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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다섯 번째 계절>과 지질학적인 상상력 본문

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다섯 번째 계절>과 지질학적인 상상력

OneTiger 2019. 4. 21. 19:06

노라 제미신이 쓴 <다섯 번째 계절>은 가상의 고요 대륙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수많은 판타지 설정들이 그런 것처럼, 고요 대륙은 지구가 아니고 동시에 지구와 비슷합니다. 판타지 소설들을 쓸 때, 판타지 작가들은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창조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건 불가능합니다. 판타지 작가가 요정과 정령과 악마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판타지 작가는 요정이나 정령이나 악마가 아닙니다. 판타지 작가 역시 현실에 속하는 인간이고, 현실 속에서 판타지 작가는 가상의 장소를 상상해야 합니다.

 

당연히 판타지 작가는 현실을 모방하고, 현실에 뭔가를 덧붙이고, 현실에서 뭔가를 빼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판타지 작가는 가상의 장소에 현실을 반영하거나 가상의 장소를 이용해 현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판타지 소설은 유럽 중심주의와 가부장 문화를 찬미할 수 있고, 어떤 판타지 소설은 제국주의와 침략 전쟁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후자에 속할 겁니다. 소설 속의 고요 대륙에는 엄청난 지각 변동이 있고, 이런 재앙 때문에 인류 문명은 크게 진보하지 못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류 문명은 대략 19세기 유럽 문명과 비슷합니다. 아니, 솔직히 시대적인 배경을 가늠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고요 대륙 사람들은 범선을 타고 마차를 탑니다. 몇 백이나 몇 천 년 동안 한 번씩 화산 폭발이나 대지진은 대륙을 강타하고, 인류 문명에게는 진보하기 위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류 문명은 (대재난을 막기 위해) 지질학을 열심히 연구하나, 전반적으로 기술 수준은 19세기 유럽을 뛰어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는 전기 장치와 기계 설비들이 있으나, 이 소설은 진보적인 SF 느낌을 풍기지 않습니다. 소설은 기계 설비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는 뛰어난 기술 대신 '오로진'이라는 초능력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태생적인 마법사들과 비슷합니다. 초능력자들은 열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를 이용해 지질 활동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숱한 사이언스 픽션들이 초인들을 멸시하거나 숭배하는 것처럼, 숱한 판타지들이 마법사들을 괴짜라고 간주하거나 위대한 현자라고 떠받드는 것처럼, <다섯 번째 계절>에서 사람들은 오로진들을 차별하거나 부러워합니다. 오로진들 때문에 <다섯 번째 계절>은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노라 제미신은 행성 지질학을 대충 넘어가지 않고, 그 덕분에 어떤 관점에서 <다섯 번째 계절>은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습니다. 어떤 독자는 이게 판타지라고 생각할 테고, 어떤 독자는 이게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소설 홍보 문구가 표현하는 것처럼, 어떤 독자는 이게 사이언스 판타지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가장 속이 편한 해답일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가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을 모두 만족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판타지에서 초능력자들은 드문 설정이 아닙니다. 소설 <듄>에서 베네 게세리트 마녀들은 사람을 현혹하거나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하거나 신진대사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치열한 훈련을 거치나, 그 과정은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베네 게세리트 마녀가 뛰어난 집중력으로 정교한 논리를 펼칠 때,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베네 게세리트 마녀가 목소리 기술을 이용해 인간 심리를 조종할 때, 여기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거의 없습니다. 베네 게세리트 마녀들은 판타지 설정에 가깝습니다. 퀴사츠 헤더락이 미래를 예언할 때, <듄>은 완전히 판타지 소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듄>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우주선들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병사들이 광선총들을 쏘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유전자 조작으로 개조 동물들을 만들기 때문에? 이런 이유들 역시 틀리지 않으나, 무엇보다 <듄>에는 행성 생태학이 있습니다. <듄>은 어떻게 건조한 사막 행성이 싱그러운 녹색 삼림 행성으로 바뀌는지 보여줍니다. 이건 테라포밍이고, 일반적으로 테라포밍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듄>은 하드 SF 테라포밍과 완전히 다르나, 프랭크 허버트는 자세하게 행성 생태학을 묘사했고, 그래서 <듄>은 얼마든지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듄>은 초능력자들(베네 게세리트 마녀들)을 보여주고 동시에 행성 생태학을 묘사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초능력자들(오로진들)을 보여주고 동시에 행성 지질학을 묘사합니다. <듄>이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다면, <다섯 번째 계절> 역시 그럴 수 있을 거에요. <듄>과 <다섯 번째 계절>이 하드 SF 소설들과 완전히 다르다고 해도, 독자들은 얼마든지 <듄>과 <다섯 번째 계절>이 사이언스 픽션을 만족한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듄>과 <다섯 번째 계절>이 SF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행성 생태학과 행성 지질학을 재미있게 읽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장르 분류는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장르는 후천적입니다. 독자들은 후천적으로 장르를 이렇게 저렇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제와 설정과 이야기일 겁니다. 비록 <다섯 번째 계절>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독자가 지질학적인 상상력을 좋아한다면, 독자는 다른 SF 소설들과 함께 <다섯 번째 계절>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자체로서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 사이언스 판타지라는 용어들은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어떤 독자는 <드워프 포트리스> 같은 건설 게임과 <다섯 번째 계절>을 동시에 좋아할지 모릅니다. 양쪽 모두 지질학적인 상상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 <드워프 포트리스>는 문자 그대로 드워프 지하 왕국을 이야기합니다. 게임 속에서 드워프들은 열심히 여러 암석들을 채굴하고 왕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당연히 <드워프 포트리스>에는 지질학적인 상상력이 있습니다. 드워프들이 훌륭한 광부들이기 때문에, <드워프 포트리스>는 지질학을 대충 넘어가지 않고 꽤나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지질학적인 상상력을 좋아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드워프 포트리스>를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게임 <드워프 포트리스>처럼,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대재난을 묘사하고 지질학적인 상상력을 자세하게 풀어놓습니다.

