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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빼앗긴 자들>이 생태학 SF 범주에 속하는가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빼앗긴 자들>이 생태학 SF 범주에 속하는가

OneTiger 2020. 4. 2. 19:51

[이 게임은 비(非)현실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대규모 바이오 돔과 이 게임 사이에 유사성들이 있나요?]



고생물학자 스콧 샘슨은 중생대 생태계가 태양을 먹고 산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어떻게 중생대 생태계가 태양을 먹고 살 수 있나요? 쥐라기 골판 공룡 스테고사우루스는 중생대 생태계에 속합니다. 스테고사우루스가 태양을 먹을 수 있나요? 태양을 먹기 위해 스테고사우루스가 우주 강화복을 입고 항성으로 날아갈 수 있나요? 아무리 스테고사우루스가 이카루스 우주선을 타고 태양으로 날아간다고 해도, 태양은 엄청나게 뜨겁고 엄청나게 거대합니다. 노란 항성이 슈퍼걸에게 힘을 주는 것처럼, 노란 태양은 5778 켈빈 온도를 자랑하고, 태양 반지름은 696,340km에 이릅니다.


우주선 이카루스 승무원들이 태양을 경외하는 것처럼, 태양은 신과 같은 항성입니다. 어떻게 쥐라기 골판 공룡이 태양을 먹을 수 있나요? 스콧 샘슨이 거짓말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태양은 지구에 빛과 열을 전달하고, 식물들(내부의 광합성 요소들)은 광합성할 수 있습니다. 광합성은 영양분을 만들고, 그래서 식물들은 영양분 생산자입니다. 디플로도쿠스 같은 초식동물들은 식물들을 뜯어먹습니다. 알로사우루스는 초식동물들을 잡아먹습니다. 식물들과 디플로도쿠스, 알로사우루스 같은 동물들은 죽습니다. 미생물들은 죽은 식물들과 동물들을 분해하고, 식물들과 동물들은 토양 영양분이 됩니다.



살아있는 식물들은 토양 영양분을 이용하고 광합성합니다. 다시 영양분 순환 체계는 돌아갑니다. 만약 태양이 빛과 열을 보내지 않는다면, 지구에서 영양분 순환 체계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만약 거대한 운석이 충돌하고, 대대적인 먼지 구름이 하늘을 가린다면, 먼지 구름은 빛과 열을 차단할 테고, 영양분 순환 체계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공룡들은 굶어죽고 멸종할 겁니다. 태양 덕분에, 지구에서 영양분 순환 체계는 돌아갈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식물 대 좀비>에서 (이름과 달리) 태양 버섯은 태양을 혐오하나, 태양 없이, 지구 생태계는 망할 겁니다. 중생대 생태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고생물학자 스콧 샘슨은 스테고사우루스가 태양을 먹고 산다고 말했을 겁니다. 스콧 샘슨은 중생대 영양분 순환 체계, 먹이 그물망을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영양분 순환 체계, 먹이 그물망은 과학 분야들 중에서 생태학에 속합니다. 문자 그대로 생태계 순환은 생태학에 속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생태학이라고 간주합니다. 분명히 생태학에서 영양분 순환 체계, 먹이 그물망, 생물 다양성은 핵심입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역시 이것들을 중시합니다. 만약 어떤 사이언스 픽션이 영양분 순환 체계, 먹이 그물망, 생물 다양성을 중시한다면, 이 사이언스 픽션은 생태학 SF 울타리에 들어갈 겁니다.



물론 생태학은 먹이 그물망과 함께 세대 재생산을 고려해야 합니다. 생태학에서 생물 다양성은 핵심이고, 세대 재생산 과정에서 생물 다양성은 나타납니다. 만약 생명체들이 후손들을 낳지 않는다면, 돌연변이 역시 나타나지 않을 테고, 생명체들은 진화하지 못할 테고, 생물 다양성 역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장대한 시간 동안, 생명체들이 진화했기 때문에, 자연 선택은 다양한 생명체들을 낳았고, 이건 놀라운 생물 다양성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자연이라는 용어처럼, 자연 생태계에서 먹이 그물망과 세대 재생산은 핵심입니다. 생명 현상은 먹고 번성합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이것을 중시합니다.


전형적인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먹이 그물망과 생물 다양성과 세대 재생산을 중시합니다. 만약 어떤 사이언스 픽션이 이것들을 중시한다면, 이 사이언스 픽션은 생태학 SF 전형(典型)이 될 겁니다. 소설 <폭풍의 언덕>이 19세기 영국 문학 전형이 되는 것처럼, 먹이 그물망과 생물 다양성과 세대 재생산은 생태학 SF 전형이 됩니다. 소설 <듄>은 아라키스 먹이 그물망과 행성 자연 환경을 이야기합니다. <듄>은 아주 대표적인 생태학 SF 소설입니다. 소설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는 거대한 바이오 돔이 자연 환경과 생물 다양성을 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 역시 대표적인 생태학 SF입니다.



