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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발레리나>와 근대 산업 사회 '구조' 본문

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발레리나>와 근대 산업 사회 '구조'

OneTiger 2021. 7. 10. 20:10



고지라와 모스라는 아주 유명한 거대 괴수입니다. 어쩌면 고지라와 모스라는 가장 유명한 거대 괴수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두 괴수는 대조적입니다. 고지라는 파괴신입니다. 고지라는 폭력적입니다. 고지라와 달리, 모스라는 자연의 여신입니다. 모스라는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쪽이 진짜 거대 괴수인가요? 파괴신이 진짜 거대 괴수인가요? 아니면 자연의 여신이 거대 괴수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고지라를 선택할지 모르고, 어떤 사람들은 모스라를 선택할지 모릅니다. 이 선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거대 괴수 설정은 어떤 성향이 진짜인지 규정하지 않습니다.

 

파괴신은 거대 괴수 성향이 될 수 있고, 자연의 여신은 거대 괴수 성향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두 가지가 대조적이라고 해도, 두 가지는 거대 괴수 성향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거대 괴수는 파괴적이야! 모스라가 풍요롭기 때문에, 모스라는 진짜 거대 괴수가 아니야!" 이렇게 사람들은 모스라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비단 파괴신과 자연의 여신만 아니라 다른 성향들 역시 거대 괴수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 SF 작가가 거대 괴수에게 다른 성향을 덧붙이기 원한다면, 이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SF 작가가 다른 성향을 덧붙일 수 있는 것처럼, 거대 괴수 설정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고지라는 파괴적입니다. 고지라와 달리, 비록 모스라가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상징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거대 괴수 장르에서 모스라를 쫓아내지 않습니다. 심지어 크기와 규모조차 고정적인 설정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소설에서 아주 작은 벌레가 주인공이고, 도마뱀이 벌레들을 잡아먹는다면, 도마뱀은 거대 괴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 관점에서 고지라가 거대 괴수인 것처럼, 벌레 관점에서 도마뱀은 거대 괴수입니다. 심지어 (벌레 관점에서) 도마뱀조차 거대 괴수가 되는 것처럼, 거대 괴수 설정은 고정적이기보다 주관적입니다. 이건 거대 괴수 장르에게 아무 규칙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장르를 형성하기 위한 규칙은 존재합니다. 아무리 설정이 주관적이라고 해도, 장르를 형성하기 위한 규칙 내부에서 장르 설정은 주관적입니다. 박소란 시인은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썼습니다. 이 시가 거대 괴수를 묘사하나요? 거대 괴수 설정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닫힌 문>이 거대 괴수 이야기인가요? 소설 <프로젝트 메카 고지라>처럼, 이 시가 거대 괴수 장르에 속할 수 있나요? "슈퍼에서 한 봉지 천 오백 원. 회원 가입을 하고 포인트를 적립한다.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 이 문구들이 커다란 야수를 표현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닫힌 문>은 거대 괴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리 설정이 주관적이라고 해도, 거대 괴수 장르는 동물이 (아주) 거대하다고 묘사해야 합니다. 고지라는 아주 거대한 (중생대) 야수입니다. 모스라는 동물보다 곤충에 가까우나, 인간보다 곤충은 동물에 가깝고, 모스라는 아주 거대한 곤충입니다. <프로젝트 메카 고지라>가 장르 규칙을 충족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거대 괴수 장르에 속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아주) 거대한 동물을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시는 거대 괴수 장르에 속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닫힌 문>이 거대 괴수 장르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장르 규칙은 존재합니다. 분명히 장르 규칙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장르 규칙 내부에서 장르 설정은 주관적입니다. 고지라와 모스라가 장르 규칙을 충족하기 때문에, 장르 규칙 내부에서 장르 설정(파괴신과 자연의 여신)은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파괴신과 자연의 여신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비록 고지라와 모스라가 대조적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거대 괴수 장르에서 모스라를 쫓아내지 않습니다. 비록 고지라와 모스라가 대조적이라고 해도, <프로젝트 메카 고지라>에서 고지라와 모스라가 비기는 것처럼, 거대 괴수 성향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폭력적이거나 풍요롭거나 다른 성향들이라고 주관적으로 설정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설정과 해석은 주관적입니다. 설정과 해석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진짜 거대 괴수 성향은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입니다. 이건 사람들이 거대 괴수 설정을 논의할 때, 모든 것이 주관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대 괴수 성향이 주관적이라고 해도,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 괴수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거대 괴수를 설정할 때, 사람들은 자연 생태계를 참고합니다. 사람들이 야생 동물들을 참고하고 거대 괴수를 설정하는 것처럼,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에서 거대 괴수는 비롯합니다. 거대 괴수에게 자연 생태계는 생산 조건입니다. 거대 괴수 설정보다 생산 조건은 우선합니다.

