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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허기>, 굶주리는 외계인들과 살아있는 상호 작용 환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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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 굶주리는 외계인들과 살아있는 상호 작용 환경

OneTiger 2019. 8. 21. 20:03

[굶주리는 사람들과 외계인들. 양쪽 사이에는 관계가 없는 것 같으나, 여기에는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제목처럼, 반다나 싱이 쓴 <허기>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아내입니다. 아내로서 소설 주인공은 살림을 맡습니다. 집안에서 잔치가 벌어지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 아내는 온갖 음식들을 준비합니다. 풍족한 음식들은 요란한 잔치로 이어집니다.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소설 주인공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인식합니다. 풍족한 음식들 속에서 소설 주인공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인식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직 풍족한 음식들만 바라보나, 소설 주인공은 풍족한 음식들과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조합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풍족한 음식들과 굶주리는 사람들이 함께 있습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은 음식들을 먹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이 온갖 요리들을 준비함에도, 아내는 이런 요리들을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인식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게 문제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은 그저 더럽고 추잡한 뭔가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서 수두룩한 사람들은 굶주리고, 분명히 우리는 굶주리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나, 소설 주인공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이게 문제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단편 소설 <허기>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외계인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내가 SF 소설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내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외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계인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은 낯섭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싫어하고 혐오하고 차별합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외면합니다. 우리는 낯선 것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외계인, 이방인, 낯선 것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혐오하고 차별합니다. 우리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합니다.


구호 광고들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월 2만으로 불쌍한 흑인 아이들을 도우세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이런 구호 광고들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이런 광고들은 왜 흑인 아이들이 굶주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흑인 아이들이 굶주리나요? 미개한 깜둥이 새끼들이 존나게 멍청하고 열등하기 때문인가요? 수구 꼴통 세력들은 열대 지방 깜둥이 새끼들이 지랄맞게 미개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지랄맞게 미개한 쪽은 열대 지방 흑인들보다 수구 꼴통 세력들입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흑인들을 수탈하기 때문에, 흑인들은 굶주립니다. 하지만 수구 꼴통 세력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수구 꼴통 세력들이 이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수구 꼴통 세력들은 식민지 수탈이 문제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단편 소설 <허기>에서 부자들이 빈곤과 허기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수구 꼴통 세력들은 식민지 수탈이 문제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본다고 해도, 우리가 문제를 인식한다고 해도, 우리는 문제가 문제라고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식민지 수탈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수구 꼴통 세력들은 열대 지방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구호 광고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구호 광고들은 직접 열대 지방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나, 구호 광고들은 식민지 수탈이 문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구호 광고들은 그저 흑인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구호 광고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불쌍한 흑인 아이들이 뚝 떨어졌다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수구 꼴통 세력들과 구호 광고들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식민지 수탈을 외면합니다. 아무리 구호 광고들이 안쓰러운 목소리로 월 2만 원을 운운한다고 해도, 결국 구호 광고들은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식민지 수탈이 서구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구호 광고들이 식민지 수탈을 비판한다면, 구호 광고들은 자본주의를 함께 비판해야 합니다. 구호 광고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수두룩한 사람들이 굶주림에도, 구호 광고들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합니다. 아무리 구호 광고들이 불쌍한 흑인 아이들을 운운한다고 해도, 결국 구호 광고들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합니다. 구호 광고들은 굶주리는 사람들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옹호하고 싶어합니다. 구호 광고들처럼, 우리는 굶주리는 수두룩한 사람들을 외면합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은 투명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배경에 불과합니다. 밑바닥 계급은 그저 병풍에 불과합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 살아감에도, 우리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으리으리하고 삐까번쩍한 백화점에 간다고 해도, 우리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습니다. 단편 소설 <허기>에서 아내는 굶주리는 사람들과 풍족한 요리들을 대조하나, 우리는 으리으리한 백화점과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으리으리한 백화점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건 너무 비현실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이 세상에 뭔가가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편 소설 <허기>는 이런 비현실적인 현상을 지적합니다. SF 소설들은 외계인들을 말하나, 이것은 비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SF 소설들은 현실적입니다.



