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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로맨서>의 꺼진 텔레비전 색깔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뉴로맨서>의 꺼진 텔레비전 색깔

OneTiger 2018. 10. 13. 18:43

소설을 비평할 때, 독자들은 여러 사안들에 주의해야 할 겁니다. 그것들 중에서 하나는 소설이 텍스트 매체라는 특징입니다. 소설책에서 하얀 것은 종이고, 검은 것들은 글자들입니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글자들입니다. 라이트 노벨들은 글자들 이외에 다양한 삽화들을 보여줍니다. 때때로 이런 삽화들은 라이트 노벨을 홍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아이들이 읽는 소설책들 역시 삽화들을 담았을지 모릅니다. 이런 소설책들에서 삽화들은 글자들보다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할지 모릅니다. 이런 것들은 소설책보다 그림책에 가깝죠.


시드니 파젯이 셜록 홈즈 그림을 알린 것처럼, 일반적인 소설들 역시 삽화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삽화들 때문에 독자들은 머릿속에 셜록 홈즈의 외모를 쉽게 떠올릴 수 있죠. 표지 그림 역시 중요합니다. 표지 그림이 멋지거나 예쁘다면, 소설책은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길 수 있을 겁니다. 여러 <백경> 소설책들은 거대한 하얀 고래가 포경 보트와 포경선을 깨부수는 웅장하고 압도적인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소설책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런 그림들은 시선을 끌 수 있겠죠. 이른바 주류 문학에서 <백경>은 가장 압도적인 표지 그림을 보여줄지 모릅니다. 이런 표지 그림은 어지간한 3류 괴수물 포스터보다 낫겠죠.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소설은 글자들입니다. 아무리 삽화가가 멋진 삽화를 그린다고 해도, 아무리 표지 그림이 멋지다고 해도, 아무리 어린이 동화책들에서 삽화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글자들은 소설을 이루는 근본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오직 글자들을 통해 독자들은 소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약 글자들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에서 소설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연극, 영화, 테이블 게임과 비디오 게임은 어느 정도 살아남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이런 것들은 그림이나 동영상이나 음악을 포함합니다. 무성 영화는 글자들 없이 존재할 수 있을 겁니다.


반면, 글자들 없이 소설은 절대 존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삽화들이 예쁘다고 해도, 글자들이 사라진다면, 라이트 노벨은 더 이상 소설책이 아닐 겁니다. 글자들 없는 라이트 노벨은 그림책이 되겠죠. 독자들은 글자들을 통해 소설을 읽고, 그래서 단어들을 고르기 위해 소설 작가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어떤 작가는 대충 문장을 지을지 모르나, 문장 하나를 위해 어떤 작가는 몇 시간을 방황할지 모르죠. 번역자들 역시 이런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떤 단어나 어떤 문장이 원문의 매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가? 언제나 번역자들은 고민합니다. 원문이 독특하다면, 번역자는 두 배 고민할 겁니다.



언뜻 이런 단어들은 별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작가가 아무 단어를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글자들이 그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무슨 단어를 고르든, 그런 사람들은 그저 내용이 중요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해석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고, 단어 때문에 감정은 크게 바뀔지 모릅니다. 수많은 독자들은 그저 사실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소설은 그저 딱딱하게 사실들만을 나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실주의 소설들조차 그러지 않을 겁니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에게 공감하고, 등장인물들의 분노와 슬픔과 갈등과 애정을 느끼고 싶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어들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시와 달리, 소설은 구태여 운율을 맞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어들은 감정을 크게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어울리는 단어들을 찾느라 애쓸 겁니다. 가령,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바리케이드들 뒤에서 대학생들은 붉어진 얼굴들로 붉은 깃발들을 휘둘렀다." 여기에서 '붉어진 얼굴들'은 흥분한 얼굴들이나 열정적인 얼굴들을 가리킬 겁니다. 흥분할 때, 사람들은 얼굴을 붉히죠. 하지만 작가는 흥분한 얼굴 대신 붉어진 얼굴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왜 작가가 이런 묘사를 골랐을까요. 작가는 가투 현장이 투쟁적이라는 사실을 훨씬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작가는 붉은색을 강조하고 싶었을 테고, 그래서 붉어진 얼굴들과 붉은 깃발들을 연이어 늘어놓았을 겁니다. 독자들은 붉다는 시각적인 감성을 받을 수 있고, 가투 현장이 투쟁적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모든 독자가 이걸 느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독자들은 대학생들이 부끄러워하거나 수줍어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바리케이드들 뒤에서 여학생과 남학생이 연애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죠. 좋아하는 연인 앞에서 여학생과 남학생은 얼굴을 붉히는지 모르죠. 붉은 장미처럼 붉은 깃발은 사랑을 고백하는 상징일지 모르죠. 그건 틀리지 않은 해석입니다. 문학은 열린 대상이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바리케이드와 붉은 깃발은 거리 투쟁을 의미하고, 여러 독자들은 연애보다 투쟁을 느낄 겁니다. 한편으로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여학생은 붉은 장미 같았다. 남학생은 고개를 돌렸다. 붉은 저녁 노을은 아주 아름다웠다." 이런 문장 역시 붉다는 시각적인 측면을 두 번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건 별로 투쟁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은 연애 소설에 어울릴 겁니다. 여학생, 붉은 장미, 아름다운 붉은 노을, 고개를 돌린 남학생은 사랑에 빠진 감정이나 부끄러움, 수줍음을 나타낼 수 있겠죠. 분명히 사랑과 수줍음 때문에 남학생은 얼굴을 붉혔을 겁니다. 작가는 그걸 붉은 노을에 은유했죠. 피가 붉은색이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이런 문장에서 출혈이나 상처를 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연애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작가는 저런 문장을 썼겠죠.