<듄>과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는 정반대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듄>은 장대한 서사시를 전개합니다. <듄>은 유사 메시아 신화를 도입하고, 온갖 초능력들을 보여주고, 기이한 첨단 장치들을 보여줍니다. <듄>은 성인 소설입니다. 반면,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는 청소년 소설입니다. 분량은 별로 길지 않고, 내용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하드 SF 장르에 속합니다. <듄>은 판타지와 비슷하나,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는 판타지와 거의 만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소설은 생태학 SF 전형들을 보여줍니다. <듄>과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는 대표 간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듄>과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에서 먹이 그물망, 생물 다양성은 위기에 부딪힙니다. 사막에서 삼림으로 아라키스 환경이 바뀌기 때문에, 모래벌레는 멸종 위기에 부딪힙니다. 일반적으로 삼림은 풍요로운 자연을 대표하고, 그래서 어머니 자연은 삼림과 비슷합니다. 많은 화가들은 어머니 자연에게 녹색 나뭇잎들을 붙입니다. 어머니 자연과 달리, 모래벌레는 삼림을 싫어합니다. 삼림이 풍부한 수분을 머금기 때문입니다. 모래벌레들은 건조한 환경을 좋아합니다. 심지어 풍부한 수분은 모래벌레를 죽일지 모릅니다. 아라키스 행성이 녹색 삼림 행성이 되기 때문에, 모래벌레들은 줄어듭니다.



제목 '위기의 지구 돔'이 가리키는 것처럼,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에서 대규모 바이오 돔은 심각한 위기에 부딪힙니다. 만약 과학자들이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바이오 돔 생물 다양성은 멸종할지 모릅니다. 썩은 인공 호수는 암울한 예고편인지 모릅니다. 바이오 돔은 작은 지구 생태계, 행성 생태계 모식도가 되고, 과학자들은 작은 행성 환경을 개선하고, 심각한 위기에서 대규모 바이오 돔은 벗어납니다. 아라키스는 거대한 행성 환경이고, 지구 돔은 그저 바이오 돔에 불과하나, 양쪽 모두 어떻게 행성 환경 변화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지 강조합니다. 바이오 돔은 행성 환경 축소판입니다.


비디오 게임 <타이토 에콜로지>는 대규모 바이오 돔과 생물 다양성, 먹이 그물망, 세대 재생산을 보여줍니다. <듄>과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처럼, <타이토 에콜로지>가 생태학 SF 전형이 될 수 있나요? 대답은 애매합니다. <타이토 에콜로지>는 비(非)현실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듄>에서 모래벌레들은 비현실입니다. 현실에서 모래벌레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모래 위에서 우리가 쿵쿵따~♬를 시전한다고 해도, 우리는 모래벌레들을 부르지 못합니다. <위기의 지구 돔>에서 작은 보조 로봇들은 비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작은 곤충 로봇들은 대규모 바이오 돔과 인공 자연 환경을 보조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바이오스피어 2 같은 바이오 돔을 실험하나, 바이오스피어 2 실험은 작은 곤충 로봇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대규모 바이오 돔 그 자체는 비(非)현실입니다. 현실 속의 바이오스피어 2 실험과 소설 속의 대규모 바이오 돔은 크게 다릅니다. <위기의 지구 돔>에서 대규모 바이오 돔은 엄청난 야생 동물들을 품었습니다. 반면, 바이오스피어 2 실험은 오직 제한적인 생태계만 재현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2 실험과 달리, <위기의 지구 돔>처럼, <타이토 에콜로지>는 대규모 바이오 돔과 엄청난 야생 동물들을 자랑합니다. 대규모 바이오 돔과 엄청난 야생 동물들은 비현실입니다.


그래서 <타이토 에콜로지>가 생태학 SF 전형이 될 수 있나요? <위기의 지구 돔>이 생태학 SF 전형이 되는 것처럼, <타이토 에콜로지>가 생태학 SF 전형인가요? <위기의 지구 돔>은 어떻게 과학자들이 대규모 바이오 돔을 건설하고, 조성하고, 운영하는지 설명합니다. <타이토 에콜로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타이토 에콜로지>는 과학자들을 보여주지 않고 거대한 중앙 기계 장치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들이 속편 <타이토 온라인>을 고려한다면, <타이토 에콜로지> 역시 생태학 SF 범주에 속할 겁니다. <타이토 온라인>은 외계 자연 환경을 실험하고, 이건 생태학 SF 전형입니다.