 

<드워프 포트리스>와 <다섯 번째 계절>이 모두 지질학적인 상상력을 중시한다면, <드워프 포트리스>를 만족스럽게 즐기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다섯 번째 계절>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드워프 포트리스>와 <다섯 번째 계절>은 많이 다릅니다. <드워프 포트리스>는 건설 게임이고, <다섯 번째 계절>은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입니다. 게임과 소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점들이 있고,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과 소설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양쪽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전에 3월 1일 게시글이 소설 <인간 종말 리포트>와 게임 <니치>를 비교한 것처럼, 장르와 매체에 상관없이, <드워프 포트리스>와 <다섯 번째 계절>에는 지질학적인 상상력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판타지와 상상 과학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왜 SF 팬들이 구태여 판타지와 상상 과학을 함께 즐겨야 하나요? 판타지 없이, SF 팬들은 상상 과학을 즐길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 소설에서 연금술사들이 강철 골렘에게 마법을 부리지 않는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얼마든지 소설 <아이 로봇>을 읽고 로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SF 독자들은 스팀펑크 소설 속의 강철 골렘을 보고 싶어합니다. 심지어 한때 영어권 출판 시장에서 스팀펑크가 너무 범람했기 때문에, SF 작가들은 스팀펑크에 질렸다고 짜증을 부렸습니다. 왜 SF 독자들이 강철 골렘을 보고 싶어하나요? 노라 제미신이 상상 과학을 판타지 속에 넣을 때, 여기에 무슨 가치가 있나요?

