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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덕후와 덕질은 선험적이지 않다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덕후와 덕질은 선험적이지 않다

OneTiger 2019. 3. 14. 18:50

[누군가가 이런 게임을 떠든다면, 이건 덕질이 될 겁니다. 하지만 덕질이 선험적이고 고정적인가요?]



"세상의 어떤 분야에서도 오타쿠만큼 무서운 인종은 없습니다. 잘만 이용하면 전문가도 혀를 내두를 만큼 움직여줄 겁니다." 아리카와 히로가 쓴 <바다 밑>에서 이렇게 어떤 등장인물은 말합니다. 소설 <바다 밑>에서 정체 불명의 가재 괴수들은 일본 항구 도시를 습격합니다. 경찰은 대책을 세우기 원하고 군사적인 동향을 파악하기 원합니다. 가재 괴수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주일 미군은 뭔가를 계획하고, 일본 경찰은 그걸 알기 원해요. 하지만 주일 미군은 공개적으로 계획을 밝히지 않고, 그래서 일본 경찰은 좀 특별한 대책을 강구합니다. 그들은 군사 오타쿠들을 이용합니다.


군사 오타쿠들이 미군 동향을 파악한다면, 일본 경찰은 그 정보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등장인물들은 군사 오타쿠 따위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비난하나, 어떤 등장인물은 군사 전문가보다 군사 오타쿠가 훨씬 뛰어날 수 있다고 옹호합니다. 이건 비단 소설 속의 현상만이 아닐 겁니다. 현실 속에서 숱한 오타쿠들, (이른바) 오덕후들은 엄청난 '덕질들'을 보여줍니다. 특정한 부분에서 이런 '덕질들'은 얼마든지 전문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전문가들보다 덕후들은 훨씬 날카롭고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덕후들과 전문가들을 구분하기는 힘듭니다.



전문가와 오덕후 사이에 무슨 차이점들이 있을까요? 전문가는 프로입니다. 전문가는 전문 분야를 이용해 돈을 벌고 사회 활동에 참여합니다. 어떤 커다란 사회 문제가 생겼을 때, 전문가는 지식인이 되고 자신의 전문 분야를 이용해 사회 문제를 진단하거나 해결합니다. 전문가는 폭넓은 지식을 쌓아야 하고 학술적으로 논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 오타쿠는 돈을 벌지 않습니다. 덕후들이 덕질들을 이용해 돈을 번다고 해도, 금전적인 보상은 부차적입니다. 덕후들은 구태여 덕질들을 이용해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덕후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위한 사회 활동과 자기 만족을 위한 덕질은 서로 다릅니다.


덕후들은 엄청난 지식들을 늘어놓을 수 있으나, 지식인이 되지 않습니다. 덕후들은 그저 개인적으로 사회 문제를 진단할 뿐입니다. 덕후들은 폭넓은 지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학계에 진출하지 않습니다. 덕후들은 지식보다 자기 만족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전문가와 오덕후 사이에는 여러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이건 전문가와 오덕후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다른 숱한 용어들이 그런 것처럼, 오덕후는 고정적이고 특정한 집단이나 유형이 아닙니다. 이른바 덕질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덕질에는 수많은 종류들이 있습니다. 소설 <바다 밑>은 군사 덕질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인가요?



이 세상에는 군사 덕후들 이외에 수많은 덕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베르사유의 장미> 만화책들을 열심히 모을 때, 그건 덕질이 됩니다. 누군가가 열심히 F-91 같은 건담 프라모델들을 조립할 때, 그건 덕질이 됩니다. 누군가가 열심히 <드워프 포트리스>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고 공략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때, 그건 덕질이 됩니다. 이런 것들 역시 덕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문화(이른바 서브 컬쳐) 덕질입니다. 문화 덕질은 군사 덕질과 다릅니다. 군사 덕후들과 건담 프라모델 덕후들은 다를 겁니다. 미군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 경찰은 건담 프라모델 덕후들에게 문의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군사 덕질과 건담 프라모델 덕질을 함께 추구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군사 덕후가 우주 구축함이나 매스 드라이버나 2족 보행 전차나 사이버 전쟁을 논의하기 원할 때, 군사 덕후는 SF 세상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군사 덕후는 비디오 게임 <고스트 리콘: 퓨처 솔져>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군사 덕후들은 군사 정보와 SF 소설을 함께 추구할 겁니다. 이런 군사 덕후들이 밀리터리 SF 이외에 다른 SF 하위 장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겠습니까. 군사 덕후들은 뉴 웨이브 소설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군사 덕후들이 밀리터리 SF 소설들을 꾸준히 읽는다면, 군사 덕후들은 어느 정도 사이언스 픽션을 섭렵할 수 있겠죠.



