 이건 가장 암울한 분위기가 될 겁니다. <사람의 아이들>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무시무시한 과오를 이야기합니다. 소설 주인공 테오에게는 끔찍하고 악몽 같은 과오가 있습니다. 테오는 돌이키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니, 이게 실수인가요? 이게 정말 과오인가요? 어쩌면 테오는 일부러 사람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테오는 일부러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기만하는지 모릅니다. 테오가 실수했거나 일부러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분명히 테오는 살인자입니다. 살인 그 자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만약 신이 테오를 용서한다고 해도, 테오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그 자체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테오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죄책감을 느끼고 깊고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만약 미래 사회가 밝고 즐겁고 건강하다면, 이런 죄책감은 별로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 인류 사회 전체가 화목하다면, 개인적인 슬픔은 쉽게 묻힐 겁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은 무너지는 중입니다. 곳곳에서 독재 정치들과 온갖 폭력들과 광신들은 난리법석을 부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인 절망은 사회적인 절망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지기 때문에, (테오가 느끼는) 내부적인 절망과 (인류가 사라진다는) 외부적인 절망은 서로 뒤섞이고 훨씬 거대한 절망으로 승화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고 문학적인 비유를 정말 물리적인 현상으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 "나의 영혼은 폭발한다." 일반적으로 이건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남자 친구가 소개팅에 나가거나 양다리를 걸칠 때, 여자 친구의 영혼은 폭발할 겁니다.
하지만 영혼이 폭발한다고 해도, 여자 친구는 물리적으로 풍압을 일으키거나 다른 사물을 불태우지 않을 겁니다. 반면, SF 소설 속에서 정말 영혼은 폭발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영혼은 존재하고 영혼은 폭발할 수 있습니다. 단편 소설 <사기꾼 로봇>은 어떻게 영혼이 폭발하는지 보여줍니다. 소설 <얼터드 카본>에서 "나는 너의 영혼을 갖는다."라는 문구는 그저 문학적인 비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건 물리적인 현상입니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이 인격들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 나는 너무 외로워. 이 세상에 오직 나만 살아가는 것 같아." 이건 상투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최후의 인간>에서 이건 현실입니다. 인류가 멸종했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혼자 살아갑니다. 개인적인 외로움은 절대 개인적이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발턴 인권 운동가들이 외칠 때, 이건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하지만 단편 소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에서 이건 물리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 계절은 4월입니다. 4월은 고백하고 연애하고 사랑하기에 좋은 계절이에요.)
사이언스 픽션 속에서 문학적인 비유는 물리적인 현상이 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문학적인 비유를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테오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낍니다. 이건 그저 비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은 정말 무너지는 중입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지는 중이기 때문에 살인했다는 죄책감은 훨씬 깊은 절망 속에 빠집니다. 테오는 아주 쉽게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테오와 인류 문명은 함께 무너집니다.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는 이런 효과를 노렸을지 모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작은 희망이 빛난다면, 이게 아주 가녀리고 연약한 희망이라고 해도, 이건 찬란한 신성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주류 문학에서 연약한 희망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신성이 될 수 있습니다. 신성 때문에 독자는 두 눈이 너무 부신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연약한 희망을 찬란한 신성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골랐을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개인적인 절망을 사회적인 절망과 뒤섞습니다. 하지만 초점은 개인적인 절망입니다. 개인적인 절망을 강조하기 위해 사회적인 절망은 존재합니다. 소설 <사람의 아이들>은 개인적인 절망을 열심히 묘사하나, 사회적인 절망에 시선을 돌리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절망은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회적인 절망은 진부하고 밋밋합니다.
