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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계절>에서 유사성들과 생산 조건들

OneTiger 2019. 9. 27. 21:21

※ 이 게시글에는 노라 제미신이 쓴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Make me a prince. (왕자를 만들어줘.)" 영화 <알라딘>에서 이렇게 알라딘은 소원을 말합니다. 알라딘이 쟈스민에게 콩깍지가 씌었기 때문에, 알라딘은 왕자가 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지니는 소원이 두루뭉실하다고 경고합니다. "왕자를 만들어줘." 이 간단한 문구는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만약 지니가 마법을 부리고 허공에서 번쩍 왕자를 만든다면, 이건 소원 성취가 됩니다. 만약 지니가 <인어 공주>에서 에릭 왕자를 꺼내오고 알라딘에게 보여준다면, 이건 소원 성취가 됩니다. 지니는 에릭 왕자를 만들었습니다. 아니면 지니는 알라딘을 애물단지 왕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겨울 왕국>에서 한스 웨스터가드 왕자는 형제들이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한다고 하소연합니다. 이런 애물단지 왕자 역시 왕자입니다. 하지만 알라딘은 한스 웨스터가드 같은 애물단지 왕자를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알라딘은 왕자를 말했으나, 알라딘은 '무슨 종류의' 왕자인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니는 알라딘을 타잔으로 만들고 알라딘이 밀림의 왕자가 되었다고 우기거나, 알라딘을 로빈 후드로 만들고 알라딘이 도적들의 왕자가 되었다고 우기거나, 알라딘을 개구리로 만들고 알라딘이 개구리 왕자가 되었다고 우길 수 있습니다. 에릭과 한스와 타잔과 로빈 후드와 개구리 왕자는 '왕자'입니다.



아니면 지니는 알라딘을 심바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심바는 왕자입니다. 알라딘이 아프리카 사자가 되어야 하나요? 심지어 지니는 다른 스튜디오로 넘어가고 알라딘을 몰락 왕자 참나무방패 소린으로 만들지 모릅니다. 참나무방패 소린에게는 왕국이 없고, 백성들이 없고, 무엇보다 아르켄스톤이 없으나, 그렇다고 해도 소린은 왕자입니다. 알라딘이 드워프가 되고 아르켄스톤을 찾기 위해 화염 드래곤 동굴로 떠나야 하나요? 이렇게 "Make me a prince."는 수많은 해석들을 낳습니다. 만약 지니가 오직 이 문장에만 주목한다면, 지니는 수많은 왜곡들을 늘어놓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텍스트를 해석할 때, 우리는 오직 텍스트 그 자체에만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왜 알라딘이 왕자가 되기 원하나요? 알라딘은 쟈스민에게 콩깍지가 씌었습니다. 소원보다 콩깍지는 '먼저' 존재합니다. 콩깍지 때문에, 알라딘은 소원을 빕니다. 콩깍지는 소원("Make me a prince.")을 만듭니다. 콩깍지는 선천적인 것이고, 소원은 후천적인 것입니다. 소원에게 콩깍지는 '생산 조건'이 됩니다. 지니가 이런 맥락(생산 조건으로서 콩깍지)을 파악하지 않는다면, 지니는 소원을 왜곡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텍스트를 해석할 때, 우리는 '어떻게 텍스트가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20세기 초반에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은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혁명을 배신하고 제국주의 전쟁에 들러붙는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은 혁명이 1차 세계 대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회 민주당은 이런 혁명가들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래서 혁명가들은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만듭니다. 여기에서 '스파르타쿠스'는 고대 로마 검투사를 가리킵니다. 왜 사회주의 혁명 단체가 고대 로마 검투사 이름을 빌리나요? 스파르타쿠스가 공산주의자였나요? 고대 로마에 공산주의가 있었나요?