만약 이런 군사 덕후가 사이언스 픽션들을 평가한다면, 이게 무슨 덕질이 될까요? 이게 군사 덕질일까요, 아니면 SF 덕질일까요? 이건 군사 덕질이 될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건 SF 덕질이 될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건 군사 덕질이고 동시에 SF 덕질이 될지 모릅니다. 종종 밀리터리 SF 덕후는 군사적인 측면을 훨씬 강하게 내세우거나 SF 비평을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낼지 모릅니다. 이렇게 덕질은 고정적이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오덕후는 다소 비하적인 용어이나, 왜 무조건 덕질이 비하적이어야 할까요? 만약 누군가가 세계 고전 문학들을 열심히 읽는다면, 이건 덕질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고전 문학 덕질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고전 문학 덕후를 덕후라고 부르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이런 고전 문학 덕후들이 '책벌레'라고 불렸기 때문입니다. 이미 책벌레라는 용어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태여 고전 문학 덕후들을 덕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전 소설들을 열심히 읽는 '책벌레'와 '고전 문학 덕후' 사이에 실질적이고 커다란 차이점이 있나요? 누군가가 에밀리 브론테와 오노레 드 발자크를 열심히 읽을 때, 이 사람이 책벌레일까요, 아니면 고전 문학 덕후일까요? 두 가지 사이에 차이점은 없을 겁니다. 정말 차이점이 있다고 해도, 그건 별로 크지 않을 겁니다. 책벌레는 얼마든지 고전 문학 덕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책벌레를 고전 문학 덕후라고 부르지 않을 뿐입니다.



사실 '덕질'이라는 표현은 새로울지 모르나, 덕질 그 자체는 별로 새롭지 않습니다. 덕질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이전에도 이미 덕후들은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덕후들을 덕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호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대상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브라이언 올디스는 메리 셸리가 최초의 SF 작가라고 평가했습니다. 브라이언 올디스가 평가했기 때문에, 메리 셸리는 최초의 SF 작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올디스가 평가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19세기에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존재했습니다.


브라이언 올디스는 <프랑켄슈타인>을 '후천적으로' 분류했습니다. 김춘수가 쓴 시처럼, 인간이 꽃을 꽃이라고 부를 때, 꽃은 꽃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대상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그 대상은 꽃이 아니겠으나, 그 대상이 꽃이 아니라고 해도, 이건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덕질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이전에도 이미 고전 문학 덕후들이 존재한 것처럼, 브라이언 올디스가 평가하기 전에도 메리 셸리가 이미 <프랑켄슈타인>을 쓴 것처럼, 호명 행위는 새로운 뭔가를 창조하지 않습니다. 호명 행위는 '사후적으로' 뭔가를 분류합니다. 그래서 덕질이라는 것은 선험적이지 않습니다.



덕질이 선험적이지 않기 때문에, 덕질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세계 고전 문학을 열심히 읽는 책벌레가 고전 문학 덕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덕질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덕질의 경계선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덕질은 이것이 될 수 있고, 저것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이것과 저것이 될 수 있습니다. SF 장르가 선험적이지 않고 후전적으로 분류되는 것처럼, 덕질은 선험적이지 않고 후천적으로 분류됩니다. 양쪽 모두 인류 사회 속에서 후천적으로 나타나는 호명 행위입니다. 사람들이 덕후를 덕후라고 호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덕후들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브라이언 올디스가 메리 셸리를 SF 울타리에서 추방한다고 해도, 메리 셸리가 인조인간을 썼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브라이언 올디스는 그저 후천적으로 고정적이지 않은 경계선을 그릴 뿐입니다. 사람들이 덕후들을 호명한다고 해도, 고정적인 경계선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덕질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덕질은 이것과 저것과 그것을 모두 추구하거나 뒤섞을 수 있습니다. 경계선이 흐릿하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과 그것은 뒤섞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어떤 것이 덕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이 덕질이 아니라고 제외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덕질은 다양한 분야들과 경계들을 넘을 수 있습니다. 여기 <SF 생태주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 <SF 생태주의>가 덕질이 될 수 있나요? 게임 플레이어가 비디오 게임을 열심히 분석할 때, 사람들은 그걸 덕질이라고 말할 겁니다. 분명히 <루리웹> 같은 비디오 게임 사이트는 오덕 사이트가 될 수 있습니다. <루리웹>이 그런 것처럼, 여기 <SF 생태주의>에는 숱한 비디오 게임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SF 생태주의>는 (생태학 SF) 오덕 블로그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가 <어스텅>의 어스우드 프리저브 모드를 떠들 때,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록토퍼스가 독특하다고 칭찬할 때, <압주>가 아르켈론을 오직 하나만 보여준다고 지적할 때,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가 원시적인 향수를 자극한다고 이야기할 때, <쉘터>의 엄마 오소리와 아기들이 기술적인 자연이 된다고 분류할 때, <타이토 에콜로지>에 첨단 바이오 돔이 있다고 가리킬 때, <블록후드>가 삼림 도시와 생태적인 공동체를 아름답게 보여준다고 호평할 때, <호라이즌 제로 던>이 상투적으로 기계 공룡을 보여준다고 비판할 때, <엔들리스 레전드>에서 야생을 걷는 자들의 도시가 싱그럽고 우아하다고 좋아할 때, 이 블로그는 덕질 블로그가 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여기가 덕질 블로그라고 생각합니다. 여기는 온갖 생태적인 상상력들, 외계 행성 테라포밍, 개조 생명체들, 생체 우주선이나 생체 잠수정, 첨단 바이오 돔, 공룡을 비롯해 선사 시대 생태계 복원, 낯선 식생 탐사, 모스라 같은 거대 괴수, 환경 아포칼립스, 생태 유토피아, 삼림 도시를 덕질합니다. 여기는 비단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만 아니라 드루이드와 동물 동료와 신성 자연 주문 같은 생태학 판타지를 덕질합니다. 아무도 이걸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생태적인 상상력을 덕질하기 위해 이 블로그는 자본주의와 가부장 문화를 비판합니다. 사실 생태적인 상상력을 '제대로 덕질하고' 싶다면, 이 블로그는 자본주의와 가부장 문화를 비판해야 합니다. 숱한 과학자들은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개무시하고 탐욕스러운 인류가 자연 환경을 오염시킨다고 말합니다. 생태학 서적 <벌, 그 생태와 문화의 역사>에서 번역자 김승윤은 인류가 자연 환경을 오염시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에는 지배적인 산업 자본가 계급과 착취를 당하는 제3세계 인민들이 있습니다. 지식인이 이걸 무시한다면, 그건 인종 차별이 될 겁니다. 김승윤은 인종 차별론자입니다.


