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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고지라: 행성 포식자>와 새로운 천사, 새로운 진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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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라: 행성 포식자>와 새로운 천사, 새로운 진보

OneTiger 2019. 5. 31. 19:59

※ 이 게시글에는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의 결말 누설이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로서 <행성 포식자>는 이런 대안을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아쉬운 한계가 있습니다.]



토호 <고지라> 시리즈에서 킹기도라가 나온 이후, 언제나 킹기도라는 최종 보스 자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많은 거대 괴수 팬들은 고지라의 숙적이 킹기도라라고 생각합니다. 스페이스 고지라, 디스트로이어, 메카 고지라 역시 유명한 숙적이 될 수 있으나, 다들 킹기도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기도라가 커다란 인기를 끄나요? 왜 많은 거대 괴수 팬들이 다른 괴수들보다 킹기도라가 숙적이라고 생각하나요? 기도라의 가장 커다란 특징들 중에서 하나는 세 머리들입니다. 다른 거대 괴수들과 달리, 기도라는 삼두용입니다. 기도라는 하나가 아니라 셋입니다.


기도라는 하나이나, 동시에 기도라는 셋입니다. 그래서 고지라와 기도라가 싸울 때, 언뜻 고지라는 세 괴수들과 싸우는 것 같으나, 기도라는 하나입니다. 하나로서 기도라는 고지라를 다굴칠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1:1 대결을 연출할 수 있고 동시에 고지라를 다굴칠 수 있습니다. 다른 괴수들에게 이건 불가능해요. 이런 하나이고 여럿이라는 특징 때문에, 많은 거대 괴수 팬들은 기도라가 숙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행성 포식자>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3편으로서 <고지라: 행성 포식자>는 기도라를 보여주고, 고지라 어스는 기도라와 싸웁니다.



하지만 <고지라: 행성 포식자>에서 기도라는 '하나이고 여럿이라는 특징'을 크게 부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 머리들만 있고 몸뚱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라에게는 세 머리들이 있고 몸뚱이 하나가 있습니다. 머리들은 셋이나, 몸뚱이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하나이고 여럿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 <고지라: 행성 포식자>에서 기도라는 몸뚱이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세계 관문들은 오직 기도라의 세 머리들만 내보냅니다. 몇몇 환각 장면은 기도라의 전체 모습(일반적인 기도라의 모습)을 보여주나, 이런 전체 모습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고지라: 행성 포식자>는 기도라의 모습을 제대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라의 세 머리들이 구불거리며 고지라를 휘감는다고 해도, 기도라는 하나이고 여럿이라는 특징을 부각하지 않습니다. 기도라의 머리가 셋이 아니라 하나라고 해도, 전투 분위기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고지라와 기도라가 싸울 때, 머리들이 셋이라는 특징은 전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고지라: 행성 포식자>에서 기도라의 목이 엄청나게 길기 때문에, 오직 머리 하나만으로도 기이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두 머리가 없다고 해도, 이건 별로 문제가 아닐 겁니다.



사실 기도라가 이세계 존재이기 때문에, 고지라는 기도라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고지라가 열선을 쏘거나, 발톱으로 할퀴거나, 굵직한 꼬리를 휘두른다고 해도, 이건 기도라에게 아무 피해를 주지 못합니다. 고지라는 물리적으로 기도라와 부딪히지 않습니다. 고지라가 꼬리를 휘두른다고 해도, 꼬리는 기도라를 통과합니다. 고지라가 열선을 쏜다고 해도, 열선은 휘어지고 기도라에게 닿지 못합니다. 반면, 기도라는 고지라를 물어뜯을 수 있고, 게다가 기도라는 시간과 공간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고지라가 고온으로 주변 공기를 불태우고 싶다고 해도, 기도라는 공간을 왜곡하고 온도를 낮출 수 있습니다.


기도라에게 이런 능력들이 있기 때문에, 고지라는 기도라를 상대하지 못합니다. 이건 물리적인 대결이 아닙니다. 이건 힘과 힘의 대결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고지라와 기도라가 싸울 때, 두 거대 괴수는 힘을 겨룹니다. 반면, <고지라: 행성 포식자>에서 고지라는 힘으로 기도라를 밀어붙이지 못합니다. 고지라가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다고 해도, 기도라가 다른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기도라는 일방적으로 고지라를 밀어붙입니다. 사실 <고지라: 행성 포식자>에서 기도라는 거대 괴수보다 초자연적인 악령과 비슷합니다. 광신적인 엑시프가 기도라를 소환하기 때문에, 기도라는 꽤나 으스스합니다.



