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괴수물에서 부화의 신비로움 본문
[저는 이런 장면에서 거대 괴수의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이건 그저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하지 않겠죠.]
스콧 웨스터펠드가 쓴 <레비아탄> 시리즈에는 여러 개조 동물들이 나옵니다. 작고 똑똑한 로리스부터 순양 전함을 침몰시키는 촉수 괴수 베헤모스까지, <레비아탄> 시리즈는 다양한 개조 동물들을 보여주죠. 어떤 것은 포유류이고, 어떤 것은 조류이고, 어떤 것은 파충류입니다. 베헤모스 같은 괴수가 어디에 속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크라켄은 거대 오징어처럼 생겼고, 따라서 두족류에 속하겠죠. 하지만 베헤모스가 두족류일까요? 분명히 베헤모스는 엄청난 촉수들을 자랑하나, 전반적인 생김새는 두족류와 거리가 멉니다.
어떤 독자들은 베헤모스와 크라켄이 똑같은 부류라고 이야기하나, 설사 소설 설정이 그렇다고 해도, 베헤모스는 꽤나 괴상한 두족류가 되겠죠. 이렇게 생물종이 다르기 때문에 독자들은 개조 동물들이 태어나는 방법이 서로 다를 거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크라켄은 거대 두족류이고, 따라서 알에서 태어나겠죠. 크라켄 알은 정말 엄청나게 클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레비아탄이나 전투 곰이나 가스 탐지견 같은 포유류들이 알에서 깨어날까요? 스콧 웨스터펠드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모든 개조 생명체는 알에서 깨어납니다.
파충류나 조류의 알은 새끼를 보호하는 장치입니다. 부화하기 전까지, 알 속에서 새끼는 안전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알은 외부의 위협을 막고, 자라나는 새끼를 지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스콧 웨스터펠드는 개조 생명체들이 알에서 깨어난다고 설정했을지 모릅니다. 이는 기능을 중시하는 설정이죠. 아니면 좀 더 미학적인 설정이 있을지 모릅니다. (작가조차 의식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죠. 어쩌면 스콧 웨스터펠드는 난태생이 태생보다 신비롭게 보인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작가는 개조 생명체들이 알에서 깨어난다고 설정했을지 몰라요. 알은 새끼를 보호하는 장치이고, 동시에 새끼를 감추는 비밀 상자입니다.
새끼가 부화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알에서 무엇이 나올지 알지 못합니다. 무지는 신비를 강조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난태생은 괴수의 신비로움을 강조하는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부화의 신비로움은 괴수가 신비롭다는 측면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여러 괴수물들은 그런 장면들을 강조해요. 소설 <테메레르>에서 주인공 로렌스 대령과 테메레르가 처음 만났을 때, 테메레르는 아직 부화하지 않았습니다. 테메레르는 알 속에 있었습니다. 로렌스는 어떤 알을 발견했고, 이내 그게 드래곤의 알이라고 깨닫습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알 속에서 어떤 드래곤이 깨어날지 두근두근 기다립니다. 게다가 부화의 순간은 모든 이목을 끌어당깁니다.
소설 <테메레르>에서 알이 깨지고 테메레르가 태어나는 순간은 꽤나 극적입니다. 어쩌면 이건 소설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들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이는 실질적으로 로렌스와 테메레르가 처음 만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알에서 누가 깨어날지 로렌스는 알지 못했죠. 기다림의 순간은 긴장과 흥분을 동반하고, 작가 나오미 노빅은 그런 점을 멋지게 살렸습니다. 새끼를 낳는 장면 역시 감동적이나, 여기에는 부화가 선사하는 긴장과 흥분이 없습니다. 태생은 어미와 새끼가 동시에 존재하는 탄생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난태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미는 알을 낳고 어디론가 떠났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알에서 뭔가가 깨어난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깨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역시 이런 긴장과 흥분을 변주합니다. 이 소설은 알 대신 고치를 강조하죠. 애벌레는 고치가 되고, 고치에서 뭐가 나올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마침내 고치에서 그것이 나왔을 때, 독자들은 입을 벌리고 감탄하겠죠. 영화 <모스라 대 고지라>에서 사람들은 아주 엄청나게 거대한 알을 발견합니다. 해안에 아주 거대한 알이 덩그러니 놓였습니다. 이것 역시 모스라가 태어난다는 신비로움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일 겁니다.
어쩌면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는 모스라의 알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모스라의 알이 나온다면, 이 영화 역시 부화의 순간이 동반하는 긴장과 흥분을 보여주겠죠. (모스라의 알이 무슨 모양일지 저는 꽤나 궁금합니다.) 이런 소설들과 영화들 이외에 우리는 다른 수많은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창작가가 괴수를 신비롭게 포장하고 싶다면, 창작가는 부화의 순간에 주목해야 합니다. 창작가는 괴수를 보여주기 전에 먼저 알을 보여주고,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알에 주목한다고 써야 합니다. 당연히 독자들 역시 알에 주목할 테고, 알에서 누가 깨어나는지 기다릴 겁니다.
그런 기다림은 괴수를 더욱 신비롭거나 경이롭게 포장할 수 있겠죠. 왜 영화 <쥬라기 공원>과 <쥬라기 월드>가 벨로시랩터와 인도미누스 렉스가 부화하는 장면을 보여줬을까요? 저는 부화가 벨로시랩터와 인도미누스 렉스를 신비롭(거나 무시무시하)게 포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알 속에서 날카로운 눈동자를 드러내는 인도미누스 렉스…. 태생은 절대 이런 장면을 묘사하지 못하죠. 그래서 괴수는 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태생 설정은 나쁘지 않고, 태생 설정 역시 여러 멋진 장면들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난태생이 태생보다 훨씬 나은 설정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부화를 이용한 미학적인 연출은 오직 괴수물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사실 수많은 문화 예술들은 부화를 신나게 써먹습니다. 부화는 누군가가 껍질을 깨고 세상과 직면하는 행위입니다. 껍질과 직면. 이런 상징 덕분에 예술가들은 부화에 주목하고, 부화를 직면과 용기와 깨달음으로 연결합니다. 하지만 괴수물에서 부화는 다른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괴수물에서 부화는 직면과 용기와 깨달음이 아니라 긴장과 흥분과 공포와 경외가 될 수 있겠죠.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처럼, 고치 역시 알을 대신할 수 있고요. 흠, 어쩌면 <고지라: 괴수왕>은 두 번의 부화를 연출할지 모르겠군요. 모스라 애벌레가 알에서 깨어나는 장면과 모스라 어른벌레가 고치에서 깨어나는 장면. 어떻게 <고지라: 괴수왕>이 두 번의 부화 장면을 연출할지 저는 꽤나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