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내 생에 특별한 날>과 운명적인 비주류 사랑 본문
"인간은 행복과 불행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한다. 오히려 행복과 불행은 인간을 선택한다." 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에서 이렇게 어떤 등장인물은 말합니다. 이 대사는 주제를 대표합니다. 여기에서 행복과 불행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소설 주인공 미흔은 사랑을 믿으나, 사랑은 미흔을 배신합니다. 미흔은 살기 위한 의지를 잃고 인생을 포기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미흔은 사랑에 빠지고 살기 위한 의지를 찾으나, 이 사랑은 정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비정상적인 사랑, 비주류 사랑입니다. 비주류 사랑은 미흔을 불행에 빠뜨릴 겁니다. 미흔은 불행을 예감합니다.
미흔은 자신이 불행에 빠질 거라고 직감합니다. 정상적인 인생을 위해 미흔은 비주류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미흔은 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미흔은 비주류 사랑에 매달립니다. 이것 없이, 미흔은 살지 못합니다. 미흔이 비주류 사랑에 매달리는 동안, 세상은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비록 이 사랑이 비주류라고 해도, 이건 사랑이고, 사랑은 환희가 됩니다. 환희가 넘치고 흐르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반짝이기 때문에, 미흔은 이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비록 나중에 비주류 사랑이 불행이 된다고 해도, 지금 당장 이건 행복입니다. 미흔은 행복을 붙들기 원합니다.
소설 핵심 대사처럼, 미흔은 행복과 불행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비주류 사랑은 미흔을 선택하고, 미흔은 이것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비록 비주류 사랑이 비참하고 파렴치한 파국에 이른다고 해도, 지금 당장 미흔은 불행이 반짝이는 행복이라고 느낍니다. 소설 <내 생에 특별한 날>은 사랑이 선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계산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을 계산하지 못합니다. 계산은 합리적입니다. 계산은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결과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랑은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동안, 단점은 장점을 부각하거나 장점으로 치환합니다.
단점이 보이지 않고, 단점이 장점을 부각하고, 단점이 장점으로 치환하기 때문에, 사랑은 계산이 아닙니다. 미흔이 비주류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사랑에 맹목적으로 빠집니다. 사랑이 맹목적이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사랑은 종교와 비슷합니다. 인간이 종교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처럼, 미흔은 사랑을 맹목적으로 추구합니다. 종교는 선택이 아닙니다. 종종 구복 신앙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선택으로 수렴하나, 전반적으로 종교는 선택이 아닙니다. 종교는 계산보다 믿음입니다. 사랑은 계산보다 믿음이고, 사랑과 종교는 비슷합니다. 지치고 힘들고 혐오스러운 인생에서 종교는 넉넉한 위안입니다.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동안, 환희가 흐르고 넘치는 것처럼, 세상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처럼, 인간이 종교에 빠지는 동안, 인간은 신성을 느끼고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초월적인 존재가 인생을 뒷받침하기 때문에, 비록 인생이 지치고 힘들다고 해도, 인간은 인생이 든든하다고 느낍니다. 인생이 든든하기 때문에, 인간은 종교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종교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미흔은 사랑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비단 미흔만 아니라 많고 많은 소설 등장인물들은 사랑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운명이 찾아오는 것처럼, 갑자기 사랑은 찾아오고, 소설 등장인물들은 이것을 피하지 못합니다.
갑자기 사랑이 나타나고 등장인물을 치고 가기 때문에, 이건 교통 사고 같습니다. 교통 사고가 갑작스러운 것처럼, 사랑은 갑작스럽습니다. 인간은 교통 사고를 예상하지 못합니다. 교통 사고처럼, 인간은 사랑을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이돌 팬들이 아이돌 가수들을 숭배할 때, 아이돌 팬들은 이것을 '덕통 사고'라고 부릅니다. 교통 사고가 불행하기 때문에, 덕통 사고라는 용어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으나, 어떤 관점에서 이건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갑자기 교통 사고가 인간을 치고 가는 것처럼, 갑자기 사랑은 인간을 치고 갑니다. 만약 사랑이 불행으로 이어진다면, 이건 정말 교통 사고일 겁니다.