휘날리는 붉은 깃발과 함께 원형 경기장 노예들이 제국주의를 때려잡자고 외쳤나요? 그건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 후반 사상입니다. 고대 로마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없었습니다. 고대 로마에 마르크스주의가 없었음에도, 왜 혁명가들이 마르크스주의 단체 이름을 스파르타쿠스라고 지었나요? 이건 비유에 가깝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노예 봉기를 시도했습니다. 노예 봉기는 계급 투쟁에 속합니다. 사회주의 혁명 역시 계급 투쟁에 속합니다. 양쪽 모두 똑같이 계급 투쟁입니다. 그래서 계급 투쟁을 강렬하게 상징하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스파르타쿠스 이름을 빌렸습니다.



"우와, 클라라 체트킨이 스파르타쿠스 동맹 소속이야? 시오노 나나미처럼, 클라라 체트킨은 고대 로마를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클라라 체트킨은 스파르타쿠스 동맹에 들어갔을 거야!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이 '고대 로마' 검투사를 가리키기 때문에,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고대 로마' 연구 단체일 거야!" 만약 이렇게 역사학자들이 해석한다면, 이건 오류가 될 겁니다. 클라라 체트킨이 스파르타쿠스 동맹 소속이라고 해도, 이건 클라라 체트킨이 고대 로마 제국 빠순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노예 봉기 상황에서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은 억압을 받는 사람들을 상징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억압을 받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그래서 스파르타쿠스 봉기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이런 공통점을 이용하기 원했을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고대 로마'보다 '노예 봉기'입니다. 만약 역사학자들이 노예 봉기보다 고대 로마를 훨씬 중시한다면, 그들은 클라라 체트킨을 잘못 판단할 겁니다. 역사학자들은 클라라 체트킨이 고대 로마 빠순이라고 왜곡할 겁니다. 다행히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클라라 체트킨이 열정적인 사회주의 혁명가라고 인정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스파르타쿠스 동맹이 고대 로마 동호회라고 오해하지 않습니다.



노예 봉기와 사회주의 혁명 사이에서 역사학자들은 유사성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건 쉬운 해석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해석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들에서 유사성들은 인정을 받거나 비판을 받을지 모릅니다. TV 드라마 <상속자들>에는 서민 여자 주인공과 부유층 고등학생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서민 여자와 부유한 남자들. 연애와 사랑과 결혼. 계급 대비와 신분 상승. 이런 요소들은 신데렐라 컴플렉스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TV 드라마 <상속자들>은 신데렐라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데렐라 이야기가 보조적인 존재로서 여자를 묘사한다고 비판합니다.


어떤 시청자들은 TV 드라마 <상속자들> 속의 서민 여자 차은상과 부유한 남자 김탄이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배우 이민호가 훈훈한 미모를 흩날리고 "나 너 좋아하냐?"라고 묻는다고 해도, <상속자들>은 여자를 비하한다고 비판을 받습니다. 반면, 다른 시청자들은 <상속자들>이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고 반박할 겁니다. 이런 시청자들은 아무리 여자가 서민이고 남자가 부자라고 해도 오직 이것만 신데렐라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고 반박할 겁니다. 신데렐라 이야기에는 훨씬 근본적인 구성 요소들이 있고, 그래서 <상속자들>과 신데렐라 이야기는 닮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옳은가요? TV 드라마 <상속자들>이 신데렐라 이야기와 비슷한가요? 아니면 유사성이 그저 포장지에 불과하고, 알맹이가 완전히 딴판인가요? 포장지가 비슷하다고 해도, 알맹이가 다르다면, 포장지는 그저 들러리에 불과할 겁니다. 비록 <상속자들>이 신데렐라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해도, 어떤 시청자들은 신데렐라 이야기 유형에 여러 종류들이 있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신데렐라 이야기 유형에는 훨씬 개혁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들과 보수적이고 고루한 신데렐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상속자들>은 훨씬 개혁적인 종류이거나 훨씬 고루한 종류인지 모릅니다.


