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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팬들이 <퍼시픽 림>을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까 본문

SF & 판타지/크고 작은 괴수들

괴수 팬들이 <퍼시픽 림>을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까

OneTiger 2018. 9. 18. 20:17

[이렇게 멋진 거대 괴수가 얻어터진다면…. 거대 괴수 팬들에게 그게 재미가 될 수 있을까요.]



영화 <퍼시픽 림>에 등장하는 나이프헤드는 꽤나 멋진 괴수입니다. 나이프헤드는 도입부를 장식하죠. 왜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가 나이프헤드를 가장 처음에 배치했을까요? 물론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괴수는 트레스패서이나, 트레스패서는 예거와 씨우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이프헤드는 본격적으로 카이주와 예거가 싸우는 이야기를 열어젖히죠. 첫인상은 중요합니다. 나이프헤드를 목격한 이후, 관객은 나이프헤드가 카이주라는 전형을 대표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감독은 카이주라는 전형성을 드러낼 수 있는 괴수를 선택해야 했을 테고, 나이프헤드는 그런 괴수가 되었겠죠.


이는 그저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나, 아예 망상이 아닐 겁니다. 나이프헤드가 첫째 타자라면,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겠죠. 감독은 아무 이유 없이 나이프헤드를 첫째 괴수로써 배치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나이프헤드는 여러 전형성들을 보여줍니다. 나이프헤드는 특수 촬영 영화에 어울리는 디자인입니다. 우둘투둘한 생김새, 직립 2족 보행, 거대한 두 팔, 커다란 머리. 배우가 나이프헤드 슈트를 직접 입고 슈트 액션을 선보인다고 해도, 그건 크게 무리가 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나이프헤드는 외모로 자신의 특기를 드러냅니다. 이름처럼 나이프헤드는 칼날 같은 머리를 자랑합니다. 게다가 이는 장식이 아니고, 실질적인 무기입니다. 나이프헤드는 칼날 머리로 집시 데인저를 꿰뚫고 자릅니다. 그래서 집시 데인저는 커다란 부상을 입어야 했고, 영화 주인공 레인저는 크나큰 상처를 이기지 못합니다. 나이프헤드와 달리, 다른 괴수들은 외모로 자신의 특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타치를 보세요. 오타치 그림이나 피규어를 본다면, 관객들이 오타치에게 무슨 특기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오타치와 예거가 싸우는 장면을 관람한 이후, 관객들은 오타치에게 무슨 특기가 있는지 알 수 있겠죠. (그래서 체르노 알파는 쓰러졌죠.)


레더백 역시 마찬가지고요. 더백이 직접 특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더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유레카 스트라이커는 쓰러졌죠.) 무타보어나 슬래턴, 오니바바에게는 뚜렷한 특기가 없고요. 이런 카이주들은 외모로 자신의 특기를 드러내나, 그런 특기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죠. 나이프헤드는 정말 특수 촬영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외모를 자랑하고, 동시에 그런 외모로 자신의 특기를 인상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독이 나이프헤드를 첫째 괴수로 낙점했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이것 역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하지만 제 추측이 틀리다고 해도, 이런 분석은 아주 틀리지 않겠죠.



영화 <퍼시픽 림>을 재미있게 관람했다면, 괴수 팬들은 나이프헤드에게 관심을 기울일지 모릅니다. 괴수 팬들은 이런 인상적인 괴수를 간과하지 못하겠죠. 일반적인 관객들은 괴수 팬들이 이런 괴수를 아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실 괴수 팬들은 나이프헤드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평론가들이나 관객들은 <퍼시픽 림>이 괴수 팬들을 위한 영화라고 말해요. 하지만 이런 발언에는 약간 문제(?)가 있을지 모릅니다. 분명히 나이프헤드는 인상적인 괴수이나, <퍼시픽 림>이 괴수 팬들을 위한 영화일까요?


흠, 한 번 생각해 보죠. <퍼시픽 림>에서 주인공들은 예거 조종사들 레인저들입니다. 레인저들은 거대 로봇 예거들을 조종하고, 거대 괴수 카이주들을 두들겨팹니다. 영화가 흘러가는 동안, 다양한 카이주들은 예거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습니다. 어떤 괴수는 플라즈마 포에 맞고, 어떤 괴수는 대괴수 미사일들을 얻어맞고, 어떤 괴수는 장검에 찔립니다. 결국 예거들은 승리하고, 괴수들은 패배합니다. <퍼시픽 림>은 처절하게 거대 괴수들이 두들겨맞고 패배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괴수 팬들은 결국 거대 괴수들이 처절하게 패배하는 장면들을 여러 번 바라봐야 합니다. 이게 즐겁나요. 괴수 팬들에게 이게 즐거운 경험일까요.



나이프헤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이프헤드는 도입부를 장식하는 카이주이고, 첫째 타자입니다. 첫째 타자이기 때문에 나이프헤드는 첫째 샌드백이 됩니다. 아무리 나이프헤드가 인상적으로 집시 데인저를 물어뜯고 할퀴고 꿰뚫는다고 해도, 결국 나이프헤드는 샌드백입니다. 이렇게 인상적인 거대 괴수는 샌드백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카이주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퍼시픽 림>은 거대 괴수들이 처절하게 패배하는 기록입니다. 괴수 팬들이 즐겁게 이런 기록을 관람할 수 있을까요. 물론 <퍼시픽 림>은 재미있는 영화이고, 괴수 팬들 역시 이 영화를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괴수 팬은 당연히 거대 괴수가 승리하기 바랄 겁니다. 괴수 팬은 적어도 거대 괴수가 막대한 분량을 차지하기 바랄 겁니다. 하지만 거대 괴수들은 연이어 패배합니다. 카이주들은 지고, 지고, 지고, 다시 집니다. 괴수 팬들은 그런 패배의 기록들을 계속 봐야 합니다. 흠…. 이게 재미있나요? 거대 로봇 팬들에게 이건 재미있겠죠. 일반적인 관객들에게 이건 재미있겠죠. 하지만 괴수 팬들은? 괴수 팬들이 이걸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요? 왜 괴수 팬이 괴수 팬이라고 불리겠어요? 괴수 팬은 거대 괴수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대상이 두들겨맞는다면, 그게 재미있겠어요?



이건 <퍼시픽 림>이 재미가 없다거나 괴수 팬들이 <퍼시픽 림>을 외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퍼시픽 림>이 괴수 팬들을 위한 영화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합니다. 흐음, 거대 괴수들이 처절하게 쓰러지는 영화가 괴수 팬들을 위한 영화…. 그게 정말인지 저는 좀 궁금합니다. 나이프헤드가 두들겨맞는 모습을 괴수 팬이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는지…. 어쩌면 진짜 괴수 팬들을 위한 영화는 <퍼시픽 림>보다 <고지라>일지 모릅니다. 이런 영화가 괴수 팬들을 위한 선물에 좀 더 가까울지 모릅니다. <고지라>에서 거대 괴수는 처절하게 패배하지 않습니다. <퍼시픽 림>과 달리, 고지라는 누군가의 노예(생체 병기)가 아닙니다. 나이프헤드와 달리, 고지라는 누군가의 샌드백이 아닙니다. 고지라는 장대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힘'입니다. 정말 괴수 팬들을 위한 영화는 이런 장대하고 신비롭고 살아있는 힘을 담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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