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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사기꾼 로봇>과 강렬한 단편 소설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사기꾼 로봇>과 강렬한 단편 소설

OneTiger 2018. 4. 29. 09:38

필립 딕은 수작 SF 소설들을 쓴 그랜드 마스터입니다. 필립 딕이 훌륭한 SF 작가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이 그랜드 마스터를 좋아할 이유 역시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필립 딕이 독특하고 기발한 작품들을 남겼다고 생각하나, 필립 딕이 쓴 장편 소설들을 쉽게 읽지 못하겠습니다. 작가가 뭐라고 말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된 갈등 관계나 극적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시간의 미로>, <높은 성의 사나이>, <화성의 타임 슬립>, <닥터 블러드머니> 같은 소설들을 읽었으나, 솔직히 제가 저런 소설들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화성의 타임 슬립>을 읽은 후 감상평을 쓰고 싶었으나, 뭐라고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사실 필립 딕은 글을 잘 쓰는 작가가 아닙니다. 여러 서문들이나 비평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필립 딕은 글을 잘 쓴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저는 필립 딕이 쓴 장편 소설들에서 뭔가 재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장편 소설들이 엉터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필립 딕은 기발한 작가이나, 그저 제가 필립 딕에게서 재미를 찾는 능력이 없을 뿐이겠죠. (비단 필립 딕만 아니라 진 울프가 쓴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 같은 소설 역시 좀….)



반면, 이 양반이 쓴 단편 소설들은 정말 멋집니다. <사기꾼 로봇>, <두 번째 변종>, <우리라구요!>, <자가 광고> 등등. 다들 기가 막힌 소설들입니다. 필립 딕이 장편보다 단편에 강한 작가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개인적인 평가에 불과하겠죠.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이 단편 소설들을 더 재미있게 읽은 이유는 그만큼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필립 딕은 소설 주인공들이 혼란에 빠지는 내용을 다루고, 그래서 장편 소설들은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그런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읽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초반부를 지나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겁니다.


허허, 솔직히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 해도 어질어질한 상황에서 어질어질한 장편 소설을 읽고 싶지 않습니다. (<화성의 타임 슬립>을 읽었을 때, 제가 소설을 읽지 않고 소설이 저를 읽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 단편 소설은 깔끔합니다. 이야기가 아주 복잡해지는 시점에서 소설 주인공은 극적 반전을 만나고 어느 새 결말에 다다릅니다. 단편 소설은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지 않고, 덕분에 천하의 필립 딕이라고 해도 혼란스러운 사건들을 주구장창 펼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야기 구조를 한눈에 알아보기 쉽습니다.



위에서 이미 말했다시피 이는 필립 딕이 장편 소설을 못 썼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창작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칭송을 많이 받는 창작물이라고 해도 결국 일부 사람들은 그 창작물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필립 딕이 쓴 장편 소설들은 저에게 그런 창작물입니다. 하지만 단편 소설들은 정말 독특합니다. 단편 소설은 짧은 이야기를 통해 강렬한 반전을 선사하는 문학입니다. 따라서 가상과 현실이 갈리는 강렬한 충격은 단편 소설 속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필립 딕이 쓴 여러 단편 소설들 중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드는 소설은 <사기꾼 로봇>입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제일 널리 알려진 필립 딕의 단편 소설인 것 같습니다. 필립 딕이 쓴 다른 단편 소설들처럼 <사기꾼 로봇>에서 사람들은 소설 주인공이 뭔가 다른 존재라고 의심합니다. 그래서 소설 주인공은 계속 쫓깁니다. 재미있는 점은 소설 주인공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상황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설 주인공을 의심하나, 주인공은 자신이 결백하다고 확고하게 믿습니다. 이 인물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이런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의심하는 상황 속에서 혼자 자기 자신을 확고하게 믿을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상황들을 논의하는 SF 소설들은 많고 많습니다. 비단 필립 딕만 아니라 다른 SF 작가들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고하게 믿는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믿음이 흔들릴 때, 소설 주인공은 더욱 깊은 나락에 빠질지 모릅니다. 굳은 믿음이 흔들리거나 깨진다면, 그만큼 소설 주인공은 아득하게 추락하겠죠.


<사기꾼 로봇>에서 그런 충격은 그저 절망이나 공포로 승화하지 않습니다. 내부적인 자아가 폭발할 때, 마침내 외부적인 세계 역시 폭발합니다. <사기꾼 로봇>은 내부적인 의심을 그저 내부 속에만 가두지 않습니다. 그걸 밖으로 끄집어내고, 아주 장대한 산화를 보여주죠. 그래서 저는 <사기꾼 로봇>이 다른 사이버펑크 소설들보다 훨씬 강렬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야기 구조에 따라 주제가 훨씬 강렬하게 보일 수 있겠죠. 인류와 외계인의 전쟁이나 첩자 로봇 같은 소품들 역시 재미있고요. 만약 <사기꾼 로봇>이 장편 소설이 되었다면…. 글쎄요, 이런 강렬한 느낌은 많이 옅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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