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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근대적인 우생학과 태생적인 정체성 문제 본문

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근대적인 우생학과 태생적인 정체성 문제

OneTiger 2019. 6. 30. 19:57

허버트 웰즈는 외눈박이 사회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방인(아웃사이더)을 논의하기 위해 콜린 윌슨은 허버트 웰즈를 인용했습니다. 사변 문학에서 외눈박이 사회는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하지만 외눈박이 사회 이외에도 사변 문학에는 온갖 비교 대상들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외계인들, 인공 지능들, 똑똑한 개조 생명체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중세 판타지들은 신화적인 존재들과 드워프, 하플링, 오크 같은 유사 인간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변 문학은 인간과 다른 존재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외눈박이 인간에게 두 눈이 있는 인간은 이방인입니다.

 

이런 사례처럼, 인간에게 외계인들, 인공 지능들, 똑똑한 개조 생명체들, 유사 인간들은 이질적입니다. 인간에게 외계인들, 인공 지능들, 똑똑한 개조 생명체들, 유사 인간들은 외부 시선입니다. 외부 시선이 인간들을 판단하기 때문에, 사변 문학 독자들은 인간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건 사고 실험입니다. 현실 속에서 인간에게는 외부 시선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른 지적 존재와 소통하지 못합니다. 여러 스페이스 오페라들 속에서 외계인들은 인간들을 판단합니다. 사이버펑크들은 미래 사회에서 상급 인공 지능과 똑똑한 개조 생명체들이 인간들을 판단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들에서 드워프들은 인간들을 판단합니다. 그때 인류는 외부 시선을 이용해 자신을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 판단보다 이건 훨씬 나을 겁니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 본성을 판단한다면, 이건 외부 시선보다 내부 시선에 가까울 겁니다. 이건 내부 시선입니다. 내부 시선이 스스로 혼자 본성을 판단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내부 시선이 본성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내부 시선과 본성은 함께 존재합니다. 내부 시선과 본성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심지어 본성은 내부 시선을 포괄하는지 모릅니다.

 

본성이 내부 시선을 포괄한다면, 내부 시선이 본성을 판단한다고 해도, 이건 논리적인 판단이 되지 못할 겁니다. 본성은 필수적으로 내부 시선에 영향을 미칠 테고, 내부 시선은 영향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본성이 필수적으로 내부 시선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이런 영향력 속에서 내부 시선은 본성을 판단해야 합니다. 이게 올바른 판단인가요? 영향력이 존재한다면, 영향력 속에서 올바른 판단이 나타날 수 있나요? 인간이 뭔가를 사랑할 때, 그것에게 단점이 있다고 해도, 사랑은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점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사랑에 빠졌어." 이렇게 사랑은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것을 콩깍지라고 부릅니다. 콩깍지는 긍정적인 용어입니다. 사랑이 설레고 두근거리기 때문에, 우리는 콩깍지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콩깍지 속에서 올바른 판단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영향력 속에서 논리적인 판단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콩깍지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인간 본성을 논의할 때, 내부 시선은 커다란 한계가 됩니다. 흔히 우리는 인간 본성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인간은 이성적이다, 인간은 평화롭다, 기타 등등. 하지만 내부 시선이 본성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인간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 인간은 외부 시선을 이용해야 할 겁니다.

 

낸시 크레스가 외계인 단편 소설을 쓰는 것처럼, 현실에 외계인들이 있다면, 우리는 외계인 시선(외부 시선)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외계인이 외부에서 왔기 때문에, 외계인 시선은 정말 외부 시선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실에 외계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실은 낸시 크레스 단편 소설이 아닙니다. 단편 소설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외계인을 이용해 이방인을 말할 수 있으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외부 시선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외부 시선을 이용한다고 해도, 이건 사변이고 사고 실험입니다. 아무리 낸시 크레스를 비롯해 SF 작가들이 외계인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건 사고 실험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외부 시선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오직 내부 시선만 이용해야 한다면, 우리가 정말 인간 본성을 제대로 논의할 수 있을까요? 흔히 우리는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인간이 이성적입니까? 누가 그걸 검증할 수 있나요? 우리는 스스로 검증해야 합니다. 외부 시선들은 우리를 검증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어떤 코믹 SF 소설이 말하는 것처럼, 돌고래들은 정말 똑똑할지 모릅니다. 돌고래들은 우주와 다른 모든 것의 비밀이 42라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돌고래들이 똑똑하다고 해도, 돌고래들은 우리를 검증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미 돌고래들은 인류 문명을 검증했는지 모릅니다. 돌고래들이 끽끽거릴 때, 이건 "인류는 태생적으로 평화로워. 특히, 여자들은 생태적이야. 언제나 여자들은 대단해."라는 뜻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돌고래들과 소통하고 우리가 평화롭다고 깨달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돌고래들과 소통할 수 있습니까? 아직 아무도 그걸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부 시선이 본성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판단한다면, 우리는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나, 우리가 정말 스스로 혼자 우리를 검증할 수 있습니까?

