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그림 <첫째 생존 농장>과 생산 조건 본문
위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가 무엇인가요? 대답들은 다양할 겁니다. 바이오 돔 역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여러 바이오 돔들은 그림 왼쪽을 차지합니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바이오 돔들이 반구 형태이기 때문에, 바이오 돔들은 두드러지는 곡선들을 자랑합니다. 투명한 육각형 조각들이 바이오 돔을 덮었기 때문에, 다른 건물들보다 바이오 돔들은 훨씬 반짝거립니다. 오직 외형과 재질만으로서 바이오 돔은 가장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바이오 돔은 그저 기계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바이오 돔들은 식물들을 키웁니다.
바이오 돔은 생명력을 키웁니다. 비단 위 그림만 아니라 많은 우주 개척 이야기들에서 바이오 돔은 다양한 생명력들을 키웁니다. 우리 인간은 생명체입니다. 우리가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생명력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만약 바이오 돔이 농장 지역이라면, 바이오 돔은 작물들을 키울 테고, 우주 개척자들은 작물들을 먹을 겁니다. 바이오 돔에서 '바이오'는 비단 작물들만 아니라 우주 개척자들을 함께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작물들과 우주 개척자들은 똑같은 생명체이고, 바이오 돔이 작물들을 키우기 때문에, 우주 개척자들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여러 바이오 돔들은 소규모 농장에 가까우나, 우주 개척 이야기에서 바이오 돔은 규모를 확장하고 야생 보호 구역이 될 수 있습니다. 외계 행성에서 인공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개척자들은 대규모 바이오 돔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만약 외계 행성이 삭막한 불모지라면, 여기에서 다양한 생명력들을 키우기는 어려울 겁니다. 화성은 지구 이웃 행성이나, 화성은 삭막한 불모지이고, 여기에서 지구 생태계를 조성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가혹한 우주와 풍요로운 생명력은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화성 개척 기지가 대규모 바이오 돔을 포함한다면, 다른 기지 건물들보다 바이오 돔은 훨씬 두드러질 겁니다.
가혹한 우주와 풍요로운 생명력이 대조적이기 때문에, 만약 우주 개척 이야기가 대규모 바이오 돔을 묘사하고, 열대 밀림 속에서 수마트라 호랑이가 돌아다닌다면, 이 장면은 아주 두드러질 겁니다. 접시 안테나 건물보다 바이오 돔 속의 수마트라 호랑이는 훨씬 두드러질 겁니다. 만약 바이오 돔 속의 인공 생태계가 삼림보다 해양이라면, 이건 훨씬 이질적일 겁니다. 일반적으로 바이오 돔 속의 인공 생태계는 해양보다 삼림이나 초원이나 다른 육상 지리들입니다. 우리 인간이 육상 동물이기 때문에, 바이오 돔 역시 해양보다 육상입니다. 육상 동물 인간에게 바다는 이질적입니다. 인간에게 해양 바이오 돔 역시 이질적입니다.
만약 화성 개척 기지가 대규모 바이오 돔을 포함하고, 바이오 돔에서 장수 거북이 헤엄친다면, 접시 안테나 건물보다 바이오 돔의 장수 거북은 훨씬, 훨씬 두드러질 겁니다. 분명히 수마트라 호랑이는 거칠고 위험한 야생에 속하나, 수마트라 호랑이보다 장수 거북은 훨씬 두드러질 겁니다. 위 그림에서 바이오 돔은 야생 보호 구역보다 소규모 농장에 가깝고, 소규모 농장은 호랑이와 장수 거북보다 식물들을 키우나, 비록 위 그림이 호랑이와 장수 거북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에서 바이오 돔은 생명력을 키웁니다. 비단 외형과 재질만 아니라 생명력으로서 바이오 돔은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위 그림이 바이오 돔을 보여주기 때문에, 위 그림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현실에서 식물들을 키우기 위해 사람들은 바이오 돔을 건설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바이오 돔들, 폐쇄 인공 생태계들은 존재하나, 이것들은 과학 실험 프로젝트에 속하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바이오 돔을 건설하지 않습니다. 