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노래하던 새들>이 탐험을 이야기하다 본문
[게임 <서브머지드>의 한 장면.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폐허 탐험은 좋은 궁합입니다.]
소설 <해변에서>는 핵 전쟁 아포칼립스입니다. 특이하게 이 소설에서 북반구와 남반구의 상황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북반구의 강대국들이 전쟁을 벌인 까닭에 방사능 낙진이 북반구를 휩쓸었어요. 결과적으로 남반구는 안전하고, 북반구 인구가 절명했음에도 남반구 사람들은 평화롭게 지냅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방사능 낙진이 남쪽으로 밀려오기 때문이죠. 그래서 남반구에 대피 중인 어떤 사람들은 북반구를 조사하기 위해 잠수함을 타고 출발합니다.
그 잠수함은 죽음과도 같은 고요한 세계를 떠돌고 문명의 붕괴를 확인하죠. 아마 잠수함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중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사실 그 승무원들은 친숙한 고향땅을 지나가는 중이었으나, 그 고향땅은 이미 방사선 낙진에 휠쓸렸고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 승무원들은 이런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하겠죠. 대재앙은 친숙한 고향땅을 낯선 장소, 비경으로 바꿀 수 있어요. 유럽인 탐험대가 남아메리카 열대 밀림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만큼 잠수함 승무원들은 파괴된 고향땅을 낯설게 바라봤을지 모릅니다.
소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비경 탐험의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소설에서 문명은 붕괴했으나, 어느 작은 산골 마을은 살아남았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오손도손 살아가는 중이었으나, 이내 물자와 장비가 노화되거나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들은 더 좋은 물자와 장비를 얻기 위해 산골 마을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마을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외부인이 마을에 들린 적도 없습니다. 산골 마을 밖은 폐허입니다. 거기에는 무너진 도시들과 낯선 숲들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새로운 장비와 물자를 찾기 위해 마을 밖으로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탐사대를 조직하고, 이런 과정은 소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마을 사람은 어떻게 탐사대를 훈련시키고 조직해야 하는지 한참 고민하죠. 소설 <로드> 역시 탐험 소설 같은 느낌을 풍깁니다. 핵 전쟁으로 추정되는 재앙 덕분에 세상은 멸망했습니다. 모든 것이 불에 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없고, 세상은 그저 무채색일 뿐입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눈이 내리고, 거리는 검은 잿더미입니다. 주인공 남자와 소년은 그런 세상을 떠돕니다.
주인공 남자와 소년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너무 오래 한 자리에만 머무른다면, 누군가가 그들을 찾아낼지 모릅니다. 만약 그 사람들이 약탈자라면, 남자와 소년은 죽은 목숨이겠죠. 게다가 남자와 소년이 한 자리에 머물고 싶다고 해도 식량이 떨어질 겁니다. 그들은 식량을 찾기 위해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사실 소설에서 남자와 소년은 식량을 찾기 위해 계속 움직입니다. 그들은 폐허를 방문하고, 산 속으로 올라가고, 도로를 방황하고, 지하 대피소를 들어갑니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언제나 식량을 찾습니다. 만약 작가가 '먹거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즉, <로드>는 식량을 찾아 낯선 세계(붕괴한 문명)를 떠도는 탐사대(남자와 소년)를 묘사합니다. 남자와 소년은 탐험의 로망 따위를 풍기지 않으나, 그들의 여정은 이미 탐험과 같습니다. 붕괴한 문명은 비경처럼 낯선 장소이고, 남자와 소년은 그 낯선 장소에서 계속 이동하고 뭔가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탐험 소설이 반드시 전문적이고 전형적인 탐험가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작가가 낯선 세계와 끊임없이 이동하고 발견하는 사람들을 설정한다면, 그 이야기는 탐험 소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은 '탐험'을 이야기하기에 좋습니다. 왜냐하면 인류 문명이 붕괴되었고, 당연히 붕괴한 문명은 낯선 세계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21세기 인간이 런던, 도쿄, 시드니, 오타와, 요하네스버그, 카이로, 산티아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서울, 모스크바 등을 돌아다닌다면, 이 사람은 자신이 낯선 장소를 헤맨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장소들은 모두 현대 문명을 대표하는 대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리적이거나 문화적인 차이를 느끼겠죠. 오타와 사람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모스크바를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뭔가 낯설고 다르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서울과 산티아고와 모스크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리적이고 문화적인 차이가 있겠으나, 결국 모두 똑같은 인류 문명의 대도시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전세계 문명이 붕괴되었다고 가정하죠. 런던부터 모스크바까지, 모든 대도시들이 전부 무너졌다고 가정하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대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찬란한 문명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만약 21세기 사람이 그 폐허를 돌아다닌다면, 오지를 방문한 것처럼 낯설다고 느낄 겁니다.