 

인간은 티-렉스를 참고하고 고지라를 설정합니다. 인간은 나방에게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덧붙이고 모스라를 설정합니다. 고지라와 모스라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자연 생태계는 존재합니다. 자연 생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건 생산 조건이 되고, 이 생산 조건에서 거대 괴수는 비롯합니다. 비단 고지라와 모스라만 아니라 다른 여러 거대 괴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자연 환경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거대 괴수를 상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미 자연 생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라는 체계, 구조 속에서 인간은 거대 괴수를 상상합니다. 체계, 구조 속에서 인간은 상상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은 거대 괴수를 상상하지 않습니다. 고지라와 모스라가 나타나기 전에, 거대 괴수 설정들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자연 생태계는 존재하고, 이 생산 조건, 체계, 구조 속에서 인간은 거대 괴수를 상상합니다. 거대 괴수를 그리기 위해 화가들이 여러 야생 동물들을 관찰하는 것처럼, 이미 자연 생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화가들은 거대 괴수를 그릴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보다 거대 괴수는 우선하지 않습니다. 거대 괴수보다 자연 생태계는 우선합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하기 전에, 이미 엄청난 생물 다양성은 존재했습니다. 장르 설정보다 구조는 우선합니다.

 

설정(거대 괴수)보다 구조(자연 생태계)는 우선합니다. 구조(자연 생태계)에서 설정(거대 괴수)은 비롯합니다. 설정보다 구조가 우선하고, 구조에서 설정이 비롯하기 때문에, 설정 없이, 구조는 존재할 수 있으나, 구조 없이, 설정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이 생산 조건, 자연 생태계는 풍요롭습니다. 생태학자들은 자연 생태계가 파괴적이기보다 풍요롭다고 설명합니다. 분명히 자연 생태계에는 파괴적이고 폭력적이고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측면들이 있으나, 생태학자들이 생명체를 설명할 때, 생태학자들은 신진대사, 번식, 진화를 언급합니다. 이것들, 생명체 성립 조건들은 폭력적이기보다 풍요롭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오직 파괴와 폭력만 자연 생태계라고 간주한다면, 만약 자연 생태계가 오직 이빨과 발톱만이라면, 생태학자들은 이 판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생명체들이 번성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은 성립합니다. 이미 생물 다양성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풍요로움을 가리킵니다. 자연 생태계가 풍요롭기 때문에, 이 풍요로움은 구조가 되고, 이 풍요로운 구조 속에서 인간은 거대 괴수를 상상합니다. 설정과 해석은 주관적입니다. 거대 괴수 설정은 주관적이나, SF 작가가 거대 괴수를 주관적으로 설정하기 전에, 이미 생산 조건, 구조는 존재합니다. 이 구조는 폭력적이기보다 풍요롭습니다.

 

고지라가 진짜 거대 괴수 성향에 가깝든, 모스라가 진짜 거대 괴수 성향에 가깝든, 이건 주관적인 해석이나, 풍요로운 구조 속에서 인간은 주관적으로 해석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보다 풍요로운 구조 속에서 인간은 해석합니다. 이 구조는 주관적이기보다 객관적입니다. 풍요로움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파괴신이 진짜 거대 괴수 성향이든, 자연의 여신이 진짜 거대 괴수 성향이든, 두 해석은 객관적인 사실(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이 구조가 되고 이 구조 속에서 해석이 나타난다고 동의해야 합니다. 아무리 두 해석이 대조적이라고 해도, 두 해석은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을 함부로 운운하지 못합니다.