지구 행성이 생명의 요람, 어머니 자연이기 때문에, 바이오 돔 없이, 사람들은 식물들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고, 식물들은 얼마든지 자랄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바이오 돔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바이오 돔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비(非)현실 설정으로서 바이오 돔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그래서 위 그림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무엇보다 위 그림에서 비단 바이오 돔만 아니라 여러 건물들과 두 탈것은 위 그림이 SF 장르에 속한다고 증명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개척자는 전초 기지와 바이오 돔들을 지었을 겁니다. 위 그림은 SF 우주 개척을 보여줍니다. 위 그림의 제목은 <첫째 생존 농장 First survival farm>입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외계 행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척자는 전초 기지와 바이오 돔들을 지었을 겁니다. <첫째 생존 농장>은 SF 그림입니다. 이건 'SF' '그림'입니다. <첫째 생존 농장>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생존 농장>은 그림이고, 동시에 <첫째 생존 농장>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두 가지 측면 중에서 무엇이 훨씬 두드러지나요? 그림과 사이언스 픽션 중에서 무엇이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나요? 이 그림(링크)은 '그림'입니다. <첫째 생존 농장>처럼, 이건 그림입니다. 이건 글자들이 아니고, 조각이 아니고, 음악이 아닙니다. <첫째 생존 농장>이 그림인 것처럼, 이건 '그림'입니다. 게다가 이 그림은 풍요로운 생명력들을 자랑합니다. 울창한 녹색 나무들은 번성하는 생명력들입니다. 비록 이 그림이 동물원을 묘사하고, 동물원이 그저 유사 자연에 불과하다고 해도, 분명히 울창한 녹색 나무들은 풍요로운 생명력들을 자랑합니다. 이 그림에서 생명력은 가장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첫째 생존 농장>에서 생명력(바이오 돔과 식물들)이 가장 두드러질 수 있는 것처럼, 동물원 그림에서 생명력은 가장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바이오 돔과 동물원은 비슷합니다. <첫째 생존 농장>에서 바이오 돔은 소규모 농장이나, 우주 개척 이야기들에서 바이오 돔은 대규모 인공 생태계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대규모 바이오 돔에서 개척자들이 인공 생태계를 조성한다면, 개척자들은 수마트라 호랑이와 장수 거북 같은 대형 동물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인공 서식지에서 대형 동물들을 살아갑니다. 동물원 역시 인공 서식지입니다. 인공 서식지로서 동물원은 대형 동물들을 보여줍니다.
대규모 바이오 돔과 동물원은 똑같은 인공 서식지입니다. 인공 서식지로서 대규모 바이오 돔과 동물원은 호랑이 같은 대형 동물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대규모 바이오 돔과 동물원은 비슷합니다. 바이오 돔과 동물원이 비슷하기 때문에, 비록 <첫째 생존 농장>에서 바이오 돔이 소규모 농장이라고 해도, <첫째 생존 농장>과 열대 밀림 동물원 그림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단편 소설 <식물 아내>가 양쪽 사이에 끼어든다면, <첫째 생존 농장>이 무엇에게 훨씬 가까운가요? 패트리스 머피는 <식물 아내>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우주 개척과 외계 식생들과 플랜테이션 농업을 이야기합니다.
우주 개척과 외계 식생들과 플랜테이션 농업은 SF 설정입니다. 외계 행성과 개척 기지와 바이오 돔이 SF 설정인 것처럼, 외계 플랜테이션 농업은 SF 설정입니다. <첫째 생존 농장>과 <식물 아내>는 우주 개척을 묘사하고, 그래서 양쪽은 똑같은 우주 개척 이야기, 스페이스 오페라, SF 장르에 속합니다. 열대 밀림 동물원 그림은 SF 설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SF 설정은 비현실이나, 동물원은 비현실이 아닙니다. 그림 속의 동물원은 아주 웅장하고, 현실에서 이런 웅장한 동물원은 존재하지 않으나, 아무리 웅장한 동물원이 비현실 설정이라고 해도, 동물원 그림은 우주 개척과 외계 행성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우주 개척과 외계 식생들과 전초 기지는 웅장한 동물원과 다른 위상입니다. 반면, <첫째 생존 농장>과 <식물 아내>는 우주 개척을 묘사합니다. <식물 아내>는 플랜테이션 농업이 외계 식생들을 밀어내지 못한다고 묘사합니다. 이 단편 소설은 풍요로운 외계 식생들이 번성할 거라고 암시합니다. <첫째 생존 농장>이 풍요로운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식물 아내>는 풍요로운 생명력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첫째 생존 농장>과 <식물 아내>는 비슷합니다. 열대 밀림 동물원 그림보다 <첫째 생존 농장>과 <식물 아내>는 훨씬 가깝습니다. 하지만 열대 동물원 그림과 달리, <식물 아내>는 단편 소설입니다.
