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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빼앗긴 사람들과 생산 수단을 공유하려는 사람들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빼앗긴 사람들과 생산 수단을 공유하려는 사람들

OneTiger 2017. 11. 23. 19:18

가끔 저는 '빼앗긴 자들'이라는 소설 제목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사회주의 공동체(무정부적인 노동 조합주의)를 묘사하는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서 아나레스 사람들은 소유하려는 욕심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 중심적이라거나 소유적이라는 말은 모욕이 됩니다. 아나레스 어른들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자기 중심적으로 굴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은 서로 욕할 때, 소유주의자라고 욕해요.


따라서 저는 이 소설에게 '빼앗긴 자들'보다 '소유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훨씬 소설 내용에 어울려요. 어쨌든 아나레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동시에 소유하지 않습니다. 서로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기 때문에 사적인 소유를 최대한 멀리할 수 있죠. 그게 과연 바람직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개인적인 소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중요한 공유는 생산 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한다는 개념이죠. 가령, 토지는 가장 중요한 생산 수단입니다. <빼앗긴 자들> 역시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그런 특징은 여러 사회주의 사상들과 일치합니다.



전통적인 공산주의 관점에서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피지배 계급이 됩니다. 귀족은 자신의 땅이 있으나, 노예는 자신의 땅이 없습니다. 소작농은 땅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귀족)의 땅을 빌려야 합니다. 귀족이 빌려준 땅에서 자신이 직접 노동했다고 해도 소작농은 생산물을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을 자본주의 체계에 대입한다면, 자본가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계급이고, 임금 노동자는 그렇지 못한 계급입니다. 단순히 부자는 자본가이고 가난뱅이는 임금 노동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작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그걸로 먹고 살 수 있다면, 비록 그 사람이 가난하다고 해도, 그 사람은 임금 노동자가 아닙니다. 임금을 받지 않고, 자신이 노동한 결과를 자신이 처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자영농, 농민입니다. 농민은 농장 노동자가 아닙니다. 똑같이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농민은 자신의 땅이 있으나, 농장 노동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농민은 재화를 생산하고 처분할 수 있으나, 농장 노동자는 재화를 처분하지 못합니다. 농장 노동자는 생산 수단,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생산 수단을 소유한다는 개념은 그런 뜻이죠.



그래서 여러 사회주의 사상들은 임금 노동자들을 중시합니다. 임금 노동자들은 재화를 생산함에도 그걸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무엇을 생산할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임금 노동자가 소유한 것은 그저 자신의 노동력뿐이고, 그래서 장시간 노동함에도 생산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가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죠. 왜 자본가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왜 노동자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했는가? 아마 어떤 사람들은 자본가가 열심히 일했고 노동자가 자본가에 비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겁니다. 사실 그런 주장은 꽤나 영향력이 큽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공평한 조건에서 출발했다면,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많은 몫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생산 수단을 소유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재화(생산물)와 달리 생산 수단은 인간과 상관없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토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토지는 몇 십 억 년이라는 지질 과정을 거쳤죠. 구태여 표현한다면, 토지를 만든 장본인은 자연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토지(생산 수단)를 소유할 권리는 없습니다.



토지를 소유한다는 개념과 토지에서 열심히 노동한다는 개념은 서로 다릅니다. 인간이 토지에 씨를 뿌리고, 비료를 뿌리고, 물을 뿌리고, 새싹을 가꾸고, 기타 여러 노동력을 투입한다고 해도 그 인간이 토지를 만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인간이 노동하기 전부터 토지는 원래 존재했습니다. 인간은 토지를 그저 바꾸었을 따름이죠. 그래서 인간은 노동의 결과인 재화를 소유할 권리가 있으나, 토지를 소유할 권리는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땅에 사과 씨앗을 심었다고 가정하죠. 그 사람은 사과 나무를 열심히 길렀습니다.


그래서 사과들이 열린다면, 그 사람은 사과들을 소유할 권리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사과 100개를 얻을 테고, 빈둥거리는 사람은 사과 10개를 얻을 테죠. 어쩌면 누군가는 사과 100개를 얻는 것보다 빈둥거리는 것을 더 좋아할지 모릅니다. 사과 10개로 굶어죽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사과 10개에 만족할지 몰라요. 하지만 열심히 일한 사람이든, 빈둥거린 사람이든, 누구든 사과 나무를 길렀을 뿐이고 땅을 만들지 않았죠. 사과 나무를 기르기 위해 땅을 바꿨을 뿐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일했든 빈둥거렸든, 인간은 땅을 소유할 권리가 없어요.