비단 거대 괴수 성향만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 거대 괴수를 해석하는 것처럼, 해석은 주관적이나, 구조 속에서 인간은 해석합니다. 해석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구조는 우선합니다. 만약 어떤 매체가 초기 산업 사회를 과장한다면, 이 매체는 스팀펑크일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19세기 산업 사회를 과장하고 비행선과 고속 전철과 자동 인형(오토마톤)과 상급 인공 지능과 무선 통신을 묘사한다면, 독자들은 이 소설이 스팀펑크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중세 유럽 판타지조차 스팀펑크를 도입하고 (19세기) 초기 산업 사회를 과장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중세 판타지 사람들조차 잠수정에 탑승하고 심해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 소설에서 드루이드들이 잠수정에 탑승하고 심해 열수공 생태계를 관찰한다면, 독자들은 이 소설이 스팀펑크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독자들은 중세 판타지가 스팀펑크를 도입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중세 판타지조차 스팀펑크를 도입하는 것처럼, 만약 어떤 매체가 초기 산업 사회를 과장한다면, 이 매체는 스팀펑크일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가 초기 산업 사회를 과장하기 때문에, 스팀펑크는 시대 격차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근대, 진보, 산업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21세기 초반, 근대, 진보, 산업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나, 갑자기 하늘에서 이것들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허공에서 근대, 진보, 산업은 번쩍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근대가 찾아오기 전에, 인류 사회(서구 사회)는 중세, 르네상스, 대항해 시대, 계몽주의를 거쳤습니다. 근대가 찾아오기 전에, 산업 개념, 진보 개념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산업 혁명 동안,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거쳤고, 이 과도기 동안, 산업 개념, 진보 개념은 나타났습니다. 스팀펑크는 초기 산업 사회, 과도기 산업 사회에 비행선과 잠수정과 자동 인형과 무선 통신 같은 비(非)현실 설정들을 덧붙입니다.

 

모스라가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과장하는 것처럼, 스팀펑크는 과도기를 과장합니다. 스팀펑크가 과도기를 과장하기 때문에, 스팀펑크는 산업 사회가 번쩍 나타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스팀펑크는 어떻게 진보, 산업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시작했는지 강조합니다. 스팀펑크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할 수 있으나, 다른 SF 하위 장르들은 초기 산업 사회를 과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SF 하위 장르들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으로 돌아가기보다 미래 사회를 전망합니다. (거의 유일하게) 스팀펑크가 초기 산업 기술들을 과장하기 때문에, (거의 유일하게) 스팀펑크는 어떻게 산업이 시작했는지 강조합니다.



심지어 중세펑크(중세 판타지+스팀펑크)는 이것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장르 명칭이 가리키는 것처럼, 중세 판타지는 중세 사회를 모방합니다. 중세 과학자들은 잠수정에 탑승하지 않았고, 심해로 내려가지 않았고, 열수공 생태계를 관찰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초기 산업 시대 과학자들조차 열수공 생태계를 관찰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초기 산업 사회조차 심해 잠수정을 건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사회와 심해 잠수정은 너무 어울리지 않습니다. 두 가지는 너무 어울리지 않으나, 중세펑크는 두 가지를 결합합니다. 대조적인 두 가지가 결합하기 때문에, 이건 상대를 강조합니다.

 

중세펑크는 중세 사회를 강조하거나 초기 산업 기술들을 강조합니다. 근대, 진보, 산업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중세펑크 소설을 읽고 초기 산업 기술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중세 사회와 심해 잠수정이 너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중세펑크는 어떻게 산업 기술들이 시작했는지 강조합니다. 중세 판타지 스팀펑크에게는 이 미덕이 있습니다. 이 미덕 때문에, 중세 판타지 스팀펑크는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중세펑크 던전 탐험에서 드워프 총잡이는 연발 권총을 쏠지 모릅니다. 판금 갑옷보다 연발 권총은 진보한 기술입니다. 진보는 검사(劍士)를 밀어낼지 모릅니다.



인간 전사는 드워프 총잡이를 보고 전통(판금 갑옷)이 사라지고 진보(연발 권총)가 찾아온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중세 스팀펑크에서 산업 기술들이 초기 수준이기 때문에, 비록 연발 권총이 흔한 무기보다 드문 무기라고 해도, 만약 중세펑크 던전 탐험에서 드워프 총잡이가 연발 권총을 쏘고 판금 갑옷을 관통한다면, 인간 전사는 진보가 전통을 밀어낸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모험가 일행이 모닥불을 태우고 쉬는 동안, 그들은 전통과 진보를 논의할지 모릅니다. 드루이드는 심해 잠수정 덕분에 해양 생태학이 발달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진보는 전통 종교에게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19세기 산업 사회에서 진보(진화 이론)와 전통(종교 권력)이 대립했던 것처럼, 중세 판타지 스팀펑크에서 진보와 전통 종교는 대립할지 모릅니다. 만약 모험가 일행이 성직자를 포함한다면, 전사가 진보와 전통을 고민하는 것처럼, 성직자는 진보와 전통을 고민할지 모릅니다. 만약 중세펑크에서 드루이드가 진화 생물학을 연구한다면, 성직자가 이것을 환영하나요? 드루이드(진화 이론)와 성직자(전통 종교)가 갈등하나요? 성직자가 드루이드와 진화 이론을 비난하나요? 마법사는 어떤가요? 마법사가 기술 발달을 환영하나요, 아니면 싫어하나요? 마법과 과학이 어울리나요, 아니면 서로 밀어내나요?