김승윤은 한국 생태 도시 네트워크 사무 총장입니다. 한국 생태 도시 네트워크 사무 총장은 인종 차별론자입니다. 물론 이런 지식인들은 정말 자연 환경을 지키기 원할 겁니다. 이런 지식인들은 지배 계급의 나팔수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식인들이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외면할 때, 지식인들은 지배 계급의 나팔수가 됩니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지배 계급의 나팔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학 SF 덕후가 지배 계급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이게 정말 근본적인 덕질이 될 수 있나요? 덕질은 피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덕질은 근본적이고 심층적이어야 합니다.



"우와, 씨발, 모스라 날개 무늬는 존나 화려하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을 관람한 이후, 이렇게 괴수 팬이 말할 때, 근본적이고 심층적인 시각은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베라 파미가는 <고지라: 괴수왕>이 자연 환경을 보호하는 영화라고 말했습니다. 베라 파미가가 제대로 설명했을까요? 그걸 평가하기 위해 괴수 팬은 근본적이고 심층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합니다. 생태학 서적 <벌, 그 생태와 문화의 역사>에서 저자 노아 윌슨 리치는 환경 보호 활동이 성취감을 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가 자본주의와 가부장 문화를 비판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제가 빨갱이거나 페미 나치라고 말할 겁니다. 어쩌면 노아 윌슨 리치 역시 제가 악랄한 빨갱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뭐, 이런 상황은 별로 성취감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게 덕질이 될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제가 빨갱이나 페미 나치라고 비난을 받는다면, 이게 덕질일까요, 아닐까요? 위너 덕후가 노래 <밀리언즈>를 흥얼거리며 위너 굿즈를 구입하고 위너 브로마이드를 벽에 장식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게 쓸데없는 돈 낭비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아야세 에리를 위해 애니메이션 <러브 라이브> 덕후가 생일 케이크를 사고 생일을 축하할 때, 다른 사람들은 왜 허구적인 등장인물을 위해 생일 케이크가 필요한지 물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것은 덕질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그것은 돈 낭비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빨갱이라는 말을 들을 때, 저는 이게 덕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본주의 체계를 비판할 때, 그건 덕질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게 덕질보다 악랄한 빨갱이 짓거리라고 간주할 겁니다. 덕후와 덕질이 선험적이지 않고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SF 장르가 후천적인 분류인 것처럼, 덕질은 후천적인 호명 행위입니다. 덕질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타쿠를 언급한) 소설 <바다 밑>을 비롯해 만화책 <베르사유의 장미>와 소설 <폭풍의 언덕>과 게임 <드워프 포트리스>와 소설 <골짜기의 백합>과 F-91 프라모델과 게임 <블록후드>와 노래 <밀리언즈>는 모두 덕질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르사유의 장미> 독자가 프랑스 혁명과 1848년 혁명과 파리 코뮌을 연구하는 것처럼, 이런 것들을 덕질할 때, 오덕들은 덕질에 다른 것들을 덧붙이고 동원할 수 있습니다.


여기 <SF 생태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이 블로그가 빨갱이 짓거리라고 말할지 모르나, 이런 빨갱이 짓거리 역시 덕질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건 정말 근본적인 덕질일지 모릅니다. 덕질이 선험적이지 않다면, 덕질은 경계를 허물고 훨씬 깊은 뿌리를 탐구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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