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기억 은행 초과 인출>과 전자 드루이드 본문
[이런 게임이 발달한다면, 사람들은 정말 전자 드루이드들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종종 사이버펑크 소설은 가상 세계에서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가상 현실은 온갖 시뮬레이션들과 생생한 (아니면 생생하다고 느껴지는) 감각들을 동원할 테고, 그 속에서 인간은 또 다른 존재가 된다고 착각할 겁니다. 가상 현실 속에서 인간은 야생 동물이 되거나, 우주선 승무원이 되거나, 외계 행성을 돌아다닐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가상 현실들 중에서 저는 동물 체험이 독특하다고 생각합니다. 야생 동물은 우리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타자이고 외부인입니다. 오랜 옛날부터 인류는 숱한 야생 동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야생 동물이 바라보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사변을 통해 인간은 그런 시각을 키울 수 있으나, 그걸 위해 다양한 철학 훈련들을 쌓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가상 세계에서 인간은 구태여 철학 훈련들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철학을 배우지 않은 어린 아이조차 증강 현실을 이용해 야생 동물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SF 소설들 역시 존재합니다. 존 발리가 쓴 <기억 은행에서의 초과 인출>에서 소설 주인공은 사자가 되고, 사자처럼 먹고 살고 울부짖습니다.
<기억 은행에서의 초과 인출>에서 사자 증강 현실은 주된 내용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어떻게 인간이 증강 현실을 이용해 야생 동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비록 사자 증강 현실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나, 이 소설은 어떻게 인간이 야생 사자의 삶을 경험하는지 그립니다. SF 평론가들은 <기억 은행에서의 초과 인출>을 원형적인 사이버펑크라고 부릅니다. 본격적인 사이버펑크 소설들이 유행하기 전에 존 발리가 이걸 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원형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억 은행>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는 사이버펑크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는 우리가 사이버펑크에 기대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아니면 배미주가 쓴 <싱커>는 진짜 사이버펑크 소설이 될 수 있겠죠. 악덕 대기업들과 첨단 기술과 암울한 미래 역시 등장합니다. <싱커>에서 아이들은 가상 현실에 접속하고, 진짜 야생 동물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저 증강 현실이 아닙니다. 이는 빙의에 가깝습니다. 빙의는 다소 부정적인 용어일지 모르나, 빙의보다 좋은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군요. <던전스 앤 드래곤스> 같은 중세 판타지에서 드루이드가 야생 동물로 변신하는 것처럼, <싱커>에서 사람들은 야생 동물에게 빙의할 수 있어요.
이런 증강 현실 기술이나 전자 빙의(?) 기술이 정말 나타날 수 있을까요? 정보 기술은 엄청난 혁신들을 자랑하고, 정말 전자 빙의 기술 역시 실현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기술들이 정말 나타나기 바랍니다.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저는 동물원이나 수족관이 사라지고 전자 동물원이나 전자 수족관이 나타나기 바랍니다. 동물원이나 수족관은 야생 동물을 착취하는 장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들이 생태적인 감수성을 키운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정말 동물원이 생태적인 감수성을 키울 수 있을까요. 철장 우리 안에서 야생 동물들은 질병에 걸리거나 정신병에 시달리거나 고통을 받습니다. 수족관 안에서 동물들은 넓은 대자연을 누비지 못합니다. 절지 동물들은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어떤 동물들은 비좁은 서식 지역에 만족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수많은 동물들은 비좁은 우리를 견디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동물원 역시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동물원을 떠받치는 요소는 수익이고, 수익 때문에 동물들은 고통을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정말 생태적인 감수성을 키울 수 있을까요? 비좁고 개방된 우리 속의 호랑이가 생태적인 감수성을 키울까요? 좌우로 불안하게 돌아다니는 늑대가 생태적인 감수성을 키울 수 있을까요? 철창 속의 호랑이가 정말 호랑이일까요? 호랑이는 그저 호랑이라는 생물이 아닙니다. 호랑이는 울창한 숲 속을 돌아다니는 강력한 암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짜 생태적인 시각은 이런 것이겠죠. 생물이 아니라 생태를 바라보는 시각. 오직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와 숲과 다른 동물들을 바라보는 시각.
하지만 만약 동물원과 수족관이 모두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야생 동물을 쉽게 구경하지 못할 겁니다. 저는 자연 다큐멘터리들이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연 다큐멘터리가 부족하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탁광일이 쓴 <죽은 나무가 없는 숲은 아름답지 않다>는 일종의 생태학 수필입니다. 저자는 북아메리카 밴쿠버 아일랜드를 등반하고, 어떻게 자신이 경이롭고 위대한 자연 경관을 만났는지 생생하게 기록합니다. 이 생태학 서적은 여러 경관들을 아름답게 담았습니다. 탁광일은 자신이 겪은 일화들을 소개하고, 자연 다큐멘터리는 그런 야생적인 경험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자연 다큐멘터리가 멋진 화면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시각적인 체험이고, 거기에는 야생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시청자가 느끼는 생태적인 감수성은 꽤나 제한적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는 원본의 아우라를 잃을 겁니다. 저는 탁광일에게 동의합니다. 인간이 직접 야생 동물을 살펴본다면, 그런 체험이 자연 다큐멘터리보다 훨씬 낫다고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야생 동물들이 야생 속으로 돌아간다면, 사람들이 쉽게 거기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증강 현실 기술이나 전자 빙의 기술은 훨씬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직접 야생 동물을 만나는 경험과 증간 현실 기술을 구분하지 못할 겁니다. <싱커>처럼 전자 빙의 기술은 우리를 전자 드루이드로 만들지 모릅니다. 이미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압주>나 <쉘터 2> 같은 비디오 게임들부터 증강 현실 동영상들까지, 이런 것들은 미래의 전자 빙의 기술을 보여주는 예고편일지 모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기술적 자연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생태적인 감성에 훨씬 쉽게 다가갈 수 있겠죠. 비좁고 개방된 우리로 호랑이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호랑이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