소설 <내 생에 특별한 날> 후기에서 전경린 작가는 털어놓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합법적으로 제도에 편입되어 기념비가 되는 사랑보다 삶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다치며 내쫓기는 비합리적인 사랑에 매혹되었다." 소설 주인공 미흔은 합법적인 사랑보다 비합리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비합리적인 사랑은 상처가 됩니다. 이것은 인생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짓밟고, 정상 궤도에서 미흔을 내쫓습니다. 하지만 미흔은 이게 행복이라고 느낍니다. 적어도 비합리적인 사랑이 미흔을 내쫓기 전까지, 미흔은 이게 행복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오직 미흔만 비주류 사랑을 행복이라고 느끼나요? 그건 아닙니다.
많은 연인들은 사랑이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감정이 아니라고 인식합니다. 아무리 어떤 두 연인이 심쿵심쿵 두근두근~♡ 연애한다고 해도, 언젠가 이 감정은 사라지고 흩어질지 모릅니다. 그때 두 연인은 헤어질 겁니다. 만약 두 연인이 서로에게 수많은 것들을 선물했다면, 수많은 선물들은 수많은 아픔들이 될 겁니다. 실연 이후, 인간이 선물들을 볼 때마다, 인간은 상처를 느낄 겁니다. 더 이상 선물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은 상처입니다. 선물은 상처가 될지 모르나,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동안, 인간은 뭔가를 주기 원합니다. 인간은 비단 심리적인 감정만 아니라 (비싼) 물리적인 선물을 주기 원합니다.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동안, 인간은 조공하기 원합니다. '조공'이라는 표현은 우스꽝스러운지 모르나, 두 연인은 서로에게 '조공'합니다. 아무리 어떤 반지나 목걸이나 시계나 정장이나 구두가 비싸다고 해도, 두 연인은 이것들을 조공합니다. 조공하기 위해 연인은 수 십 만원, 수 백 만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절대적이지 않고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 사랑은 깨질지 모르고, 수많은 선물들은 수많은 상처들이 될지 모릅니다. 수 십 만원짜리 선물들은 수 십 만원짜리 상처들이 될지 모릅니다. 수 백 만원짜리 선물들은 수 백 만원짜리 상처들입니다. 값진 사랑은 비싼 상처가 됩니다.
비록 수 백 만원짜리 선물들이 수 백 만원짜리 상처들이라고 해도, 연인은 조공합니다. 지금 당장 세상이 반짝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언젠가 이 연애는 깨지고, 나와 그 사람은 헤어질지 몰라. 만약 언젠가 우리가 헤어질 거라면, 왜 내가 수 십 만원짜리 선물들을 줘야 하지? 왜 내가 많은 돈을 낭비해야 하지?" 이렇게 연인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사랑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해도, 비록 나중에 행복이 불행이 된다고 해도, 지금 당장 불행이 행복이기 때문에, 연인은 선물합니다. 소설 주인공 미흔이 행복을 선택하기보다 행복이 미흔을 선택하는 것처럼, 현실 속의 연인은 불행복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아이돌 팬들은 수 십 만원, 수 백 만원을 소비합니다. 앨범들을 사고, 굿즈들을 사고, 이것저것 사기 위해 아이돌 팬들은 많은 비용을 치릅니다. 아이돌(idol)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처럼, 아이돌 문화는 종교적인 측면을 포함합니다. 사랑과 종교가 비슷하기 때문에, 사랑이 고정적이지 않은 것처럼, 종교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종교가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이돌 숭배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언젠가 숭배는 희미해질지 모릅니다. 더 이상 아이돌 팬은 아이돌 가수를 숭배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행복과 불행이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돌 팬은 아이돌 가수를 의도적으로 숭배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이돌 팬이 노력한다고 해도, 행복과 불행은 노력이 아닙니다. <내 생에 특별한 날>에서 불행복이 미흔을 선택한 것처럼, 오히려 행복과 불행이 아이돌 팬을 선택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돌 팬은 아이돌 가수를 숭배하거나 아이돌 가수에게서 벗어납니다. 아이돌 문화는 아이돌 숭배를 '덕질'이라고 부릅니다. 아이돌 숭배가 사그라들 때, 이건 탈덕이 됩니다. '탈덕'이라는 단어는 우스꽝스러운지 모르나, 실연이 아픈 상처가 되는 것처럼, 탈덕은 아픈 상처가 됩니다. 실연 이후, 인간이 눈물을 짜고 콧물을 짜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는 것처럼, 아이돌 팬은 폐인이 될지 모릅니다.
