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녹색 생명체를 품는 (로봇) 여자, 이브 본문
[이브는 기본적으로 녹색 식물을 품습니다. 여자들이 '몸으로' 생명체를 품고 낳고 먹이는 것처럼.]
애니메이션 <월-E>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중에서 <월-E>는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다국적 기업은 거대한 독점 시장을 운영했고 지구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모든 대기업의 꿈은 독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유 시장 경제가 중요하다고 착각하나, 사실 기업들은 자유 시장 경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계속 합병과 독점을 추구합니다. 기업들은 수많은 계열사들을 만듭니다. 중앙 부서들은 생산을 조절합니다. 중앙 부서들은 계열사들을 관리합니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경제 현상을 '계획 경제'라고 부릅니다. 기업들은 계획 경제를 좋아합니다. 기업들은 자유 시장 경제가 불가능하고 계획 경제가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업들은 끊임없이 계획 경제를 추구합니다. 이건 흔히 우리가 말하는 '공산주의 계획 경제'와 다릅니다. 독점 시장은 계획 경제들 중에서 하나가 될 수 있으나, 결국 이건 극심한 관료 체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거대 독점 시장은 무산자 민중 계급이 직접 참가하는 '공산주의 계획 경제'가 아닙니다. 독점 시장 상층부는 극심한 관료 체제와 비슷하고, 양쪽 모두 불행한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월-E>는 불행한 환경 아포칼립스를 보여줍니다. 지구는 쓰레기 폐허가 되었고, 청소 로봇 월-E는 엄청난 쓰레기 건물들을 헤칩니다. <월-E>는 바다를 보여주지 않으나, 어쩌면 바다 역시 쓰레기장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쓰레기 섬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 섬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지상에 고층 쓰레기들이 가득하다면, 바다에는 쓰레기 섬들이 가득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 로봇 월-E는 녹색 새싹과 만납니다. 황량한 쓰레기 지구에서 녹색 새싹은 드뭅니다. 사방이 폐허가 되었음에도, 녹색 새싹은 싱그러움을 자랑합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녹색 새싹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문제는 월-E가 새싹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월-E는 생명력이 번성하거나 자연 환경이 풍성해지거나 생물 다양성이 늘어난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청소 로봇은 그저 열심히 청소할 뿐입니다. 녹색 새싹은 그저 수많은 수집품들 중에서 하나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브에게 상황은 아주 다릅니다. 이브는 식물 탐사 로봇입니다. 지구에서 이브는 생명체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월-E는 이브에게 녹색 씨앗을 보여주고, 이브는 그것을 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브는 뱃속에 생명체를 품습니다. 월-E는 뱃속에 쓰레기를 품으나, 이브는 뱃속에 생명체를 품습니다. 그리고 이브는 여자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황량하고 쓰레기들이 넘친다고 해도, 여자는 뱃속에 생명체를 품습니다.
아니, 잠깐. 이브가 여자인가요? 관객들이 이브를 여자라고 간주할 수 있나요? 이브는 로봇입니다. 로봇에게 성별은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로봇들은 서로 연애하거나 키스하거나 섹스하지 않을 겁니다. 2016년 비디오 게임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여자 아나운서 로봇을 보여줍니다. 여자 아나운서 로봇에게는 두 젖가슴이 있습니다. 두 기계 젖가슴은 그저 모방에 불과합니다. 여자 아나운서 로봇은 아이를 낳지 않을 테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여자 로봇은 로봇 아기(?)에게 오일 모유(?)를 먹일지 모르나, 왜 아나운서 로봇이 인간 형태이어야 합니까? 아나운서 로봇이 인간 형태를 모방해야 합니까? 이런 법칙이 있나요?
법칙은 없습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스페이스 오페라이고, 흔한 다른 스페이스 오페라들처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그저 인간 형태 외계인들과 인간 형태 로봇들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외계인, 로봇, 괴수에게 인간을 대입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들 역시 외계인, 로봇, 괴수에게 인간을 대입합니다.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나 피터 왓츠 같은 하드 SF 작가는 이런 상황을 한심하다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나 낸시 크레스가 보여주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와 사이언스 판타지가 인간을 외계인에 대입할 때, 외계인은 훌륭한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외계인이 훌륭한 비유가 될 수 있다면, 로봇 역시 훌륭한 비유가 될 수 있겠죠. 왜 사이언스 픽션이 비유를 버려야 합니까? 모든 문학에는 상징과 비유가 있습니다. 상징과 비유는 문학의 가장 커다랗고 감동적인 미덕일지 모릅니다. 상징과 비유가 있기 때문에, 낸시 크레스가 쓴 외계인 이야기를 읽은 이후, 독자들은 감동할 수 있습니다. 낸시 크레스가 감동적으로 인간을 외계인에 대입할 수 있다면, <월-E> 역시 감동적으로 인간을 로봇에 대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로봇에게 성별이 없다고 해도, 이브는 여자가 될 겁니다. 어떤 관객들은 로봇에게 성별이 없고 이브가 여자가 아니라고 주장할 겁니다.
