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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과 <뒤 돌아보며>를 비교한다면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과 <뒤 돌아보며>를 비교한다면

OneTiger 2018. 7. 8. 18:58

찰스 더버가 쓴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제목처럼 마르크스주의 서적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19세기 철학자입니다. 하지만 찰스 더버는 마르크스가 분석한 철학을 21세기 문명에 대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찰스 더버는 기후 변화, 빈익빈 부익부, 침략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아울러 이 책에서 찰스 더버는 카를 마르크스와 현실 사회주의를 분리합니다. 찰스 더버는 블라디미르 레닌 같은 전위 정당 지도자가 마르크스와 관계가 없다고 말해요. 아마 레닌이나 트로츠키, 스탈린 지지자들은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이 좌파 소아병 같은 책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군요.


분명히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럽 사회를 상정했고, 유럽 사회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에게 문의해야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어떻게 러시아 사회주의가 혁명할 수 있는지 대답했으나, 그걸 자세히 연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에 다른 이론을 덧붙여야 했죠.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런 전위 정당 이론이 옳다고 여기고,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게 마르크스 철학과 관계가 없다고 여깁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후자 의견을 지지하는군요.



하지만 그런 내용보다 저는 형식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다른 마르크스주의 서적들과 다소 다릅니다. 제목처럼 이 책은 21세기에 카를 마르크스가 살아있다고 상정합니다. 유령으로서 마르크스는 살아있습니다. 찰스 더버는 마르크스 유령과 만나고, 21세기 자본주의 문명을 이러쿵 저러쿵 떠듭니다. 찰스 더버와 마르크스 유령은 어떻게 공산주의가 모함을 받는지, 마르크스 철학에 무슨 문제점들이 있는지, 왜 21세기 문명이 위기에 빠졌는지, 어떻게 인류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 (왜 전위 정당은 마르크스 철학과 관계가 없는지) 논의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철학 서적이나 사회학 서적이 아니라 소설 같습니다. 찰스 더버와 마르크스 유령이 나누는 대화는 하나의 소설을 구성하고, 소설을 읽는 것처럼 독자는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에서는 저자가 딱딱하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소개하나,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에서 저자 찰스 더버는 직접 마르크스와 만나고 대화합니다. 찰스 더버는 이런저런 상상력을 발휘하고, 그래서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훨씬 부드럽고 쉽습니다.



이런 형식은 고전적인 <유토피아>부터 <뒤 돌아보며>나 <붉은 별> 같은 소설과 비슷합니다. 특히, <뒤 돌아보며> 같은 소설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사실 <유토피아>나 <뒤 돌아보며>는 일반적인 소설보다 사상 서적에 가깝고, 소설은 사상을 쉽게 전달하기 위한 그릇입니다. <뒤 돌아보며>에 소설적인 재미가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소설 주인공 청년과 미래 사회의 아가씨가 서로 알콩달콩 연애하는 장면들은 꽤나 두근거립니다. (미래 사회의 아가씨는 거의 여신이나 천사나 선녀에 가깝군요.) 소설 주인공은 엄청나게 바뀐 미래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 돌아보며>는 SF 소설이 자랑하는 이질적인 경이를 선사해요. <뒤 돌아보며>는 SF 소설이 자랑하는 재미를 놓치지 않았죠.


하지만 이 소설은 분명히 사상 서적이고, 주인공 청년과 사회주의자 의사가 대화하는 장면은 주인공 청년과 미래 아가씨가 연애하는 장면보다 훨씬 중요할 겁니다. 작가가 등장인물들(주인공 청년, 미래 아가씨, 사회주의자 의사)을 제시했기 때문에 독자는 그런 등장인물들을 따라갈 수 있고, 훨씬 쉽게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소설은 철학을 풀어낼 수 있고, 철학을 일상에 접목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그런 방법을 모방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이 <뒤 돌아보며> 같은 소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양쪽은 분명히 달라요. <뒤 돌아보며>를 썼을 때, 에드워드 벨라미는 자신이 소설을 쓴다는 상황을 의식했습니다. 에드워드 벨라미는 여러 등장인물들을 집어넣었고, 갈등 관계나 두근거리는 연애 관계를 그렸어요. 반면,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에는 그런 인간 관계나 일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찰스 더버는 일상적인 장면들을 후딱 넘기고, 마르크스 유령과의 대화에 주력합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이 소설적인 감동을 전달한다고 해도, 이 책은 소설이 아니죠.


중요한 것은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소설과 철학이 무슨 관계를 맺었는지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화나 비디오 게임 같은 영상 매체가 소설처럼 철학을 풀어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소설과 달리, 영화나 비디오 게임은 철학을 일상에 접목하거나 길게 풀어내지 못하겠죠. 영화나 비디오 게임은 추상적인 영역을 풀어내지 못해요. 이런 관점을 SF 소설에 적용한다면, 왜 영화나 비디오 게임보다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에 더 어울리는지 우리는 알 수 있을 겁니다.



※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자본주의에게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유전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끊임없이 경쟁과 확장을 추구하는 체계입니다. 만약 자본가들이 경쟁과 확장을 잠시 멈추고 서로 협력한다면, 자본주의는 무너질 겁니다. 자본주의는 탈성장, 제로 성장이라는 개념을 끔찍하게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환경 오염을 막기 위해 인류 사회에는 탈성장이 필요해요. 무엇보다 강대국들은 성장을 멈춰야 하고, 개발도상국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그건 절대 불가능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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