 

 

내부 시선은 스스로 본성을 검증하지 못하고, 우리는 스스로 인간 본성을 검증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외부 시선이 필요합니다. 외부 시선은 비교 대상입니다. 현실에 외계인이 있다면, 우리는 인간 시선과 외계인 시선을 비교, 대조, 분류, 정리, 종합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 본성을 판단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외계인은 인간에게 외계인 본성을 파악하라고 부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에 외계인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인간 본성을 검증하기 위한 비교, 대조, 분류, 정리, 종합 수단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자화자찬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외눈박이 인간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은 외눈박이입니다. 외눈박이 사람들은 두 눈이 있는 사람을 상상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두 눈이 있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마침내 외눈박이 사람들은 "우와, 외눈박이는 지배적이지 않아! 이 세상에는 두 눈박이가 있어!"라고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외눈박이에게 두 눈박이는 비교, 대조, 분류, 정리, 종합 대상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는 인간 이외에 지적 존재가 없고, 외부 시선이 없고,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 본성을 논의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편협한 인간 중심주의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사변 문학은 편협한 인간 중심주의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입니까? 어떻게 이런 주장이 외부 시선을 이용합니까? 인간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고 사람들이 주장할 때, 이런 사람들이 외부 시선을 이용합니까? 이런 사람들이 비교 대상을 이용합니까? 아니, 이런 사람들은 외부 시선과 비교 대상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외부 시선과 비교 대상을 이용하지 않음에도, 우리는 너무 당당하게 인간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고 말합니다. 이건 헛소리인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들이 인간이 탐욕스럽다고 계속 떠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세뇌를 받았을 뿐인지 모릅니다.

 

뭐, 어쩌면 돌고래들(외부 시선)은 여자들의 본성이 생태적이라고 검증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들의 세뇌보다 돌고래들을 믿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돌고래들과 소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내부 시선으로 인간 본성을 검증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 본성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인간 본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이건 인간에게 철학과 과학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인간은 철학을 이용해 이론을 정립할 수 있고 과학을 이용해 기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돌고래들은 (거시적인) 이론을 정립하지 못하고 (대규모) 기계를 만들지 못합니다.

 

 

저 역시 철학과 과학을 이용합니다. 저는 사회주의 사상으로 생태학 SF 설정을 평가하고 인터넷 기술로 게시글을 올립니다. 분명히 다른 동물들보다 인간은 철학과 과학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철학과 과학이 없었다면, 저는 이런 게시글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이성은 중요하고, 우리는 무엇이 이성적인지 계속 논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철학과 과학은 이성과 동일한 위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철학과 과학보다 이성은 훨씬 폭넓은 개념입니다. 철학과 과학은 이성을 뒷받침할 수 있으나, 이성과 완전하게 겹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본성을 함부로 언급하지 못할 겁니다.

 

외계인이 나타나고 우리가 외계인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인간 본성을 계속 회의해야 할 겁니다. (뭐, 언제 외계인들이 나타날지 누가 압니까.) 만약 우리가 인간 본성을 계속 회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편협한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인간은 이성적이야. 왜? 인간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인간이 말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적이야. 하지만 인간이 이성적인지 어떻게 인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지? 당연히 인간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적으로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어." 이건 환원 논리입니다. 주장은 근거가 되고, 근거는 다시 주장이 됩니다.

 

 

우리가 비교 대상을 이용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함정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인간 본성보다 다른 문제들은 훨씬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중들이 온갖 보수 우파 헛소리들을 믿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인간 본성보다 사회 구조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문제를 논의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인간 본성보다 사회 구조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겁니다. 만약 우리가 비교 대상들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위의 환원 논증처럼, 우리는 편협한 함정에 빠질 겁니다. (어쩌면 이 게시글에도 아주 커다란 함정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본성보다 사회 구조, 계급 투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겁니다.