원래 기도라는 지구 생명체가 아닙니다. 기도라는 외계 생명체입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에서도 고지라 및 나방 괴수(모스라)와 달리 기도라는 외계 존재입니다. 그래서 고지라는 지구와 동화하고, 나방 괴수(모스라)는 인류(후투아)에게 새로운 유전 형질을 물려주나, 기도라에게는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후투아는 고지라를 두려워하나, 적어도 후투아는 고지라를 혐오하지 않고 증오하지 않습니다. 후투아와 고지라는 똑같이 지구 소속입니다. 반면, 외계인 엑시프는 기도라를 소환합니다. 기도라가 지구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소환 의식으로써 기도라는 지구를 침략할 수 있고, <고지라: 행성 포식자>에서 이 소환 의식은 꽤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고지라와 기도라가 싸우는 과정은 거의 들러리에 가깝고, 중요한 것은 소환 의식입니다. 하지만 엑시프 종족은 스스로 기도라를 소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엑시프는 구태여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사람들의 증오나 믿음, 분노를 이용하고 싶어합니다. 특히, 소환 의식에서 주인공 하루오 사카키의 분노, 절망, 증오는 커다란 원동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엑시프 메트피에스 사제는 무엇이 기도라를 소환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나, 메트피에스는 계속 분노, 절망, 증오를 읊조립니다. 어쩌면 이런 감정들은 부정적인 에너지가 되고, 부정적인 에너지는 기도라를 소환하는지 모릅니다.



[후반부 전개에서 중요한 것은 고지라와 기도라의 싸움보다 진보와 절망, 미래를 바라보는 역사 관점입니다.]



여기에서 왜 인류, 특히, 하루오 사카키가 절망하고 증오하나요? 고지라가 밉기 때문에? 고지라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인류가 고지라를 절대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오 사카키가 고지라를 미워하나요? 이것들 역시 이유가 될 수 있으나, 메트피에스는 훨씬 원대한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절망에는 훨씬 중차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진보입니다. 메트피에스는 인류 문명을 비롯해 지적 문명이 무한히 진보한다고 추정합니다. 엑시프 종족의 첨단 계산법은 지적 문명이 계속 진보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진보는 거대 괴수를 부르고, 거대 괴수는 지적 문명을 파괴합니다.


지적 문명이 거대 괴수를 쓰러뜨린다고 해도, 지적 문명은 다시 진보를 추구합니다. 진보는 다시 거대 괴수를 부르고, 거대 괴수는 다시 지적 문명을 파괴합니다. 진보는 반드시 거대 괴수를 부르고, 그래서 지적 문명은 반드시 멸망해야 합니다. 이건 운명이고, 지적 문명은 이런 운명을 피하지 못합니다. 엑시프의 첨단 계산법은 모든 지적 문명이 이런 운명으로 흘러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인류 역시 절망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이 고지라를 쓰러뜨린다고 해도, 결국 인류 문명은 다시 진보할 테고 다시 거대 괴수를 부를 겁니다. 거대 괴수는 다시 인류 문명을 파괴할 겁니다.



이런 단선적인 역사 관점은 하루오 사카키의 개인적인 절망과 맞물립니다. 하루오 사카키는 고지라를 정말 증오하나, 아무리 사람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고지라는 절대 쓰러지지 않습니다. 빌루사루도 종족이 말하는 것처럼, 인류가 다른 무엇이 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고지라를 쓰러뜨리지 못할 겁니다. 하루오 사카키는 절대 고지라를 쓰러뜨리지 못할 테고, 이런 개인적인 절망은 진보가 반드시 거대 괴수를 부른다는 훨씬 원대한 역사 관점과 만납니다. 그래서 엑시프 종족 메트피에스 사제는 모든 지적 문명이 파멸을 추구하고 파멸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언뜻 이런 주장은 옳은 것 같습니다. 이런 주장은 단선적인 역사를 바라봅니다. 이런 관점은 역사가 반드시 선형적으로 진보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메트피에스가 엉터리 궤변을 펼친다고 반박할지 모르나, 사실 메트피에스처럼 수많은 사람들은 단선적인 역사 진보를 믿습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이걸 대표합니다. 게오르크 헤겔은 역사가 선형적으로 진보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 정신이 있고, 역사는 반드시 절대 정신을 향해 전진합니다. 아무것도 이것을 막지 못합니다. 게오르크 헤겔처럼, 수많은 사람들 역시 역사가 반드시 진보한다고 생각합니다.



