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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스팀펑크, 서구와 동구를 가르다

OneTiger 2019. 1. 10. 22:56

'스팀펑크'라는 장르 이름을 들을 때, 흔히 사람들은 과장된 19세기 과학 기술을 떠올릴 겁니다. 웅장하고 호화로운 비행선, 튼튼하고 철벽 같은 모니터 함선, 바닷속에서 크라켄과 싸우는 구닥다리 잠수함, 자동인형들, 개조 생명체들, 거대 공장들과 굴뚝들이 뿜는 시커먼 매연. 이런 것들은 스팀펑크를 장식하는 전형적인 소재들입니다. 이런 소재들이 19세기 산업 도시를 치장할 때, 사람들은 그런 장면을 스팀펑크라고 간주할 겁니다. 종종 스팀펑크는 20세기로 넘어가거나 아예 미래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소설 <마법사가 너무 많다>와 <파반>은 20세기 배경이고, <모털 엔진>은 아예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하지만 19세기 스팀펑크들과 <마법사가 너무 많다> 같은 20세기 스팀펑크, <모털 엔진>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스팀펑크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유럽 중심적인 분위기입니다. 기본적으로 스팀펑크는 유럽 문명에 기반합니다. 미국을 이야기하는 스팀펑크들 역시 많으나, 유럽과 미국은 모두 서구(western)에 속하죠. 영국과 프랑스와 기타 유럽은 미국을 '개척'했고, 그래서 미국과 유럽은 똑같이 서구가 됩니다. 특히, 냉전 시대에 이런 측면은 강해졌죠. 냉전 이전에도 유럽은 동구권이 나쁘다고 인식했으나 냉전 시대에 이런 측면은 훨씬 강해집니다.

 

 

유럽 사람들에게,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 사람들에게 동구는 위협이었습니다. 동구는 페르시아와 (비잔틴과) 이슬람과 인도와 몽골 같은 야만인들이 있는 위협이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까지, 동구는 끊임없이 유럽을 위협했고, 유럽은 동구에 온갖 나쁜 것들을 붙이기 시작했죠. 냉전 시대에 유럽은 새로운 위협을 발견했습니다. 그건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권 공산주의였죠. 그래서 유럽은 페르시아와 이슬람과 인도와 몽골에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권 공산주의를 덧붙이고 서구와 동구를 가릅니다. 여기에서 서구는 자유롭고 문명적이고 세련된 지역이고, 동구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무시무시한 지역이 됩니다.

 

심지어 '동구권'에 속하는 아시아 사람들조차 이런 관념에서 별로 자유롭지 않습니다. 분명히 남한 사람들은 동구에 속하나, 남한 사람들은 동구보다 서구가 훨씬 세련되었다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남한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학살자라고 욕하죠. 물론 소비에트 연방보다 유럽 자본주의가 훨씬 많은 양민들을, 훨씬 넓은 지역들에서, 훨씬 악랄하게 학살했음에도, 남한 사람들은 유럽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유럽 자본주의가 서구이기 때문입니다. 서구는 좋은 겁니다. 남한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다행히 망했다고 생각하나, 유럽 자본주의가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죠. 소설 <반지 전쟁>은 서구가 좋고 동구가 나쁘다고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그래서 남한 사람들이 열렬한 <반지 전쟁> 애독자들일까요.

 

 

그건 아니겠죠. <반지 전쟁>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심지어 <반지 전쟁>을 싫어한다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동구를 욕하고 서구를 옹호할 겁니다. 이런 편가르기가 제국주의에서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해방 이후, 미국(서구)은 남한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런 영향 속에서 남한은 서구가 좋다는 관념을 받아들였습니다. 한때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 공산당과 북한을 지지하는 목소리들은 작지 않았으나, 군사 정권은 그런 목소리들을 무자비하게 압살했고, 이제 서구가 세련되었다는 제국주의 관념은 상당히 지배적이죠. 아무리 영국이 수많은 인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영국이 고상한 서구이고, 인도가 촌스러운 동구이기 때문에.

 

세련된 서구 사람들이 촌스러운 동구 사람들을 학살한다고 해도, 그건 학살에 속하지 않아요. 그래서 학살 규모와 상관없이, 남한 사람들은 무조건 서구를 옹호하고 무조건 동구를 욕하죠. 하지만 예전에 한반도 사람들에게는 이런 관념이 있지 않았을 겁니다. 고려 사람들은 서구가 고상하고 동구가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제국주의 관념은 20세기 초반에서 비롯했죠. 그리고 제국주의는 식민지 지배에서 다시 비롯했습니다. 어떤 강대국이 커다란 식민지를 수탈할 때, 그건 제국주의가 됩니다. 고대부터 여러 제국들이 있었음에도, 왜 제국주의가 20세기 초반 관념일까요?

