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알파 센타우리>와 여자의 젖과 어머니 자연 본문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의 비비안. 여자와 자연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이런 것이겠죠.]
흔히 사람들은 여자와 자연이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이 생명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은 수많은 생명들을 낳고 수많은 생명들을 먹입니다. 생물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 심지어 과학자들조차 풍성한 생물종들이 번성하고 먹이 그물망을 이룬다고 생각할 겁니다. 쓸쓸하고 죽어가는 황무지는 자연이 아닙니다. 그게 과학적으로 자연 환경에 속한다고 해도, 대중적인 인식 속에서 쓸쓸한 황무지는 자연이 아닙니다. 자연은 싱그러운 녹색 삼림이나 형형색색의 산호초입니다. 그것들이 풍성한 생명력, 인류 문명의 번성을 보장하는 생명력이기 때문이죠.
누군가는 심해 열수공이 자연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심해 열수공은 아주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자랑합니다. 어쩌면 최초 생명체는 심해에서 비롯했는지 모르죠. 자연(생명 현상)은 심해에서 올라왔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심해 열수공이 풍성한 생물 다양성을 자랑한다고 해도, 그건 태양 에너지 생태계가 아니고, 인류 문명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심해 열수공과 달리, 녹색 삼림이나 방대한 산호초는 태양 에너지 생태계이고, 당장 인류 문명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대중적인 인식 속에서 녹색 삼림과 방대한 산호초는 자연이 될 수 있으나, 심해 열수공은 그렇지 못하겠죠. 사람들은 자연이 아름답고 친숙하고 풍성한 생명 현상이라고 간주해요.
이런 관점에서 여자는 자연과 비슷합니다. 자연이 무수한 생명들을 낳고 키우는 것처럼, 여자는 아기를 낳고 아기에게 젖을 먹입니다. 여자, 여자의 신체, 여자의 젖가슴과 둔부, 여자의 풍성한 젖은 생명력입니다. 여자의 젖가슴은 인류 문명을 먹여 살립니다. 여자의 풍성한 젖은 쉽게 치유와 생명과 사랑과 연민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카리타스 로마나(로마 여자의 자비)는 대표적인 사례일 겁니다. 굶어죽는 노인을 구하기 위해 젊은 여자는 노인에게 젖꼭지를 물릴 수 있죠.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존 스타인벡은 비슷한 장면을 묘사합니다. 어쩌면 이건 생명 현상처럼 노동자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뜻인지 모르죠. 그런 해석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여자가 누군가(다른 생명체)에게 풍성한 젖을 먹이는 장면은 생명 현상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아주 숭고하고 성스럽고 아름다운 장면이 될 수 있겠죠.
물론 가부장 문화는 이런 수유 장면을 차별하고 왜곡할지 모릅니다. 여자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육아가 여성적인 영역이라고 치부하고 육아를 여자 개인에게 떠넘길지 모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른바 돌봄 노동은 여자들의 영역이죠. 하지만 수유가 여자의 영역이라고 해도, 전반적인 육아는 사회 영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공 탁아소나 국립 유치원이 필요하다고 외치죠. 육아와 살림은 어느 한 여자의 힘겨운 스트레스가 아니라 사회 영역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는 육아를 여자라는 성별로 밀어넣죠. (자본주의는 육아가 이윤을 창출하지 못한다고 무시하죠.)
현대 (서구와 서구에서 영향을 받은) 사회에서 젖가슴은 성적 매력이 됩니다. 거리의 브래지어 광고는 교통 사고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브래지어 광고는 남자 운전자의 시선을 빼앗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젊은 여자가 노인에게 젖꼭지를 물릴 때, 누군가는 그걸 성교나 애무로 해석할지 몰라요. 그건 사상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성 차별로 이어진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가 되겠죠. 이렇게 가부장 문화 속에서 수유와 임신과 출산은 성 차별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가부장 문화는 수유와 출산을 이용해 성스러운 모성 본능 신화를 만들고, 육아를 사회적인 영역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여성적인 영역으로 밀어넣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일조해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여자를 여성적인 영역에서 분리해야 할 겁니다. 동시에 우리는 남자를 남성적인 영역에서 분리해야 하겠죠. 하지만 이런 문제점들이 있다고 해도, 여자가 다른 생명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사라진다면, 사회적인 육아가 대세가 된다면, 우리는 수유 장면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겠죠. 영양분이 넘치는 풍성한 젖과 풍만한 젖가슴과 도톰한 젖꼭지는 생명 현상을 상징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건 여자의 신체가 남자의 신체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그걸 오해할지 모릅니다. 음, 저는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여자에게는 두 젖가슴과 보지가 있습니다. 남자에게는 오직 자지만 있습니다. 보지와 자지는 상응할 수 있으나, 남자에게는 두 젖가슴에 상응하는 부분이 없죠. 여자는 젖으로 생명체를 먹일 수 있으나, 남자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어떤 젊은 엄마는 굶어죽는 남자를 만납니다. 젊은 엄마는 굶주린 남자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젖을 먹입니다. 이건 치유나 복원이나 풍성한 생명력을 상징할 수 있죠. (젊은 엄마가 굶어죽는 할머니에게 젖을 먹인다고 해도, 그런 상징은 바뀌지 않겠죠.)
만약 성별이 반대였다면? 어떤 젊은 아빠가 굶어죽는 여자를 만났다면? 아무리 굶주린 여자가 젊은 아빠의 자지를 빤다고 해도, 굶주린 여자는 영양분을 얻지 못하겠죠. 남자가 몇 리터짜리 정액을 싼다고 해도, 그게 영양분이 될까요? 여기에서 저는 정액 성분을 자세히 분석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굶주린 여자가 젊은 아빠의 자지를 빨고 정액을 삼킨다고 해도, 그건 치유나 풍성한 생명력을 상징하지 못하겠죠. 엄마가 아이에게 젖꼭지를 들이밀 때, 그건 아름다운 장면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아이에게 자지를 들이미는 장면은…. 글쎄요.