소설 <사람의 아이들>은 독재자와 독재 사회를 묘사하나, 이런 묘사는 상투적인 수준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이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역사학자 주인공 테오는 독재와 혁명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테오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연구함에도, 테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공산주의 운동을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테오는 그저 인간이 탐욕적이고 권력 욕구가 위험하다고 투덜거릴 뿐입니다. 이건 뻔하고 뻔한 헛소리입니다. 테오는 열심히 헛소리들을 주절거리고, <사람의 아이들>은 폼을 잡고 열심히 헛소리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인간이 정말 탐욕적인가요? 누가 그걸 증명했나요?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가 뇌 과학자인가요? 필리스 제임스가 신인가요? 창조주로서 필리스 제임스가 인간의 영혼을 밑바닥까지 꿰뚫어볼 수 있나요? 아니, 필리스 제임스는 그렇지 못합니다. 필리스 제임스는 뇌 과학자가 아니고, 정신 분석학자가 아니고, 창조주가 아닙니다. 인간은 탐욕스럽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이 정말 탐욕스럽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모든 인간은 똑같이 탐욕스럽지 못합니다. 아주 억압적인 수직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탐욕을 부릴 때, 우리는 인간이 탐욕스럽다고 말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탐욕을 부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이 탐욕스럽다고 말한다고 해도, 이건 망상이 됩니다.
소설 <사람의 아이들>은 멋지게 폼을 잡고, 온갖 미사여구들을 동원하고, 이런 헛소리들을 신나게 자랑합니다. 테오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연구함에도, 역사학자로서 테오는 윌리엄 모리스를 언급하지 않아요. 테오는 그저 윌리엄 모리스를 디자이너라고 취급할 뿐입니다. 아니, 왜 빅토리아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윌리엄 모리스를 혁명가라고 간주하지 않나요? 테오가 <에코토피아 뉴스>를 읽지 않았나요? 왜 테오가 이걸 읽지 않았나요? 테오가 너무 똑똑하고 훌륭한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너무 똑똑하고 훌륭한 역사학자는 윌리엄 모리스가 그저 디자이너에 불과하다고 간주해야 하나요?
등장인물들이 독재와 혁명을 이야기함에도, 왜 테오가 윌리엄 모리스처럼 중요한 19세기 혁명가를 언급하지 않나요? 똑똑한 지식인들이 윌리엄 모리스를 무시해야 하나요?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똑똑한 보수 우파 지식인들 역시 윌리엄 모리스를 무시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대가리들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들이 지식인이랍시고 개X랄들을 씨부리기 때문에 참으로 세상은 평화롭고 즐겁습니다. 테오 역시 너무 똑똑하고 훌륭한 대학 교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 똑똑하고 훌륭한 지식인 테오는 민중들의 저항들을 개무시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엄청나게 착취하고 폭력들을 휘두른다고 해도, 너무 똑똑한 대학 교수 테오는 이걸 절대 지적하지 않아요. 만약 인류 전체가 정말 탐욕스럽다고 해도, 서구 제국주의는 일방적으로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수탈합니다.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서구 자본주의를 수탈하지 못해요. 테오는 이걸 절대 언급하지 않아요. 숱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양심적으로 현실을 바라보겠다며 우파와 좌파가 똑같이 나쁘다고 지껄입니다. 아, 그래요? 우파와 좌파가 똑같나요? 정말 양쪽이 똑같습니까? 우파와 좌파가 어디에서 비롯했습니까? 우파와 좌파는 18세기 서구 문명에서 비롯했습니다.
