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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아쿠아>와 스팀펑크의 시대적인 제약 본문

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아쿠아>와 스팀펑크의 시대적인 제약

OneTiger 2019. 2. 25. 23:33

[이런 스팀펑크는 유럽 문명과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다른 문명들은 그렇지 않을지 모릅니다.]



2010년 비디오 게임 <아쿠아>는 스팀펑크 해상 전투를 이야기합니다. 배경 무대는 가상의 지구이고, 전세계적인 재난은 광범위한 지리를 바꿨습니다. 이제 더 이상 대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게다가 해수면은 상당히 높이 솟았죠. 인류는 새롭게 세력들을 편성하고 얼마 남지 않은 육지들을 지킵니다. 새로운 세력들은 서로 충돌하고, 당연히 그런 충돌은 해상 전투로 이어집니다. 육지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증기 함선을 조종하고 적군 함선들과 항공기들을 퇴치해야 합니다.


대재난은 인류 문명을 무너뜨렸으나, <아쿠아>는 별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분위기를 풍기지 않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분위기가 있다고 해도, 스팀펑크 해상 전투는 그걸 쉽게 묻어버립니다. <아쿠아>는 기본적으로 탑다운 슈팅 게임이고, 적군 함선들과 항공기들을 처치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주인공 증기 함선을 열심히 조종해야 합니다. 여러 게임 평론가들은 진부한 탑다운 슈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쿠아>가 노력했다고 호평합니다.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아쿠아>에 무슨 장점이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증기 함선들이 돌아다니는 모습과 이런저런 설정들, 그림들, 디자인들은 보기 좋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아쿠아>는 스페이스 오페라 비행 게임과 비슷합니다. 은하계에서 여러 세력들은 서로 싸우고, 게임 플레이어는 그런 세력들 중에서 하나에 속하고, 게임 주인공은 우주 전투기나 우주 함선을 이용해 적군 전투기들과 적군 함선들을 몰아내야 하고, 그렇게 게임 주인공은 우주 세력들의 알력 다툼에 휘말리고, 기타 등등.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이건 별로 드물지 않은 서사입니다. 사실 <엘리트> 시리즈, <윙커맨더> 시리즈, <프리랜서> 시리즈는 이런 서사를 따라가죠. <아쿠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엘리트>와 <윙커맨더>와 <프리랜서>는 3D 우주 비행 시뮬레이션에 가깝습니다.


이런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탐험, 무역, 전투를 병행할 수 있고 커다란 자유도를 누릴 수 있죠. <엘리트>와 <윙커맨더>와 <프리랜서>와 달리, <아쿠아>는 그저 탑다운 슈팅에 불과합니다. <아쿠아>는 3D 수중 환경을 구현하지 않고, 게임 플레이어는 탐험이나 무역 없이 오직 선형적인 전투만 반복해야 합니다. <아쿠아>는 <엘리트> 시리즈, <윙커맨더> 시리즈, <프리랜서> 시리즈와 똑같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게임들은 모두 제국 세력들이 갈등하는 동안 게임 주인공이 함선을 이용해 적군 함선들을 퇴치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적어도 이런 서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아쿠아>는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 주인공들과 달리, <아쿠아>의 주인공은 우주 함선이 아니라 증기 함선을 몰고 다니죠.



증기 함선을 몰고 다니기 때문에 <아쿠아>는 배경 설정에 스팀펑크 분위기를 덧붙여야 합니다. 스팀펑크 분위기를 풍겨야 하기 때문에 <아쿠아>는 어느 정도 제약을 받을지 모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 항해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기술력은 첨단을 달릴 겁니다. 당연히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는 수많은 제약들을 깨뜨릴 수 있죠. 사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수많은 설정들을 쓸어담을 수 있겠죠.


사실 초기 스페이스 오페라와 달리, 이른바 모던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극단적이고 실험적이고 하드한 설정들을 추구합니다. 그런 설정들은 진부한 우주 함대 전투로 흘러가지 않아요. 스팀펑크가 그럴 수 있을까요? 스팀펑크 역시 수많은 설정들을 쓸어담을 수 있을까요? 19세기 산업 시대라는 제약 속에서 스팀펑크가 급진적이거나 하드한 설정들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어떤 작가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할 테고, 어떤 작가는 그게 어렵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떤 작가는 기술적인 설정이 문제라고 생각할 테고, 어떤 작가는 '사회적인 설정이 문제'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실 19세기 산업 시대라는 배경은 비단 기술적인 설정만 아니라 사회적인 설정을 제약할지 모릅니다.