[동물원 '그림'과 우주 바이오 돔 '그림'은 비슷한 형식입니다. 하지만 이건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닙니다.]
단편 소설은 글자들입니다. 단편 소설은 시각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림과 글자들은 다릅니다. 그림보다 그림이 글자들에게 가까울 수 있나요? 열대 밀림 동물원 그림보다 <첫째 생존 농장>이 <식물 아내>에게 가까울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링크)를 그렸습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화가이고,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회화입니다. <첫째 생존 농장>이 시각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처럼, 회화로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시각적인 정보를 전달합니다.
<첫째 생존 농장>이 글자들이 아닌 것처럼, <유디트>는 글자들이 아닙니다. <유디트>는 두 여자가 남자를 칼로 찌르고 잔인하게 죽인다고 묘사합니다. 어두운 배경, 일그러진 남자 얼굴, 붉은 피, 길다란 칼날, 압박하는 두 여자, 두 여자의 표정은 잔인한 분노를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압박하는 두 여자와 길다란 칼날은 분노하는 성 해방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뛰어난 화가이나, 가부장 유럽 사회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억압했고, 아르테미시아는 분노했을 겁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이 분노를 화폭에 담았을 겁니다. 두 여자는 가부장 편견을 잔인하게 처단합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에 속하나, 여전히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고전이 시대를 초월하는 것처럼, <유디트>는 21세기 초반 사회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서 가장 지배적인 경제 영역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이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페미니즘 논쟁에서 여자 무급 노동이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 것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여자 무급 노동에게 기생합니다. 비록 여자 무급 노동 이론이 여러 이견들에게 부딪힌다고 해도, 분명히 자본주의는 수많은 여자들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수많은 여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가부장 제도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여자가 보조적이라고 세뇌합니다. 남자는 주된 존재이나, 여자는 보조적입니다. 이건 끔찍한 가부장 문화, 성 폭행들, 강간 문화를 형성합니다. 남자가 주된 존재이고, 여자가 보조적이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정복한다고 열심히 헛소리합니다. 이 끔찍한 헛소리는 강간 문화를 뒷받침합니다. 이 끔찍한 헛소리를 타파하기 위해 여자들은 가부장 제도, 자본주의를 없애야 합니다. 하지만 폭력적인 착취 경제로서 가부장 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바르고 고운 말은 착취 경제를 몰아내지 못합니다. 오직 거친 투쟁만 착취 경제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가 폭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전히 21세기 초반 성 해방 운동에게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폭력이 필요합니다. 이 관점에서 단편 소설 <식물 아내>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식물 아내> 역시 성 해방 운동에게 폭력이 필요하다고 암시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에 저항하기 위한 피지배 계급 폭력은 진보적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폭력은 오직 물리적인 폭력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단어 violate가 '위반하다'라는 뜻인 것처럼, 폭력은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 질서(자유 민주주의)를 위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가 폭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성 해방 운동은 진보적인 폭력, 피지배 계급의 '위반'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잔인한 폭력을 보여주기 위해 <유디트>는 시각적인 정보들을 전달합니다. 소설을 비롯해 문학들과 달리, <유디트>는 글자들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이건 그림입니다. <첫째 생존 농장> 역시 그림입니다. 반면, <식물 아내>는 단편 소설입니다. 단편 소설보다 그림이 그림에게 가깝기 때문에, <식물 아내>보다 <첫째 생존 농장>이 <유디트>에게 가깝나요?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이 기준이 될 때, <유디트>보다 <첫째 생존 농장>은 <식물 아내>에게 가깝습니다. 양쪽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이 잔인한 성 해방 그림은 SF 설정들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그림에서 소재는 외계 식생들이 아닙니다. 남자를 죽이기 위해 두 여자는 광검을 휘두르지 않고 크리스 나이프를 찌르지 않습니다. 그림 속의 칼날은 거대 괴수 이빨이 아닙니다. 유디트는 거대 괴수 이빨을 가공하지 않습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비현실과 서구 근대화를 결합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첫째 생존 농장>과 <식물 아내>는 비현실과 서구 근대화를 결합합니다. 그래서 열대 밀림 동물원 그림과 <유디트>보다 <첫째 생존 농장>은 <식물 아내>에게 가깝습니다.