어떤 시청자들은 차은상이 신데렐라 유형에 속한다고 해도 개혁적인 신데렐라와 고루한 신데렐라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유사성들과 차이들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클라라 체트킨은 고대 로마 연구 동호인이 아니었고, 이런 해석은 쉬우나, <상속자들>과 신데렐라 이야기는 다소 어렵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상속자들>이 신데렐라 이야기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훨씬 개혁적인 종류거나 훨씬 고루한 종류라고 주장할 겁니다. 이런 다양한 의견들에 다양한 논리적인 근거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시청자들은 이런 논의 그 자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TV 드라마 <상속자들>이 신데렐라 이야기와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다고 해도, 이런 논의에 정답과 결론이 없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결론을 내리기보다 논의 그 자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논의는 고정된 결론보다 지속적인 흐름입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논의 그 자체를 인정한다고 해도, 시청자들은 '어떻게 <상속자들>이 나타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상속자들>에는 서민 여자와 부유한 남자가 있습니다. 현실 속에도 가난한 밑바닥 계급과 부유한 자본가들이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가부장 문화는 여자가 남자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가부장 문화는 아주 지배적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남한 사회를 지배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속에서 <상속자들>은 나타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속에서 시청자들은 <상속자들>을 봅니다. 시청자들은 현실 속의 자본주의를 이용해 <상속자들> 속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입니다. 이건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고 개인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TV 드라마 <상속자들>에게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생산 조건이 됩니다. 생산 조건 없이, 창작물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폭력적인 착취 경제라는 사실입니다. 잉여 노동 시간이 이윤을 만들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반드시 피지배 계급을 착취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노예 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에는 다른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기후 변화는 가장 심각한 문제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자본주의는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지질학적인 단위에서 자본주의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이런 착취와 환경 오염 없이,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없이, <상속자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자본가 지배 계급이 서민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길들이기 때문에, <상속자들>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상속자들>은 비롯합니다. 결국 착취와 환경 오염에서 <상속자들>은 비롯합니다.


착취와 환경 오염에서 <상속자들>이 나타남에도, <상속자들>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아무 비판 없이, <상속자들>은 현실 속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모방하고 묘사합니다. <상속자들>이 신데렐라 이야기와 닮거나 닮지 않았다고 해도, 이건 그저 주관적인 의견에 불과합니다. <상속자들>이 신데렐라 이야기와 닮거나 닮지 않았다고 해도, 심지어 이건 부차적인 문제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주관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소리를 빽빽 지르며 자본주의를 찬양하나,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피지배 계급을 착취하고 자연 생태계를 파괴합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시청자들이 <상속자들>을 좋아한다면, 그들은 <상속자들>이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고 부정할 겁니다. 하지만 <상속자들>이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고 시청자들이 부정한다고 해도, 시청자들은 <상속자들>에게 착취와 성 차별과 환경 오염이 생산 조건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창작물을 평가할 때, 우리는 현실 속의 생산 조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창작물이 뚝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 속의 생산 조건을 파악해야 합니다. <상속자들>은 로맨스 장르에 속하나, 다른 장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독자들은 <다섯 번째 계절>이 오직 초인 이야기에만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하지만 다른 초인 이야기들과 달리, <다섯 번째 계절>은 '행성'을 계속 언급합니다. 이 소설은 행성을 의인화(아버지 대지)합니다. 고대 신화들이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의인화(어머니 자연)하는 것처럼, <다섯 번째 계절>은 환경, 행성을 의인화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 환경, 행성은 아주 핵심적인 소재입니다. 환경 변화, 행성 변화는 아주 필수적인 소재입니다. 다른 초인 이야기들은 행성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마블 스튜디오 덕분에, 관객들은 온갖 초인 영웅 영화들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초인 영웅 영화들이 환경 변화, 행성 변화에 주목하나요? 얼마나 많은 초인 영웅 영화들이 자연 환경과 행성을 의인화하나요? <다섯 번째 계절>에서 과학 기술 발달, 산업 동력원, 행성 변화는 핵심 설정입니다. 독자들이 '부서진 대지 3부작'을 평가할 때, 이런 소재들은 빠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이 행성급 환경 오염과 무분별한 산업 동력원을 언급하나요?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행성을 의인화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일반적인 초인 이야기들보다 행성 변화 이야기들과 <다섯 번째 계절>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다섯 번째 계절>은 초인 이야기에 속하나, 동시에 이 소설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이야기합니다.


