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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드루이드 그림 해석이 반드시 사변 장르 평론이 되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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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이드 그림 해석이 반드시 사변 장르 평론이 되는가

OneTiger 2019. 10. 7. 20:17

[이 그림은 비비안 초상입니다. 왜 초상 배경이 녹색 계열이고, 왜 머리카락이 (옅은) 붉은 계열인가요?]



위 그림은 비디오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의 등장인물 비비안 가디니어를 보여줍니다. 비비안 가디니어는 환경 보호 세력 테라 살붐의 대표자입니다. 환경 보호 세력 대표자로서 위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녹색 색깔일 겁니다. 비비안은 녹색 복장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완전한 녹색이 아닙니다. 색감은 연두색에 가깝고, 흰색들 역시 연두색과 조화를 이룹니다. 연두색과 흰색들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복장 색깔은 강렬하기보다 안락하고 편안합니다. 어쩌면 이런 색감은 세력 특성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비비안은 전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테라 살붐은 정복 세력이 아닙니다.


테라 살붐은 내정을 추구합니다. 이런 세력 특성과 안락하고 편안한 복장 색깔은 어울립니다. 아니면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릅니다. 위 그림에서 비비안 복장 이외에 배경 역시 녹색입니다. 배경은 훨씬 진한 녹색입니다. 배경은 삼림이나 수풀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비비안 가디니어가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 원하기 때문에, 배경 그림은 녹색 삼림인지 모릅니다. 흔히 우리는 자연이 녹색 삼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에는 여러 환경들이 있으나, 우리는 녹색 삼림을 자연에 연결합니다. 메마른 사막, 뜨거운 용암 지대, 가파른 고산 산맥, 컴컴하고 불길한 심해, 드넓은 평원보다 녹색 삼림은 자연이 됩니다.



왜 다른 무엇보다 녹색 삼림이 자연이 되나요? 왜 녹색이 자연인가요? 녹색 식물 속의 광합성 요소가 영양분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녹색 식물이 광합성을 거치고 영양분을 생산하기 때문에, 전반적인 먹이 그물망은 돌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식물들이 사라지거나 광합성하지 못한다면, 자연 생태계는 크게 무너질 겁니다. 이건 정말 <풀의 죽음>이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녹색 나뭇잎, 녹색 삼림이 자연 생태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구가 삼림 행성보다 바다 행성에 가깝다고 해도, 우리에게 파란 바다보다 녹색 삼림은 자연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래서 비비안 가디니어 역시 녹색(연두색) 복장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배경 그림은 녹색 수풀인지 모릅니다. 그림 상단에 진한 녹색 수풀이 있고, 그림 하단에 연두색 복장이 있기 때문에, 위 그림은 두 가지 녹색 계열을 보여줍니다. 만약 비비안이 진한 녹색 복장을 입었다면, 배경과 복장은 너무 비슷했을 테고, 비비안 복장은 우드랜드 위장복 같았을지 모릅니다. 비비안이 연두색 복장을 입기 때문에, 위 그림은 단조로운 녹색 배열을 피할 수 있습니다. 비비안 머리카락 색깔 역시 두드러집니다. 전반적으로 위 그림은 녹색 계열이나, 비비안 머리카락 색깔은 붉은색에 가깝습니다. 비비안은 완전히 빨강 머리가 아니나, 그렇다고 해도 머리카락은 붉은색에 가깝습니다. 녹색과 빨간색은 대조적입니다.