열대 밀림 동물원 '그림'과 초기 바로크 '그림'보다 개척 기지와 바이오 돔 '그림'이 외계 식생 '단편 소설'에게 가까울 수 있는 것처럼, SF 장르는 형식과 매체를 뛰어넘습니다. 그림과 단편 소설은 다르나, SF 장르에서 형식과 매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형식과 매체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식과 매체는 SF 설정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형식과 매체가 바뀔 때, SF 장르는 비현실+서구 근대화를 다르게 표현합니다. SF 소설과 SF 그림은 똑같지 않습니다. 그림과 단편 소설로서 <첫째 생존 농장>과 <식물 아내>는 똑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SF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현실+서구 근대화입니다.
어떤 여행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이돌 그룹 여자친구는 프란츠 슈베르트 조각상에게 인사합니다. 여자친구 쏘리더, 은하, 유주는 프란츠 슈베르트를 '선배님'이라고 부릅니다. 왜 쏘리더, 은하, 유주에게 프란츠 슈베르트가 선배인가요? 19세기 서구 낭만주의 작곡가와 21세기 초반 동아시아 아이돌 가수들이 똑같을 수 있나요? <송어>와 <애플>이 똑같은 범주에 속하나요? 어쩌면 이건 그저 우스꽝스러운 예능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작 딴따라들 따위가 감히 위대한 고전 작곡가에게 비빈다고 힐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분류는 틀리지 않습니다. <송어>와 <애플>은 음악에 속합니다.
훨씬 폭넓은 범주에서 프란츠 슈베르트와 여자친구 멤버들은 똑같은 문화 예술 범주(음악)에 속합니다. 아무리 <송어>와 <애플>이 다르다고 해도, (유주가 표현한 것처럼) 프란츠 슈베르트는 <송어>와 <애플>이 음악 범주에 속한다고 분류해야 합니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이것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프란츠 슈베르트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과 21세기 초반 아이돌 음악을 똑같은 범주에 집어넣는 것처럼, 형식과 매체는 중요한 분류 기준입니다. 형식과 매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글자들과 그림은 다릅니다. 글자들과 그림이 다르기 때문에, <첫째 생존 농장>과 <식물 아내>는 똑같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비현실'입니다.
<송어>와 <애플>이 똑같은 문화 예술 형식(음악)인 것처럼, 형식(그림)이 기준이 될 때, 단편 소설 <식물 아내>보다 그림 <첫째 생존 농장>은 회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에게 가깝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오오오오력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우리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우리는 살아갑니다. 반면, <첫째 생존 농장>이 우주 바이오 돔을 보여주는 것처럼, SF 장르는 비현실을 이야기합니다. 비현실 때문에, SF 팬들은 이 장르를 좋아합니다. SF 장르에서 비현실은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입니다.
현실에서 우주 개척 기지와 바이오 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상상 속에서만 우주 개척 기지와 바이오 돔은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현실에서만 우리는 살아가나, SF 장르는 비현실(우주 바이오 돔)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그림이라는 형식보다 비현실이라는 상상은 훨씬 두드러지고, 이 기준(비현실)에서 회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보다 그림 <첫째 생존 농장>은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게 가깝습니다. 심지어 19세기 문학 작가 메리 셸리와 21세기 초반 4X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 역시 똑같은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 범주는 SF 장르입니다.
SF 그림으로서 <첫째 생존 농장>에게는 두 가지 측면(장르, 형식)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절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상상 속에서만 우주 개척 기지와 바이오 돔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기준은 <첫째 생존 농장>에서 그림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훨씬 두드러진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오직 비현실만 SF 장르를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우주 개척 기지와 바이오 돔은 비현실입니다. 비현실로서 우주 개척 기지와 바이오 돔은 SF 장르를 만듭니다. 하지만 이게 비현실인 것처럼, 드루이드 수풀은 비현실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드루이드들은 드루이드 캠프를 드루이드 수풀이라고 부릅니다.