 

스팀펑크 소설이 산업 도시와 마법사와 오토마톤(자동 인형)을 함께 묘사할 때, 여기에 무슨 가치가 있나요? 어쩌면 강조 효과는 중요한 가치가 될 겁니다. 신호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빨간색과 녹색은 서로 강조할 수 있습니다. 공사장 표지판이 보여주는 것처럼, 검정색과 노란색 빗금은 훨씬 주목을 끌 수 있습니다. 빨간색과 녹색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검정색과 노란색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신호등과 공사장 표지판은 시각적으로 두드러집니다. 어떤 두 가지가 서로 대조적이라면, 두 가지는 서로 강조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두 가지는 하나로 뒤섞이고 꽤나 두드러질 겁니다. 미학자들과 예술 평론가들은 이걸 보색 효과나 강조 효과라고 부를 겁니다. 전반적으로 예술 영역에서 보색 효과와 강조 효과는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왼쪽 <분노의 도로>는 두개골과 새싹을 대조하고, 오른쪽 <외로운 항해>는 무채색과 빨간색을 대조합니다.]

 

 

위 사진을 보세요. 왼쪽 사진은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한 장면입니다. 부발리니 씨앗 할머니는 두개골 속에서 녹색 새싹을 키웁니다. 녹색 새싹은 싱그러운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그 자체로서 새싹은 생명력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을 상징하기 위해 녹색 새싹에게는 두개골이 필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두개골은 죽음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대조적입니다. 결국 생명이 죽음에 닿는다고 해도, 생명과 죽음은 대조적입니다. 사진 속의 두개골에게 두 뿔이 있기 때문에, 이건 일반적인 동물보다 돌연변이 두개골 같습니다. 이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보다 기이한 죽음입니다. 그래서 두개골 위에서 녹색 새싹이 자랄 때, 녹색 새싹은 훨씬 싱그러울 수 있습니다. (게다가 왼쪽 사진에서 전반적인 색조는 푸르스름하나, 새싹은 녹색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비디오 게임 <FAR: 외로운 항해 Lone Sail>의 한 장면입니다. 이 게임에서 대부분 배경들은 무채색들(하얀색, 검은색, 각종 잿빛들)입니다. 하지만 증기 차량과 게임 주인공과 여러 사물들은 빨간색입니다. 배경은 무채색들이나, 증기 차량, 게임 주인공, 여러 사물들은 빨간색입니다. 배경은 움직이지 않으나, 증기 차량, 게임 주인공, 여러 사물들은 움직입니다. 그래서 게임 <외로운 항해>는 쓸쓸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무채색 배경들은 죽었습니다. 붉은색들은 움직입니다. 두 가지는 강렬한 대조를 이룹니다. 배경이 무채색들이기 때문에 증기 차량과 게임 주인공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는 이런 보색 효과, 강조 효과가 있습니다.

 

 

 

이 기하학적 추상화를 봅시다. 이 어설픈 조형주의 추상화는 별로 좋은 사례가 아니나, 이 그림은 강조 효과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보여줍니다. 그림 속에서 여러 직선 도형들은 딱딱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거의 대부분 도형들은 무채색입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의 도형만 빨간색입니다. 그래서 빨간색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무채색 도형들이 없다고 해도, 빨간색은 빨간색입니다. 빨간색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구태여 무채색 도형들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무채색 도형들 없이, 우리는 얼마든지 빨간색이 빨갛다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년에 <최불암 시리즈>에서 최불암이 "요즘에 나는 빨간색이 좋다니까?"라고 농담하는 것처럼, 무채색 도형들 없이 우리는 빨간색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무채색 도형들이 있기 때문에, 빨간색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팀펑크 작가가 상상 과학을 과거 시대에 집어넣지 않는다고 해도, SF 독자는 상상 과학을 즐길 수 있습니다. 과거 시대 없이, SF 독자는 상상 과학을 즐길 수 있어요. 하지만 스팀펑크 속에 마법이 있기 때문에, 과거 시대가 있기 때문에, 상상 과학은 이것들과 어울리고 훨씬 두드러집니다.