하지만 <타이토 온라인> 없이, <타이토 에콜로지>는 애매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이 생태학 SF 전형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대규모 바이오 돔과 엄청난 야생 동물들이 비(非)현실이라고 해도, <타이코 에콜로지>는 애매합니다. <타이토 에콜로지>가 애매한 것처럼, <어스텅>은 애매합니다. <어스텅>은 외계 버섯들과 곤충들을 묘사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외계 버섯들과 곤충들은 영양분 순환 체계, 먹이 그물망을 이룹니다. 외계 자연 생태계는 후손 세대를 재생산합니다. 외계 자연, 영양분 순환 체계, 먹이 그물망, 세대 재생산은 생태학 SF 전형입니다. <어스텅>은 전형입니다.


아니, 정말 <어스텅>이 생태학 SF 전형인가요? 현실에서 우리는 외계 보라 버섯을 관찰하지 못합니다. 우주 생물학자들은 외계 행성에서 균사체가 서식할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어스텅>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작은 신이 되나, 현실에서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분명히 <어스텅>에서 핵심 소재들은 비(非)현실입니다. 하지만 <어스텅>은 어떻게 보라 버섯과 지구 버섯이 다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외계인들이 그저 또 다른 인간에 불과한 것처럼, 보라 버섯은 그저 또 다른 지구 버섯에 불과합니다. <어스텅>은 생태학 SF 범주에 속할 수 있으나, 이 게임은 확실한 전형이 되지 못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은 대규모 바이오 돔을 건설하고 조성할지 모릅니다. 이건 시대 격차입니다.]



SF 평론가들은 <듄>과 <위기의 지구 돔>이 생태학 SF 전형이라고 분류할 겁니다. 반면, SF 평론가들은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이 애매하다고 대답할 겁니다. 솔직히 그들은 두 게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많은 SF 평론가들에게 소설은 가장 중요한 매체, 형식이고, 영화는 다음 순위를 차지합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은 여기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국내 SF 문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듀나님, 박상준님, 고장원님 같은 유명한 평론가들은 SF 게임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습니다. 표도기님은 SF 게임을 상당히 좋아하나, 오히려 표도기님은 예외일 겁니다. 게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SF 팬들 역시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이 애매하다고 대답할 겁니다. 그들은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이 <Among Ripples>와 비슷하다고 분류할 겁니다. 이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Among Ripples>는 현실 속의 담수 생태계를 묘사합니다.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은 <듄>과 <위기의 지구 돔>보다 <Among Ripples>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에 가깝습니다. SF 장르에서 비(非)현실은 가장 커다란 특징이나, 아무리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이 대규모 바이오 돔과 외계 버섯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은 비현실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듄>과 <위기의 지구 돔>과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은 모두 낯설고 새롭고 기이한 자연 환경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듄>과 <위기의 지구 돔>과 달리,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은 낯설고 새롭고 기이한 자연 환경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낯설고 새롭고 기이한 자연 환경은 현실 속의 자연 환경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와아, 생물 다양성은 정말 신비로워! 생물 다양성은 기이한 외계 같아!" 이렇게 사람들이 감탄할 때, SF 장르는 생물 다양성이 정말 기이한 외계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듄>은 완벽한 아라키스 생태학을 고증하지 못하나, 아라키스 생태학은 생물 다양성을 과장합니다.