매트 리들리가 쓴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아주 단순한 역사 진보 관점을 드러냅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역사가 진보하고 진보하고 다시 진보한다고 말합니다. 매트 리들리는 (관념적인) 변증법과 절대 정신을 언급하지 않으나, 게오르크 헤겔과 매트 리틀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어떤 관점에서 게오르크 헤겔보다 매트 리들리는 훨씬 단순합니다. 여기에서 절대 정신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무한하게 번영할 테고, 자본주의는 역사의 종언입니다. 이미 역사는 끝났습니다. 자본주의가 무한하게 발전하기 때문에, 다른 대안들이 없기 때문에,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이 됩니다.


미래에도 자본주의는 존재할 테고, 자본주의가 무한한 번영을 보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매트 리들리에게 동의할 겁니다. 심지어 개혁적인 시민 운동가들 역시 <이성적 낙관주의자>에게 동의할 겁니다. 아무리 시민 운동가들이 개혁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들이 자본주의를 뒤엎기 원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개혁적인 시민 운동가들은 자본주의를 뒤엎기 원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안에서 시민 운동가들은 잘못을 고치기 원합니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무한하게 번영할 겁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은 자본주의를 타파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적인 시민 운동가들 역시 자본주의가 반드시 무한하게 진보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옳은 것이고, 시민 운동가들은 자본주의를 절대 건드리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비판은 신성 모독입니다. 누군가가 자본주의를 타파하자고 외친다면, 개혁적인 시민 운동가들은 그 사람이 악랄한 빨갱이라고 몰아붙일 겁니다. 자본주의는 신성하고, 아무도 자본주의를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자세히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미 사람들은 <이성적 낙관주의자>에 동의합니다.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연장선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대안들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마가렛 대처에게 동의합니다. There Is No Alternative. 사람들은 이른바 티나(TINA)에게 동의합니다. 역사는 선형적으로 진보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이게 옳은가요? 정말 선형적인 역사 진보가 옳은가요? 게오르크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이성적 낙관주의자>가 말하는 것처럼, 절대 정신이 자본주의가 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선형적으로 발전해야 하나요?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여기에 반대할 겁니다. 게오르크 헤겔은 관념론 변증법을 주장하나,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역사가 단순하게 선형적으로 진보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적 문명은 거대 괴수를 부르고 파멸로 향합니다. 이런 관점은 진보를 너무 선형적으로 파악합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주의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직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아주 단순한 원칙을 말했을 뿐입니다. 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세한 공산주의 미래를 설명하지 않나요?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미래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이 관념론 변증법이라고 비판하고 자신들이 유물론 변증법이라고 주장합니다. 발터 벤야민은 이런 역사 관념을 이어받고 훨씬 방향을 돌립니다.


심지어 발터 벤야민은 미래보다 과거를 바라봅니다. 과거가 미래를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과거를 언급할 때, 미래를 위해 우리는 과거를 언급합니다. 과거는 미래에 종속됩니다. 현재를 옹호하고 미래를 떠받들기 위해 우리는 과거를 언급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17세기 식민지 수탈은 식민지 수탈보다 대항해 시대가 됩니다. 유럽 침략자들은 바다를 건넜고, 열대 밀림을 파괴했고,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세웠고, 인디언들을 학살했고,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켰습니다. 유럽 침략자들은 막대한 부를 얻었고 자본주의를 발달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발달입니다.



우리가 '대항해 시대'를 언급할 때, 우리는 현재(자본주의)를 옹호합니다. 만약 우리가 식민지 수탈을 언급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식민지 수탈이 자본주의를 뒷받침했다면, 자본주의는 식민지들에게 배상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을 배상한다면, 자본주의는 막대한 비용을 물어야 할 테고, 자본주의는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파산할지 모릅니다. 여전히 미국 자본주의는 식민지들을 수탈하기 원합니다. 만약 미국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하지 못한다면, 미국 자본주의는 망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항해 시대를 대학살 시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가 단편적으로 흘러간다고 믿고 역사가 반드시 자본주의로 귀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역사가 반드시 자본주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식민지 수탈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그저 과정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가 절대 정신이기 때문에, 아무리 식민지 수탈이 끔찍하다고 해도, 여전히 미국이 남아메리카를 억압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과정에 불과합니다. 현재 상황에서 현실 사회주의보다 미국 자본주의가 부유하기 때문에, 미국 자본주의는 반드시 옳습니다. 이렇게 현재를 옹호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를 언급합니다.