현실에서 드루이드 수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드루이드 수풀은 비현실입니다. 우주 바이오 돔과 드루이드 수풀은 똑같은 비현실입니다. 그래서 드루이드 수풀이 SF 장르에 속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서구 근대화가 빠졌기 때문에, 드루이드 수풀은 SF 장르에 속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드루이드가 호랑이 동료를 부르고, 마법 송곳니 주문을 외우고, 흡혈귀를 물리친다고 해도, 이 비현실은 SF 장르에 속하지 않습니다. 고대 켈트 드루이드와 <던전스 앤 드래곤스> 드루이드는 똑같지 않으나, 서구 근대화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드루이드는 존재했습니다. 드루이드는 고대 문화에 속합니다. 고대 문화는 서구 근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드루이드 수풀이 고대 인류 문화에게 기반하는 것처럼, 이 환상적인 삼림은 고대 문화에게 기반합니다.]
반면, 서구 근대화가 나타난 이후, 인류 문화는 우주 바이오 돔을 상상합니다. 서구 근대화가 나타나기 전에, 인류 문화는 우주 바이오 돔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구 근대화는 SF 장르를 만들기 위한 결정적인 생산 조건입니다. 'SF&F'라는 명칭이 가리키는 것처럼, 비현실은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를 함께 묶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우주 바이오 돔과 환상적인 버섯 삼림은 다르고,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유럽 판타지는 다릅니다. 서구 근대화가 생산 조건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에게 이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화성 개척자들과 해양 바이오 돔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화성 대규모 해양 바이오 돔에서 개척자들은 우아하고 장엄한 장수 거북과 함께 헤엄칠 수 있습니다. 판타지는 이 우아하고 장엄한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판타지가 이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도, 판타지에서 서구 근대화보다 신화, 전설, 미신은 훨씬 근본적인 생산 조건일 겁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을 파악하기 위해 서구 근대화는 필수적인 출발점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어떻게 서구 근대화가 나타났나요? 서구 근대화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비롯했습니다. 우주 바이오 돔,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서구 근대화는 필수적인 생산 조건입니다. 서구 근대화에게도 필수적인 생산 조건이 있을 겁니다.
우주 바이오 돔에게 생산 조건(서구 근대화)이 있는 것처럼, 서구 근대화에게도 생산 조건이 있을 겁니다. 이게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합리적인 유럽을 대답할 겁니다. 일반인부터 전문적인 학자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합리적인 유럽이 서구 근대화를 만들었다고 대답합니다. 자본주의 역시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유럽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유럽은 자본주의를 만들었고, 자본주의 역시 합리적입니다. 자본주의가 합리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한다고 해도, 이건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건 근대화 사명입니다. 유럽은 근대화 문명들을 퍼뜨립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유럽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유럽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나요? 아니, 이건 사실을 왜곡합니다. 합리적인 유럽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오히려 16~18세기 서구 문명이 식민지들을 수탈했기 때문에,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나타났습니다. 식민지 수탈은 산업 자본주의를 뒷받침합니다. 너무 끔찍한 식민지 수탈은 자본주의를 뒷받침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이것을 은폐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지배적인 관념은 합리적인 유럽을 들먹입니다. 합리적인 유럽은 끔찍한 식민지 수탈을 은폐합니다. 합리적인 유럽은 역사 관점을 고정하고 인종 차별로 이어집니다.
<식물 아내>가 플랜테이션 농업을 비판하는 것처럼, 식민지 플랜테이션이 자본주의를 뒷받침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산업 자본주의는 근대 환경 오염입니다. 아니, 산업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보다 환경 파괴입니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온실 가스를 뿜었고 지구 온도를 올리기 시작했으나, 이미 환경 파괴 범죄(플랜테이션)는 산업 자본주의를 뒷받침했습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관념이 이것을 왜곡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환경 파괴보다 합리적인 유럽을 믿습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식민지 수탈을 외면하고 합리적인 유럽을 굳게 믿습니다.