 

다행히 인류 문명에는 다양한 사회 구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비교, 대조, 분류, 정리, 종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회 구조들 중에서 공동 생산/공동 분배/공동 소유 사회는 가장 적게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 생산/공동 분배/공동 소유 사회를 추구해야 할 겁니다. 문제는 세계화 자본주의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나,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절대 공동 소유 경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소수 지배 계급은 엄청난 생산 수단을 소유합니다. 그리고 이걸 계속 독차지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엄청난 폭력들을 휘두릅니다.

 

 

이렇게 사회 구조가 중요한 문제임에도, 많은 사람들은 사회 구조보다 인간 본성을 운운합니다. 지배 계급은 이런 상황을 아주 좋아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피지배 계급을 통치하기 위해 지배 계급은 인간 본성을 운운했습니다. "귀족은 태생적으로 고귀하고, 천민은 태생적으로 미천하다. 당연히 귀족은 천민을 지배해야 한다." 근대적인 진보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태생적으로 수동적이야. 흑인들은 태생적으로 열등해. 인디언들은 태생적으로 야만적이야. 노동자들은 태생적으로 게을러. 열대 민족은 태생적으로 미개해. 동성애는 태생적으로 잘못이야. 인간은 태생적으로 탐욕스러워."

 

페미니즘 서적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에서 마리 루티가 지적하는 것처럼, 지배 계급은 태생적인 정체성을 좋아합니다. 정말 가부장 문화가 옳습니까? 여자들이 수동적이기 때문에, 남자들이 적극적이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가 옳습니까? 남자들이 태생적으로 본능적으로 강간을 선호합니까? 이건 지랄 염병 같은 헛소리입니다. 이건 진화 생물학이 아닙니다. 이건 지랄 염병 우생학입니다. 우생학은 그저 19세기 관념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생학은 너무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우생학을 찬양하고, 사람들은 세뇌를 당하고 온갖 뻘소리들을 떠듭니다.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들이 떠드는 것처럼, 정말 인간이 태생적으로 탐욕스럽나요? 정말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본주의가 적합한가요? 이건 너무 친숙한 논리입니다. "깜둥이들은 태생적으로 미개해. 그래서 깜둥이들에게는 노예 제도가 어울려." 이건 19세기 우생학입니다. "인간들은 태생적으로 탐욕스러워.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자본주의가 어울려." 노예 제도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는 아주 흡사합니다. 사람들은 21세기가 첨단 과학 시대라고 떠드나, 여전히 첨단 과학 21세기에서 사람들은 왜곡된 진화 생물학을 믿습니다. 아무리 21세기가 첨단 과학 시대라고 해도, 이게 무슨 소용입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기술적 특이점이 어쩌구 저쩌구 떠든다고 해도, 이게 무슨 소용입니까?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진부한 우생학을 씨부리고, 사람들이 그걸 믿는다면, 21세기 첨단 과학 따위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재난 사회학자들은 여러 증거들을 내세우고 이런 되먹지 않은 우생학에게 반박할 겁니다. 여러 증거들은 심지어 재난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조차 공유지를 설정한다고 보여줍니다. 여자들이 돌봄 노동들을 맡기 때문에, 재난 상황에서 여자들은 공유지를 설정하고 아이들과 환자들과 노인들을 지킵니다. 하지만 재난 사회학자들이 증거들을 내민다고 해도, 사람들은 현실보다 지배적인 관념, 왜곡된 진화 생물학을 숭배합니다.

 

 

[한심한 우파 우생학은 이런 게임에 탐욕을 추구하는 유전 형질이 있어야 한다고 따질지 모릅니다. (푸핫.)]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에게 진화 생물학은 아주 중요한 소재입니다. 비디오 게임 <니치>가 보여주는 것처럼, 생태적인 상상력과 진화 생물학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진화 생물학을 왜곡하고 지배적인 관념을 숭배합니다. 멍청하고 한심한 보수 우파 떨거지 지식인들은 <니치>에 수컷이 강간하는 유전 형질과 탐욕을 추구하는 유전 형질이 있는지 따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덕후들은 가부장 문화, 자본주의 경제, 식민지 수탈을 뒤엎어야 할 겁니다. 그때 멍청하고 한심한 보수 우파 떨거지 지식인들은 진화 생물학을 왜곡하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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