"우리는 먹이 그물망을 알아. 폐쇄 공간에서 우리가 먹이 그물망을 조성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사람들이 물어볼 때, <위기의 지구 돔>은 사고 실험이 됩니다. <위기의 지구 돔>은 과학자들이 폐쇄 생태계를 만든다고 증명하지 못하나, 이 소설은 사고 실험입니다. 언젠가 과학자들은 폐쇄 생태계를 조성할지 모르고, 만약 이게 성공한다면, 외계 행성에서 사람들은 지속 가능한 인생을 꾸릴지 모릅니다. 자연 생태계에서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대규모 바이오 돔에서 외계 개척자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은 오직 지구 환경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바이오 돔은 '자연'이 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우리에게 오직 지구 환경만 '자연'입니다. 우리는 다른 '자연'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외계 행성과 대규모 바이오 돔과 엄청난 야생 동물들은 오직 지구 환경만 '자연'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건 시대 격차가 되고, 우리는 고정 관념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 짜릿한 감성입니다. SF 팬들은 이런 짜릿한 감성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대규모 바이오 돔은 짜릿한 감성을 선사합니다. 반면, <타이코 에콜로지>가 짜릿한 감성을 선사하나요? 이 게임이 우주 개척, 외계 개척자들, 지속 가능한 외계 인생을 보여주나요? 그건 아닙니다. <어스텅> 역시 생물 다양성을 과장하지 못합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타이토 에콜로지>가 우주 개척, 외계 개척자들, 지속 가능한 외계 인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어스텅>이 생물 다양성을 과장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소설, 만화, 영화, 게임 같은 창작물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합니다. 이런 해석들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들이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을 생태학 SF 울타리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이건 오류, 과잉 해석이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은 부족합니다. 적어도 <듄>과 <위기의 지구 돔>보다 두 게임은 부족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에는 비(非)현실이 있습니다. 대규모 바이오 돔과 외계 버섯들은 비(非)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위기의 지구 돔>과 <타이토 에콜로지>를 함께 좋아할지 모릅니다. <듄>과 <위기의 지구 돔>에서 행성 환경 변화와 생물 다양성 감소가 주된 갈등인 것처럼,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에서도 생물 다양성 감소는 주된 갈등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생물 다양성과 생물량을 늘려야 합니다. 만약 생물량이 감소한다면, 이건 게임 오버에 가까울 겁니다. <다크 소울>과 달리,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는 유다희양을 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생물량이 감소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런 상황이 유다희양과 다르지 않다고 느낄 겁니다. 자연 생태계에서 먹이 그물망과 생물 다양성과 세대 재생산이 핵심이기 때문에, 만약 생명체들이 굶주리고 후손들을 낳지 못한다면, 이건 정말 You Died일 겁니다. <듄>과 <위기의 지구 돔>과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에서 생물 다양성 감소가 심각한 위기인 것처럼, 현실에서도 생물 다양성 감소는 심각한 위기입니다. 아니, 현실에서 생물 다양성 감소가 위기이기 때문에, <위기의 지구 돔>은 지구 환경 축소판이 어려움에 부딪힌다고 묘사했을 겁니다. 독자는 소설과 현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환경 사회학 서적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은 몇 백 년 이후 지구 환경이 바뀌고 서구 문명이 몰락한다고 서술합니다.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과학 저술가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SF 작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은 강렬한 SF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 책에서 어떤 과학자는 개조 미생물들을 키우고 지구 환경을 개선합니다. 이건 진짜 생태학 SF 설정입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소설 <듄>과 소설 <붉은 화성>이 <다가올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듄>은 대표적인 생태학 SF 소설입니다.


<붉은 화성> 역시 아주 대표적인 생태학 SF 소설입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SF 작가가 아니나, 두 과학 저술가는 생태학 SF 설정을 빌립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홉 번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생태학 SF 장르는 지구 자연 환경을 과장하고 강조합니다. 이건 시대 격차가 되고, 시대 격차는 고정 관념을 깨뜨립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환경 오염을 과장하고 강조합니다. 이건 시대 격차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구 환경이 고정적이라고 착각하나, 이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심각한 착각입니다. 과학자들은 이미 기후 변화가 변곡점, 티핑 포인트를 지났을지 모른다고 경고합니다.



지구 자연 환경은 고정적이지 않고, 지구 환경이 대대적으로 바뀔 때, 인류 문명은 커다란 위기에 빠질지 모릅니다. 최근에 코로나 19 사태는 인류 문명을 무너뜨리지 않으나, 기후 변화는 인류 문명을 무너뜨릴지 모릅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보다 기후 변화는 훨씬 심각하고 위험한 재앙이 될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구 환경이 고정적이라고 착각하나, 지구 환경이 대대적으로 바뀔 때, 인류 문명은 커다란 위기에 빠질지 모릅니다. 아직 이런 미래가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합니다. 반면, 생태학 SF 장르는 지구 환경 변화를 서술합니다.


그래서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생태학 SF 설정을 빌렸을 겁니다. 그래서 <위기의 지구 돔>은 생태계 모식도 축소판을 보여줄 겁니다.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이 생태학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과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을 함께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이건 <다가올 역사>가 먹이 그물망, 세대 재생산을 중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텅>과 달리, <다가올 역사>는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생태학 SF 울타리에는 여러 하위 장르들이 있고, 환경 아포칼립스와 <타이토 에콜로지>는 다릅니다.



하지만 <다가올 역사>와 <타이토 에콜로지>는 모두 생태학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궁바오지딩과 깐풍기는 다르고, 꿔바로우와 탕수육은 다르나, 사람들은 네 가지 요리들이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깐풍기는 튀긴 닭고기이고, 탕수육은 튀긴 돼지고기이나, 중국집 메뉴판에서 깐풍기와 탕수육은 전형입니다. 깐풍기와 탕수육이 중국집 메뉴판 전형이 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다가올 역사>와 <타이토 에콜로지>를 함께 고려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자연 생태계를 연구하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에서 <다가올 역사>와 <타이토 에콜로지>는 나타납니다.