조선에서 신부가 혼인할 때, 신부는 이른바 녹의홍상(綠衣紅裳)을 입습니다. 여기에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으나, 사람들이 주술적인 의미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녹의홍상이 강렬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녹색 저고리와 빨간 치마는 강렬한 대조를 이룹니다. 수박 역시 비슷한 색감 대조를 보여줍니다. 만약 수박 껍질이 노란색이라면, 붉은 수박 내부는 아주 두드러지지 않을 겁니다. 녹색 껍질과 검은색 줄무늬 덕분에, 붉은색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일상에서 신호등은 녹색/적색 대조를 가장 흔하게 보여줍니다. 신호등은 가장 일상적인 보색 사례입니다. 이것들 이외에 녹색/적색 대조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녹색을 강조하거나 녹색과 다른 색깔을 대조하기 원한다면, 붉은색은 가장 어울리는 색깔일 겁니다. 비비안 가디니어 역시 붉은 계열 머리카락을 보여줍니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붉지 않다고 해도, 머리카락이 주황에 가깝다고 해도, 그림은 어느 정도 붉은 머리카락에 가깝습니다. 적어도 이건 다른 계열 색깔들이 아닙니다. 왜 머리카락 색깔이 붉은 계통, 주황에 가까운가요? 어쩌면 화가는 배경이 녹색이기 때문에 비비안 머리카락이 붉은 계열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화가는 녹색 수풀과 붉은 머리카락을 대조하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건 그저 우연한 결과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녹색과 적색 대조가 강렬하다고 해도, 전문적인 패션 쇼부터 신호등까지, 많은 문화들이 녹색/적색 대조를 이용한다고 해도, 비비안 가디니어 그림 역시 보색 효과를 이용하나요? 테라 살붐이 평화롭다고 강조하기 위해 화가가 옅은 붉은 계통을 칠했나요? 이런 해석이 옳은가요? 우리가 보색 효과를 비비안 그림에 반드시 적용해야 하나요?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화가는 비비안 머리카락을 붉은 계통으로 칠했는지 모릅니다.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녹색/적색 대조가 강렬하다고 해도, 우리는 화가 의도를 단정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화가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왜 비비안 머리카락이 (옅은) 붉은 계통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정말 화가는 (옅은) 녹색과 (옅은) 적색을 대조하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화가 의도를 단정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그림, 산문, 동영상, 조각, 음악, 연기, 기타 등등을 해석할 때, 언제나 이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이 그림을 해석하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화가에게 직접 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왜 화가가 (옅은) 녹색과 (옅은) 적색을 선택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화가를 직접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작가를 직접 만나고, 감독을 직접 만나고, 조각가를 직접 만나고, 작곡가를 직접 만나고, 배우를 직접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 독자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해) 모든 독자가 옥타비아 버틀러를 만나고 개인적으로 물을 수 있나요? 저는 옥타비아 버틀러를 만나고 <야생종> 설정들을 묻고 싶습니다. 저는 왜 옥타비아 버틀러가 어떤 장면을 묘사했고, 어떤 문구를 썼고, 어떤 단어를 선택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해외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옥타비아 버틀러를 만나지 못합니다. 다른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독자들 역시 옥타비아 버틀러를 쉽게 만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소설을 스스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스스로 해석한다고 해도, 독자들에게 해석 권리가 있다고 해도, 독자들은 작가 의도를 인식해야 합니다.


"이게 올바른 해석인가? 작가가 이것을 의도했나? 이게 '부재의 함정'이 아닌가? 내가 기대 심리를 너무 주입하지 않는가?" 독자들은 이런 물음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겁니다. 비비안 가디니어 그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화가는 녹색 수풀 배경과 (옅은) 붉은 머리카락을 대조하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붉지 않다고 해도, 연두색 복장처럼, 이건 전투보다 내정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만약 비비안이 진한 녹색 복장을 입었다면, 비비안 머리카락이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이라면, 전반적으로 비비안은 훨씬 강렬한 인상을 드러냈을 겁니다. 하지만 테라 살붐은 평온한 내정을 중시하고, 강렬한 인상과 평온한 내정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화가는 이런 것들을 의도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화가는 이런 것들을 의도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화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수많은 문화 예술들은 녹색/적색 대조를 사용합니다. 화가가 녹색/적색 대조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분명히 녹색/적색 대조는 인상적입니다. 그래서 비비안 가디니어 그림은 인상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비안 그림이 녹색/적색 대조를 보여주기 때문에, 비비안 그림이 생태 사회주의를 가리킨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테라 살붐은 환경 보호 세력이고, 생태 사회주의와 테라 살붐은 잘 어울립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녹색과 적색 깃발을 휘두릅니다. 가끔 사람들은 생태 사회주의가 수박 색깔이라고 놀립니다. 그래서 비비안 그림이 정말 생태 사회주의, 급진적인 녹색과 적색을 상징하나요?