합리적인 유럽이 자본주의를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합리적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흔한 상식과 달리) 이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아주 관대하게 바라봅니다. 신이 계시를 내려준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유럽 사람들이 합리성을 번쩍 얻었기 때문에, 이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떻게 자본주의가 나타났는지 묻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확장하나,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소비에트 연방보다 서구 제국주의가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10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과 달리, 16~19세기 동안, 서구 문명은 열대 밀림을 파괴했습니다.
한 번 계산기를 단순하게 두드려보세요. 16~19세기 동안, 초기 상업 자본주의가 본격적인 산업 자본주의로 발전하는 동안, 서구 문명은 열대 밀림들을 밀어냈고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소비에트 연방이 무엇을 했나요? 놀랍게도(!) 소비에트 연방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플랜테이션 농업들 때문에, 서구 문명은 막대한 이득을 얻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상황들에서 국가 무역 수입보다 플랜테이션 농업 수익은 훨씬 컸습니다. 이렇게 서구 문명이 획일화 농업을 강요하고 막대한 수익을 얻는 동안, 소비에트 연방이 무엇을 했나요? '놀랍게도' 소비에트 연방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서구 문명은 효율적인 비료를 얻기 원했고, 그래서 서구 문명은 식민지 자연 생태계들을 파괴했습니다. 자본주의 농업은 자연 생태계에게 심각한 피해를 미칩니다. 서구 문명이 식민지 자연 생태계들을 파괴하는 동안, 소비에트 연방이 무엇을 했나요? /놀랍게도/ 소비에트 연방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플랜테이션 농장들에서 수많은 노예들은 죽어나갔습니다. 서구 문명이 수많은 노예들을 죽이는 동안, 소비에트 연방이 무엇을 했나요? 노오오올랍게도 소비에트 연방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소비에트 연방은 뻘짓 집단이었으나, 놀.랍.게.도. 소비에트 연방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서구 문명은 악랄한 짓거리들을 저질렀습니다.
이 악랄한 짓거리들은 막대한 수익을 얻었고, 서구 문명은 자본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나타났고,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저질렀습니다. 초기 환경 파괴(플랜테이션 농업)는 21세기 초반 환경 파괴(기후 변화)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이 환경 파괴들을 무시하고 소비에트 연방보다 서구 제국주의가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소비에트 연방보다 자본주의는 낫다. 적어도 소비에트 연방보다 자본주의는 평화롭다." 이렇게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커다란 착각입니다. 기후 변화가 평화로운가요?
아무리 소비에트 연방이 뻘짓거리 집단이었다고 해도, 적어도 소비에트 연방은 기나긴 환경 파괴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소비에트 연방이 악랄하다고 해도, 적어도 소비에트 연방은 행성급 환경 오염 범죄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소비에트 연방이 독재 국가라고 해도, 적어도 몇 백 년 동안 여러 대륙 단위들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인종 싹쓸이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이 어마어마한 환경 파괴와 인종 학살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오직 소비에트 연방만 힐난합니다. 네, 소비에트 연방은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차악이고, 서구 자본주의는 최악입니다.
조지 오웰은 디스토피아 대작 <1984>를 썼고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나타나기 전에, 200년 이상, 이미 서구 문명은 식민지들을 수탈했고 열대 밀림을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서구 문명은 산업 자본주의를 만들었고, 산업 자본주의와 함께 자유 민주주의 역시 나타났습니다. 조지 오웰은 기후 변화를 알지 못했으나, 산업 자본주의는 비단 기후 변화만 아니라 다른 엄청난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습니다. 환경 오염들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심지어 카를 마르크스는 심각한 벌목이 기후 변화로 이어질지 모른다고 의심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19세기 후반 유럽 사람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자본주의는 심각한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고, 19세기 카를 마르크스는 기후 변화를 의심했습니다. 식민지 수탈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들은 비롯했습니다. 그래서? 서구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조지 오웰이 SF 대작을 썼나요? 아니, 조지 오웰은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기 위한 SF 대작을 쓰지 않았습니다. 조지 오웰은 서구 자본주의를 어느 정도 비판했으나, 이것을 위해 조지 오웰은 SF 대작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84>에게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유럽 중심주의, 백인 우월주의, 인종 차별에서 <1984>는 나타났습니다. 조지 오웰은 환경 파괴를 외면했습니다.
[만약 이런 밀림이 수탈을 당한다면, 이건 절대 긍정적이지 않을 겁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부정적입니다.]