이른바 '현대 문명인'에게 요란하고 복잡하고 바쁜 도시는 일상입니다. 많은 문명인들은 그런 도시를 일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적막하고 붕괴한 도시는 비일상적이고, 현대인은 그런 도시를 외계 행성만큼 낯설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은 얼마나 현대인이 그런 도시를 낯설게 바라보는지 묘사합니다. 괴수가 상륙하든, 운석이 떨어지든, 핵 전쟁이 터지든, 화산이 폭발하든, 뭐든 간에 도시를 비롯한 문명이 붕괴한다면, 그런 상황은 현대인을 아주 비일상적인 세계로 안내할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붕괴한 문명을 당황스럽고 이질적인 눈빛으로 바라볼 겁니다. 그런 눈빛은 이질적인 세계를 기이하게 바라보는 탐험가의 눈빛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현대인은 탐험가보다 훨씬 낯선 환경에 처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현대인은 붕괴한 도시를 돌아다니고, 모든 것을 낯설게 바라볼 겁니다. 설사 각종 고층 건물들이 멀쩡하다고 해도 사회 인프라가 무너진 도시는 더 이상 친숙한 장소가 아닙니다. <트리피드의 날>처럼 사람들이 일상을 벗어난다면, 그것만으로 도시는 낯선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이 산산히 깨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낯선 곳을 여행하는 과정'은 SF 소설의 주된 소재입니다. 사실 수많은 SF 소설들이 낯선 장소를 설정하고, 주인공들을 그 장소로 떠밉니다. 주인공들은 낯선 장소를 탐험하고, 새로운 관념에 눈을 뜹니다. 독자 역시 주인공들의 탐험을 따라가고, 인식의 지평선을 확대합니다. 우주 탐사 소설은 이런 탐험 소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중력의 임무>는 아주 좋은 사례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주 탐사 소설과 달리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붕괴'를 이용해 낯선 세계를 창조할 뿐입니다.
우주 탐사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외계 행성이나 아득한 은하계로 떠납니다. 그와 달리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어딘가로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이미 낯선 장소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들은 한때 친숙했던 장소를 헤매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공간 자체가 거대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주인공들은 낯선 곳으로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이 곳, 이 친숙한 장소가 낯선 장소이고 비경입니다. 주인공들은 별로 원하지 않았겠으나, 당연히 탐험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낯선 장소를 둘러보기 위해.
때때로 작가들은 비일상적인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색다른 소재를 활용합니다. 붕괴한 도시는 그 자체만으로 낯선 장소가 되지만, 거기에서 뭔가 이상한 존재들이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만약 외계인들이 지구를 공격했다면, 외계인의 잔당들이 도시 곳곳을 돌아다닐지 모릅니다. 만약 전염병이 사람들을 멸종시켰다면, 그 사람들은 좀비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만약 인공 지능이 인류를 공격했다면, 살상 로봇들이 도시를 순찰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붕괴한 도시를 떠도는 생존자들은 그런 이상한 존재들과 싸워야 할 겁니다.
로저 젤라즈니가 <지옥의 질주>에서 강조한 것처럼 이럴 때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은 모험 소설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아마 많은 작가들이 이런 모험을 묘사하기 위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용할 겁니다. 그런 작가들은 멸망을 이야기하기보다 흥미진진한 모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포칼립스 소설을 이용할지 모릅니다. 붕괴한 도시와 이상한 존재들은 훌륭한 모험을 위한 재료와 양념이 될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온갖 모험 소설과 액션 게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매우 매우 사랑합니다.
작가들은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빙자한 모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습니다. 가령, 우주적 공포 소설이나 검마 판타지 소설 역시 붕괴한 도시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광기의 산맥>은 (외계인 입장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한때 외계인들이 남극의 고산지대에 살았으나, 도시는 붕괴하고 그들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인간 남극 탐사대는 여기를 방문하고, 도시를 탐험하고, 외계인들의 기이한 잔재를 마주칩니다. 이 소설은 공포를 강조하기 때문에 모험이 약하지만, 아마 많은 창작가들은 이런 소설에서 뭔가 영감을 얻었을 겁니다.
분위기는 매우 다르나, <드래곤 라자>에 등장하는 대미궁 역시 무너진 도시입니다. 드워프들은 대미궁이라는 도시를 만들었으나, 이내 오크들이 침략했고 거기는 버려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주인공 일행은 이 미궁을 방문하고, 다양한 함정을 회피하거나 수수께끼를 풉니다. 이건 전형적인 판타지 모험이고 전형적인 던전 탐험입니다. 검마 판타지 역시 이렇게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용할 수 있어요. 기이한 고대 유적은 검마 판타지의 단골 소재입니다. 그렇게 검마 판타지는 무너진 도시를 짜릿한 모험을 위한 장소로 바꿉니다.
물론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의 본질이 탐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탐험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사실 비경 탐험이야말로 순수하게 탐험이라는 로망을 추구하죠.)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주인공은 탐험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대피소나 안전 가옥에만 머무릅니다. <최후의 Z> 같은 소설은 당연히 탐험이라는 요소가 부족하죠. 소설 주인공이 안전 지대를 떠날 생각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탐험을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오히려 이런 소설들은 '안락한 곳에 짱박히는' 소설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해변에서>나 <노래하던 새들은>처럼 어떤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탐험을 붕괴한 문명과 결합시킵니다. 이 장르는 '낯선 곳을 탐험하는' 느낌을 풍기기 좋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흥미진진한 모험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작가들과 독자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적어도 이 장르의 어떤 특징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