던전 탐험에서 성직자, 전통 종교와 드루이드, 진화 생물학이 대립할지 모르는 것처럼, 스팀펑크는 매력적인 장르입니다. 애니메이션 <발레리나>는 어떤가요? 이 애니메이션은 초기 산업 사회를 과장합니다. 만약 어떤 매체가 초기 산업 사회를 과장한다면, 이건 스팀펑크일 수 있습니다. <발레리나>가 스팀펑크에 속하나요? 만약 <발레리나>가 스팀펑크에 속한다면, 관객들이 어떻게 산업과 진보가 시작했는지 인식할 수 있나요? <발레리나>가 이 미덕을 선사하나요? 관객들이 이것을 느낄 수 있나요? 하지만 애니메이션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주인공 소녀는 기술자보다 발레리나입니다.

 

아무리 남자 주연 등장인물이 기술자(발명가)라고 해도, 아무리 스팀펑크 설정이 주인공 소녀를 돕는다고 해도, <발레리나>에서 스팀펑크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벨 에포크는 그저 병풍 설정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이 애니메이션이 스팀펑크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도, 많은 관객들은 초기 산업 기술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시대 격차보다 발레 대결은 훨씬 커다란 비중, 핵심 비중을 차지합니다. SF 팬들은 <발레리나>가 스팀펑크에 속하지 않는다고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습니다. <발레리나>는 스팀펑크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해석은 주관적입니다.

 

 

비록 <발레리나>가 스팀펑크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해석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떤 관객들은 스팀펑크 미덕을 느낄지 모릅니다. <발레리나>가 초기 산업 기술들을 과장하기 때문에, 스팀펑크 기술이 주인공 소녀를 돕기 때문에, 어떤 관객들은 스팀펑크 미덕을 느낄지 모릅니다. 하드 SF 소설들이 19세기 산업 사회를 과장하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하드 SF 소설들보다 <발레리나>는 근대, 진보, 산업을 훨씬 부각할지 모릅니다. 만약 관객들이 이것을 느낀다면, 이게 오류인가요? <발레리나>가 스팀펑크 미덕을 절대 선사하지 못하나요? 모든 관객이 오직 똑같은 것만 느껴야 하나요?

 

어떤 관객들은 <발레리나>가 스팀펑크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아니면 어떤 관객들은 스팀펑크 미덕을 느낄지 모릅니다. 비록 이 관객들이 그저 소수에 불과하다고 해도, <발레리나> 덕분에, 그들은 산업, 진보가 무엇인지 고민할지 모릅니다. 해석은 주관적입니다. 해석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발레리나>는 스팀펑크 미덕을 선사하거나 선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조 속에서 인간은 해석합니다. <발레리나>가 스팀펑크 미덕을 선사하든, 선사하지 않든, 이미 산업 사회 구조는 존재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보다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이 사회는 산업 사회입니다.



스팀펑크에게 19세기 산업 혁명은 생산 조건입니다. 만약 19세기 산업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스팀펑크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19세기 산업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SF 그 자체는 나타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스팀펑크보다 생산 조건, 산업 혁명은 우선합니다. 스팀펑크에서 산업 혁명은 비롯하지 않았습니다. 산업 혁명에서 스팀펑크는 비롯했습니다. 산업 혁명에서 스팀펑크가 비롯했기 때문에, 이미 산업 사회 구조는 존재하고, 관객들이 무엇을 해석하든, (산업) 구조 속에서 관객들은 해석합니다. <발레리나>보다 산업 사회는 우선하고, 관객 해석보다 산업 사회는 우선합니다.

