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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그리즐리 맨>과 맹목적인 생태 철학 본문

생태/자연과 문명

<그리즐리 맨>과 맹목적인 생태 철학

OneTiger 2018. 10. 11. 18:43

영화 <그리즐리 맨>은 티모시 트레드웰을 다룬 일종의 다큐멘터리입니다. 티모시 트레드웰은 야생 곰들을 보호하자고 외치는 환경 운동가였죠. 트레드웰은 비단 곰들을 보호하자고 외칠 뿐만 아니라 직접 야생 곰들과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그리즐리 맨>이 나온 이유는 트레드웰이 그저 야생 곰들과 잘 어울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과는 그 반대였고, 그건 참혹한 사고였죠. 티모스 트레드웰을 둘러싼 의견들은 다양합니다. 누군가는 비판하고, 누군가는 동정하고, 누군가는 모욕합니다. 누군가는 티모시 트레드웰이 야생 동물을 지키는 성자라고 숭배할지 모릅니다. 그건 지나친 개인 숭배일지 모르나, 트레드웰이 보여준 열정은 순수했습니다.


분명히 트레드웰은 열정적인 환경 운동가였고, 이런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우리는 기후 변화를 비롯해 여러 환경 오염들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티모시 트레드웰처럼 열정적인 환경 운동가들이 늘어나다면, 그건 바람직한 현상일지 모릅니다. 이런 환경 운동가는 특종거리나 별종이 아니라 일반적인 모습이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트레드웰에게는 아주 커다란 한계가 있었죠. 이 사람은 현실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고 너무 낭만적이었습니다.



티모시 트레드웰은 자연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트레드웰은 학자보다 운동가에 가까웠죠.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운동 역시 이론에 기반해야 할 겁니다. 이론에 기반하지 않는 운동은 쉽게 관념으로 흘러가겠죠. 이는 이론이 운동의 향방을 무조건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이론가들이나 사상가들, 학자들은 운동을 망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곤 합니다. 운동은 이론과 만나고, 이론은 운동과 만나야 합니다. 양쪽 모두 서로 영향을 미치고 함께 발전해야죠. 운동가는 공부해야 하고, 학자는 현장으로 달려가야 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월스트리트 점령 현장으로 달려간 슬라보예 지젝은 일종의 모범이 될 수 있겠죠. 운동가들이 광장에서 떠드는 것보다 교육 활동에 집중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의미를 품을 테고요.


하지만 티모시 트레드웰은 이론보다 운동에 너무 집중했고, 그건 참혹한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티모시 트레드웰에게는 이론이 있었으나, 그 이론은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죠. 동물학자들은 사람들이 야생 동물들과 직접 어울리는 상황을 반기지 않습니다. 야생 동물은 드루이드의 동물 동료가 아니에요. 환경 운동가들은 드루이드가 아닙니다. 하지만 티모시 트레드웰은 자신이 드루이드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것 같아요.



그건 착각이었죠. 티모시 트레드웰은 중세 판타지 속의 드루이드가 아니었습니다. 야생 곰들은 드루이드의 동물 동료가 아니었어요. 티모시 트레드웰은 관념적인 자연관을 유지했고, 그건 돌이키지 못할 결과로 흘러갔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트레드웰이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만이 아닐 겁니다. 사실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뭔가에게 배신을 당하곤 합니다. 사람들이 뭔가를 열정적으로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사람들을 배신할지 모릅니다. 그런 배신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그건 인생이 던지는 커다란 모순입니다. 그런 모순 때문에 사람들이 티모시 트레드웰을 주목할까요?


그건 전부가 아닐 겁니다. 우리는 다른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리즐리 맨>이 유명한 이유는 티모시 트레드웰을 배신하는 존재가 야생 포식동물이기 때문일 겁니다. 포식동물. 인간을 잡아먹는 커다란 야수. 티모시 트레드웰은 그저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포식이라는 행위에 커다란 자극을 받습니다. 유기체 동물로서, 잡식동물로서, 고기를 좋아하는 동물로서, 우리 역시 뭔가를 죽이고 고기를 먹습니다. 육식은 즐겁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 역시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갈지 모르죠. 그건 별로 즐거운 상황이 아닐 겁니다.



<신의 괴물>은 최고 포식동물(알파 프레데터)을 다루는 생태 논픽션입니다. 이 책에서 데이빗 쾀멘은 잡아먹히는 행위가 일반적인 죽음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상황. 우리가 누군가의 피와 살이 되는 상황. 먹고 사는 문제에서 우리는 떨어지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는 이런 '잡아먹히는 죽음'에 매료됩니다. 그래서 티모스 트레드웰은 훨씬 주목을 받을 수 있겠죠. 게다가 야생 동물은 우리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비인간적인 존재입니다. SF 소설들에는 숱한 외계인들이 나옵니다. SF 소설들을 읽을 때, 우리는 숱한 외계인들을 만날 수 있죠. 하드 SF 소설에 등장하는 이해하지 못할 외계인부터 스페이스 오페라에 나오는 그저 피부 색깔만 다른 외계인까지, 우리는 수많은 외계인들을 만나요.


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인간 존재를 쉽게 만나지 못합니다. 비인간 존재를 만나고 싶다면, 우리는 야생 동물을 찾아가야 합니다. 티모스 트레드웰을 배신한 존재는 그런 비인간 존재입니다. 아니, 이게 배신일까요? 우리가 이걸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가 비인간 존재에게 인간적인 기준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트레드웰이 처한 비극은 독특합니다. <그리즐리 맨>은 SF 장르가 아니나, 어쩌면 우리는 SF 장르를 이용해 이런 상황을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이런 고민(비인간 존재가 누구인지 분석하는 고민)은 <그리즐리 맨>을 이어가는 주된 감성이 아닐 겁니다. 저는 이런 고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대부분 사람들은 열정과 어리석음을 논의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티모시 트레드웰이 어리석었다고 비판할지 몰라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어리석음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예외가 아니겠죠. 이 블로그는 생태 사회주의를 지지합니다. 하지만 생태 사회주의는 그저 어리석은 녹색 빨갱이에 불과할지 모르죠. 누가 알겠어요.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나 신념을 지지할 때, 우리는 왜 거기에 가치가 있는지 깊게 고민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티모시 트레드웰이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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