[이런 스팀펑크 판타지 도시는 황당무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건 슬픈 현실입니다.]



단편 소설 <허기>와 달리, 숱한 매체들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숱한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연극들, 게임들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런 숱한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연극들, 게임들은 비현실적입니다. 이건 소설들이 반드시 굶주리는 사람들을 언급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 작가들에게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소설 작가가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한다고 해도,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소설 작가가 오직 밝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수두룩한 사람들은 굶주립니다. 이건 너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게 너무 심각한 문제임에도, 너무 많은 소설들은 너무 심각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소설들이 오직 밝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 이야기한다면, 독자들은 이게 이상하다고 느낄 겁니다. 적어도 단편 소설 <허기>에서 아내는 이게 이상하다고 느낍니다. 소설은 이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우리가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단편 소설 <허기>는 우리가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지 아주 통렬하게 이야기합니다.



단편 소설 <허기>에서 아내는 굶주리는 사람들과 외계인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오직 굶주리는 사람들과 외계인들만 인식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굶주리는 사람들과 외계인들을 비교하기 전에, 아내는 꿈틀거리는 벌레들을 인식합니다. 곳곳에는 수많은 벌레들이 있습니다. 벌레들은 우리를 둘러쌌습니다. 우리는 벌레들이 미물이라고 무시하나, 사실 동물계에서 벌레들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벌레들은 작으나, 작은 것은 장점입니다. 1998년 영화 <갓질라>는 크기가 문제라고 홍보했으나, 벌레들이 작기 때문에, 벌레들은 작은 생물권들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커다란 호랑이보다 작은 여우가 훨씬 쉽게 살아남는 것처럼, 작은 동물은 작은 생물권을 차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벌레들은 쉽게 살아남습니다. 벌레들은 온갖 환경들로 향하고, 온갖 환경들에서 벌레들은 꿈틀거립니다. 온갖 환경들에서 벌레들은 무수하게 번성합니다. 벌레들은 엄청나게 많은 알들을 낳습니다. 알들은 빠르게 부화하고, 벌레들은 빠르게 성장합니다. 번식, 부화, 성장 주기가 짧기 때문에, 벌레들은 빠르게 진화하고 빠르게 적응합니다. 벌레들이 성장하는 동안, 벌레들은 변태합니다. 벌레들이 변태하기 때문에, 애벌레와 어른벌레는 다른 생태를 보여줍니다. 쌍살벌 애벌레는 고기를 먹으나, 쌍살벌 어른벌레는 수액을 빱니다.



쌍살벌 애벌레와 어른벌레가 고기와 수액을 먹기 때문에, 애벌레와 어른벌레는 경쟁 관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애벌레와 어른벌레는 똑같은 먹이를 두고 다투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곤충들은 변태하는지 모릅니다. 벌레들에게는 이런 장점들이 있습니다. 지구 동물계에서 진정한 생존자들, 진정한 주인들은 인류 문명보다 곤충들을 비롯해 벌레들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벌레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벌레들이 우리를 둘러쌌음에도, 우리는 벌레들이 미물이라고 무시합니다. 단편 소설 <허기>에서 아내는 꿈틀거리는 벌레들을 인식하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벌레들을 무시합니다.


우리는 비단 벌레들만 아니라 자연 환경을 무시합니다. 자연 환경은 '우리를 둘러싼 살아있는 상호 작용'입니다. 자연 환경이 살아있기 때문에, 자연 환경이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 환경이 우리를 둘러쌌기 때문에, 우리는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꼭지를 물리는 동안, 엄마의 젖가슴은 아기를 둘러쌉니다. 그래서 아기는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 환경은 소중하고, 자연 환경은 어머니 행성이 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유니버심> 데모 판본은 살아있는 어머니 행성을 언급합니다. 소설 <뉴욕 2140>은 어머니 자연, 어머니 바다를 언급합니다. 자연의 여신, 어머니 행성은 상징입니다.



