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소설 <개미> 속의 거미가 여자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본문
[창작물 속에서 거미는 여자가 되거나 남자가 될 수 있어요. 그 자체로서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소설 <개미>에서 어느 날 소설 주인공 레티샤 웰즈는 뜨개질하는 여자를 봅니다. 레티샤 웰즈는 뜨개질하는 여자가 거미 같다고 생각합니다. 거미가 거미줄을 짓기 때문에, 뜨개질하는 여자는 거미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소설 <개미> 시리즈가 온갖 곤충들과 벌레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런 비유는 심상치 않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라크네 역시 뜨개질하는 여자이고 동시에 거미입니다. 뜨개질하는 여자와 거미줄을 짓는 거미 사이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뜨개질하지 않기 때문에, 뜨개질이 남성적인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거미줄을 짓는 거미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됩니다.
누군가가 뜨개질을 할 때, 흔히 사람들은 여자가 뜨개질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무조건 여자가 뜨개질해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건 가부장 문화가 저지르는 편견일지 모릅니다. 뜨개질이 여성적인 노동이기 때문에, 아라크네처럼, 뜨개질하는 여자와 거미줄을 짓는 거미는 쉽게 이어집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레베카 솔닛은 뜨개질하는 여자를 거미줄을 짓는 거미에 비유합니다. 레베카 솔닛은 많은 거미들이 여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동화 <샬롯의 거미줄>에서 샬롯은 여자인지 모릅니다. 여자들이 뜨개질하는 것처럼, 샬롯은 뜨개질(?)하고 돼지 윌버를 구합니다.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 고향 헬턴트를 떠나기 전에 잠시 동안 후치 네드발은 연인(?) 제미니와 함께 단아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때 제미니는 뜨개질합니다. 제미니 스마인타그는 갑옷과 칼자루를 실로 연결합니다. 제미니는 "아여의 이아(마력의 시간)?"라고 물어요. 후치는 그 모습을 보고 제미니에게 푹 빠집니다. 제미니의 여성스러운 측면, 이른바 '여자력' 덕분에 후치는 제미니에게 푹 빠집니다. 뜨개질은 여성스러운 측면, 가정적인 측면, 여자의 영역입니다. 이건 여자들이 생물적으로 뜨개질에 특화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꾸 남자들이 여자들을 가르치기 원하는 것처럼, 자꾸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여자력'으로 밀어넣기 때문에, 뜨개질은 여자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들이 여성적인 활동들을 담당하고 남자들이 산업 노동들을 담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이른바 '여자력'을 함께 맡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미니 스마인타그처럼, 뜨개질하는 소녀는 귀엽고 예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뜨개질하는 소년 역시 귀엽고 예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과 남자들이 함께 '여자력'을 발휘할 때, 가부장 문화는 폭력과 전쟁에 남자들을 동원하지 못합니다. 폭력과 전쟁에 남자들을 동원하고 싶다면, 가부장 문화는 남자들을 '여자력'에게서 떨어뜨려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가부장 문화는 여자들을 가르치기 원하고 남자들이 공격적이라고 세뇌시킵니다.
이건 <샬롯의 거미줄>에서 샬롯이 가부장 문화를 상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작물들 속에서 뜨개질하는 여자, 거미줄을 짓는 '여자' 거미는 무조건 가부장 문화를 상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뜨개질하는 여자 배후에는 억압적인 사회 구조가 있습니다. 독자들이 지배적인 관념을 재생산하고 싶지 않다면, 독자들이 거미줄을 짓는 '여자' 거미를 볼 때, 독자들은 가부장 문화를 의식할 수 있을 겁니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여자 주인공 미츠하는 찢어진 옷을 꿰매고 '여자력' 운운합니다. 여자력은 여자가 가정적인 측면에 어울린다고 말합니다. 여자력은 여자가 사회 활동에 참가하거나 여자와 남자가 함께 가정적인 측면을 맡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건 현모양처 개념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속에서 미츠하가 여자력 운운할 때, 관객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재생산할지 모릅니다. 관객들이 이걸 막고 싶다면, 미츠하가 여자력 운운할 때, 관객들은 여자력이라는 용어가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의식할 수 있습니다. 샬롯처럼, 거미줄을 짓는 여자 거미 역시 이런 잔재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레베카 솔닛은 거미줄을 짓는 여자 거미를 언급했을 겁니다. 여러 창작물들에는 샬롯 같은 여자 거미들이 있을 겁니다.
샬롯은 긍정적인 사례입니다. 하지만 <개미> 시리즈에서 소설 주인공은 개미들이고, 거미는 개미를 잡아먹습니다. 소설 주인공 레티샤 웰즈가 뜨개질하는 여자를 무덤덤하게 바라보거나 친근하게 바라본다고 해도, 개미들에게 거미는 무덤덤하거나 친근하지 않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개미> 시리즈는 자연에 선과 악이 없다고 말합니다. 개미가 거미를 깨물거나 거미가 개미를 거미줄로 휘감는다고 해도, 그건 그저 먹이 그물망에 불과합니다. 여기에는 도덕, 윤리, 선악이 없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개미들에게 감정을 이입한다면, 독자들은 거미를 좋게 바라볼 수 없을 겁니다.
