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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의 크라켄과 우주 고래 본문

SF & 판타지/크고 작은 괴수들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의 크라켄과 우주 고래

OneTiger 2018. 8. 1. 23:46

[이런 그림은 거대 바다 괴수를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는….]



게임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는 중세 판타지 롤플레잉입니다. 하지만 다른 중세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들과 달리,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를 대표하는 표지 그림은 해전 장면입니다. 표지 그림 속에서 주연 모험가 일행은 범선을 탔습니다. 해적들은 갑판 위로 올라오고, 주변에서 크라켄으로 보이는 커다란 촉수들은 선원들을 낚아채거나 크게 꿈틀거립니다. 이 표지 그림을 봤을 때,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가 바다 괴수를 보여줄 거라고 기대한 것 같습니다. 게임 제작진 옵시디언은 항해와 선박, 항구 도시를 강조했습니다.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가 킥스타터 게임이기 때문에 옵시디언은 모금이 일정 금액을 넘는다면 바다 괴수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모금은 일정 금액을 넘지 못했고,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에 바다 괴수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게임은 작은 크라켄을 보여주나, 그건 범선을 공격하는 거대한 바다 괴수가 아닙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사실에 실망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표지 그림은 과장 홍보일지 모릅니다. 표지 그림이 바다 괴수가 선박을 습격하는 장면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옵시디언은 표지 그림을 바꿔야 했을지 모릅니다.



사실 중세 판타지 창작물에 선박과 바다와 항구 도시가 등장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 바다 괴수를 꿈꿀 겁니다. 레비아탄이나 크라켄이나 시서펜트 같은 바다 괴수는 필수적인 옵션 같습니다. 바다 괴수가 나오지 않는 중세 판타지 항해는 팥소 없는 붕어빵일지 모릅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쓴 <해적의 시대>처럼, 별로 환상적이지 않은 해양 모험 소설조차 바다 괴수 크라켄을 보여줍니다. 본격적인 중세 판타지 해양 게임이 레비아탄이나 크라켄이나 시서펜트를 슬쩍 넘어간다면, 중세 판타지 팬들은 실망할지 모릅니다.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는 바다 괴수를 슬쩍 넘어갔고, 어떤 중세 판타지 팬들은 그 점을 지적합니다. 이는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가 엉터리 게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게임은 여러 평론가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에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범선과 항해가 중요하게 등장하나, 핵심적인 플레이는 그게 아닙니다. 핵심적인 플레이는 여러 모험가들이 비경과 던전을 돌아다니는 과정이고, 범선 항해는 부차적인 요소에 가깝습니다. 만약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2>가 본격적인 항해 게임이었다면, 평론가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은 부정적인 점수를 매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해도, 표지 그림은 정말 과장 홍보 같습니다.



소설 <해저 2만리>가 지적하는 것처럼, 바다는 거대 괴수를 품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비록 <해저 2만리>에 전설적인 고래 괴수는 등장하지 않으나, 향유 고래나 커다란 오징어는 정말 바다 괴수 같습니다. 게다가 SF 세상에는 다곤이나 고지라처럼 초자연적인 바다 괴수가 존재합니다. 다곤은 바다 괴수를 넘어 고대신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우주는 어떨까요. SF 작가들은 우주가 또 다른 바다라고 계속 비유합니다. 구태여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 블로그에서 저는 우주가 또 다른 바다라는 사례들을 몇 번 이야기했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나 <우주의 개척자>나 <바실리스크 스테이션>부터 숱한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까지, SF 창작물들은 대항해 시대를 우주 탐사에 투영합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나 괴수물에 크라켄이나 고지라 같은 괴수가 존재한다면,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우주 드래곤(!)이나 우주 고래(!)가 존재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우주 고래는 별로 드문 설정이 아닐 겁니다. 비록 비중이 크지 않다고 해도, 테리 프랫쳇이나 이안 뱅크스나 스티븐 백스터나 티모시 잔이나 피터 해밀튼은 거대한 우주 부유 생명체를 묘사했습니다. <스타 워즈>나 <스타 트렉>이나 <닥터 후> 같은 영상물들을 고려한다면, 목록은 훨씬 길어질 수 있겠죠.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 역시 우주 드래곤이나 우주 고래를 빼먹지 않습니다. 워낙 노골적으로 크라켄이나 레비아탄을 모방하기 때문에 좀 어색한 사례들이 있고요. 이는 모든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이 우주 드래곤이나 우주 고래를 이야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주 고래가 다소 황당하게 보일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게임들은 순수하게 우주선들에 치중합니다. 우주가 너무 가혹한 환경이기 때문에 우주 드래곤이나 우주 고래는 비약적이고 황당한 상상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아무리 무늬만 SF라고 해도, 어떤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은 우주 고래 같은 황당한 상상력을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그런 게임들이 좀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중세 판타지 항해 이야기가 크라켄이나 레비아탄을 언급하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가 우주 고래를 언급한다면, 분위기가 훨씬 돋보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러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은 그저 우주선에만 치중하고, 우주 고래를 꿈꾸지 않아요. 이는 그게 진부하다거나 상투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게임 분위기에 따라 우주 고래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우주 고래가 상대적으로 분위기를 뛰울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주 드래곤이나 우주 고래가 등장한다고 해도, 그런 우주 괴수들이 무조건 우주선들과 싸운다면…. 그건 진부한 19세기 포경 소설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뭔가 거대한 야수를 볼 때, 사람들은 살육을 먼저 생각하곤 합니다. 어쩌면 권력을 지키기 위해 지배 계급이 계속 학살과 폭력을 미화하기 때문일지 모르죠. 지배 계급을 위해 군대가 양민들을 학살함에도, 지배 계급은 계속 군대와 폭력과 학살을 미화합니다. 지배 계급은 그런 미화를 계속 인민들에게, 심지어 아이들에게 주입합니다. 그래서 SF 창작가들조차 무조건 우주 고래를 인간들이 때려잡아야 하는 괴물로서 묘사하는지 모르죠. 이유가 무엇이든, 저는 SF 창작가들이 우주 고래를 우주 생태계의 구성원으로서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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