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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비유로서 사이언스 픽션과 보편성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비유로서 사이언스 픽션과 보편성

OneTiger 2019. 12. 13. 20:03

[21세기 초반 기후 변화 시대에서 호랑이 굴보다 바이오스피어 건물은 훨씬 어울리는 비유일 겁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라." 이건 아주 유명한 속담입니다. 하지만 21세기 초반 오늘날, 남한에서 이건 다소 어색한 속담입니다. 더 이상 남한에서 호랑이가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한에서 호랑이들은 멸종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호랑이들이 살아있다고 말하고, 호랑이 소문들은 끊이지 않습니다. 정말 여전히 호랑이들이 살아있나요? 아니면 호랑이들이 멸종했나요? 호랑이들이 살아있든 아니든, 공식적으로 남한은 호랑이 서식 지역이 아닙니다. 남한 사람들은 야생 호랑이들을 절대 쉽게 만나지 못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호랑이 굴들을 절대 쉽게 찾지 못합니다.


물론 저 속담에서 핵심 주제는 야생 호랑이가 아닙니다. 저 속담은 뭔가를 이룩하기 위해 우리가 직접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사회주의 공동체를 원한다면, 사람들은 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나쁘고 왜 사회주의가 좋은지 떠들어야 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인류 문명이 사회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떠들어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직접 떠들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는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야생 호랑이는 그저 비유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남한이 호랑이 서식 지역이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남한 사람들은 호랑이 굴을 운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유는 특정한 시대 상황에서 벗어나고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더 이상 남한이 호랑이 서식 지역이 아니라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호랑이 굴을 운운할 수 있습니다. 비단 저 속담만 아니라 다른 많은 속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호랑이 굴처럼, 더 이상 많은 속담들은 21세기 초반 남한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한 사람들은 속담들을 운운합니다. 21세기 초반 남한 도시 시민들이 가마솥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21세기 초반 남한 시민들은 솥뚜껑과 자라를 운운할 수 있습니다. 속담들이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표면보다 알맹이입니다. 솥뚜껑은 표면입니다. 알맹이는 유사성의 함정입니다.


야생 호랑이는 표면입니다. 실천은 알맹이, 주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생 호랑이보다 실천입니다. 그래서 남한이 호랑이 서식 지역이 아니라고 해도,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남한 사람들은 호랑이 굴을 운운합니다. 호랑이 굴처럼, 많은 속담들은 비유이고, 특정한 시대 상황에서 비유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건 언제나 비유가 잘 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가 표면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알맹이보다 표면을 파악할지 모릅니다. "어라, 21세기 초반 남한에 호랑이 굴이 있나요?"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반문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알맹이, 주제보다 표면을 파악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유, 표면 속의 알맹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분명히 21세기 초반 남한에 야생 호랑이 굴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남한이 호랑이 서식 지역이 아니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사회주의 문명은 야생 보호 구역들을 조성하고 남한 역시 호랑이 서식 지역이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직 이윤 극대화만 노리는 자본주의 남한 사회에서 호랑이들을 위한 야생 보호 구역은 불가능할 겁니다. 만약 남한이 정말 호랑이 보호 구역을 설정한다고 해도, 기후 변화 시대에서 이런 야생 보호 구역에 커다란 의미가 있을 수 있나요? 그래서 사람들은 남한이 호랑이 서식 지역이 아니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유를 해석할 때, 우리는 표면을 헤치고 주제를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비유에서 주제가 직접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유는 오해를 유발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비유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비유는 표면을 이용하고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야생 호랑이 굴이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남한 사람들은 호랑이 굴을 운운합니다. 하지만 비유는 오해를 유발합니다. 비유가 주제를 직접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유를 잘못 해석할지 모릅니다. "호랑이를 관찰하고 싶다면, 야생 보호 구역으로 가라." 21세기 남한 사람들에게 이건 훨씬 나은 속담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게 속담이라고 생각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여전히 이런 사람들은 주제(실천)보다 표면(야생 보호 구역)을 파악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비유가 오해를 유발할지 모름에도, 왜 사람들이 비유를 좋아하나요? 우리는 "실천은 중요하다."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간단한 주장보다 야생 보호 구역을 말하나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여러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비유를 좋아합니다. 특히, 어떤 언어학자들은 언어 활동과 인간 사고 방식에 비유 구조가 있다고 말합니다. 비유 없이, 우리는 말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나는 사랑에 빠졌어." 이 문장이 옳은가요? 인간이 사랑 속으로 빠질 수 있나요? 사랑은 수영장이 아닙니다. 인간은 수영장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수영장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랑 속으로 빠지지 못합니다. 수영장과 달리, 우리는 사랑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연인이 사랑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이건 비유입니다.