 

<발레리나>가 스팀펑크 미덕을 선사하든, 선사하지 않든, 두 해석은 대립하나, 두 해석은 생산 조건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 생산 조건 없이, 스팀펑크가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에, 생산 조건은 구조가 되고, 구조 속에서 관객들은 <발레리나>를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 구조는 절대 평화롭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근대, 진보, 산업은 절대 평화롭게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산업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자본주의는 함께 발달했습니다.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무참하게 착취했고 막대한 부를 얻었습니다. 자본가 계급은 엄청나게 부유하나, 이 엄청난 부는 무참한 착취에게 기생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가 계급이 근면 성실하기 때문에 그들이 부유하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허무맹랑한 거짓말입니다. 자본가 계급은 근면 성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절대 한 번도 근면 성실한 적이 없습니다. 비참한 아동 노동자들, 죽어가는 비참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본가 계급이 절대 근면 성실하지 않다고 증명합니다. 무참한 착취에서 부유한 자본주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엄청난 부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뭔가를 계속 착취합니다. 심지어 세계화 자본주의는 지구 생물권조차 착취합니다. 지구 생물권은 오염되고, 행성급 환경 오염은 너무 심각합니다.

만약 현실에서 자연의 여신이 존재한다면, 자연의 여신은 세계화 자본주의를 증오할 겁니다. 자연의 여신은 크게 분노하고 세계화 자본주의를 응징할 겁니다. 현실에서 자연의 여신은 존재하지 않으나, 생태 사회주의는 크게 분노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합니다. <발레리나>가 스팀펑크 미덕을 선사하든, 선사하지 않든, 이미 생산 조건, 구조는 존재합니다. 이 구조가 자리를 잡는 동안, 자본주의는 무참하게 착취했고, 여전히 자본주의는 생물권을 착취합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 범죄자라고 비판합니다. 스팀펑크 생산 조건(산업 혁명)은 기후 변화 범죄자와 함께 나타났습니다.

 

 



<발레리나>가 스팀펑크 미덕을 선사하든, 선사하지 않든, 생산 조건(산업 사회)은 훨씬 우선하고, (산업 사회) 구조 속에서 관객들은 주관적으로 해석하나, 이 생산 조건이 기후 변화 범죄자와 함께 나타났기 때문에, 생태 사회주의가 세계화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때문에, SF 팬들이 스팀펑크를 논의하는 동안, SF 팬들은 세계화 자본주의를 경계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구조 속에서 인간이 해석하기 때문에, 인간은 구조를 인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구조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나요? 인간이 구조를 인식할 때, 이게 객관적인가요? 이게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지 않나요?

해석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심지어 인간이 구조를 인식할 때조차, 인간은 구조를 주관적으로 해석할지 모릅니다. 구조가 객관적인 사실보다 주관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구조 속에서 해석이 나타난다고 파악한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객관적인 사실을 확립하기보다 주관성, 상대성이라는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그저께 7월 8일 게시글은 20세기 후반 남한 사회 구조가 가부장 제도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객관적인 사실인가요? 이게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지 않나요? 생태 사회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주관적인 해석이 아닌가요?



해석은 주관적입니다. 인간은 주관적으로 해석합니다. 해석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생태 사회주의는 객관적인 사실보다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세계화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 원인이라고 비판하나, 이건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오랜 동안, 신화 시대, 종교 시대에서 인류는 살았습니다. 중세펑크 던전 탐험에서 성직자가 기술 진보와 전통 종교를 고민하는 것처럼, 종교는 전통입니다. 중세펑크는 종교가 전통이라고 강조합니다. 오랜 동안, 종교가 전통이었기 때문에, 이건 구조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 구조(종교) 속에서 인간은 해석합니다.

구조(종교) 속에서 인간이 해석하기 때문에, 생태 사회주의는 이것을 피하지 못합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종교적인지 모릅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객관적인 사실보다 종교, 신념인지 모릅니다. 생태 사회주의를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증명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게 너무 어렵다고 해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근대 철학 이론들 중에서 사회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열심히 떠듭니다. 심지어 페미니즘조차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열심히 떠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태 사회주의는 소중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인 사실은 중요한 이유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훨씬 중요한 이유입니다.



※ 사진 <Guadeloupe islands …> 출처: Greg Galas,
https://www.pexels.com/photo/guadeloupe-islands-forest

 

※ 게임 <Allods Online>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459160/Allods_Online/


※ 애니메이션 <발레리나> 스틸샷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2261287/mediaindex?page=1&ref_=ttmi_mi_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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