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권력에 저항하는 과학자, 보그다노프와 갈릴레이 본문
SF 세상에서 과학자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SF 소설이 상상 (자연) 과학을 선보이기 때문에 과학자는 아주 핵심적인 등장인물입니다. <빼앗긴 자들>처럼 자연 과학보다 사회 괴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SF 소설들 역시 과학자를 활용하죠. 19세기에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나타났을 때부터 과학자는 핵심적인 등장인물이었고, 20세기에는 그런 성향이 훨씬 확장되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SF 세상에서 과학자들은 계속 중요한 역할을 맡겠죠.
하지만 과학자가 오직 SF 장르의 전유물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는 천문학자 갈릴레이를 다루나, 이는 시대극에 가깝고 사이언스 픽션과 아무 상관이 없죠. SF 세상에서 과학자는 그저 자연 과학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SF 세상에서 과학자는 자연 과학을 이용해 어떻게 세상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바뀔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SF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SF 소설이 어떻게 세상이 바뀌는지 보여주기 때문일 겁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런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SF 소설은 재미있겠죠.
SF 세상에서 긍정적인 과학자는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상징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미신이나 고정 관념에 빠질 때, 과학자는 그걸 지적하고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자는 계몽주의 지식인과 비슷합니다.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강조하기 위해 SF 작가들은 그렇게 과학자를 이용하곤 합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과학자 아르카디 보그다노프는 "왜 첨단 기술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근대 시대의 사상을 따르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아르카디 보그다노프는 첨단 기술이 발달한 것처럼 사람들의 사고 방식 역시 진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보그다노프는 계몽주의 지식인과 비슷해요. 하지만 이런 계몽은 언제나 여러 어려움들에 직면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고, 미신이나 고정 관념을 쉽게 버리지 않아요.
그래서 아르카디 보그다노프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고 방식을 바꾸라고 설파할 때마다, 사람들은 보그다노프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조롱하거나 분란을 일으킨다고 모욕하죠. SF 독자들은 이런 과학자 상징을 비단 <붉은 화성>만 아니라 여러 소설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양들은 올려다본다>에서 환경 오염이 극심함에도, 기업들은 계속 산업 폐기물들을 쏟아붓고, 정치인들은 대기업들과 결탁하고, 사람들은 그런 대기업들에게 매달리고…. 이런 상황에서 환경 오염을 막기 위해 과학자는 혼자 동분서주하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붉은 화성>이나 <양들은 올려다본다>의 이런 과학자들과 어느 정도 상통합니다. 특히,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갈릴레오는 미신이나 고정 관념을 거부하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강조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붉은 화성>이나 <양들은 올려다본다>의 과학자들처럼,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갈릴레오는 주류적인 고정 관념을 거부하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촉구합니다. 갈릴레이는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SF 소설들에서 과학자들이 미움을 받는 것처럼, 갈릴레이 역시 미움을 받아요.
아니, 그건 그저 미움이 아니라 갈릴레오의 목숨을 위협하죠. 갈릴레이는 계속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고 주장하나, 종교 세력은 지배 계급이고, 지배적인 관념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 세력은 갈릴레이를 압박합니다. 진리를 위해 갈릴레오는 고집을 꺾지 않으나, 종교 세력은 갈릴레이의 목숨을 위협하고, 결국 갈릴레이는 권력에 굴복합니다. 희곡은 갈릴레이이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 고통, 두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관객들은 갈릴레이가 사면초가 같은 위기에 빠졌다고 느낄 겁니다.
어쩌면 이는 그저 SF 소설이나 희곡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생태학자들은 기후 변화를 비롯해 온갖 환경 오염들을 우려합니다. 자유 무역은 숱한 동식물들과 미생물들을 세계 곳곳에 퍼뜨립니다. 자유 무역 때문에 자연 생태계는 대대적으로 교란됩니다. 공장식 축산은 치명적인 질병의 온상이 되고, 사방팔방에 질병을 퍼뜨립니다. 생태학자들은 공장식 축산과 자유 무역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나, 대기업들은 들어먹지 않습니다. 대기업들의 목표는 이윤입니다.
이윤을 축적할 수 있다면, 자연 생태계가 붕괴한다고 해도, 대기업들은 상관하지 않아요. 정부는 대기업들을 편들고, 공장식 축산이 아니라 야생 철새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웁니다. 심지어 정부는 야생 철새들을 사살합니다. 공장식 축산 때문에 무고한 철새들은 죽어갑니다. 이를 지켜보는 생태학자들은 절대 속이 편하지 않겠죠. 다들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생태학자들이 대기업을 규제하라고 외칠 때, 대기업들은 시장에 간섭하지 말라고 반박하고 생태학자들을 빨갱이로 몰아갑니다.
SF 소설 속에서, 희곡 속에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슷한 광경들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옳은 말을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미움을 받고 모욕을 당합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그 사람의 주장이 기득권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에 저항하고 옳은 말은 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습니다. 어쩌면 <갈릴레이의 생애>와 <붉은 화성>은 그런 현실을 꼬집고 싶어하는지 모르죠. 하지만 결국 역사의 승리자는 갈릴레이입니다. 우리는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고 생각하죠. 그렇게 세상은 바뀝니다. 비록 사람들이 느리게 생각을 바꾼다고 해도, 결국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고, 세상은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