독자들이 <다섯 번째 계절>을 비롯해 부서진 대지 3부작과 <붉은 화성> 3부작을 비교한다고 해도, 이건 무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행성 환경을 바꿔야 하나요? 산업 발전을 위해 우리가 정말 행성 환경을 바꿀 수 있나요? 경제적으로, 윤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이게 가능하거나 이게 옳은가요? 부서진 대지 3부작과 <붉은 화성> 3부작은 비슷하게 이런 주제들을 논의합니다. 작가 후기에서 노라 제미신은 천문학 연구에서 자신이 영감을 받았다고 밝힙니다. 화성 테라포밍을 이야기하기 위해 킴 스탠리 로빈슨 역시 천문학 연구를 참고합니다. 부서진 대지 3부작과 <붉은 화성> 3부작이 행성 변화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에, 두 시리즈는 똑같이 천문학을 참고합니다.



천문학 없이, 두 시리즈는 없습니다. 천문학은 생산 조건이 됩니다. 특히, 두 시리즈는 천문학 분야들 중에서 행성 환경 변화에 주목합니다. 서구 계몽주의 작가들은 이런 소설을 쓰지 못합니다. 아무리 그들이 천문학을 연구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어떻게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어떻게 산업 동력원이 문명을 뒷받침하고, 어떻게 산업 문명이 행성 환경을 바꾸는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20세기 산업 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파악할 수 있으나, 서구 계몽주의 작가들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서구 계몽주의 작가들에게 '산업'은 생소한 단어입니다. 그들은 대규모 공장 단지를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산업 자본주의가 대기권에 온실 가스를 펑펑 뿜는다고 측정하지 못했습니다. 서구 문명이 산업 자본주의를 주도했다고 해도, 서구 계몽주의는 대규모 산업 자본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서구 계몽주의 작가들은 화석 연료, 행성 생태학, 환경 오염을 알지 못했으나, 부서진 대지 3부작은 이런 것들을 활용해 장대한 서사시를 펼칩니다. 만약 어떤 소설, 만화, 영화, 게임이 화석 연료, 행성 생태학, 환경 오염을 이용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친다면, 이런 창작물과 부서진 대지 3부작은 많이 비슷할 겁니다. 비록 이런 창작물이 초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이런 이야기와 부서진 대지 3부작은 똑같은 재료를 이용합니다.