<타이토 에콜로지>는 기후 변화가 생물 다양성을 줄이고 유다희양과 만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 생태학에서 <타이토 에콜로지>가 비롯하고, 기후 변화를 강렬하게 경고하기 위해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가 생태학 SF 설정을 빌리고, 생태학자들에게 기후 변화가 가장 커다란 화두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타이토 에콜로지>, 나오미 오레스케스, 생태학 SF 울타리, 기후 변화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장르는 나타납니다. 태초에 장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장르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땅에서 장르는 불쑥 솟지 않았습니다.



[우주 함대 전투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하지만 우주 함대는 대규모 바이오 돔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유사성들을 찾고, 유사성들은 분류 기준이 되고, 분류 기준은 장르를 묶습니다. 태초에 장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장르를 임의적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다가올 역사>는 생태학 SF 범주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습니다. <어스텅>은 생태학 SF 범주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습니다. 어떤 SF 독자는 <듄>과 나오미 오레스케스를 함께 분류하기보다 <듄>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함께 분류할지 모릅니다. <듄>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과학 저술가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스페이스 오페라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습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인구를 왕창 늘리고, 우주 함대들을 건조하고, 적대 함선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적대 함선들이 공세를 펼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우주 함선 장갑판들을 강화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막을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적대적인 공세를 막고 은하계 의장이 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승리의 깃발을 휘두를 겁니다. 은하계 세력들은 무분별한 전쟁들을 끝내고 평화로운 시대를 유지할지 모릅니다. <다가올 역사>는 이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가올 역사>와 <듄> 사이에는 유사성들이 있으나, <다가올 역사>와 <마스터 오브 오리온> 사이에는 유사성들이 거의 없습니다.



<듄>은 <다가올 역사>와 비슷하거나 <마스터 오브 오리온>과 비슷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듄>은 아주 대표적인 생태학 SF 소설이나, 스페이스 오페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생태학 SF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바이오스피어 건물과 수경 재배 농장과 외계 행성 테라포밍을 묘사하나, 이것들은 보조적입니다. 우주 함대를 건조하고 승리의 깃발을 휘두르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들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플레이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바이오 돔과 수경 재배 농장은 비슷한 위상이나, 게임 플레이어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홈월드>는 바이오스피어 건물과 수경 재배 농장과 외계 행성 테라포밍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 <홈월드>는 우주 함대 전투들을 중시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듄>이 은하 제국 전쟁을 묘사하고, <마스터 오브 오리온>과 <홈월드>가 우주 함대 전투를 중시하기 때문에, <듄>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과 <홈월드>는 비슷한 범주(스페이스 오페라, 우주 전쟁)에 속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듄>이 모래벌레 생태계와 멜란지 스파이스 순환과 삼림 행성 테라포밍을 중시하기 때문에, <듄>과 <다가올 역사>와 <타이토 에콜로지>는 비슷한 범주(생태학 SF)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장르는 유동적인 흐름입니다. 사람들은 장르를 끊임없이 분류하고, 장르는 계속 바뀝니다. 심지어 장르는 작가 의도를 뛰어넘습니다. 메리 셸리는 <로섬의 만능 로봇>을 알지 못했으나, SF 평론가들은 메리 셸리와 <로섬의 만능 로봇>을 함께 묶을 수 있습니다. 만약 메리 셸리가 되살아난다면,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과 <로섬의 만능 로봇>을 떨어뜨리기 원할지 모릅니다. 비단 SF 장르만 아니라 주류 문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에밀리 브론테가 되살아난다면, 에밀리 브론테는 20세기 주류 문학 평론들을 비판할지 모릅니다. 장르는 유동적입니다.


하지만 유사성들 '배후'에서 분류 기준이 비롯하기 때문에, 이건 장르를 묶을 수 있습니다. <타이토 에콜로지>, 나오미 오레스케스, 생태학 SF 울타리, 기후 변화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현실에서 기후 변화가 나타나고, 생물 다양성이 감소하나요? 다들 환경 오염들이 심각하다고 인식합니다. 에코 페미니스트들부터 수구 꼴통 할아버지들까지, 다들 환경 오염들을 비판합니다. 왜 환경 오염들이 나타납니까? 아주 대표적인 생태학 SF 소설 <듄>이 이것을 설명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듄>은 아주 대표적인 생태학 SF 소설이나, <듄>은 왜 현실에서 생물 다양성이 감소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듄>에서 아라키스 행성 환경이 바뀌고 모래벌레들이 줄어들 때, 독자는 이게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위기를 비유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듄>은 과장, 비유, 강조입니다. <듄>은 설명이 아닙니다. <타이토 에콜로지> 역시 왜 현실에서 생물 다양성이 감소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대규모 바이오 돔을 관리하고 생물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생태학 서적들보다 <타이토 에콜로지>는 훨씬 낫습니다. 생태학 서적들에서 독자들은 자연 생태계를 직접 조성하지 못합니다. 생태학 서적들은 생태계 모식도 시뮬레이션이 아닙니다.