기본적으로 스팀펑크는 유럽 중심적입니다. 유럽 문명은 산업 혁명을 일으켰고, 스팀펑크 장르는 그런 사건을 피해가지 못합니다. 수많은 스팀펑크 설정들, 웅장한 비행선들, 태엽 자동인형들, 개조 생명체들, 구닥다리 같은 첨단 화기들, 거대한 공장들, 투박한 강화복들과 보행 병기들은 산업 혁명에서 비롯했습니다. 산업 혁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SF 작가들은 그런 것들을 상상할 수 있어요. 산업 혁명은 유럽과 어울려야 합니다. 산업 혁명은 사라센이나 이집트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수우 부족이나 아즈텍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이건 스팀펑크가 무조건 유럽을 묘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작가가 원한다면, SF 작가는 사라센 스팀펑크나 중국 스팀펑크나 아즈텍 스팀펑크를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산업 혁명이 유럽 문명이라고 상정합니다. 이런 일반적인 상식 때문에, SF 작가가 사라센 스팀펑크나 중국 스팀펑크나 아즈텍 스팀펑크를 묘사한다면, 그건 다소 어색할지 모릅니다. 19세기 유럽 문명이 산업 혁명을 일으키고, 근사한 프록코트를 걸치고, 공장들과 매연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동안, 중국은 (근대화는 고사하고) 아직 계몽주의 시대에조차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건 엄청난 격차죠. 2차 세계 대전 이후, 잿더미와 폐허 속에서 중국 인민 공사는 이런 격차를 따라잡아야 했고 그래서 그들은 숱한 뻘짓들을 저지릅니다.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팀펑크가 유럽 중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스팀펑크는 어색할 겁니다. 유럽 문명이 산업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 사상을 낳는 동안, 중국 사람들은 임금 노동이 뭔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유럽 문명과 스팀펑크는 아주 쉽게 이어질 수 있으나, 중국을 비롯해 다른 문명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팀펑크 장르는 사회적인 설정을 제약할지 모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중국 문명은 유럽 문명과 대등해질 수 있습니다. 아니, 비단 스페이스 오페라만이 아니라 이미 여러 우주 탐사 소설들과 영화들에서 중국은 유럽 및 미국과 대등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최신 소설 <붉은 달 Red Moon>처럼, 하드 SF 작가들은 아무렇지 않게 중국이 우주로 진출한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스팀펑크에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중국은 스팀펑크와 쉽게 어울리지 못해요. 스팀펑크는 유럽 중심적이어야 하죠. 흠, 중국이 스팀펑크와 어울리지 못한다면, 러시아는 어떨까요? <아쿠아>에서 게임 주인공들은 유럽 소속입니다. 그레이 선장과 폴리 에디슨은 유럽(영국) 소속 같습니다. 이런 스팀펑크 분위기에 러시아가 참가한다면, 그게 어울릴까요? <사이쓰> 같은 스팀펑크 게임은 러시아 세력을 묘사합니다. 그건 별로 어색하지 않고 꽤나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사이쓰>는 1차 세계 대전을 묘사합니다. <사이쓰>는 '1920+'이라는 설정에 속하죠. <사이쓰>는 이미 19세기 산업 혁명을 뛰어넘었습니다. 따라서 <사이쓰>에서 러시아가 스팀펑크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도, 그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쿠아>가 그럴 수 있을까요? <아쿠아>는 어떤 특정 시대를 주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쿠아>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과 미래적인 구닥다리를 뒤섞은 것 같습니다. 만약 러시아 세력이 이런 스팀펑크에 참가한다면, 러시아 세력은 19세기 분위기를 해칠지 모릅니다. 러시아 세력은 20세기 초반 분위기 및 미래적인 구닥다리와 어울릴 수 있을지 모르나, 물과 기름처럼, 19세기 분위기와 반발하겠죠.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러시아 제국이 후진적인 농업 국가라고 조롱했습니다. 러시아는 자신이 제국임을 내세웠으나, 그건 후진적인 농업 제국이었죠. 오스만 투르크 '제국' 역시 다르지 않았어요. 대영 '제국'은 이런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조롱했죠. 그래서 스팀펑크는 영국과 어울리고 러시아와 오스만과 중국과 어울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건 19세기 분위기의 스팀펑크가 절대 러시아와 오스만과 중국을 묘사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설정에 정답이 있겠어요? 하지만 스팀펑크 설정을 구상할 때, SF 작가들은 이런 시대적인 맥락을 고려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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