하지만 여자가 젖을 먹일 수 있다고 해도, 이건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차이에 불과합니다. 여자는 자신의 젖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나, 그건 남자를 차별할 근거가 되지 않죠. 누군가가 이걸 우월이나 열등으로 해석한다면, 그건 억압과 차별로 이어질 겁니다. 왜 생물적인 차이가 억압과 차별로 이어져야 할까요. 만약 인류가 포유동물이 아니었다면, 이런 개념은 바뀌었을 겁니다. 인류가 조류나 양서류였다면, 여자는 젖을 먹이지 않았을 테고, 여자와 자연은 좀 더 다른 관계를 맺었을지 몰라요. 그때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땅' 같은 비유적인 문구는 존재하지 않겠죠. 만약 인류가 포유동물이 아니라면, 풍성하고 영양분이 넘치는 젖은 상징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사소한 정의>가 젖가슴 운운하는 것처럼, <역행하는 여름>이 여자와 남자를 뒤바꾸는 것처럼, 이런 발상은 SF 설정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인류가 외계인들을 만난다면, 외계인들에게 성별이 있다고 해도, 젖가슴 같은 부위는 없을지 모릅니다. 외계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땅 같은 표현을 쓰지 않겠죠. 이런 사변은 SF 설정으로 이어질 수 있으나, 우리는 인간이고, 우리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죠. 아무리 골수 SF 독자가 수 백 권의 SF 소설들을 읽는다고 해도, 결국 SF 독자는 인간입니다. 현실에서 인간은 포유동물이고, 여자는 젖을 먹입니다. 젖은 생명이고요.
그래서 대지모신이나 어머니 자연은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민족들이 대지모신이나 어머니 자연을 섬기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은 이게 낯선 개념이 아니라고 말하죠. 어쩌면 인류는 공통적으로 여자와 자연(대지)을 연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 자연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인류는 과일이나 버섯을 따먹을 수 있으나, 그건 어머니 자연의 젖이 아닙니다. 인류가 과일들을 따먹는다고 해도, 자연은 여자가 되지 않죠. 여자와 자연이 함께 등장한다고 해도, 그건 비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비긴스>에서 에코토피아를 이룩하는 두 주역은 여자입니다. 두 주역은 나이든 여자 의원과 젊은 발명가 아가씨입니다.
두 여자가 에코토피아를 이룩한다는 상황은 어머니 자연으로 이어질 수 있겠죠. 이건 <에코토피아 비긴스>가 어머니 자연을 그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어머니 자연보다 에코 페미니즘에 가깝습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정복에 저항하죠. 가부장 문화는 남자가 여자를 정복하고 깃발을 꼽아야 한다고 간주합니다. 이런 것처럼,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에 깃발을 꼽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유럽 침략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건 착취와 수탈과 오염이 됩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정복보다 공존을 바랍니다. 그래서 에코 페미니즘은 수탈을 당하는 대상(여자와 자연)을 응원하죠.
그래서 누군가는 <에코토피아 비긴스>와 어머니 자연이 아예 관계가 없다고 해석할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에서 SF 설정이 상상력을 과감하게 발휘한다면, SF 설정은 아예 행성 생태계를 여자에 대입할 수 있어요. 비디오 게임 <알파 센타우리>는 아주 좋은 사례가 되겠죠. <알파 센타우리>에서 디드리 스카이는 행성 생태계(행성 의식)와 접촉할 수 있습니다. '가이아의 양녀들'이라는 세력 이름처럼 디드리 스카이는 어머니 자연을 강하게 의식하죠. '가이아의 양녀들'이라는 이름의 여자 대표자가 행성 생태계와 소통하고 행성과 하나가 된다면…. 이것처럼 SF 설정으로 어머니 자연을 구현하는 사례가 있을까요. 이건 에코 페미니즘과 어머니 자연을 동시에 구현하는 사례가 되겠죠.
아니면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처럼, 대지모신과 밀림의 딸 네이티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어요. 네이티리가 대지모신과 소통하고 거대한 외계 호랑이와 교감하는 장면에서 누구나 어머니 자연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겠죠. 그렇다고 해도 이런 것들은 그저 비유이고 상징입니다. 여기에 상상 과학은 없습니다. 여기에 여자와 자연을 이어주는 필연적인 논리는 없어요. <알파 센타우리>의 정신적 후계작 <문명: 비욘드 어스>에도 행성 생태계와 소통하는 설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별은 중요하지 않죠.
설사 미래 인류가 정말 지적인 행성 생태계를 만난다고 해도, 그 행성 생태계가 여자들과 소통하기 원할까요? 지적인 행성 생태계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와 소통할지 모릅니다. 그런 SF 소설들은 없지 않아요. 판타지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소녀 모아나가 대지모신 테 피티를 살리는 것처럼, 여성적인 행성 생태계는 상상 과학보다 판타지 설화에 가깝죠. SF 설정이 여자와 자연을 함께 이야기한다면, 그건 어머니 자연보다 에코 페미니즘에 가까워야 할지 모릅니다. 어머니 자연은 비유이고, 누군가가 비유를 본질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건 피상적인 분석이 되겠죠. (물론 어머니 자연이 비유라고 해도, 분명히 어떤 가치는 있을 겁니다. 이게 꽤나 강력한 비유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