 

이공계 대학 강의실에서 지질학자가 현무암과 화강암과 흑요석을 떠든다고 해도, 이건 별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게 일상적이라고 생각해요. 근대적인 과학과 이공계 대학 교수는 대조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드워프 광부가 현무암과 화강암과 흑요석 성질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이건 비일상적이고 두드러질 겁니다. 드워프 광부가 거대한 드릴이 달린 증기 기관 굴착 차량을 털털거리며 끌고 온다면, 이건 훨씬 두드러질 겁니다. 드워프 광부 조합이 총파업을 일으키고 동성애 모임과 연대한다면, 이건 훠어얼씬 두드러질 겁니다. 드워프는 신화와 전설에 속했습니다. 신화와 전설은 근대적인 지질학 및 굴착 차량 및 노동 조합 총파업과 대조적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SF 독자들은 스팀펑크를 즐길 겁니다. 이것 이외에 다른 이유들 역시 있으나, 이런 보색 효과, 강조 효과는 커다란 특징일 겁니다. 지질학적인 상상력과 함께, 또 다른 특징으로서 <다섯 번째 계절>은 유럽 중심주의를 벗어납니다. 고요 대륙에는 제국이 있으나, 이 제국은 이른바 '표준 설정'이 아닙니다. 여러 판타지들과 사이언스 픽션들에서 제국은 백인, 남자, 상류층과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제국은 상류층 백인 남자의 상상력입니다. 중세 판타지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인간 제국은 하층민 흑인 여자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게임 속에서 중요한 인간들은 상류층 백인 남자들입니다.

 

흑인 여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흑인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오크나 트롤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워크래프트>는 오크들에게 조명을 비추느라 애쓰나, 결국 상류층 백인 남자들은 서사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가장 비중이 커다란 여자 등장인물은 가로나이나, 가로나는 인간이 아니라 오크입니다. 반면, <다섯 번째 계절>은 이런 표준적인 설정에서 많이 벗어납니다. 어쩌면 노라 제미신이 흑인 여자 작가이기 때문에, 흑인 여자 작가로서 노라 제미신은 표준 설정을 우회했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많은 판타지 독자들은 제국을 상류층 백인 남자와 쉽게 연결하나, <다섯 번째 계절> 같은 소설들이 늘어난다면, 표준 설정 역시 바뀔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주연 오로진들은 여자들입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소녀, 처녀, 엄마 오로진들을 보여줍니다. 소설이 소녀 오로진과 처녀 오로진을 보여줄 때,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선택합니다. 반면, 소설이 엄마 오로진을 보여줄 때, 소설은 직접 등장인물을 특별히 2인칭 대명사로 부릅니다. 숱한 판타지들은 여전히 (상류층 백인) 남자들에게 매달리나, <다섯 번째 계절>은 이런 숱한 남자 판타지들과 다릅니다. 물론 정말 중요한 것은 창작물이 아니라 창작물이 파생하는 현실입니다. 왜 숱한 판타지 창작물들이 상류층 백인 남자들에게 매달리나요?

 

유럽 중심주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 가부장 문화가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유럽 중심주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 가부장 문화는 서로 복잡하게 얽혔고 서로 떨어지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는 폭력적으로 발달했고 전세계를 장악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가부장 경제이고 동시에 유럽 중심적인 경제입니다. 현실 속에서 민중들이 이것들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숱한 판타지 작가들은 계속 상류층 백인 남자들에게 매달릴 겁니다. 하지만 <다섯 번째 계절> 같은 소설들이 늘어난다면, 어떤 독자들은 현실이 괴상하다고 감지할지 모릅니다. 그런 인식들은 현실을 바꾸는 각성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다섯 번째 계절>은 만화 <엑스맨>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에 영화 <엑스맨: 다크 피닉스>는 한창 홍보하는 중입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이런 초인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이 소설에서 판타지는 지질학적인 상상력과 멋지게 어울립니다. 이 소설은 진부한 상류층 백인 남자에게서 벗어납니다. (언제까지 남정네들이 한심하게 꽥꽥 소리나 질러대고 난장판을 피우는 판타지들이 유행할지, 참….) 이런 특징들 때문에, <다섯 번째 계절>은 상투적인 초인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야, 노라 제미신은 대단한 작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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