반지와 목걸이와 시계와 정장과 신발 같은 선물들이 상처가 되는 것처럼, 아이돌 앨범들과 굿즈들은 상처가 됩니다. 이것들이 상처이기 때문에, 아이돌 팬은 이것들을 보관하지 못합니다. 아이돌 팬이 앨범들과 굿즈들을 처분하는 동안, 아이돌 팬은 눈물을 짜고 콧물을 짜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할지 모릅니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다들 가뭄이라고 아우성인데, 왜 오직 내 눈물만 가뭄이 아닌 거야…." 굿즈들을 사기 위해 아이돌 팬은 많은 돈을 소비했으나, 이제 이것들은 그저 상처들에 불과합니다. 많은 돈이 상처가 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아이돌 숭배 문화가 멍청하다고 조롱할지 모릅니다.
만약 아이돌 숭배 문화가 멍청한 짓거리라면, 이 세상에서 많고 많은 사랑들은 멍청한 짓거리일 겁니다. 사랑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인은 선물들을 조공합니다. 선물들을 조공하기 위해 연인은 많은 돈을 소비합니다. 실연 이후, 많은 돈은 허무한 낭비가 될지 모릅니다. 많은 돈은 허무한 낭비가 될지 모르나, 연인은 이게 낭비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동안, 세상이 반짝반짝~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아름답고 반짝이는 사랑을 느끼기 위해 인간은 많은 돈을 소비합니다. 아이돌 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연인이 선물을 조공하는 것처럼, 아이돌 팬은 앨범과 굿즈를 구매합니다.
아이돌 팬이 아이돌 가수를 숭배하는 동안, 아이돌 팬은 세상이 아름답게 반짝인다고 느낍니다. 비록 나중에 아이돌 숭배가 희미해지고 아이돌 팬이 탈덕한다고 해도, 아이돌 팬은 이 반짝이는 순간을 추억할지 모릅니다. "아, 그때는 정말 아름다웠어. 상처 때문에, 이제 나는 눈물을 흘리나, 나는 그때를 후회하지 않아." 심지어 어떤 아이돌 팬들은 나중에 그들이 눈물들을 흘릴 거라고 예감합니다. 어떤 아이돌 팬들은 덕질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예감합니다. 하지만 아이돌 팬들은 덕질에 빠집니다. 덕통 사고가 그들을 치고 가기 때문입니다. "언니, 저는 언니를 정말 사랑해요." 이게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게시글 농담(링크)이 보여주는 것처럼, 덕통 사고가 아이돌 팬들을 치고 가는 것처럼, 사랑은 계산이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은 선택이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이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 미흔은 선택하지 못합니다. 비록 덕질이 후회와 한탄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덕통 사고가 아이돌 팬을 치고 가는 것처럼, 비록 비주류 사랑이 후회와 한탄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행복과 불행은 소설 주인공 미흔을 치고 갑니다. 미흔은 이것을 막지 못합니다. 소설 <내 생에 특별한 날>은 인간이 운명 같은 사랑을 막지 못하고, 계산하지 못하고, 선택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여러 문학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내 생에 특별한 날>만 아니라 여러 문학들은 사랑이 선택이 아니고 계산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종교와 운명입니다. 사랑과 종교와 운명이 비슷하기 때문에, 인간보다 이것들은 초월적입니다. 인간은 초월적인 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합니다. 덕통 사고처럼, 초월적인 것은 인간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순응해야 하나요? 인간이 초월적인 것을 인정하고 필연적으로 순응하나요? 인간이 뭔가를 '선택'하지 못하나요? 전경린 작가는 제도 속의 합법적인 사랑보다 비합리적인 사랑을 언급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왜 어떤 사랑이 제도 속의 합법이고, 왜 어떤 사랑이 비주류인가요?