소설 <붉은 화성> 3부작 역시 산업 동력원, 행성 환경 변화, 생태학을 이용합니다. 행성 변화 이야기로서 부서진 대지 3부작과 <붉은 화성> 3부작에게 과학 기술 발달, 대규모 산업 경제, 산업 동력원, 환경 오염, 지질학적인 재앙은 비슷한 재료들입니다. 물론 어떤 독자들은 이런 비교에 반박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런 비교가 오류와 착각이라고 반박할 겁니다. 클라라 체트킨이 고대 로마 빠순이였다고 역사학자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어떤 독자들은 부서진 대지 3부작과 <붉은 화성> 3부작에게 유사성들이 없다고 반박할 겁니다. 부서진 대지 3부작과 <붉은 화성> 3부작이 비슷한 재료들을 이용하는 것 같다고 해도, 이건 착각인지 모릅니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이 고대 로마 동호회가 아닌 것처럼, <상속자들>과 신데렐라 이야기가 닮지 않은 것처럼, 부서진 대지 3부작과 <붉은 화성> 3부작은 비슷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떤 독자들은 주장할지 모릅니다. 이런 독자들은 옳습니다. 분명히 <붉은 화성>에서 개척 생태학자 히로코는 신비로운 기운을 끌어모으지 못하고 바이오 돔 속의 농작물들을 조종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서구 개척 과학자들이 히로코에게 오리엔탈리즘을 뒤집어 씌운다고 해도, 히로코는 신비로운 초인이 아닙니다. 시에나이트와 달리, 히로코는 씨앗 하나 까딱하지 못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스팀펑크 판타지이고, <붉은 화성>은 우주 탐사물입니다. 분명히 <다섯 번째 계절>과 <붉은 화성>은 비슷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서진 대지 3부작과 <붉은 화성> 3부작에게 과학 기술 발달, 대규모 산업 경제, 산업 동력원, 환경 오염, 지질학적인 재앙은 핵심적인 생산 조건입니다. 계몽주의 작가들은 마법사를 이야기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마법사와 과학 기술 발달, 대규모 산업 경제, 산업 동력원, 환경 오염, 지질학적인 재앙을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대규모 산업 경제가 행성 환경을 비극적으로 오염시킨다고 쓰지 못했습니다. 장 자크 루소가 이런 이야기를 썼다고 해도, 장 자크 루소는 대규모 산업 경제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리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 부인이 장 자크 루소를 후원했다고 해도, 루이즈 드 바랑 역시 장 자크 루소가 대규모 산업 경제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쓸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루이즈 드 바랑이 대규모 산업 경제를 구체적으로 구경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루이즈 드 바랑과 달리, 노라 제미신은 쓸 수 있습니다. 루이즈 드 바랑은 NASA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 NASA 강연에 노라 제미신은 참석할 수 있습니다. 노라 제미신은 <다섯 번째 계절>이 천문학을 곡해할지 모른다고 걱정하나, 그렇다고 해도 <다섯 번째 계절>에게 천문학(을 비롯해 지질학과 각종 자연 과학들)은 생산 조건이 됩니다. <붉은 화성> 3부작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부서진 대지 3부작과 <붉은 화성> 3부작은 비슷합니다. 아무리 SF 독자들이 두 시리즈 사이를 갈라놓기 원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런 유사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건 주관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독자들은 현실을 이용해 소설들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는 또 다른 유사성이 있습니다. 오로진 시에나이트와 알라배스터는 어떤 섬마을에 들립니다. 섬마을에서 육아를 비롯해 돌봄 노동들은 사회화되었습니다. 섬마을에는 돌봄 노동 사회화가 있습니다. 엄마들은 아기들에게 골고루 젖을 먹입니다. 남자들 역시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가합니다. 섬마을에서 생물적인 엄마와 아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섬마을 아기에게 모든 엄마는 모두 유모가 되고, 모든 성인은 모두 아기 보호자가 됩니다. 그래서 섬마을에는 아주 개방적인 섹스 문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육아를 맡기 때문에, 섬마을에서 남자들은 여자들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돌봄 노동 사회화 덕분에, 자유 연애, 프리 섹스는 가능합니다. 문제는 가부장 문화에서 돌봄 노동 사회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 남자들이 전쟁과 대규모 산업과 탐험에 치중한다면, 어떻게 여자들과 남자들이 함께 돌봄 노동을 맡을 수 있나요? 자본주의 역시 가부장 문화이고, 자본주의 속에서 돌봄 노동 사회화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 노동력이 상품이라고 간주합니다. 상품은 개인적인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상품이 사회화가 되는 순간, 상품은 이윤을 창출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돌봄 노동 사회화는 공존하지 못합니다. 두 가지 중에서 하나는 작살이 나야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러시아 소비에트를 공격하기 원했습니다.



러시아 소비에트가 공공 육아를 모색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러시아 소비에트를 짓밟기 원했습니다. 러시아 소비에트는 침략들과 반동적인 쿠데타들을 막아야 했고, 이런 혼란들 속에서 러시아 소비에트는 돌봄 노동 사회화를 실천하지 못합니다. 러시아 소비에트가 보여주는 것처럼, 돌봄 노동 사회화는 사회주의 정책입니다. 노동 '사회화'는 '사회'주의 정책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 '사회화'를 짓밟기 원합니다. 하지만 <다섯 번째 계절>은 돌봄 노동 사회화를 응원하는 것 같습니다. 섬마을에서 알라배스터는 평온을 찾고, 시에나이트는 섹스 욕구를 해방합니다. 섬마을은 평온한 사회, 프리 섹스 사회입니다.