자연의 여신, 어머니 행성은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 우리를 둘러쌌다고 상징합니다. 엄마의 젖가슴이 아기를 둘러싼 것처럼, 살아있는 상호 작용은 우리를 둘러쌌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말할 때, 기호로서 자연은 여러 가지를 가리킵니다. 자연이 너무 많은 개념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어떤 상황들에서 자연은 상호 작용, 생명 현상,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가리키지 못할지 모릅니다. 고급 화장품 광고들은 자연을 주절거리곤 하나, 이런 광고들은 상호 작용, 생명 현상, 환경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고급 화장품 광고들은 그저 무분별한 소비를 재촉할 뿐입니다. 자연이 무분별한 소비인가요? 고급 화장품 광고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겁니다. 자연이라는 단어(기호)는 너무 드넓은 범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호 작용, 생명 현상,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가리키고 싶다면, 자연이라는 단어(기호)보다 자연의 여신과 어머니 행성이라는 상징은 훨씬 나을 겁니다. 물론 자연의 여신과 어머니 행성이 상징이기 때문에, 상징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편견은 상징에 차별을 집어넣을 겁니다. "어머니 행성? 그래, 여자는 아기를 키우지. 여자는 육아를 맡아야 해. 여자는 오직 육아만 맡아야 해." 이렇게 가부장적인 편견은 상징을 왜곡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징을 언급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상징이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할 겁니다. 우리는 어머니 자연(상징)과 함께 돌봄 노동 사회화(상징을 해석하기 위한 구조)를 언급해야 할 겁니다.



[어머니 자연이 감동적인 상징이라면, 우리는 상징을 넘고 배후를 파악하고 생산 조건을 말해야 할 겁니다.]



단편 소설 <허기>에서 소설 주인공 '아내'는 온갖 요리들을 준비합니다. 이게 여자가 오직 살림만 맡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살림이 여자를 대표한다고 반다나 싱이 생각했나요? 그래서 반다나 싱이 소설 주인공을 아내라고 설정했나요? 소설 모음집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에서 비단 <허기>만 아니라 다른 단편 소설들 역시 아내들을 이야기합니다. 여러 단편 소설들에서 아내들은 살림을 맡고, 아기를 낳고, 아이를 키웁니다. 이런 여자들은 이른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여자들과 다릅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정적인 여자에 가깝습니다. 아내가 야생 동물이 되든 외계 행성이 되든 삼림이 되든, 다들 진취적인 여자의 전형이 아닙니다. 소설 모음집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가 가정적인 여자를 이야기하기 원하나요?


만약 독자가 "소설 모음집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는 가정적인 여자를 이야기하기 원해. 그래, 여자는 살림과 육아를 맡아야 해."라고 해석한다면, 이건 올바른 해석보다 오류와 편견에 가까울 겁니다. 이런 해석이 완전히 틀리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이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현실 속에서 반다나 싱이 소설들을 쓰고 독자가 소설들을 읽기 때문에, 독자는 비단 소설만 아니라 현실을 이용해 판단해야 합니다. 독자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극심한 성 폭행들에 시달린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차별과 소외 속에서 여자들은 보조적인 인간, 부차적인 인간으로 추락합니다. 이런 판단 속에서 독자는 <허기>를 읽어야 할 겁니다.



가부장 사회 속에서 여자들이 소외를 당하기 때문에, 여자들 역시 외계인입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외계인이 되는 것처럼, 여자들은 외계인입니다. 굶주리는 사람들과 여자들은 똑같이 외계인입니다. 아내는 사람들을 먹입니다. 아내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아내는 음식들을 준비합니다. 아내가 음식들을 준비하기 때문에, <허기>에서 소외는 훨씬 두드러집니다. 반다나 싱은 수유 장면을 쓰지 않았으나, 여자는 자신의 몸으로 아기를 먹일 수 있습니다. 만약 반다나 싱이 수유 장면을 묘사했다면, 여자, 허기, 돌봄, 먹거리는 훨씬 긴밀한 관계를 맺었을지 모릅니다.