<개미> 시리즈에서 벨로캉 개미들과 아스콜레인 꿀벌들은 전쟁을 벌입니다. 벨로캉 개미 군단은 황금의 벌집 아스콜레인을 침략합니다. 하지만 벨로캉 군단은 아스콜레인을 정복하지 않습니다. 벨로캉 원정대는 그저 몇몇 지원을 원했을 뿐입니다. 아스콜레인 꿀벌들은 벨로캉 원정대에 합류하고, 개미들과 꿀벌들 사이에는 특별히 원한 관계가 없습니다. 비록 개미들과 꿀벌들이 전쟁을 치르렀다고 해도, 소설은 개미들과 꿀벌들을 특별히 선악으로 분류하지 않아요. 하지만 거미는 포식자이고, 독자들은 거미가 나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개미>에는 우화와 비슷한 측면이 있고, 독자들은 개미들에게 감정을 이입합니다.
소설 <왕의 귀환>에서 쉴롭은 부정적인 사례가 될 겁니다. 쉴롭은 거대한 여자 거미입니다. 동시에 쉴롭은 끊임없이 살을 찌우기 원합니다. 쉴롭은 계속 다른 생명체들을 잡아먹어야 합니다. 쉴롭은 탐욕스럽고, 탐욕에는 끝이 없습니다. 쉴롭은 사방에 거미줄들을 치고, 오크들을 잡아먹고, 심지어 반지 운반자 프로도 배긴스를 잡아먹기 원합니다. <샬롯의 거미줄>에서 샬롯이 거미줄들을 치는 것처럼, 쉴롭은 사방에 거미줄들을 칩니다. 샬롯은 윌버를 구하나, 쉴롭은 누군가를 구하지 않습니다. 쉴롭은 누군가를 잡아먹기 원합니다. 이건 별로 가정적인 측면이 아니고 '여자력'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샬롯처럼 쉴롭은 거미줄을 짓는 여자 거미입니다. 프로도 배긴스를 구하기 위해 샘 갬기는 단검 스팅을 휘두르고 쉴롭과 싸웁니다. 샘 갬기는 단검을 쉴롭의 복부에 찌르고, 쉴롭은 피를 흘립니다. 쉴롭은 어두운 구멍 속으로 도망칩니다.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이걸 섹스에 비유합니다. 남자 샘 갬기는 단검을 여자 쉴롭의 복부에 찌릅니다. 여자 쉴롭은 피를 흘리고 아프다고 느낍니다. 단검은 성기가 되고, 복부는 음문이 되고, 피는 섹스 이후 출혈이 됩니다. 이런 비유 속에서 남자 샘 갬기와 여자 쉴롭은 섹스하는 관계입니다. 쉴롭이 도망치기 때문에, 이런 비유적인 섹스 속에서 남자는 여자를 정복하고 승리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장된 해석일지 모릅니다.
아무리 쉴롭이 뜨개질하는 여자라고 해도, 샘 갬기와 쉴롭의 싸움이 섹스하는 남자와 여자인가요? 어떤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그렇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작가 존 로널드 톨킨이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톨킨은 저도 모르게 비유적인 섹스를 집어넣었을지 모릅니다. 인간은 '저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내거나 뭔가를 저지릅니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소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합니다. 숱한 작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작가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소설과 현실 속의 소설책은 다릅니다. 그래서 존 로널드 톨킨이 비유적인 섹스를 거부한다고 해도, 샘 갬기와 쉴롭은 섹스를 상징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어떤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이런 해석에 반대할 겁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게다가 정말 샘 갬기와 쉴롭이 비유적으로 섹스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쉴롭은 인상적인 괴물이나, 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쉴롭은 나즈굴들과 다릅니다. 쉴롭은 흥미로운 논의 대상이나, <반지 전쟁>에는 쉴롭 이외에 다른 주된 논의 대상들이 있습니다. 골룸부터 데네소르 섭정까지, 주된 논의 대상들은 넘쳐납니다. (게다가 다들 남자들입니다.) 게다가 쉴롭이 유명하다고 해도, 판타지 창작물들이나 SF 창작물들에서 거미줄을 짓는 거미는 언제나 여자가 아닙니다.
만화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대부분 스파이더맨들은 피터 파커입니다. 최근에 스파이더 그웬은 커다란 인기를 끄는 중입니다. 스파이더맨 피커 파커처럼, 스파이더 그웬은 꽤나 유명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스파이더맨은 피터 파커입니다. 스파이더 그웬이 성 상품이 되고 남성 판타지를 자극하든, 새로운 여자 초인 영웅이 되든, 블록버스터 실사 영화 <스파이더 그웬>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국 초인 영웅 만화들에서 전통적으로 초인 영웅들은 남자들이었고, 거미줄을 짓는 거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파이더맨처럼, 거미줄을 짓는 남자 거미들은 드물지 않을 겁니다.
고대부터 사람들이 아라크네 같은 신화들과 전설들을 지었다고 해도, 예외 사례들은 드물지 않을 겁니다. 이건 레베카 솔닛이 거미와 여자를 잘못 비유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지배 계급이 계속 여성적인 노동을 무시한다는 사실입니다. 뜨개질을 비롯해 여성적인 노동은 보조적인 것이 되고, 그래서 여자들 역시 차별을 당합니다. 그 자체로서 거미와 여자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개미를 잡아먹는 거미와 샬롯과 쉴롭과 스파이더 그웬은 문제가 아닙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가 있기 때문에, 거미와 여자는 문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