주연 오로진 시에나이트와 알라배스터가 섬마을을 긍정하기 때문에, <다섯 번째 계절>은 섬마을을 긍정하는 것 같습니다. 돌봄 노동들이 '사회화'하기 때문에, 섬마을은 '사회'주의 공동체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라 제미신은 살아갑니다. 노라 제미신이 사회주의 공동체를 지지하나요?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이 사회주의 공동체를 지지하나요? 어쩌면 노라 제미신은 사회주의를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노라 제미신은 악랄한 빨갱이 계집년 클라라 체트킨을 극심하게 혐오하는지 모릅니다. 노라 제미신은 <다섯 번째 계절>이 빌어먹을 빨갱이 사상을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현실 속의 생산 조건입니다. 노라 제미신이 염병할 빨갱이 사상을 혐오한다고 해도, 이미 현실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권은 성 해방, 프리 섹스, 돌봄 노동 사회화를 꾸준하게 논의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다섯 번째 계절>은 나타납니다. 17세기 서구 문명에서 프리 섹스는 대중적인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열정적으로 비판했고, 무수한 운동권들이 격렬하게 투쟁했고, 수많은 사회적인 실험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돌봄 노동 사회화는 대중적인 주제가 되었습니다. 만약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이 없었다면, 돌봄 노동 사회화는 대중적인 주제가 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노라 제미신은 이런 현실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잠깐, 뭐라고? 남한에서 OneTiger라는 빨갱이 씨발년이 내 소설을 좋아한다고? 어떻게 고작 악랄한 빨갱이 따위가 <다섯 번째 계절>을 감히 좋아할 수 있지? 남한에서 자유한국당은 정권을 잡고 악랄한 빨갱이를 인천 앞바다에 처박아야 해! 자유한국당이여, 영원하라!" 이렇게 노라 제미신이 주장한다고 해도, 노라 제미신은 현실이라는 생산 조건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노라 제미신이 트럼프 정부가 모든 빨갱이 계집년을 마리아나 해구에 처박기 원한다고 해도, 노라 제미신은 생산 조건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비단 <다섯 번째 계절>만 아니라 <상흔>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차이나 미에빌이 쓴 <상흔>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소설 <상흔>과 <다섯 번째 계절>은 모두 스팀펑크 판타지에 속합니다. 두 소설은 모두 환경 변화를 중시합니다. 두 소설에서 해적 사회는 자유분방한 해방 공간입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 해방 사회 섬마을은 해적 마을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해적이고, 그들은 해적질로 먹고 삽니다. 프리 섹스 사회는 해적 마을입니다. <상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흔>에서 해상 선단 도시 아르마다는 천민들과 난민들을 받아줍니다. 아르마다에서 리메이드 여자는 성 노예보다 당당한 시민이 됩니다. 아르마다에서 인간과 리메이드는 연인이 되고 섹스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르마다에도 프리 섹스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회주의 사상이 해방의 철학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상이 억압을 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파리 코뮌, 러시아 소비에트, 중국 인민 공사와 아르마다 사이에는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모두 밑바닥 계급 해방을 외칩니다. 하지만 차이나 미에빌은 이런 해석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이 고대 로마 동호회가 아닌 것처럼, 아르마다는 러시아 소비에트가 아닙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파리 코뮌과 아르마다가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파리 코뮌은 악랄한 빨갱이 소굴입니다. 파리 코뮌에서 빨갱이 씨발년들은 "코뮌 만세! 혁명 만세!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노라 제미신이 빨갱이 씨발년들을 싫어하는 것처럼, 차이나 미에빌 역시 코뮌 계집년들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프랑스 군대가 코뮌 여자들과 아이들을 학살했다고 해도, 차이나 미에빌은 코뮌 계집년들이 잘 죽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누가 압니까? 누가 차이나 미에빌의 속내를 단언할 수 있습니까? 차이나 미에빌이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차이나 미에빌은 파리 코뮌을 극심하게 혐오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차이나 미에빌이 파리 코뮌과 아르마다 사이를 부정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다섯 번째 계절>보다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이 우선하는 것처럼, 아르마다보다 파리 코뮌은 우선합니다.