소설 <분노의 포도>가 여자와 수유와 허기를 보여주는 것처럼, 여자, 허기, 돌봄, 먹거리는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여자는 자연으로 이어지고, 어머니 행성은 뛰어난 상징이 됩니다. 이렇게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허기>를 읽고 어머니 행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고 상징을 해석하고 기호를 파악하고 의미를 유추할 때, 언제나 독자는 현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과 상징과 기호와 의미는 소설과 상징과 기호와 의미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과 상징과 기호와 의미가 뭔가를 말한다고 해도, 독자는 이런 것들이 샛길로 빠질지 모른다고 경계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여신과 어머니 행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 행성이라는 상징은 여자가 반드시 오직 육아만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이 어머니 행성을 왜곡한다면,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가부장 문화가 상징을 왜곡했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여신과 어머니 행성은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류 문명에게 어머니 행성은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소설들, 만화들, 연극들, 영화들, 게임들이 자연 환경에 주목하나요?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 우리를 둘러쌌음에도, 그래서 우리가 먹고 살 수 있음에도, 숱한 매체들은 자연 환경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건 모든 매체가 반드시 자연의 여신을 숭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독자가 우리를 둘러싼 살아있는 상호 작용을 느끼고 싶다면, 게임 플레이어가 어머니 행성을 보고 싶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반다나 싱은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가 자연 환경을 묘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단편 소설 <허기>에서 아내가 꿈틀거리는 벌레들을 인식하는 것처럼,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해양 생태학자 타크베르는 인류 문명을 둘러싼 살아있는 상호 작용을 좋아합니다. 타크베르처럼, SF 세상에서 많은 등장인물들은 웅장하고 살아있는 환경을 둘러봅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사변 장르가 이런 등장인물들을 보여주나요?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레우스>와 <프롬 더스트>가 자연 현상을 강조하는 것처럼, 먹고 살기 위해 고대 사람들은 자연 환경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고대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자연 환경을 이야기하기 위해 고대 사람들은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고대 신화 판타지 <프롬 더스트>가 고대 폴리네시아 신화에 기반하는 것처럼, 애니메이션 <모아나>는 고대 오세아니아 신화에 기반합니다. 고대 오세아니아 신화 속에서 마우이는 자연 현상을 조절합니다. 마우이가 자연 현상을 조절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자연의 여신 테 피티가 수많은 생명체들을 낳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자연 환경에 주목하기 위해 신화는 테 피티 같은 자연의 여신을 말합니다. 고대 인류 문명과 달리, 근대 인류 문명은 산업 자본주의를 이용해 자연을 정복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인류 문명은 단 한 번도 자연을 정복한 적이 없습니다. 근대 인류 문명은 그저 자연 환경에 좀 더 잘 적응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산업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킴에도, 근대 인류 문명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근대 인류 문명은 왜 기후 변화가 나타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근대 인류 문명은 자신이 자연을 정복했다고 착각합니다.



[고대 신화 판타지는 기이한 식생들과 커다란 꿈틀이들을 이용해 자연 환경을 강조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문명이 자연을 절대 정복한 적이 없음에도, 산업 자본주의는 서구적인 근대화가 자연을 정복했다고 씨부렁거립니다. 그래서 아직 근대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가 너무 심각한 위기라고 깨닫지 못합니다. 근대 인류 문명은 자신이 자연을 정복했다고 착각하고, 그래서 근대 인류 문명은 자연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근대 인류 문명은 자연 환경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떠듭니다. 자연 환경과 자본주의 중에서 근대 인류 문명이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근대 인류 문명은 망설이지 않고 자본주의를 선택할 겁니다. 더 이상 근대 인류 문명에게 테 피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인류 문명에게 자연의 여신, 어머니 행성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착각입니다. 근대 인류 문명에게 테 피티는 필요하지 않고, 지배적인 관념은 이게 현실이라고 주절거리나, 이건 현실보다 착각입니다. 우리는 현실 같은 착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자연의 여신 테 피티가 상상력인 것처럼, 고대 신화가 상상력인 것처럼, 사변 장르는 상상력입니다. 사실 고대 신화와 사이언스 픽션은 모두 상상력에 속합니다. 유구한 사변 장르 사조에서 고대 신화는 사이언스 픽션으로 이어집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 과학을 고대 신화에 덧붙입니다.