이런 해석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브는 여자가 아닐 수 있고 동시에 이브는 여자일 수 있습니다. 이브라는 이름이 여자 이름이기 때문에, 이브가 여자 목소리로 웃기 때문에, 이브는 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팬 아트(링크)처럼, 여러 <월-E> 팬 아트들 역시 이브를 (하얀 머리카락이 있고 하얀 슈트를 입은) 여자라고 묘사합니다. 반면, 월-E는 남자입니다. 남자로서 월-E는 여자(이브)에게 반하고, 여자(이브)에게 꽃(바람개비)을 주고, 여자(이브)와 연애하고 싶어합니다. 이브가 월-E에게 찌릿하게 신호할 때, 그건 황홀한 키스가 됩니다.
이게 성 차별적인 해석일까요? 어떤 관객들은 왜 두 로봇이 여자와 남자가 되어야 하는지 물을 겁니다. 로봇은 로봇이고, 이브와 월-E에게는 아무 성별이 없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브와 월-E는 레즈비언 연인이거나 게이 연인일 수 있습니다. 로봇에게 성별이 없기 때문에, 이브와 월-E는 레즈비언 연인이거나 게이 연인일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들 역시 틀리지 않을 겁니다. 픽사가 이런 해석들을 부인한다고 해도, 이런 해석들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브와 월리가 여자 이름과 남자 이름이기 때문에, 이브와 월-E가 여자 목소리와 남자 목소리로 말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브와 월-E가 여자와 남자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월-E는 녹색 새싹을 주고, 이브는 녹색 새싹을 뱃속에 품습니다.
남자는 생명체를 보여주고, 여자는 생명체를 품습니다. 결국 이건 생명체 번성으로 이어집니다. 이브는 생명체를 품는 여자입니다. 녹색 새싹을 지키기 위해 월-E 역시 애썼으나, 이브를 만나기 전에 월-E는 녹색 새싹을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브는 기본적으로 식물을 품습니다. 이건 이브의 절대적인 임무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이브는 생명체를 품는 여자입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자가 생명체를 품고 낳고 먹이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생명체를 품고 낳고 먹입니다. 이걸 해석하는 시각들은 서로 다르나, 고대 주술사들부터 21세기 초반 과학적인 시민들까지, 급진적인 에코 페미니즘부터 수구 꼴통 같은 가부장 문화까지, 모두 여자가 생명체를 품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브는 생명체를 품고, 결국 이건 풍성한 생물 다양성으로 이어집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풍성한 생태 유토피아가 됩니다. 여자가 생명체를 품을 때, 황량한 쓰레기 세상은 풍성한 생물 다양성이 될 수 있습니다. 흔히 창작물들은 이런 현상을 어머니 자연에 비유합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는 것처럼, 자연은 생명체들을 낳고 먹이 그물망을 짭니다. 여자와 자연은 똑같이 생산적입니다. 여자는 '몸으로' 아이를 낳고 '몸으로' 젖을 먹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자연은 꽤나 흔한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몸으로' 생명체들을 먹이기 때문에 여자가 기본적으로 생태적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분명히 여자는 '몸으로' 생명체들을 먹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자가 기본적으로 생태적일 수 있나요? 수구 세력 속에서 여자가 성장한다고 해도, 여자가 가부장적인 편견과 오해를 무조건 극복하고 타파할 수 있나요? 수구 세력 속에서 여자가 성장한다고 해도, 여자가 무조건 환경 보호와 평화 시위를 지지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여자가 '몸으로' 생명체를 먹인다고 해도, 이건 여자가 무조건 생태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생물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여자보다 남자는 생물적으로 비생산적이나, 수구 세력 여자가 온실 가스에 찬성할 때, 좌파 정당 남자는 온실 가스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문제는 폭력적인 가부장 문화와 무자비한 성 폭행들입니다. 수많은 여자들은 이런 위협들에 시달립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자각하고 해결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저항하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19세기 이전까지, 여자들은 국제적으로 단결하지 못했으나, 산업 자본주의가 세계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이제 여자들은 집단을 이룰 수 있습니다. 대규모 산업 공장에서 거대한 노동 조합이 비롯하는 것처럼,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여자들은 집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비단 프롤레타리아 계급만 아니라 저항하는 여자들을 만들었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모든 인류가 폭력적이고 저항하는 여자들 역시 폭력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항하는 여자들이 폭력적이라고 해도, 그게 대수입니까? 이제까지 엄청나게 오랜 동안,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들은 짓밟혔습니다. 저항하는 여자들이 가부장 사회를 짓밟는다고 해도, 저항하는 여자들이 끔찍한 지옥을 만든다고 해도, 이건 훨씬 공평한 지옥이 될 겁니다. 이제까지 가부장 사회가 여자들을 짓밟았다면, 여자들 역시 '공평하게' 가부장 사회의 자지를 싹둑싹둑 자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지옥이라고 해도, 이건 공평한 지옥입니다. 적어도 불공평한 가부장 지옥보다 공평한 지옥은 훨씬 낫습니다.