게다가 설사 토지(를 비롯한 생산 수단)를 소유할 수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서로 공정한 조건에서 출발하지 못했습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본다면, 토지를 소유하기 위한 어마어마한 학살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유럽 백인들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북미 원주민들을 학살했죠. 아직 그런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캐나다 대기업이 북미 원주민을 내쫓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그런 수탈과 착취와 학살 위에 서있습니다. 우리가 문명 국가라고 예찬하는 유럽 강대국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명 국가라고 예찬하는 영국이나 프랑스나 독일 역시 생산 수단을 빼앗기 위해 열심히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상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그래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잃어버리고 고달프게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인류 역사에서 수탈하는 지배 계급과 수탈을 당하는 피지배 계급은 절대 공정한 조건에서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일방적으로 압살했죠. 뉴질랜드 원주민들 같은 경우는 학살을 덜 당한 경우이나, 모든 피지배 계급이 이들과 같지 않았죠. 뉴질랜드 원주민들조차 사정이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고요.



하지만 현대 문명에서 기득권들은 이런 학살과 수탈을 제대로 사과하거나 보상할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기득권들은 온실 가스를 뿜고, 유전자 조작 생물을 퍼뜨리고, 산업 폐기물을 버립니다. 현대 자본주의 체계는 무조건 이윤 축적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윤 축적을 위해 모든 것은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학살과 수탈을 보상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마음씨가 착한 자본가라고 해도 결국 이윤 축적을 위해 계속 수탈을 반복할 뿐이겠죠. 재벌들이 기부금들이나 세금들을 많이 낸다고 해도, 역사적인 학살과 수탈에 비한다면, 그런 세금이나 기부금은 애교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 재벌들이 기부금이나 세금을 많이 낸다고 해도 피지배 계급들이 생산 수단에서 쫓겨났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계급은 생산 수단을 소유한 계급에게 굴종해야 합니다. 즉, 기부금이나 세금은 일시적인 긴급 조치에 불과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소하지 못합니다. 생산 수단을 공유해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소수 사람들이 생산 수단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이상, 기나긴 학살과 수탈을 해소할 방법은 없을 겁니다.



이런 시각을 비단 토지만 아니라 다른 생산 수단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헨리 조지는 토지 공유가 중요하다고 말했고, 그런 의견 역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생산 수단은 비단 토지만이 아니죠. 그저 토지가 제일 생각하기 쉬운 생산 수단이기 때문에 저는 토지를 사례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생산 수단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어렵고요. 어쨌든 그래서 사회주의를 비롯해 수많은 좌파들은 생산 수단을 공유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여러 공동체들은 그런 공유를 실천하기 위해 애썼고요.


하지만 그런 공동체들이 등장할 때마다 기득권들은 무자비하게 짓밟았습니다. 그래서 생산 수단을 공유하는 공동체는 이른바 문명 국가에서 쉽게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좌파라고 오해하는 소비에트 연방조차 그런 공유를 시도하지 못했고요. 소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의 여러 장점들을 받아들였으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생산 수단 공유)을 실현하지 못했죠. 즉, 예전부터 좌파들은 어떻게든 생산 수단을 공유하려고 몸부림쳤으나, 매번 기득권들은 그런 노력을 짓밟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좌파와 우파가 대등하게 싸웠다고 생각하나, 역사적으로 좌파는 언제나 우파에게 짓밟혔습니다. 만약 그런 좌파적인 공동체들이 짓밟히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현대 문명은 크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토지 공유든, 사회주의 혁명이든, 빈민들의 봉기든, 노동 조합주의든, 기득권들은 그런 좌파적인 공동체를 학살하기 바빴어요. 그런 학살은 오늘날의 노동 운동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요. 우파들만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키운 상황에서 어떻게 노동 운동이 힘을 얻겠어요. 따라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과 달리 좌파는 언제나 살아남기 바빴습니다.


자신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좌파와 우파를 똑같이 비판하나, 정말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고 싶다면, 좌파를 지지하는 당파성을 보여야 할 겁니다. 정말 공정하다면,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쪽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쪽 중에서 누구를 지지해야 할까요. 물론 좌파들도 역사적으로 많은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폭력은 나빠요. 저는 그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폭력은 나쁘죠. 하지만 누가 먼저 폭력을 저질렀죠? 누가 더 많이, 더 오래 폭력을 저질렀나요? 왜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을까요? 백인을 죽이는 원주민 노예와 원주민을 채찍질하는 백인 주인이 똑같은 폭력을 저지르나요?



생산 수단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한쪽은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생산 수단이 빈약하거나 없기 때문에 다른 한쪽은 아둥바둥 먹고 살아야 합니다. 양쪽은 절대 똑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착취와 학살과 수탈을 무시하고, 무조건 좌파와 우파를 똑같이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흐름을 무시하는 사고 방식이죠. 게다가 이런 착각은 우파를 지지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파가 일방적으로 좌파를 두들겨 패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양쪽을 동시에 비판한다면, 당연히 우파가 훨씬 유리하겠죠.


만약 사람들이 좌파와 우파를 언급하고 싶다면, 생산 수단이라는 개념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누가 생산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가? 북미 원주민들이 얼마나 많은 생산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가?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들이 자유롭게 생산 수단을 이용했는가? 왜 어슐라 르 귄은 소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강조했는가?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좌파를 논한다고 해도 그저 허공에 대고 외치는 행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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