이건 너무 지나친 해석입니다. 어쩌면 화가는 생태 사회주의를 의도했는지 모르나, 장수 거북이 헤엄치는 생체 솥뚜껑이 아닌 것처럼, 이런 해석은 총체적인 시각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가 환경 보호 세력을 보여준다고 해도, 생태 사회주의는 너무 급진적입니다. 이런 게임은 급진적인 사상과 사회주의 혁명을 옹호하지 않을 겁니다. 생태 사회주의보다 녹색 수풀과 붉은 머리카락 대조에는 훨씬 많은 가능성들이 있습니다. 비단 비비안 그림만 아니라 여러 그림들은 녹색 수풀과 붉은 머리카락을 대조합니다. 이런 드루이드 그림(링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림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배경 색깔은 녹색입니다. 그림 상단에는 무성한 녹색 나뭇잎들이 있고, 그림 하단에는 길다란 녹색 풀들이 있습니다.



그림 상단에는 하늘색이 살짝 있으나, 두드러지는 녹색은 하늘색을 밀어냅니다. 사람들이 그림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작은 하늘색보다 그림 상단과 그림 하단의 녹색 나뭇잎들, 녹색 풀들을 인식할 겁니다. 비비안 그림보다 드루이드 그림은 녹색 (삼림) 배경을 훨씬 강조합니다. 비비안이 녹색 복장을 입은 것처럼, 드루이드 역시 녹색 복장을 입었습니다. 드루이드가 거의 벌거벗었기 때문에, 녹색 복장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드루이드는 녹색 복장을 입었습니다. 사실 많은 드루이드들, 레인저들은 녹색/갈색 복장을 입습니다. 녹색/갈색 복장이 울창한 삼림에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비단 드루이드들과 레인저들만 아니라 그린 드래곤, 포레스트 드래곤, 어스 드래곤 같은 자연 친화적인 드래곤들 역시 비슷한 색깔 구도를 보여줍니다. 그림 속의 드루이드에게는 붉은 머리카락이 있습니다. 비비안 머리카락은 다소 연한 계통이나, 그림 속의 드루이드 머리카락은 아주 빨갛습니다. 전반적으로 드루이드 그림은 진한 색깔을 보여줍니다. 녹색과 붉은색 모두 진합니다. 녹의홍상과 신호등이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처럼, 드루이드 그림은 뚜렷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화가가 이것을 의도했나요? 화가가 녹색 삼림 배경과 붉은 머리카락을 대조하기 원했나요? 아니면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한가요?



[녹색 수풀 배경부터 젊은 여자까지, 비비안 그림과 드루이드 그림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비비안 가디니어가 환경 운동가인 것처럼, 드루이드 역시 자연의 수호자입니다. 비비안 그림과 드루이드 그림은 비슷한 색깔을 보여주고,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비슷하게 자연 환경 보호를 이야기합니다. 비록 드루이드 그림이 자연 환경 보호를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많은 중세 판타지들에서 드루이드가 자연 성직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드루이드 그림과 자연 환경 보호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비록 비비안 가디니어는 드루이드가 아니나, 비비안처럼, 그림 속의 드루이드 역시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 원할 겁니다. 하지만 비비안과 달리, 드루이드는 거의 벌거벗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릴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이 가부장적인 편견을 드러낸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많은 SF 및 판타지 그림들은 착 달라붙는 복장이나 벌거벗은 복장을 강조합니다. 이런 그림들은 성 상품이 됩니다. 여기에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편견들이 있습니다. 위 드루이드 그림 역시 가부장적인 편견에서 비롯했나요? 이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야생 삼림에서 드루이드가 살아가기 때문에, 드루이드는 그저 복장을 대충 걸쳤는지 모릅니다. 거추장스러운 복장이 문명을 상징하고, 드루이드가 야생에 가깝기 때문에, 드루이드는 벌거벗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드루이드 그림이 반드시 가부장적인 편견이라고 단정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벌거벗은 드루이드 그림이 불편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당연한 감정입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가부장 문화이고, 가부장 문화로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온갖 성 상품들을 쏟아내고 강간 문화를 만듭니다. 이런 가부장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벌거벗은 젊은 여자 그림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해도, 이건 잘못된 감정이 아닙니다. 벌거벗은 젊은 여자 그림은 문제가 아닐지 모르나, 가부장 문화는 너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건 주관적인 해석보다 현실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벌거벗은 드루이드 그림을 불편하게 여긴다면,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를 타파해야 할 겁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들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부장 문화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타파해야 할 겁니다. 우리가 그림을 해석할 때, 이렇게 우리는 사회 구조를 의식할 수 있습니다. 비록 드루이드 그림이 가부장 문화를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억압적인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드루이드 그림을 감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흠, 만약 그림 속의 드루이드가 자본주의 사회를 구경한다면, 드루이드 역시 자본주의를 싫어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기후 변화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드루이드에게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혔다면, 드루이드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못할 겁니다.