물론 저항하는 여자들을 비롯해 사람들이 공유 사회를 만든다면, 공유 사회에서 거대 권력은 한쪽에 쏠리지 못할 겁니다. 거대 권력이 한쪽에 쏠리지 못한다면, 대규모 폭력 사태는 나타나지 못할 테고, 애석하게도(?) 공평한 지옥 역시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사회 구조가 평등할 때, 대규모 폭력 사태가 사라질 때, 인류 사회는 제대로 자연 환경을 관리할 겁니다. 약자들이 강자들에게 저항할 때, 사회 구조는 평등해질 테고, 이런 사회는 제대로 자연 환경을 관리할 수 있겠죠. 인간이 인간을 극심하게 착취하고 폭행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환경 보호가 가능하겠습니까. 환경 오염들이 약자들을 괴롭힌다고 해도, 강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을 테고 계속 자연 환경을 수탈할 겁니다.
따라서 저항하는 약자들과 환경 보호는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가지는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훨씬 약자에 속하고, 따라서 여자들이 저항할 때, 인류 사회는 심각한 환경 오염들을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환경 아포칼립스와 생태 유토피아에서 여자와 자연은 중요합니다. 여자는 기본적으로 생태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여자가 몸으로 아이를 먹인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수유는 생태적이지 않을 겁니다. 여자가 약자에 속하고, 약자가 저항해야 하기 때문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에서 여자들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임신과 출산, 수유는 생태적인 측면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수유 현상이 무조건 생태적인 측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여기에는 커다란 잠재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이 생산적이라고 간주하고, 여자 역시 자신의 몸이 생산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출산과 수유는 생산입니다. 인류 문명에서 이건 아주 필수적이고 원초적인 생산입니다. 소설 <신비의 섬>처럼, 아무리 남자들이 훌륭한 문명을 만든다고 해도, 여자가 생산하지 않는다면, 이내 훌륭한 문명은 사라질 겁니다. 자연이 생명체들을 낳고 먹이는 것처럼, 여자가 아이를 배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먹일 때, 자연처럼 여자는 자신이 생산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제3세계 생태 마을들에서 여자들이 영성을 따르고 자연 환경을 보호하는 것처럼, 여자들이 자연 환경에 가까이 다가갈 때, 여자들은 어머니 자연을 훨씬 깊게 느낄 수 있겠죠.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을 비롯해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겁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는 어머니 자연에게 아무 가치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여자는 어머니 자연이 되지 못할 겁니다. 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여자가 자연을 가까이 대할 때, 여자는 '자신의 몸'을 다시 돌아볼 수 있고 어머니 자연을 깊게 느낄 겁니다. (당연히 이런 평등한 사회에서 돌봄 노동들은 사회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 아포칼립스들과 생태 유토피아들에서 어머니 자연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연을 돌보는 여자들은 중요합니다. 이렇게 환경 아포칼립스, 생태 유토피아, 자연을 돌보는 여자, 어머니 자연은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월-E>는 이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월-E>는 그저 가족 애니메이션에 불과하고, 여기에는 어머니 자연이나 에코 페미니즘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연을 돌보는 여자가 중요한 저항 요소이기 때문에, 이브에게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브가 녹색 새싹을 품을 때, 관객들은 여러 가지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