소설 <내 생에 특별한 날>에서 이성애 1:1 결혼은 제도 속의 합법적인 사랑입니다. 비단 이 소설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성애 1:1 결혼은 제도 속의 합법입니다. 반면, 소설에서 미흔이 남편보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건 비합리적인 비주류 사랑이 됩니다. 이성애 1:1 결혼이 제도 속의 합법이고, 미흔이 다른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건 비주류 사랑이 됩니다. 여기에서 소설 독자는 물을 수 있습니다. 왜 이성애 1:1 결혼이 주류이고, 왜 (이른바) 불륜이 비주류인가요? 왜 우리가 불륜을 불륜이라고 부르나요? 왜 어떤 사랑이 주류와 합법이 되고, 왜 어떤 사랑이 불륜과 비합리적인 사랑이 되나요?
만약 이성애 1:1 결혼이 사라진다면, 지구가 무너질까요? 만약 이성애 1:1 결혼이 사라진다면, 지구 생물권이 멸종할까요? 만약 이 세상에서 모든 여자와 모든 남자와 모든 다른 성별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이 오직 원 나이트 스탠드만 화끈하게 때린다면, 여섯 번째 멸종이 찾아올까요? 그건 아닙니다. 이성애 1:1 결혼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이성애 1:1 결혼이 절대적인 법칙이라고 떠받드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답들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여러 대답들 중에서 사회 구조 역시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만약 이성애 1:1 결혼이 사라진다면, 중산층 가족은 사라질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산층 가족은 가장 작은 경제 단위입니다. 임금 노동자 남편과 가정 주부와 아이들. 이 가족 구성은 자본주의 사회를 뒷받침합니다. 만약 이성애 1:1 결혼이 사라진다면, 중산층 가족 역시 사라질 테고, 자본주의 사회는 흔들릴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중산층 가족을 옹호합니다. 어떤 사랑이 중산층 가족을 위협할 때, 중산층 가족을 옹호하기 위해 지배적인 관념은 이 사랑을 짓밟고 왜곡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비주류가 됩니다. 게다가 만약 이성애 1:1 결혼이 사라진다면, 육아는 개인적인 영역보다 사회적인 영역이 될 겁니다. 육아는 사회 노동이 될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민영화, 사유화를 선호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가 공공 의료를 왜곡하고 조롱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사회 영역보다 개인 영역을 선호합니다. 만약 이성애 1:1 결혼이 사라진다면, 육아가 사회 노동이 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이성애 1:1 결혼이 절대적인 법칙이라고 세뇌합니다. 아무리 육아가 힘들고, 아무리 엄마들이 육아 우울증에 빠진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는 사회 노동보다 개인 노동이 되어야 합니다. 엄마들이 우울증에 빠지든 말든, 중요한 것은 엄마들보다 자본주의입니다. 아무리 엄마들이 힘들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자본가 계급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주류와 비주류를 나눕니다. 사회 구조 때문에, 어떤 사랑은 주류가 되고, 어떤 사랑은 비주류가 됩니다. 진공 상태에서 사랑은 주류가 되지 않고 비주류가 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주류 사랑과 비주류 사랑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 때문에, 주류 사랑과 비주류 사랑은 나타납니다. 이건 오직 사회 구조만 비주류 사랑에게 필연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때 공산주의자들이 동성애를 차별한 것처럼, 사회 구조에서 비주류 사랑은 벗어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비주류 사랑을 차별하고 억압합니다.