생태학 서적들보다 <타이토 에콜로지>는 훨씬 나으나, <타이토 에콜로지>는 왜 현실에서 생물 다양성이 감소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듄>과 <타이토 에콜로지>가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생태학 SF 장르가 기후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생태학 SF 울타리에는 비단 <듄>과 <타이토 에콜로지>만 아니라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이 있습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무분별한 자유 시장 경제가 기후 변화를 부른다고 비판합니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인류 문명은 자유 시장 경제를 제한하거나 없애야 합니다. 환경 운동과 자유 시장 경제는 상극입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국가 정부들이 자유 시장 경제를 강력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수구 꼴통 할배들은 이게 악랄한 빨갱이 짓거리라고 아주 게거품을 물 겁니다. 수구 꼴통 할아버지들은 대기업들이 국가 경제를 살린다고 지랄지랄 개X랄합니다. 에코 페미스트들은 국가 정부들이 자유 시장 경제를 제한할 수 있을지 의심합니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세계화 자본주의 그 자체가 사라지고 생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생태 마을 연합을 주장하나, 마르크스주의는 여기에 반대할 겁니다.


생태 마을 연합은 시장 경제보다 계획 경제에 가깝습니다. 디거스가 자연 환경 공유를 꿈꾼 것처럼, 에코 페미니즘은 공유 사회를 꿈꿉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개럿 하딘과 <공유지의 비극>이 멍청한 헛소리라고 일축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공유지의 비극>을 비판하고 계획 경제와 공유 사회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생태 마을 연합은 너무 느슨합니다. 생태 마을 연합이 너무 느슨하기 때문에, 어떤 지역이 환경 오염들을 저지른다고 해도, 생태 마을 연합은 이것을 막지 못할지 모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것을 경계하고 국유화를 주장합니다.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는 자연 환경을 국유화해야 합니다.



에코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는 대조적이나, 수구 꼴통 할배들과 달리, 에코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를 없애기 원합니다. 에코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처럼, 생태학 SF 장르는 계획 경제, 공유 사회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디거스가 꿈꾼 것처럼, 인류 문명은 자연 환경을 공유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에게도 디거스는 머나먼 선배님인지 모릅니다. 빌어처먹을 지배 계급은 머나먼 선배님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언제나 억압적인 지배 계급은 공유 사회를 짓밟습니다. 파리 코뮌 역시 비참한 운명에 부딪혔습니다. 공유 사회는 지배 계급, 사유화를 비판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고 세계화 자본주의를 없애기 위해 생태학 SF 장르 역시 지배 계급, 사유화를 비판해야 합니다. 아주 대표적인 생태학 SF 소설 <듄>은 지배 계급, 사유화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타이토 에콜로지> 역시 지배 계급, 사유화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생태학 SF 울타리에서 <듄>과 <타이토 에콜로지>는 전부가 아닙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은 사유화를 비판하고, 공유 사회를 꿈꾸고, 노동자 평의회를 지지합니다. <듄>과 <타이토 에콜로지>는 자연 환경 사유화를 비판하지 않으나, 생태학 SF 울타리에서 <빼앗긴 자들>은 <듄>과 <타이토 에콜로지>를 보충할 수 있습니다.



영화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희귀 야생 동물 캠페인을 홍보합니다. 공룡 사파리가 생태학 SF 설정이고, 생태학이 희귀 야생 동물들을 걱정하기 때문에, <폴른 킹덤>은 환경 운동을 홍보할 겁니다. 사실 클레어 디어링은 환경 운동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폴른 킹덤>은 왜 생물 다양성이 위기에 부딪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야생 동물들이 상품이 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은 위기에 부딪히나, 클레어 디어링은 이것을 설명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생태학 SF 울타리에서 <빼앗긴 자들>은 클레어 디어링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빼앗긴 자들>이 생태학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나요? <타이토 에콜로지>와 달리, <빼앗긴 자들>은 구체적인 자연 생태계 모식도를 그리지 않습니다. 생태학 SF 장르에서 자연 생태계 모식도가 핵심이기 때문에, <빼앗긴 자들>은 생태학 SF 전형이 되지 못할지 모릅니다. 깐풍기는 중국집 메뉴판 전형이나, <빼앗긴 자들>은 생태학 SF 전형이 아닙니다. <빼앗긴 자들>은 깐풍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빼앗긴 자들>에서 타크베르는 여자 해양 생태학자입니다. 생태학자로서 타크베르는 생물 다양성이 그물망을 이룬다고 느낍니다. 아레나스 위성은 삭막한 불모지입니다.