파리 코뮌이 무산자 민중 혁명을 외치는 동안, 소설 <상흔>과 선단 도시 아르마다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코뮌이 붉은 깃발을 흔드는 동안, 아직 차이나 미에빌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선단 도시 아르마다를 쓰기 전에, 이미 파리 코뮌은 혼란스러운 해방 사회를 실천했습니다. 지배 계급 군대는 혼란스러운 해방 공간을 학살했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이런 현실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차이나 미에빌이 "붉은 깃발은 확 찢어져야 제맛이지!"라고 '붉확찢'을 주장한다고 해도, 차이나 미에빌은 현실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차이나 미에빌은 <상흔>을 썼습니다.


<상흔>은 "어휴, 파리 코뮌은 극혐이야. 빨갱이들은 존나게 재수없어."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해방 사회로서 아르마다에게 파리 코뮌은 '선배'입니다. 아르마다보다 파리 코뮌은 '먼저' 존재했습니다. 파리 코뮌은 혁명 분위기를 퍼뜨렸고, 민중 혁명은 대중적인 소재가 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차이나 미에빌은 <상흔>을 썼습니다. 이건 선천적인 것이 후천적인 것에게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천적인 것이 후천적인 것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이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파리 코뮌을 비롯해 무산자 민중 혁명들이 없었다면, 민중 혁명이 대중적인 소재가 되었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아르마다는 해적 도시입니다. 아르마다는 잔인한 폭력들을 휘두릅니다. 아무리 해상 선단 도시가 천민들과 난민들을 받아준다고 해도, 아무리 리메이드 여자가 성 노예보다 프리 섹스를 즐기는 당당한 시민이 된다고 해도, 아르마다는 폭력적인 해적 사회입니다. <다섯 번째 계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에나이트가 성욕을 분출시키고 끈적끈적하게 3자 섹스한다고 해도, 섬마을은 해적 소굴입니다. <상흔>과 <다섯 번째 계절>은 해적 소굴에 성 해방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왜 해적 소굴이 성 해방 공간인가요? 왜 번듯하고 부유한 도시보다 고작 해적 소굴 따위가 성 해방 공간인가요?


아니, 솔직히 번듯하고 부유한 도시가 성 해방 공간이 될 수 있나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성 해방을 실천하기 원했으나,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러시아 소비에트를 압박했고 봉쇄했고 고립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소비에트는 성 해방 운동을 내던지고 사회주의 노선에서 멀어집니다. 노라 제미신과 차이나 미에빌이 <다섯 번째 계절>과 <상흔>을 쓰기 전에, 이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폭력적인 압박과 봉쇄와 고립을 겪어야 했습니다. 만약 소설 <상흔> 속에서 사람들이 노예 해방을 외친다면, 폭력적인 뉴크로부존 정부가 노예 해방 운동을 용인할까요? 만약 소설 <다섯 번째 계절> 속에서 제국 시민들이 돌봄 노동 사회화를 외친다면, 폭력적인 제국 권력자들이 이런 목소리들을 용인할까요?



리메이드들이 시민이 된다면, 뉴크로부존 정부는 식민지를 수탈하지 못할 겁니다. 제국 시민들이 돌봄 노동 사회화를 실천한다면, 제국 권력자들은 가부장 문화를 유지하지 못할 겁니다. 뉴크로부존은 노예 해방 운동을 탄압해야 합니다. 뉴크로부존 정부는 강력한 함대를 보내고 선단 도시 아르마다를 침몰시켜야 합니다. 제국 권력자들은 돌봄 노동 사회화를 탄압해야 합니다. 제국 권력자들은 돌봄 노동들이 정당한 노동이 아니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결국 탄압을 피하기 위해 저항 운동들은 도망치고 숨어야 합니다. 저항 운동들이 도망치고 숨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제대로 먹고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해적이 되고 테러 집단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테러'인가요?