사랑이 운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반면, 우리는 사회 구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회 구조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타파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이 이성애 1:1 결혼을 세뇌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사라진 이후, 더 이상 비주류 사랑은 비주류가 아닐지 모릅니다. <내 생에 특별한 날>에서 전경린 작가는 이것을 묻지 않습니다. 전경린 작가는 비주류 사랑을 언급하나, 전경린 작가는 왜 어떤 사랑이 비주류인지 묻지 않습니다. 전경린 작가는 이미 비주류 사랑이 존재한다고 상정합니다. 하늘에서 비주류 사랑은 뚝 떨어졌습니다.
전경린 작가는 이미 하늘에서 비주류 사랑이 뚝 떨어졌다고 상정합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비주류 사랑을 차별합니다. 하지만 소설 <내 생에 특별한 날>은 자본주의 사회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비단 이 소설만 아니라 많고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뭔가가 나타나는지 묻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뭔가가 뚝 떨어졌다고 상정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듀나님이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을 서평했을 때, 듀나님은 중간계를 언급했습니다. 고요 대륙은 SF 설정이고, 중간계는 판타지 설정이나, 듀나님은 양쪽이 비슷하다고 간주했습니다.
듀나님은 비단 고요 대륙과 중간계를 비교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진이 판타지 설정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초인과 마법사는 다르나, 듀나님은 양쪽이 비슷하다고 분류했습니다. 소설 <마술사가 너무 많다>는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의 SF 총서 9번입니다. <마술사가 너무 많다>는 가스등 '판타지'이나, 행복한 책읽기는 이 판타지 소설을 SF 총서 목록에 집어넣습니다. 그리폰 북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폰 북스는 SF 총서이나, 이 SF 총서는 소설 <드래곤과 조지>와 <밤을 사냥하는 자들>을 포함합니다. <드래곤과 조지>는 중세 유럽 판타지에 가깝고, <밤을 사냥하는 자들>은 흡혈귀를 이야기합니다.
이 사례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겹친다고 증명합니다. SF 팬덤과 판타지 팬덤은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비슷한가요? 아니면 두 장르가 다른가요?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SF/판타지 팬덤은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났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사이언스 픽션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비주류 사랑을 억압하는 것처럼, 서구 근대화 이후, 사이언스 픽션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장르를 파악하기 위해 SF 팬덤은 서구 근대화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서구 근대화가 뚝 떨어졌나요? 이게 사실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지식인들조차 어느 날 갑자기 서구 백인 남자들이 근대 문명을 뚝딱뚝딱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미 서구 근대화가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아니, SF 팬덤은 어떻게 서구 근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때 SF 팬덤은 이 장르를 근본적으로 논의할 수 있습니다.
※ SF 소설들은 숭배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골수 SF 독자야! 나는 우주선 바이오 돔과 테라포밍 생태계와 거대 괴수를 사랑해! 나는 이 장르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 이렇게 어떤 소설 독자는 외칠지 모릅니다. SF 소설 독자가 우주선 바이오 돔과 테라포밍 생태계와 거대 괴수를 흥미롭게 읽는 동안, SF 독자는 세상이 아름답게 반짝인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사랑은 희미해지고 흩어질지 모릅니다. SF 소설들은 시시해지고, 더 이상 우주선 바이오 돔은 흥미롭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이돌 팬이 탈덕하는 것처럼,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SF 덕질에서 소설 독자는 벗어날지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아무리 소설 독자가 노력한다고 해도, 소설 독자는 우주선 바이오 돔을 의도적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숭배 대상은 바뀌고, 소설 독자는 우주선 바이오 돔보다 다른 것을 흥미롭게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숭배 대상이 바뀐다고 해도, 인간은 뭔가를 사랑할 겁니다. 아무리 사랑이 바뀐다고 해도, 사랑하기 위해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먹고 사는 동안, 인간은 뭔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끝나는 순간, 사랑 역시 끝납니다. 사랑은 바뀔지 모르나, 먹고 살기 위해 우주선 사람들이 바이오 돔에게 기반하는 것처럼, 먹고 사는 문제는 바뀌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