거대 괴수 모스라는 고대 신화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가까우나, 사람들은 여신으로서 모스라를 숭배합니다. 1961년 영화 <모스라>와 소설 <고지라: 괴수 묵시록>과 애니메이션 <고지라: 행성 포식자>와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모스라는 계속 여신입니다. 모스라는 사이언스 픽션 속의 여신(고대 신화)입니다. 모스라는 환경 오염을 정화하고, 건강하고 풍성한 자연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대 신화가 근대 과학을 덧붙이고 사이언스 픽션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환경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테 피티와 모스라는 비슷합니다.


정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산업 폐기물들을 함부로 버리나, 무식하고 멍청하고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와 달리, 성스러운 여신으로서 테 피티와 모스라는 자연 환경을 정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변 장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이 그저 근대 과학을 덧붙인 고대 신화에 불과한가요? 그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는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만들었습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에게 대표적인 자연 과학은 진화 이론입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속에서 대표적인 자연 과학으로서 진화 이론은 사이언티픽 로망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종의 기원>을 지지했고, 허버트 웰즈는 진화 이론을 소설들에 반영했습니다. <종의 기원>은 생물 다양성과 생명 역사를 말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생물 다양성과 생명 역사를 반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생물 다양성과 생명 역사는 필수적인 소재입니다. 게다가 19세기 서구 근대화, 대규모 산업 자본주의가 엄청난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대적인 환경 오염들이 문제라고 인식합니다. 21세기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의 주범인 것처럼, 이미 19세기 자본주의는 온갖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습니다. 19세기 사람들은 근대적인 환경 오염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19세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숨쉬기 위한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21세기 남한 사람들은 중국이 대기 오염 국가라고 힐난하나, 이건 그저 얄팍한 욕지거리에 불과합니다. 이미 19세기 서구 자본주의는 엄청난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습니다. 21세기 남한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근대 환경 오염들을 비판하기 원한다면, 남한 사람들은 서구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엄청난 오염들을 저질렀음에도,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떠받들기 때문에, 중국은 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중국이 아닙니다. 남한 사람들이 중국을 욕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유치한 감정 배설에 불과합니다.



진짜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19세기 자본주의가 엄청난 오염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상상력을 이용해 이것을 지적합니다. SF 세상에서 생태 유토피아와 환경 아포칼립스는 주된 하위 장르가 되었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 현상이기 때문에, 비록 숱한 생태 유토피아들과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환경 오염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생태 유토피아들과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우리를 둘러싼 살아있는 상호 작용을 인식합니다. 타크베르가 온갖 물고기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우리를 둘러싼 살아있는 상호 작용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이유들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환경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 자연 과학을 덧붙이고 고대 신화를 재현합니다. 둘째, 사이언스 픽션은 진화 이론을 반영하고 생물 다양성과 생명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셋째,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적인 환경 오염들이 엄청난 충격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세 이유들 이외에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다른 이유들 역시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른바 주류 문학과 달리,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환경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건 모든 사이언스 픽션이 자연 환경을 이야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수두룩한 사이언스 픽션들은 자연 환경을 외면하거나 자연 환경을 왜곡합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지배적인 관념을 따르고 자연 환경보다 자본주의가 중요하다고 외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너무 지배적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맹목적으로 자본주의가 옳다고 믿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가능성을 꿈꾸어야 함에도, 사이언스 픽션들은 대안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수두룩한 사이언스 픽션들은 가능성을 포기합니다. 이런 사이언스 픽션들은 오직 자본주의가 미래로 확장한다고 예상할 뿐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인류 역사는 끝납니다. 이건 역사의 종언입니다. 더 이상 인류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더 이상 인류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사이언스 픽션에게 무슨 명분이 있나요?