역사는 단순하게 흘러갑니다. 역사는 반드시 진보합니다. 아무것도 이걸 막지 못합니다. 이미 역사는 끝났습니다. 최종 목표는 반드시 절대 정신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하고, 그래서 사람들과 엑시프는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절대적이고 선형적인 진보 역사를 믿습니다. 비록 메트피에스는 자본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현실 속의 선형적인 진보 관념과 엑시프 종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에는 그저 고지라를 비롯해 거대 괴수들이 없을 뿐입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진보가 거대 괴수를 부른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성적 낙관주의자>와 엑시프는 모두 진보가 절대 정신을 향해 전진한다고 주장합니다. 양쪽 모두 지적 문명이 반드시 진보한다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동의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엑시프 종교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무한한 경제 발전은 좋은 것이고, 경제는 반드시 발전해야 합니다. 근대적인 진보 이후, 게오르크 헤겔은 무한한 진보를 의심하지 않았고, <이성적 낙관주의자> 역시 그걸 의심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성적 낙관주의자>가 옳다고 믿고, 엑시프 종교 역시 그럴 겁니다. 엑시프 종교는 그저 <이성적 낙관주의자>에게 거대 괴수를 덧붙일 뿐입니다. 지적 문명이 거대 괴수를 처치한다고 해도, 결국 지적 문명은 다시 무한한 경제 발전을 추구할 겁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희망을 말하고 엑시프 종교는 파멸을 말하나, 이건 그저 결과 차이에 불과합니다. 양쪽 모두 똑같은 논리 구조, 선형적인 진보 역사에 기반해요.



하지만 진보가 그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이음표에 불과한가요? 우리가 단순히 현재를 옹호하기 위해 과거를 언급하고 현재를 미래로 확장한다면, 미래가 진보가 되나요? 발터 벤야민은 이런 진보 역사 관념이 얄팍하다고 비판할 겁니다. 진보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징검다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보는 과거를 바라보고 과거가 풀지 못한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고 과거에 있는 고통들을 청산할 때, 이건 미래가 되고 진보가 될 겁니다. 우리가 진보를 언급할 때, 우리는 미래보다 과거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비록 내일 당장 유토피아가 찾아온다고 해도, 유토피아는 과거를 완벽하게 청산하지 못합니다.


비록 내일 당장 전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페미니즘을 비롯해 온갖 저항 운동들이 승리하고, 아주 이상적인 인류 사회가 열린다고 해도, 학살을 당한 사람들은 살아나지 않습니다. 내일 당장 페미니즘 유토피아가 열린다고 해도, 이미 수많은 여자들은 고통들을 겪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자들은 고통들을 겪을 겁니다. 그들의 고통들은 사라지지 않고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미래 유토피아는 영원한 빚을 집니다. 학살을 당한 사람들이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 유토피아는 영원히 빚을 청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선형적인 진보 관념은 이런 고통들을 외면하거나 미화하고 절대적인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추구합니다.



[이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기반한 산업 문명이 저지른 잘못입니다. 산업 문명 그 자체가 아니라.]



무한한 경제 발전은 절대적입니다. 경제 발전이 조금 더딜 때, 국가 정부는 아주 난리법석을 떱니다. 경제 발전이 조금 더딜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국가 정부는 지랄브루스를 춥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경제가 계속 호황을 누리고 발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건 절대적인 법칙이고, 이 법칙은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과잉 생산, 경제 공황, 구제 금융이 수많은 목숨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고 간다고 해도, 자본주의 경제 발전은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우리는 오직 이런 진보만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른 진보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진보는 반드시 절대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발전입니다. 엑시프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냅니다. 엑시프는 첨단 외계인입니다. 엑시프가 첨단 외계인임에도, 그들은 오직 자본주의 경제 발전만이 유일한 산업 문명이라고 믿습니다. 엑시프는 다른 산업 문명들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산업 문명은 반드시 자본주의 경제 발전입니다. 자본주의 경제 발전이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산업 문명은 반드시 환경 오염들로 이어집니다. 이건 너무 얄팍한 시각입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 역시 지배적인 관념을 받아들이고 자본주의가 유일한 산업 문명이라는 얄팍한 시각을 드러냅니다.



얄팍한 문제 제기는 얄팍한 대안으로 이어집니다.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에서 대안은 후투아 부족입니다. 메트피에스는 선형적인 진보를 주장하나, 마이나가 하루오를 도울 때, 하루오는 메트피에스에게 반박합니다. 하루오 사카키는 후투아가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후투아는 진보를 알지 못하고, 그래서 후투아는 절망하지 않고 증오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루오 사카키가 진보를 알기 때문에, 하루오 사카키는 자신이 후투아에게 진보, 증오, 절망을 퍼뜨릴 거라고 걱정합니다. 언뜻 이건 어슐라 르 귄이 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과 비슷합니다.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서 삼림 행성 외계인들은 진보를 알지 못합니다. 