 

 

페르시아, 로마, 사라센, 아즈텍, 진은 모두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로마, 사라센, 아즈텍, 진의 확장 정책이나 무력, 수탈은 제국주의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아즈텍이 주변 약소 부족들을 수탈하고 학살하고 억압한다고 해도, 그건 제국주의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국가들을 겨낭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제국주의라는 용어가 나왔을 때, 그건 자본주의가 식민지를 수탈하는 상황을 가리켰습니다. 페르시아, 로마, 사라센, 아즈텍, 진은 모두 제국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없었습니다. 아즈텍이 약소 부족들을 수탈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편의상'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으나, 엄연히 아즈텍의 수탈은 제국주의에 속하지 않죠.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서구였습니다. 사실 서구 이외에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는 자본주의 강대국이 없었죠. 오스트레일리아는 예외가 될 수 있겠으나,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백인들이 '개척'한 지역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서구로 들어간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제국주의는 서구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다른 식민지 지역들을 구분합니다. 제국주의는 서구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식민지 지역들을 수탈하는 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서구는 계속 식민지 지역들을 수탈해야 했습니다. 18세기 이전까지 서구는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수탈했고, 19세기에 산업 혁명을 맞이한 이후, 서구는 아프리카와 중동과 동남 아시아와 동아시아로 본격적인 수탈의 총부리를 뻗기 시작합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식민지 수탈 없이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막대한 식민지들을 수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있죠. 학자들에 따라 의견들은 다를 수 있으나, 아무도 식민지 수탈이 자본주의에 일조한다는 관계를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오직 서구만 자본주의를 발달시킬 수 있었죠. 사라센이나 중국이나 인도나 아즈텍이나 에티오피아가 아니라 오직 서구만 자본주의를 발달시킬 수 있었습니다. 서구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두 대륙을 통째로 수탈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서구는 산업 혁명과 만납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적인 진보를 열어젖혔고, 그런 근대적인 진보는 21세기 초반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중이죠. 그리고 스팀펑크는 19세기 산업 자본주의에 기반합니다. 서구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막대한 식민지들을 수탈하고 산업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스팀펑크는 나타날 수 있었어요.

 

 

스팀펑크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제국주의, 산업 자본주의, 막대한 식민지 수탈. 여기에 노동 운동들과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는 페미니즘 역시 들어갈 수 있겠죠. 스팀펑크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르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스팀펑크는 서구 분위기를 강하게 풍겨야 합니다. 그래서 비서구 스팀펑크(non western steampunk)는 쉽게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물론 SF 작가가 베이징이나 카이로나 테노치티틀란이나 시리아 같은 도시에 비행선과 잠수함과 자동인형과 개조 생명체를 덧붙인다면, 그건 스팀펑크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가 테노치티틀란에 비행선을 덧붙인다고 해도, 그게 정말 스팀펑크가 될까요.

 

그건 그저 또 다른 서구 스팀펑크인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처럼, 비서구 스팀펑크는 마법 스팀펑크로 빠져야 하는지 모릅니다. 스팀펑크는 그저 과장된 19세기 과학 기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건 겉모습입니다. 스팀펑크 안에는 산업화가 부른 여러 결과들, 제국주의, 고통스러운 식민지 원주민들, 지저분한 환경 오염, 시커먼 매연, 환금 작물 농업과 열대 우림 파괴, 공산주의와 노동 운동들과 페미니즘이 있습니다. 작가가 테노치티틀란에 비행선을 덧붙인다면, 이런 요소들이 자동적으로 나타날까요. 글쎄요, 그건 쉽게 대답하지 못할 물음입니다. 어쩌면 SF 작가는 비서구 스팀펑크보다 소설 <쌀과 소금의 시대> 같은 대체 역사를 고민해야 할지 모릅니다.

 

 

비서구 스팀펑크를 만들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마법적인 스팀펑크입니다. 흔히 우리는 산업적인 스팀펑크를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하지만 팀 파워스가 <아누비스의 문>을 쓴 것처럼, 마법적인 스팀펑크 역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베이징과 카이로와 테노치티틀란과 시리아 역시 어색하지 않게 마법적인 스팀펑크를 시도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팀 파워스가 마법을 강조했다고 해도, 팀 파워스는 19세기 근대적인 산업 도시라는 배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가 노력한다고 해도, 19세기 카이로는 쉽게 근대적인 산업 도시가 되지 못하겠죠. 음, 정말 비서구 스팀펑크는 쉽지 않은 문제 같습니다.

 

물론 테이블 미니어쳐 게임 <워해머>의 스케이븐 세력처럼, 스콧 웨스터펠드가 쓴 소설 <베헤모스>에서 20세기 초반의 투르크가 스팀펑크 보행 병기를 만드는 것처럼, 비서구 스팀펑크는 아예 불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비서구 스팀펑크를 설정하고 싶다면, 서구 스팀펑크를 설정할 때보다 작가는 훨씬 많이 고민해야 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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