위 드루이드 그림 이외에 여러 드루이드/레인저 그림들은 녹색 삼림, 녹색/갈색 복장, 붉은 머리카락을 대조합니다. 이것들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색깔 조합들을 비슷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비비안 그림과 드루이드 그림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비안 가디니어는 여자입니다. 그림 속의 (엘프) 드루이드 역시 여자입니다. 왜 비비안이 여자인가요? 에코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것처럼, 여자와 자연이 비슷한 위상이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여자들을 억압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자들은 피지배 계급, 약자, 억압을 받는 위치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는 명분이 있습니다. 여자들에게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뒤집고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명분이 있습니다. 이런 위치에서 여자는 자연 생태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자들처럼, 자연 생태계는 피지배 계급, 약자, 억압을 받는 위치입니다. 여자와 자연이 똑같이 피지배 계급이기 때문에, 여자들은 자연을 대변할 수 있습니다. 자본가 계급은 자연을 말하지 못합니다. 억압을 받는 위치에서 여자들은 자연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비안 가디니어는 여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가요? 화가가 에코 페미니즘을 의식했기 때문에, 비비안이 여자인가요? 아니면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한가요?



만약 화가가 에코 페미니즘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여러 환경 운동 단체들이 에코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시각을 이용해 비비안 그림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비비안 그림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비비안 그림은 존재합니다. 비비안 그림은 창작물이고, 창작물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에코 페미니즘을 이용해 비비안 그림을 바라본다고 해도, 이건 오류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현실을 외면한다면, 이건 오류가 될 겁니다. 비단 비비안 그림만 아니라 사람들이 다른 수많은 창작물들을 해석하는 동안, 사람들은 현실을 이용해 해석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드루이드 그림 역시 에코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나요? 이건 다소 애매합니다. 비비안 가디니어는 환경 운동가이나, 드루이드는 자연 성직자입니다. 테라 살붐은 SF 환경 운동 세력입니다. 많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여자 권리를 중시합니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소설과 샬롯 퍼킨스 길먼 소설은 생태 유토피아와 여자 권리를 이야기했습니다. 반면, 중세 유럽 판타지는 여자 권리에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드 엘프는 중세 유럽 판타지에 속합니다. 자연 성직자로서 드루이드는 중세 유럽 판타지에 속합니다. 전통적으로 중세 유럽 판타지는 에코 페미니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림 속에서 드루이드가 여자라고 해도, 에코 페미니즘은 이유가 아닐 겁니다. 어쩌면 화가는 그저 예쁜 여자를 그리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하이 엘프) 디드리트 이후,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가 대세가 되었기 때문에, 화가는 우드 엘프 드루이드가 여자라고 그렸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화가는 여자가 자연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메마른 사막보다 풍성한 삼림이 '자연'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에게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자연 풍경이 광대하고 웅장하다고 해도, 여기에 풍요로운 생명력이 없다면, 이런 풍경은 진정한 '자연'이 되지 못합니다. '자연'은 생명 현상입니다. '자연'은 수많은 생명체들을 낳고 먹이고 돌봅니다.