'아, 세상에, 나는 이웃집 영희와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옆동네 철수가 이웃집 영희를 만날 때, 옆동네 철수는 저도 모르게 생각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사랑이라는 웅덩이가 존재하고 자신이 웅덩이 속에 빠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웅덩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웅덩이는 불가능하나, 옆동네 철수는 사랑이라는 웅덩이가 존재한다고 비유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사랑 웅덩이를 가정하고 자신이 사랑 웅덩이에 빠진다고 비유합니다. 사랑 웅덩이에는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있을지 모르고, 물고기들은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를 둘러싸고 예쁜 사랑을 축하할지 모릅니다.



비단 옆동네 철수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은 연인이 사랑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다른 언어 문화들에는 이런 표현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언어 문화들에 이런 표현들이 없다고 해도, 많은 언어 문화들에서 비유는 흔한 특징일 겁니다. 상당히 많은 언어 문화들은 비유를 이용할 겁니다. 적어도 옆동네 철수가 속한 언어 문화에서 비유는 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옆동네 철수는 '아, 나는 이웃집 영희를 사랑해.'보다 '아, 나는 이웃집 영희와 사랑에 빠졌어.'라고 생각합니다. 왜 옆동네 철수가 사랑이라는 웅덩이를 가정하나요? 왜 옆동네 철수가 사랑을 직접 말하기보다 사랑을 비유하나요?


문제는 사랑이 추상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합니다. 사랑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가 입을 맞추고 부둥켜안는다면, 이건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옆동네 철수가 이웃집 영희의 젖가슴을 만지고 섹스하기 원한다면, 이것 역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가 맛좋은 하우스 와인을 주문한다고 해도, 이것 역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주말 번화가에서 영희와 철수가 두 손을 잡고, 담소를 나누고, 함께 걷는다고 해도, 이것 역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아주 수많은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너무 많은 것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이 어떤 특정한 것이라고 규정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너무 폭넓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이기보다 추상적입니다. 사랑이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행위보다 감정입니다. 두 연인이 뭔가를 한다고 해도, 이건 감정에 기반합니다. 감정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 같은 감정을 직접 관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에 연결하고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에 연결합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웅덩이가 됩니다. 사랑은 감정이고, 감정은 비가시적입니다. 반면, 웅덩이는 가시적입니다. 우리는 웅덩이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웅덩이에 뛰어들고 웅덩이 생태계를 직접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웅덩이 속에 얼마나 많은 물고기들과 남생이들과 가재들과 수초들이 있는지 직접 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웅덩이가 되어야 합니다. 속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호랑이를 관찰하고 싶다면, 야생 보호 구역으로 가라." 여기에서 호랑이와 야생 보호 구역은 가시적입니다. 우리는 호랑이를 직접 구경할 수 있고 야생 보호 구역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야생 보호 구역인지 울타리를 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울타리를 따라 걷고 야생 보호 구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생 보호 구역은 가시적입니다. 반면, 실천은 추상적입니다. 실천은 비가시적입니다. 실천은 너무 폭넓은 개념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실천을 강조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실천이 무엇인지 헛갈릴지 모릅니다. 관조적인 유물론을 비판하고 주체적인 의식을 주장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실천을 강조하나, 실천이 너무 많은 것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주체적인 의식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합니다. 사랑처럼, 주체적인 의식은 추상적입니다. 사랑이 웅덩이가 되는 것처럼, 실천은 야생 보호 구역이 되어야 합니다.


실천이 추상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생태학자가 머나먼 야생 보호 구역으로 떠나고 호랑이를 관찰한다고 가시적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실천이라는 추상적인 것보다 야생 보호 구역이라는 가시적인 것은 훨씬 생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유를 이용합니다. 비유에 한계가 있고, 비유가 오해를 유발한다고 해도, 비유는 훨씬 생생합니다. 사랑과 실천 이외에 다른 추상적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추상적인 것을 설명하기 원한다고 해도, 추상적인 것은 생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 생생한 것을 제시하기 원합니다. 만약 우리가 추상적인 것을 설명하기 원한다고 해도, 우리는 생생한 것을 함께 제시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실천은 중요하다."보다 "호랑이를 관찰하기 위해 야생 보호 구역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론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어 활동과 인간 사고 방식에 비유 구조가 없다고 반대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추상적인 것보다 가시적인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반대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언어 문화에서 비유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사랑과 실천은 추상적이고, 웅덩이와 야생 보호 구역은 가시적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실천보다 웅덩이와 야생 보호 구역을 언급할 때, 우리는 훨씬 생생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비유를 좋아하는지 이유가 확실하지 않다고 해도, 비유에는 이런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담들처럼, SF 역시 비유가 됩니다.