[이 장면처럼, 공룡 사파리는 야생 동물 보호로 이어지고, 환경 운동은 사유화를 비판해야 합니다.]



척박한 자연 환경에서 노동자 평의회는 공유 사회를 힘들게 운영합니다. 척박한 자연 환경은 공유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해양 생태학자 타크베르는 이것을 해결하기 원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생태학을 중시하지 않으나, 해양 생태학자 타크베르는 주연 등장인물입니다. 타크베르는 소설 주인공 연인입니다. 그래서 비록 <빼앗긴 자들>이 전형이 아니라고 해도, 이 소설은 생태학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빼앗긴 자들>은 비단 자연 환경 사유화만 아니라 훨씬 거시적인 생태 철학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장르에게 어머니 자연은 중요한 철학입니다.


동시에 어머니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셋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자연 생태계에서 세대 재생산은 핵심입니다. 생명 현상은 번성해야 합니다. 생명 현상이 번성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머니 자연, 대지모신, 자연의 여신을 비유합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기 때문에, 어머니 자연은 여자와 자연이 비슷하다고 비유합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는 이것을 왜곡할지 모릅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가 인간보다 어머니라고 왜곡할지 모릅니다. 여자는 인간보다 어머니, 생체 인큐베이터, 돌봄 노동 노예가 됩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를 왜곡하고 억압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 노동자들은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여자들)은 "육아는 노동이다!"라고 외쳤으나, 자본주의 사회는 육아 노동에게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많은 육아 노동자들이 여자들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육아 노동(여자 노동)을 착취합니다. 남자들 역시 모성이 될 수 있으나, 자본주의는 여자가 출산하기 때문에 여자가 육아 노동을 맡아야 한다고 지껄입니다. 자본주의는 오래된 가부장 편견을 이용하고 여자 노동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는 착취 경제입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가부장 문화에서 어머니 자연은 여자 노동 착취에 일조할지 모릅니다. 에코 페미니즘이 자연, 모성, 돌봄을 논의할 때, 심지어 다른 페미니즘들조차 에코 페미니즘이 여자의 육체를 왜곡하고 가부장 편견에 일조한다고 오해합니다. 이건 자연, 모성, 돌봄이 반드시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 <시녀 이야기>는 임신과 출산을 저주하는 것 같으나, 소설 <미친 아담>은 엄마 돼지와 아기 돼지들을 보여줍니다. 크레이커 남자들은 아주 커다란 성기들을 자랑하고, 크레이커 여자들은 임신과 출산을 긍정합니다. <시녀 이야기>와 <미친 아담>은 똑같은 마가렛 앳우드 소설입니다. 얼마든지 자연, 모성, 돌봄은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 모성, 돌봄은 가부장 편견에 일조할 겁니다. 자본주의가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에, 자연, 모성, 돌봄은 자본주의를 없애야 합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성 해방 없이, 생태학 SF 역시 없습니다. 자본주의를 없애기 위해 생태학 SF 장르는 공유 사회를 꿈꿔야 합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성 해방과 공유 사회를 함께 말해야 합니다. 아주 대표적인 생태학 SF 소설 <듄>은 성 해방을 꿈꾸지 않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듄>이 베네 게세리트 마녀들을 이야기하고 성 해방을 주장한다고 해석할지 모르나, <듄>은 성 차별을 적극적으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타이토 에콜로지> 역시 성 차별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사실 <타이토 에콜로지>는 사회 구조를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쥬라기 월드>와 <위기의 지구 돔>과 <다가올 역사> 역시 성 해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위기의 지구 돔>에서 인도 여자 과학자는 제3세계와 여자를 상징할 수 있고, 분명히 이건 뛰어난 장점입니다. 기후 변화가 서구 백인 남자들보다 제3세계 여자들에게 훨씬 커다란 피해를 미치기 때문에, 생태학 SF 장르는 제3세계 여자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인도 여자 과학자는 바람직한 등장인물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위기의 지구 돔>은 성 해방을 구체적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반면, <빼앗긴 자들>은 성 차별을 적극적으로 비판합니다. 공유 사회에서 여자와 남자는 노동을 함께 맡으나, 자본주의 사회는 여자를 가정에 억지로 집어넣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자들은 가식적인 미소를 치장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자들은 가부장 문화를 미화하고 노예 근성에 빠집니다. 뭐, 솔직히 남한 사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남한 사회에서 수많은 여자들은 자본주의를 미화하고 노예 근성에 빠집니다. 심지어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 제도 좀비들입니다.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가 여자 노동을 착취한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본주의를 미화합니다.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돌봄 노동들은 심각한 장벽에 부딪힙니다. 어린이집들, 유치원들이 줄줄이 문들을 닫기 때문에, 초등학교들이 온라인 개학하기 때문에, 아이 보호자들은 걱정을 떨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남한 국가 정부는 돌봄 노동 위기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남한 정부는 재난 소득과 유급 휴직과 저소득층 지원을 떠벌이고 권고하나, 이것들이 돌봄 노동 위기를 해결할 수 있나요? 자본가 눈치 없이, 비정규직 주부 사원이 돌봄 노동에 치중할 수 있나요? "비록 당장 내가 여기를 그만둔다고 해도, 나는 여기로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어." 이렇게 비정규직 주부 사원이 생각할 수 있나요?