여자 역시 생명체를 낳고 먹이고 돌봅니다. 여자가 아기를 배고 엄마가 된 이후, 여자의 몸은 아기를 먹입니다. 여자는 비단 자신만 아니라 아기를 먹여야 합니다. 아기가 태어난 이후, 포유류 엄마들은 아기들에게 젖을 먹입니다. 포유류 엄마들은 자신의 몸으로 아기를 먹일 수 있습니다. 엄마들은 비단 자신들의 아기들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포유류는 포유류(Mammalia)입니다. 아빠보다 엄마는 학명 포유류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학명 포유류를 느끼고 싶다면, 엄마 다람쥐부터 엄마 향유 고래까지,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 엄마들을 바라봐야 할 겁니다. 그래서 어떤 문화들은 어머니 자연, 자연의 여신을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이건 오직 여자들만 육아를 맡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은 여자의 몸(임신, 출산, 수유)과 육아를 곧장 연결하나, 이런 연결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오직 여자들만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들과 육아 사이에는 필수적인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남자들 역시 육아에 얼마든지 참가할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육아를 비롯해 돌봄 노동들이 사회화할 때, 사람들은 억압과 차별을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비록 그림 속의 드루이드가 가부장적인 편견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가부장 문화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문제를 의식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드루이드는 자연의 여신을 섬기는지 모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는 여러 자연의 여신들이 있습니다. 마이리키는 대표적인 자연의 여신입니다. 마이리키는 드루이드, 삼림 레인저, 야생 동물들을 축복합니다. 어쩌면 그림 속의 드루이드 역시 자연의 여신을 섬기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화가는 엘프 드루이드가 여자라고 그렸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여자가 자연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에, 엘프 드루이드는 여자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화가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단정하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화가조차 왜 자신이 드루이드를 여자로 그렸는지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화가는 '저도 모르게' 여자 드루이드를 그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림 속의 엘프 드루이드가 자연의 여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많은 중세 판타지들에서 드루이드들이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기 때문에, 드루이드 그림을 해석하기 위해 판타지 팬들은 다른 드루이드 설정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드루이드 그림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드루이드 그림은 다른 수많은 드루이드 설정들에 속합니다. 그리고 드루이드 설정들은 현실에 속합니다. 그래서 판타지 팬들이 드루이드 설정을 파악할 때, 판타지 팬들은 현실을 이용해 설정을 해석해야 할 겁니다. 17세기 화가는 이런 드루이드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판타지 팬들은 '어떻게 현실 속에서 여러 조건들이 드루이드 설정을 만들기 시작했는지' 파악해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 드루이드와 에코 페미니즘 해석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 게시글에서 저는 비비안 가디니어 그림과 드루이드 그림을 떠들었습니다. 비비안 가디니어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속합니다. 드루이드는 중세 유럽 판타지에 속합니다. 평론가가 비비안 가디니어를 이야기하고 드루이드를 이야기한다면, 이건 스페이스 오페라 평론과 중세 유럽 판타지 평론이 되어야 할 겁니다. 비비안이 SF 등장인물이기 때문에, 평론가가 비비안을 이야기한다면, 이건 SF 평론이 되어야 할 겁니다. 이 게시글이 비비안을 계속 떠들기 때문에, 이 게시글은 SF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이 게시글이 SF 평론이나 SF 감상, SF 이야기에 속하나요?



[두 스페이스 오페라는 게임과 소설입니다. 이것을 분류하기 위해 SF 평론가는 유사성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 게시글에서 제가 비비안 그림을 떠드는 동안, 저는 SF 설정을 별로 떠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녹색과 적색 대조, 자연 상징으로서 녹색 나뭇잎, 모범적인 독자와 작가 의도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이것들은 비평 이론, 미학 이론이 될지 모르나, 이것들은 'SF' 비평 이론, 'SF' 미학 이론이 아닙니다. 녹색과 적색 대조, 자연 상징으로서 녹색 나뭇잎, 모범적인 독자와 작가 의도 관계에는 SF 이야기가 없습니다. 일반적인 미학자들 역시 이것들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미학자가 어떻게 녹색 나뭇잎이 자연을 상징하는지 설명한다고 해도, 이건 SF 미학 이론이 아닙니다. 드루이드 그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드루이드 그림을 떠드는 동안, 저는 중세 판타지 설정을 별로 떠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에코 페미니즘을 여자 엘프 드루이드에게 적용하기 전까지, 저는 중세 판타지 설정을 많이 떠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에코 페미니즘을 여자 엘프 드루이드에게 적용했을 때, 마침내 저는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판타지 설정을 훨씬 본격적으로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하루 종일 제가 비비안 가디니어와 드루이드를 떠든다고 해도, 이건 SF 감상, 판타지 감상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들을 떠든다고 해도, 이건 필연적으로 사이언스 픽션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비안이 입은 연두색 복장은 녹색 자연을 상징해!" 이런 해석에는 가치가 있으나, 이런 해석은 좀 더 넓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왜 내가 비비안 복장이 자연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지?" 이런 물음은 설정을 좀 더 넓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현실 속에서 여러 조건들이 자연 상징으로서 녹색을 만들지?" 이런 물음은 설정을 훨씬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드루이드 그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화가는 녹색 삼림 배경과 드루이드의 붉은 머리카락을 대조하기 원해!" 이런 해석은 좀 더 넓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왜 내가 녹색 삼림 배경과 드루이드의 붉은 머리카락이 대조적이라고 생각하지?" 이런 물음은 설정을 좀 더 넓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현실 속에서 여러 조건들이 보색 효과로서 녹색과 적색을 이용하지?" 이런 물음은 설정을 훨씬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게시글은 창작물을 해석하기 위해 사람들이 셋째 물음(어떻게 현실 속에서 여러 조건들이 비유, 상징, 기호를 만드는가?)을 선택해야 한다고 권유합니다. 하지만 이런 권유가 'SF' 평론, 'SF' 감상이 될 수 있나요? 이런 권유가 '판타지' 평론, '판타지' 감상이 될 수 있나요? 아니, 여기에는 'SF', '판타지'가 없습니다. 비록 이 문단이 스페이스 오페라 등장인물(비비안 가디니어)과 중세 판타지 등장인물(엘프 드루이드)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셋째 물음은 SF 비평 이론이 아니고 판타지 비평 이론이 아닙니다.