이 환경 파괴는 서구 제국주의를 뒷받침합니다. 서구 근대화는 환경 파괴에게 기반합니다. SF 장르는 해양 바이오 돔에서 개척자들과 장수 거북이 헤엄친다고 묘사할 수 있으나, 이 우아하고 장엄한 장면은 환경 파괴에게 기반합니다. 이건 너무 심각한 모순입니다. SF 장르는 대규모 바이오 돔을 묘사할 수 있으나, SF 장르가 서구 근대화에게 기반하고, 서구 근대화가 환경 파괴에게 기생하기 때문에, 대규모 바이오 돔은 환경 파괴에게 기생합니다. 아무리 SF 장르가 바이오 돔과 야생 보호 구역과 테라포밍을 떠든다고 해도, 이것들은 환경 파괴에게 기생합니다. 몇 백 년의 환경 파괴는 대규모 바이오 돔을 뒷받침합니다.
SF 생태학 덕후들은 이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SF 생태학 덕후들은 우주 바이오 돔 '배후'에서 무엇이 뒷받침하는지 분석해야 합니다. 몇 백 년의 환경 파괴가 너무 커다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19세기 산업 자본주의와 20세기 서구 제국주의를 뒷받침했고, 심지어 여기에서 기후 변화조차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SF 생태학 덕후들은 우주 바이오 돔과 기후 변화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본문 위의 그림에서 바이오 돔이 소규모 농장이기 때문에, 소규모 바이오 돔들과 기후 변화는 아무 관계를 맺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이오 돔이 소규모 농장이라고 해도, 바이오 돔은 첨단 생태학 기술에 속합니다.
아무리 바이오 돔이 소규모 농장이라고 해도, 바이오 돔은 첨단 생태학 기술을 자랑합니다. <첫째 생존 농장>은 첨단 생태학 기술을 자랑합니다. 첨단 생태학 기술은 진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생태학이 무엇인가요? 생태학이 그저 작물들을 키우기 위한 기술에 불과한가요? 생태학이 그저 폐쇄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술에 불과한가요? 바이오 돔은 식물들을 키웁니다. 하늘에서 식물들이 뚝 떨어졌나요? 허공에서 식물들이 번쩍 나타났나요? 그건 아닙니다. 기나긴 진화 역사와 행성 생물권, 이른바 어머니 자연은 식물들을 키웠습니다. 우주 바이오 돔은 행성 생물권에게 식물들을 빌립니다.
아무리 우주 바이오 돔이 첨단 생태학 기술이라고 해도, 우주 '바이오' 돔에서 식물들은 가장 핵심이고, 바이오 돔은 식물들을 직접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자연이 식물들을 키웠기 때문에, 우주 바이오 돔은 식물들을 빌릴 수 있습니다. 생태학은 어머니 자연, 행성 생물권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행성 생물권을 파괴합니다. 자본주의는 서구 근대화에 속하고, 서구 근대화는 SF 장르를 뒷받침합니다. SF 장르에서 우주 바이오 돔은 나타납니다. SF 팬들은 이것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우주 바이오 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각한 환경 파괴와 함께 우주 바이오 돔은 존재합니다.
이건 서구 근대화가 반드시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구 근대화 덕분에, 생태학자들은 지구 생물권을 훨씬 폭넓게 연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서구 근대화는 추악한 과거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때 근대는 진보를 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추악한 과거, 식민지 수탈을 청산하기 원하나요?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기나긴 환경 파괴를 무시하고 자본주의가 합리적이라고 떠벌입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합리적인 유럽을 맹신합니다. 이 관점에서 수구 보수 세력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태극기 할배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합리적인 유럽을 똑같이 맹신합니다.
우익 보수 청년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합리적인 유럽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고 칭송합니다. 유럽 중심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절대 예외가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서구 근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나요? SF 장르를 파악하기 위해 서구 근대화는 필수적인 출발점이나, 심각한 유럽 중심주의 속에서 사람들이 서구 근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나요? 그래서 SF 장르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은 식민지 수탈을 비판해야 합니다.
※ 게임 <노 맨스 스카이> 스크린샷 출처: Captain Brendig,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1738307539
※ 사진 <jungle-plant-green-rainforest> 출처: MoreToTheS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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