삼림 행성 외계인들은 폭력을 알지 못합니다. 인류가 삼림 행성을 수탈한 이후, 인류는 삼림 행성 외계인들에게 폭력을 퍼뜨립니다.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평화로운 삼림 행성 외계인들이 외부인에게 폭력을 배운다고 이야기합니다. <고지라: 행성 포식자>에서 하루오 사카키와 후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보다 하루오 사카키가 고지라를 증오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 하루오 사카키가 고지라를 증오하기 때문에, 하루오 사카키는 자신이 후투아에게 증오를 퍼뜨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하루오 사카키는 문제가 됩니다. 진보를 상징하는 나노 메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노 메탈 때문에 누군가는 제2의 하루오가 될지 모릅니다.



이건 <고지라: 행성 포식자>와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단순한 이분법을 추구하는 것 같으나, 이 소설은 단순한 이분법보다 폭력의 악순환을 이야기합니다. 강자가 극심하게 탄압할 때, 약자는 극심하게 저항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세계 대전을 터뜨리기 때문에, 현실 사회주의는 극심하게 대처해야 했습니다.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끔찍하게 폭행하기 때문에, 워마드 같은 집단은 나타납니다. 환경 오염들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환경 운동가들은 거칠게 포경선을 들이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와 워마드와 격렬한 환경 운동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와 워마드와 격렬한 환경 운동을 비판하고 싶다면, 그 전에 우리는 자본주의와 가부장 문화와 기후 변화를 없애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없애기 전까지,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와 워마드와 격렬한 환경 운동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서 인류 침략자들이 폭력을 퍼뜨리는 것처럼, 자본주의와 가부장 문화와 기후 변화는 폭력을 퍼뜨렸습니다. 현실 사회주의와 워마드와 격렬한 환경 운동은 스스로 폭력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단순한 이분법을 넘고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보여줍니다.



반면, 애니메이션 <고지라: 행성 포식자>는 훨씬 단순합니다. <행성 포식자>는 오직 자본주의만이 진보와 산업 문명이라고 간주합니다. 문제 제기가 잘못이기 때문에, 대안 역시 잘못입니다. 하루오 사카키는 후투아가 대안이라고 간주하나, 이건 지배적인 관념에 가깝습니다. <고지라: 행성 포식자>는 다른 진보, 다른 산업 문명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흔한 보수 우파 사상처럼, <고지라: 행성 포식자>는 자본주의 산업 문명이 유일한 산업 문명이고 진보라고 간주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흔한 보수 우파 사상보다 <고지라: 행성 포식자>는 좀 더 낫습니다.


적어도 <고지라: 행성 포식자>에게는 변명하기 위한 구석이 있습니다. 후투아, 특히, 미아나와 마이나는 제3세계 원주민 여자와 비슷합니다. 미아나와 마이나는 제3세계, 원주민, 여자라는 3종 세트를 갖추었습니다. 가부장적인 백인 경제에서 제3세계 원주민 여자는 피지배 계급, 약자를 대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지라: 행성 포식자>는 후투아에게 손을 들어줍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뒤엎자고 주장하지 않으나, 적어도 <고지라: 행성 포식자>는 제3세계 원주민 여자에게 주목합니다. 이것 역시 얄팍한 시선을 넘지 못하나, 이런 부분은 장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언뜻 후투아는 원시적인 것 같으나, 후투아는 새로운 진보로 흐를지 모릅니다. 이게 부각되었다면….]



언뜻 <고지라: 행성 포식자>는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진부하게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후투아는 원시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후투아는 그저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후손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후투아는 나방 괴수(모스라)에게 유전 형질을 이어받았고, 이런 유전 형질은 나노 메탈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구세대 인류와 달리, 후투아는 고지라 지구 환경에 적응할 수 있습니다. 고지라 어스가 지구와 동화한다고 해도, 후투아는 새로운 자연 환경에 적응합니다. 무엇보다 후투아는 나방 괴수가 깨어나기 기다립니다. 나방 괴수가 깨어난다면, 나방 괴수는 고지라를 내쫓고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지 모릅니다. 그때 후투아는 또 다른 진보를 추구할지 모릅니다.


거대 나방 괴수와 후투아는 새로운 자연, 새로운 진보를 추구할지 모릅니다. 이게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인가요? 거대 나방 괴수와 괴수 유전 형질과 후투아는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후투아는 반드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으로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새로운 자연, 새로운 진보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고지라: 행성 포식자>가 단순한 이분법보다 이런 새로운 진보를 중시했다면, 이건 훨씬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고지라: 행성 포식자>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고, 단순한 이분법을 뛰어넘지 못했고, 새로운 진보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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