자, 이런 평론을 볼까요.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는 자신이 등장인물들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다른 소설 구성 요소들이 매력을 잃는다고 해도,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명맥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을 구성하기 위한 요소들은 사건, 등장인물, 배경이나, 여기에서 등장인물은 가장 중요할지 모른다. 독자는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들을 원한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사회적인 존재로서 독자는 사회적인 관계를 원할지 모른다. 등장인물들은 (가상의) 사회 관계들을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가 소설을 구상하는 동안, 등장인물은 핵심 사항이 되어야 한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는 SF 작가입니다. 그래서 이 평론이 SF 평론이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평론에는 SF 설정이 없습니다. 주류 문학 평론가 역시 매력적인 등장인물, 소설 구성 요소, 소설 창작 이론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만약 평론가가 "흔히 사이언스 픽션은 배경을 중시하나,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소설들처럼, 어떤 SF 소설들은 배경보다 등장인물에 치중한다."라고 쓴다면, 이건 SF 평론이 될 겁니다. 이 평론이 SF 설정(흔히 사이언스 픽션은 배경을 중시한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가 SF '소설 작가'라고 해도, 평론가가 오직 소설이라는 매체에만 주목한다면, 이건 SF 평론이 되지 못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매체들 중에서 오직 소설만 진정한 SF 매체라고 주장합니다. 분명히 여러 매체들 중에서 소설은 가장 중요한 매체입니다. 소설을 비롯해 산문, 글자 매체가 시대적인 격차를 바라보기 위한 사상과 철학, 이론, 세계관을 가장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설이 가장 중요한 매체라고 해도, 평론가가 SF '소설'에 주목한다면, 위 문단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건 SF 평론이 되지 못할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는 우주 드래곤(!)이 있다. 우주 구축함들은 우주 드래곤과 싸워야 한다. 이런 사례는 '우주가 또 다른 바다'라고 증명한다." 이건 SF 평론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평론이 우주 드래곤이라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는 소설 작가이나, 하루 종일 평론가가 로이스 부졸드를 설명한다고 해도, 이건 SF 평론이 아닐지 모릅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비디오 게임이나, 평론가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대충 떠든다고 해도, 이건 SF 평론이 될지 모릅니다. 이건 SF 평론가가 매체와 형식을 외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식 없이, SF 개념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사이언스 픽션을 다룰 때, SF 개념은 형식에 기반해야 합니다. SF 평론가는 어떻게 내용이 형식에 기반하고 사이언스 픽션이 되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일즈의 전쟁>에 사이언스 픽션 이외에 다른 측면들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평론가가 <마일즈의 전쟁>을 떠든다고 해도, 이게 SF 평론이 되지 않는다면, SF 평론가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요?



SF 평론가는 SF 비평 이론을 제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에 여러 측면들이 있기 때문에, SF 평론가는 SF 그 자체를 설명하기보다 사이언스 픽션을 분류하기 위한 기준들을 제시해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분류하기 위해 SF 평론가는 유사성들을 묶고 차이들을 지적해야 합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유사성들을 묶고 차이들을 지적해야 한다면, 16번째 문단이 말하는 것처럼, 근본적인 시각을 위해 SF 평론가는 "어떻게 현실 속에서 여러 조건들이 유사성들을 만드는가?"라고 물어야 할 겁니다.



※ 그림 <Druid> 출처: Najescha, http://fav.me/d2iz2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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