사이언스 픽션은 가능성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만약 더 이상 인류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오직 소소한 변화들만 이야기해야 할 테고, 사이언스 픽션은 명분을 잃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이 정말 오직 소소한 변화들만 이야기하고 미래가 그저 현재의 확장에 불과하다고 단정해야 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자연 환경과 인류 문명이 바뀐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가 너무 심각해진다면, 자연 환경과 인류 문명은 부정적으로 바뀔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거시적으로 자연 환경과 인류 문명이 바뀐다고 논의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환경을 거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사이언스 픽션은 행성 환경을 바꿉니다.]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가 최악의 상황에 도달한다면 세계 지리가 바뀔지 모른다고 가정합니다. 해수면이 상승하고 해안선이 침수된다면, 세계 지리는 바뀔 겁니다. 우리는 지구본들을 폐기하고 새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기후 변화가 최악의 상황에 도달한다면, 40% 이상 생물 다양성은 사라질 겁니다. 이건 엄청난 생태 재앙입니다.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 행성급 환경 오염, 치명적인 생물 다양성 감소를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과학자들은 홀로세 멸종을 이야기합니다. 과학자들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크게 지적하지 않으나, 사실 플랜테이션 농업이 자본주의 발전을 뒷받침했기 때문에, 더 이상 홀로세는 홀로세가 아닙니다. 이른바 플랜테이션세(Plantationocene)는 홀로세를 밀어냅니다.


이렇게 지질학적 단위에서 자본주의는 재앙을 미칩니다. 하지만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급진적인 운동권이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면, 지배적인 관념은 운동권이 사악한 빨갱이라고 몰아갈 겁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소비에트 연방이 악랄한 독재라고 씨부릴 겁니다. 분명히 소비에트 연방은 폭력적이었으나, 정말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해 현실 사회주의가 억압적인 독재인가요? 이건 거짓말입니다. 이건 개나리 신발 같은 헛소리입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탄압했기 때문에, 현실 사회주의는 폭력적으로 저항했습니다. 현실 사회주의가 정말 억압적이라고 해도, 현실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훨씬 위험합니다. '자본주의가 지질학적 단위의 생태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지질학적 단위로 재앙을 일으킴에도, 지배적인 관념은 오직 자본주의만 옳다고 지껄입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이런 지배적인 관념을 추종합니다. 그래서 SF 팬들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을 바라봐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이 자연 환경을 찾고 싶다면, 이른바 주류 문학보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훨씬 나을 겁니다. 심지어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지구를 벗어나고 또 다른 어머니 행성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자연 생태계를 조성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살아있는 상호 작용을 훨씬 생생하게 느낄 겁니다. 아니면 생명이 없는 차가운 우주에서 우리는 폐쇄 인공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사변 장르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다나 싱은 사변 장르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단편 소설 <허기>에서 아내는 굶주리는 사람들과 외계인들과 함께 꿈틀거리는 벌레들을 인식했을 겁니다. <허기>를 비롯해 사변 장르는 이런 소재들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상흔>을 보세요. 소설 <상흔>은 개조 인간들, 유사 인간 종족들, 돌연변이들을 이용해 난민들, 여자들, 떠돌이들, 장애인들, 빈민들을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상흔>은 꾸준히 기이한 자연 생태계를 묘사합니다. 독자가 <상흔>을 읽는 동안, 독자는 기이한 해저 생태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상흔>에는 굶주리는 사람들과 자연 생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흔>은 정말 생생합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최고입니다.



※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컨셉 아트 출처: Fei Zhou,

https://www.artstation.com/artwork/vo04E


※ 게임 <프롬 더스트> 스크린샷 출처: ShuttleRoque,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27516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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