하지만 어떤 독자들은 이게 그저 주류 문학에 해당된다고 치부할지 모릅니다. SF 소설들은 발상과 설정에 주목합니다. 따라서 단어를 고를 여유가 있다면, SF 작가는 발상과 설정에 주목하는 편이 나을지 모르죠. 아름다운 붉은 장미 같은 여학생을 바라보는 동안 붉은 노을처럼 남학생이 얼굴을 붉힌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SF 작가들은 인류 문명과 진화 역사와 외계 우주를 바라봐야 합니다. 여기에 연애 같은 시시한 감정이나 설레는 사랑을 위한 단어 따위는 들어가지 못하겠죠. 그렇다고 해도 단어들은 중요합니다. 멋진 단어들은 소설을 아주 인상적으로 장식할 수 있습니다.


소설 <뉴로맨서>에서 윌리엄 깁슨은 아주 퇴폐적이고 인상적인 첫머리를 썼습니다. 소설 첫머리에서 하늘은 꺼진 텔레비전 색깔입니다. 항구의 하늘은 "방송이 끝난 텔레비전 색깔"이죠. 윌리엄 깁슨은 그저 하늘이 우중충하다고 쓰지 않았습니다. 그건 너무 단편적인 표현이죠. 텍스트 매체는 비유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림이나 동영상은 그러지 못하죠. 그림이나 동영상은 대상을 직접 조명합니다. 그래서 그림이나 동영상은 대중적이죠.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하지만 그림이나 동영상은 어떤 대상을 다른 것으로 직접 연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화 감독들은 장면 전환 기법을 중시하죠. 영화 <에일리언 2>에서 리플리의 얼굴이 지구로 바뀌는 장면은 리플리가 지구처럼 모성적이라는 비유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런 장면 전환 기법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죠. 반면, 소설에서 작가들은 수시로 비유들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글자들은 대상을 추상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글자들은 어떤 대상을 쉽게 다른 대상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방송이 끝난 텔레비전 색깔인 것처럼. 이건 그저 우중충한 하늘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끝나다'라는 표현은 부정적입니다. 이건 죽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영어 원문은 아예 dead channel이라고 씁니다.) 그래서 꺼진 텔레비전 같은 하늘은 죽음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사실 <뉴로맨서>는 고통과 폭력과 죽음이 어울리는 디스토피아 소설이죠.


게다가 텔레비전은 시대적인 맥락을 나타낼지 모릅니다. 텔레비전은 20세기 후반 장비입니다. 19세기 유럽 사람 셜록 홈즈는 절대 꺼진 텔레비전 운운하지 못했을 겁니다. 중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로도스도 전기>에는 하이 엘프 디드리트가 있습니다. 디드리트는 아주 아름답고, 멋진 마법들을 부릴 수 있으나, 죽었다 깨어나도 꺼진 텔레비전이 무엇인지 모를 겁니다. 꺼진 텔레비전은 20세기 후반에 어울리는 은유입니다. 아무리 소설이 열린 매체라고 해도, 판타지 소설이 상상력을 추구한다고 해도, <로도스도 전기>에서 디드리트가 (그 예쁘고 보드라운 입술로) 꺼진 텔레비전 운운한다면, 독자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릴 겁니다.



존 가드너가 쓴 소설 <그렌델>에서 불을 뿜는 드래곤은 희한한 소리들을 주절거립니다. 이건 꽤나 이상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고대 북유럽의 화염 드래곤이 바나나 껍질 개그를 운운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이런 표현은 부조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만약 <로도스도 전기>에서 디드리트가 꺼진 텔레비전 운운했다면, 그건 부조리한 표현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디드리트는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이고, 부조리한 표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엘프 아가씨가 나오는 <로도스도 전기>에는 부조리한 표현이 어울리지 않죠. 반면, <뉴로맨서>는 사이버펑크이고, 꺼진 텔레비전은 사이버펑크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어쩌면 윌리엄 깁슨은 꺼진 텔레비전보다 꺼진 컴퓨터 화면이라고 썼어야 할지 모릅니다. <뉴로맨서>가 사이버펑크 소설이기 때문에 꺼진 컴퓨터 화면은 꺼진 텔레비전보다 훨씬 나을지 모르죠. 하지만 <뉴로맨서>는 1984년 소설이고, 그렇게 컴퓨터들은 대중화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가정 네트워크 시스템이 발달했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컴퓨터보다 텔레비전이 친숙하다고 여기죠. 그래서 윌리엄 깁슨은 컴퓨터 화면보다 텔레비전을 골랐을지 모릅니다. 이게 훨씬 시각적인 측면을 빨리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연상하기가 훨씬 쉽죠.



어떤 독자들은 이런 해석이 너무 과도하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이 게시글에서 하늘과 꺼진 텔레비전을 설명하기 위해 저는 이것저것 이야기했습니다. 고작 문장 하나에 이런 해석들은 너무 과도할지 모르죠. 어쩌면 이 문장을 쓸 때, 윌리엄 깁슨은 아예 저런 것들을 고민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몇몇 단어는 중요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런 것들 때문에 <뉴로맨서>의 첫머리는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만약 소설을 깊이 분석하고 싶다면, 그게 SF 소설이라고 해도, 이런 해석은 유용할지 모릅니다. 소설이 글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진정한 소설 비평이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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