18세기 이후, 서구 문명에서 정말 우파와 좌파가 똑같은 적이 있었습니까? 우파와 좌파가 똑같이 힘을 겨룰 수 있었습니까? 좌파가 우파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습니까? 만약 좌파가 그럴 수 있었다면, 파리 코뮌이 학살을 당했을 때, 왜 아무도 파리 코뮌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좌파가 그럴 수 있었다면, 왜 서구 문명에서 그렇게 보통 선거권이 늦게 정착했습니까? 만약 좌파가 그럴 수 있었다면, 왜 파업 파괴자들이 노동 조합들을 짓밟았을 때, 아무도 그들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좌파가 그럴 수 있었다면,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었을 때, 왜 아무도 로자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좌파가 그럴 수 있었다면, 전쟁에 반대하는 유럽 노동자 계급이 학살을 당했을 때, 왜 아무도 죽어가는 노동자 계급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좌파가 그럴 수 있었다면,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가 고립되었을 때, 왜 아무도 소비에트 정부를 원조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좌파가 그럴 수 있었다면, 유럽 노동자 계급이 파쇼주의와 맞섰을 때, 왜 아무도 그들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좌파가 그럴 수 있었다면, 국경선에서 발터 벤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왜 아무도 발터 벤야민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서구 문명에서 좌파가 한 번이라도, 좌파가 단 한 번이라도, 좌파가 정말 단 한 번이라도 권력을 차지한 적이 있습니까?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과 미국에서 비열한 사회 민주주의 정당들 이외에 혁명적인 좌파 정당들이 한 번이라도 권력을 차지한 적이 있습니까? 그들이 정말 자본주의 세력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습니까? 무슨 힘으로? 무슨 능력으로? 무슨 비용으로? 무슨 자원으로? 아니, 이런 일은 벌어진 적이 없습니다. 급진 좌파들은 시리자에 기대를 걸었으나, 왜 시리자가 꼬리를 내렸나요? 왜 시리자가 눈치를 봐야 했나요? 심지어 소비에트 연방조차 미국이 저지르는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미 18세기부터 서구 자본주의가 만든 판도 안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저항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먼저 나타났고 먼저 막대한 부를 차지했고 먼저 학살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이미 막대한 부를 차지했고 떵떵거렸기 때문에, 가난한 파리 코뮌은 외롭게 싸워야 했습니다. 아무도 파리 코뮌을 돕지 못했습니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파리 코뮌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파리 코뮌 이후, 다른 좌파 세력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자본주의가 끔찍하게 압박하는 상황 속에서 좌파 세력들은 극단적으로 저항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좌파 세력들은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우파와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이미 18세기부터 서구 자본주의가 모든 판도를 짜놓은 상황에서 좌파와 우파가 똑같이 싸워요? 세상에 이런 개X랄 같은 헛소리가 있습니까.
현실에서 좌파와 우파는 똑같이 본진 건물 하나와 네 일꾼들로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현실이 <스타크래프트>라고 착각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좌파와 우파가 똑같이 본진 건물 하나와 네 일꾼들로 시작했다고 착각해요. 하지만 현실 속에서 좌파가 간신히 (히드라리스크도 아니고) 저글링들을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우파는 공성 전차들을 왕창 뽑아놨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이런 현실을 외면합니다. 그래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북한을 욕하고, 메갈리아를 욕하고, 시셰퍼드를 욕합니다. 너무 똑똑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이고 초월적인 상황을 가정하기 때문에. 너무 똑똑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누가 먼저 부를 차지했는지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테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독자는 이런 오류를 받아들일 겁니다. 독자 역시 오류가 현실이라고 착각할 겁니다. 독자는 망상을 현실이라고 인식하고 지배 계급에게 충성할 겁니다. 현실 속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필사적으로 수직적인 계급 구조에 저항함에도, 독자는 이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인류 전체가 탐욕스럽다고 착각할 겁니다. 소설 <사람의 아이들>은 개인적인 절망을 감동스럽게 사회적인 절망에 연결합니다. 개인적인 절망을 강조하기 위해 <사람의 아이들>은 사회적인 절망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건 비단 진부할 뿐만 아니라 지배 계급에게 충성합니다.
<사람의 아이들>은 사회적인 절망을 말하기 원하나, 가장 중요한 사회 구조에 절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현실 속에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참으로 개X랄스럽게 씨부리기 때문에, 이런 소설 역시 악영향을 피하지 못할 거에요. 그래서 <사람의 아이들>이 감동적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뒤집고 연약한 희망을 찬란한 신성으로 끌어올린다고 해도, 감동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