아르마다가 테러 집단인가요? 섬마을 해적들이 테러 집단인가요? 뉴크로부존 정부가 '먼저' 노예들을 탄압했고, 제국 권력자들이 '먼저' 시민들을 억압했음에도, 아르마다와 섬마을 해적들이 도둑놈 소리를 들어야 하나요? 우리는 '먼저'와 '나중'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뉴크로부존 정부가 '먼저' 노예들을 탄압했고, 아르마다가 노예들을 풀어주기 때문에, 아르마다는 도망자 신세이고, 아르마다는 해적질을 해야 합니다.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노라 제미신과 차이나 미에빌은 해방 사회가 해적 소굴이라고 설정했는지 모릅니다. 해방 사회가 해적 소굴이라고 해도,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해방 사회가 번듯하고 부유한 도시였다면, 이건 소설 설정과 충돌했을 겁니다.



왜 우리가 테러를 테러라고 부르나요? 왜 테러가 테러인가요? 누가 테러를 규정하나요? 어떻게 그 사람이 테러를 규정하기 위한 명분을 얻나요? 우리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자들은 저항 운동을 테러 집단이라고 규정합니다. 압박과 봉쇄와 고립 속에서 저항 운동들이 몰락하고 탈선하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저항 운동들이 테러 집단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결과적으로 저항 운동들은 정말 테러 집단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처참한 꼬락서니는 테러 국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와 '나중'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분할 때, 우리는 어떻게 테러가 나타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결과에만 주목한다면, 우리는 지배 계급 앞잡이가 되고 저항 운동을 비난할 겁니다.


우리가 어떤 현상을 평가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과보다 발생을 파악해야 합니다. 소원을 해석하기 위해 지니가 생산 조건(콩깍지)을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가 클라라 체트킨이 고대 로마 빠순이라고 놀리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스파르타쿠스 동맹이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속자들>이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고 부정하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상속자들>이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섯 번째 계절>이 행성 변화 이야기가 아니라고 반박하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행성 변화 이야기들이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섬마을이 해적 소굴이라고 욕하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돌봄 노동 사회화가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테러는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상속자들>과 <다섯 번째 계절>과 <붉은 화성>과 <상흔>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문학이 수많은 해석들을 낳기 때문에, 독자들은 문학들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문학들을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아무리 제가 열심히 떠든다고 해도, 제 해석은 절대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다른 수많은 독자들은 수많은 논리적인 근거들을 이용해 제 해석에 반박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해석들은 상대적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선천적인 것, 생산 조건들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SF 소설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SF 소설들을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해도, 독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는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건 주관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독자들은 현실을 이용해 소설을 분류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다른 창작물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에 영화 <조커>는 사회적인 화두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커>가 그저 영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커>가 모방 범죄들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우려합니다. 두 가지 의견 중에서 무엇이 옳은가요? 두 가지 의견이 모두 옳은가요? 여기에 정답이 없나요?



여기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저 두 가지 의견이 상대적일 뿐이라고 인정해야 하나요? 하지만 두 가지 의견이 대조적인 것 같다고 해도, 두 가지 의견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영화 <조커>가 그저 창작물에 불과하든, 영화 <조커>가 모방 범죄들을 만들든, 두 가지 의견 모두 생산 조건을 무시합니다. TV 드라마 <상속자들>에게 자본주의라는 착취, 성 차별, 환경 오염이 생산 조건이 되는 것처럼, 영화 <조커>에게 자본주의라는 착취, 성 차별, 환경 오염은 생산 조건이 됩니다. 이런 생산 조건 없이, 영화 <조커>는 절대 존재하지 못합니다. 영화 <조커>가 모방 범죄들을 만든다고 해도, 이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영화 <조커>가 나타나기 전에, '자본주의라는 착취 경제가 먼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선천적인 것으로서 자본주의는 후천적인 <조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늘에서 <조커>는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특정한 생산 조건들은 영화 <조커>를 만듭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 중심주의는 그저 망상과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생산 조건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생산 조건들 속에서 <조커>는 존재합니다. 만약 평론가라는 작자들이 이런 생산 조건을 개무시한다면, 이런 평론가들은 쌍욕들을 들어처먹어야 마땅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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