"비록 내가 일자리를 그만두고 아이들 교육에 치중한다고 해도, 나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 이렇게 비정규직 주부 사원이 안심할 수 있나요? 아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정규직 주부 사원은 안심하지 못합니다. 남한 정부는 여러 지원 정책들을 지껄여대나, 이것들은 그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남한 자본주의가 육아 노동(여자 노동)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아무리 돌봄 노동들이 코로나 19 사태에 부딪힌다고 해도, 남한 정부는 이것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자칭 페미들, 가부장 제도 좀비들은 이런 자본주의 사회를 떠받듭니다. 그들은 육아 노동(여자 노동) 착취를 깨닫지 못합니다.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누군가는 아이들을 돌봐야 해! 당연히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돌봐야 해! 여자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와 교육에 매달려야 해! 만약 여자들이 직장을 그만둔다면, 일자리들은 늘어날 테고, 실업 문제는 사라질 거야!" 이렇게 수구 꼴통 할배들은 지랄지랄 쌍지랄을 해댑니다. 저는 이런 수구 꼴통 할배들과 크게 싸운 적이 있습니다. 이게 그저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한가요? 비록 이게 그저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하다고 해도, 어디에서 이런 가부장 편견이 비롯하나요? 어떻게 수구 꼴통 할배들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지랄발광하나요? 대답은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가부장 문화를 퍼뜨리고 수구 꼴통 할배들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만약 페미니즘이 자본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수구 꼴통 할배들에게 힘을 계속 실어줄 테고, 수구 꼴통 할배들은 가부장 편견을 계속 윽박지르고 지랄발광할 겁니다. 자칭 페미들은 이런 수구 꼴통 할배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자칭 페미들과 수구 꼴통 할배들은 똑같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지적하지 않고 똑같이 육아 노동 착취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칭 페미들이 수구 꼴통 할배들을 직접 편들지 않고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칭 페미들과 수구 꼴통 할배들은 비슷한 범주에 속합니다.


가부장 제도 좀비들과 달리, <빼앗긴 자들>은 성 차별을 지적합니다. 이건 <빼앗긴 자들>이 모범적인 성 해방 소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페미니즘 평론가들은 <빼앗긴 자들>이 너무 온건하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빼앗긴 자들>보다 공산주의 유토피아 <안드로메다 성운>조차 성 해방을 훨씬 급진적으로 꿈꿉니다. 그렇다고 해도 <빼앗긴 자들>은 성 차별을 지적하고, 독자는 성 해방이 중요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노동을 함께 맡을 수 있고, 여자와 남자는 똑같이 모성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남자가 임신하지 못한다고 해도, 남자 역시 육아 노동자가 될 수 있습니다.



<빼앗긴 자들>은 자연 환경 사유화를 비판하고, 공유 사회를 지지하고, 성 차별을 지적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듄>과 <타이토 에콜로지>와 <다가올 역사>와 <위기의 지구 돔>과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장르가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생태학 SF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타크베르가 해양 생태학자라고 해도, 어떤 SF 팬들은 <빼앗긴 자들>이 생태학 SF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빼앗긴 자들>보다 <어스텅>은 생태학 SF 장르에 훨씬 가까울지 모릅니다. <어스텅>이 먹이 그물망을 구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타크베르는 노동자 평의회와 먹이 그물망을 함께 논의하고, 이건 아주 중요한 특성입니다. 유명한 SF 소설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소설들이 이런 여자 생태학자를 묘사하나요? 얼마나 많은 SF 여자 생태학자들이 노동자 평의회와 먹이 그물망을 함께 논의하나요? 비록 <빼앗긴 자들>이 생태학 SF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도, 타크베르 그 자체는 중요한 생태학 SF 등장인물입니다. 적어도 저명한 SF 소설로서 <빼앗긴 자들>은 생태학 SF 울타리를 보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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