만화 수필 <나 홀로 여행>에서 작가 다카기 나오코는 다이빙 훈련을 받습니다. 바닷속에서 다카기 나오코는 해양 동물들과 수많은 물고기들을 구경합니다. 다카기 나오코는 바닷속이 정말 신비롭고 아름답고 이질적이라고 느낍니다. 애석하게도 이런 감정은 추상적입니다.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은 추상적입니다. 우리는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직접 만지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훨씬 생생하게 표현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가시적인 것을 제시해야 합니다. <서브노티카>처럼, 만약 다카기 나오코가 외계 해저 풍경을 그린다면, 외계 해저 풍경은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감정을 강조할 겁니다.



다카기 나오코는 SF 만화 작가가 아닙니다. <서브노티카>와 달리, 다카기 나오코는 외계 해저 풍경을 그리지 않습니다. 다카기 나오코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거대 바다 괴수 리프백 레비아탄을 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카기 나오코는 '인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언급합니다. 외계 해저 생태계처럼, 리프백처럼, 현실에서 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계 해저 생태계와 리프백과 인어는 똑같이 비일상적입니다. 하지만 외계 해저 생태계와 거대 바다 괴수와 인어가 똑같이 비일상적이라고 해도, 외계 해저 생태계와 거대 바다 괴수와 인어는 똑같이 가시적입니다. 세 가지는 똑같이 생생합니다.


그래서 '인어가 된 것 같은 기분'은 외계 생태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외계 생태계를 이용하고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훨씬 생생하게 제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리프백 레비아탄? 현실에는 거대 바다 괴수가 존재하지 않아!"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비유는 오해를 유발하고, 어떤 사람들은 외계 생태계가 허무맹랑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비유를 좋아합니다. 아무리 비유가 오해를 유발한다고 해도, 우리는 비유를 버리지 못할 테고, 거대 바다 괴수와 외계 생태계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비유로서 거대 바다 괴수는 자연이 정말 '大'自然, Greeeeeat Outdoor라고 강조합니다.]



비유에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다카기 나오코가 바닷속으로 잠수하고 인어를 느끼는 것처럼, 신비로운 자연 환경을 과장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외계 해저 생태계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외계 해저 생태계는 비유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유가 됩니다. 비유에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에게도 보편성이 있고,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아직 천문학자들은 외계 해저 생태계를 찾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로파 해저 생태계를 기대하나, 유로파 바다에 생태계가 있다고 해도, 이건 미생물 생태계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풍요로운 외계 해저 생태계를 찾는다고 해도, 이건 몇 세기 이후 미래 사건일 겁니다. 당장 천문학자들은 외계 해저 생태계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당장 천문학자들이 외계 생태계를 확신하지 못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서브노티카>를 플레이하고 자연 풍경이 환상적이라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 보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편성 덕분에, 특정한 상황(미래 사건)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벗어날 수 있고, 21세기 초반 게임 플레이어는 사이언스 픽션을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비단 <서브노티카> 같은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비유로서 문학들에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문학들에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독자는 중세 문학을 읽고 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주선과 외계 해저 생태계와 첨단 잠수정과 기이한 물고기는 비일상적인 상상력, 미래 사건입니다. 소설 <2312>처럼, 심지어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 연도를 노골적으로 표시합니다. 21세기 초반 독자에게 2312년은 미래입니다. 어떻게 21세기 초반 독자가 2312년 미래 사건을 읽고 이해할 수 있나요? 이게 과대망상이 아닌가요? 만약 21세기 초반 독자가 2312년 미래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이해한다면, 이게 망상이 아닌가요?


하지만 2312년 미래에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에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보편성 덕분에, 2312년이라는 특정한 시대에서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이야기하는 SF 소설)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초반 독자는 이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은 환경 보호가 중요하다고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환경 보호는 너무 추상적입니다.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은 가시적입니다. 비록 이게 아주 웅장하고 거대하다고 해도, 환경 보호 개념보다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은 가시적입니다. 그래서 21세기 초반 독자는 환경 보호가 중요하다고 깊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 흔히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파괴적이라고 생각하나, 리프백 레비아탄처럼, 거대 괴수는 신비롭고 우아하고 평온할 수 있습니다. 이건 쌈마이 괴수 결전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거대 괴수가 너무 싸움박질, 파괴에 치우친다면, 생태계 핵심종, 거대한 생명 현상으로서 거대 괴수는 위상을 잃을 겁니다. 거대 괴수는 생명체, 생명 현상이고, 그래서 파괴적인 규모보다 생태계 핵심종이 훨씬 중요한 위상이 아닐까요. 그래서 생태학 SF 덕질에게 거대 괴수는 정말 경이로운 소재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삼림 도시, 소행성 테라포밍보다 거대 괴수는 경이롭습니다.


하지만 야생 보호 구역조차 설정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SF 팬들이 외계 생태계 핵심종을 덕질한다고 해도, 여기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백화 현상이 심각한 현실 속에서 SF 팬들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리프백 레비아탄을 열심히 빨아준다고 해도, 여기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SF 팬들에게도 컴퓨터 화면 속의 리프백 레비아탄보다 현실 속의 야생 호랑이는 훨씬 중요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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