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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생태 사회주의 비평이 가능한가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고유한 생태 사회주의 비평이 가능한가

OneTiger 2019. 10. 16. 20:06

만약 어떤 요리사가 새로운 냉면을 만든다면, 많은 미식가들은 요리사를 칭찬할 겁니다. 만약 요리사가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 육수를 끓이고, 독특한 방법으로 국수를 뽑고, 특별한 방법으로 양념을 무친다면, 이건 새로운 냉면이 될 겁니다. 미식가들은 요리사를 칭찬할 테고, SNS들은 새로운 냉면들을 떠들 테고, 먹거리 방송들은 요리사를 초청할 테고, 요리사는 이름을 널리 퍼뜨릴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냉면이 명성을 떨친다고 해도, 이건 냉면입니다. 아무리 새로운 냉면이 맛있다고 해도, 이건 냉면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냉면이 특별하다고 해도, 결국 이건 냉면입니다. 이건 새로운 뭔가가 아닙니다. 요리사는 새로운 요리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냉면 범주 안에서 요리사는 새로운 냉면을 만들었습니다. 이건 창조보다 변형에 가깝습니다. 요리사가 새로운 냉면을 만들기 전에, 이미 냉면 범주는 존재합니다. 냉면 범주 안에는 온갖 냉면들이 있습니다. 온갖 냉면들 속에서 요리사는 새로운 냉면을 추가합니다. '새로움'이라는 단어와 '창조'라는 단어는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새로운 냉면은 창조가 아닙니다. 이건 변형입니다. 이건 그저 변형에 불과합니다.



요리사가 냉면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창조보다 변형입니다. 냉면 범주 안에서 요리사는 그저 냉면 요리 방법을 바꿨을 뿐입니다. 미식가들은 요리사가 새로운 요리를 창조했다고 호평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맛집 SNS들이 요리사가 새로운 냉면 방법을 고안했다고 칭찬한다고 해도, 이건 창조보다 변형입니다. 아무리 요리사가 먹거리 방송에 나간다고 해도, 요리사는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지 못합니다. 기발한 육수와 독특한 국수와 특별한 양념은 그저 변형된 냉면에 불과합니다. 요리사는 냉면이라는 전체적인 형틀(frame)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전부터 이미 냉면 범주는 존재했습니다.


이런 냉면 범주 안에서 요리사는 그저 뭔가를 바꾸었을 뿐입니다. 이게 굉장한 업적이라고 해도, 이건 창조가 아닙니다. 비단 요리사만 아니라 다른 분야들에서도 비슷한 현상들은 나타납니다. 만약 우리가 뭔가를 바꾼다고 해도, 이건 창조보다 변형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아무리 우리가 새롭게 뭔가를 만든다고 해도, 이건 창조보다 그저 변형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만약 평론가가 생태 사회주의를 이용해 사이언스 픽션을 평가하기 원한다면, 평론가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어떻게 생태 사회주의가 사이언스 픽션을 평가할 수 있나요? 평론가가 SF 내용(줄거리들, 등장인물들, 주제들, 설정들)을 비판한다면, 이건 가장 간단한 방법일 겁니다.



애니메이션 <청의 6호>는 환경 오염을 이야기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환경 오염은 가장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청의 6호>에서 어떤 등장인물은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자연 환경을 오염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청의 6호>는 탐욕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인간들이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자연 환경은 다시 풍요로워질 겁니다. 어쩌면 시청자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이해할지 모릅니다. 이런 시청자들은 사람들이 탐욕을 버리고 자연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이런 관념은 굉장히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아주 결정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사회 구조를 무시합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지구에서 엄청난 빈곤은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지구의 절반은 굶주립니다. 지구의 절반은 너무 비참하게 굶주립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지구의 절반은, 지구의 '절반'은 정말 너무 비참하게 굶주립니다. 아이가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다고 해도, 엄마는 아이에게 밥을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이가 굶주리고 고통스러워한다고 해도, 엄마에게는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지친 아이가 잠든 이후, 엄마는 미어지는 심정으로 아이를 쓰다듬을 겁니다. 지구에는 수두룩한 이런 엄마들이 있습니다. 이런 엄마들이 탐욕스럽나요? 굶주리는 사람들이 탐욕스럽나요?



애니메이션 <청의 6호>는 인간들이 탐욕스럽다고 주장하나, 지구의 절반은 굶주립니다. '지구의 절반'이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해도, 분명히 지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굶주리고 목이 타는 지옥입니다. 사람들이 지옥을 운운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수많은 비참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지옥입니다. 이런 수많은 비참한 사람들 역시 인류입니다. 이런 사람들 역시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탐욕스럽나요? 이런 사람들이 탐욕스러운 인간에 속하나요?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탐욕을 부릴 수 있나요? 이런 사람들이 정말 삼림을 마구잡이로 베고, 야생 동물들을 학살하고, 쓰레기들을 강물에 버린다고 해도, 이유가 탐욕인가요?


만약 <청의 6호>가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주장하기 원한다면, <청의 6호>는 수많은 비참한 사람들을 개무시해야 합니다. 분명히 탐욕은 심각한 문제이나, 지구에서 모든 인간은 모두 똑같이 탐욕을 부리지 못합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는 여러 환경 운동 단체들이 있습니다. 녹색당 같은 정당부터 나무 껴안기 같은 풀뿌리 운동까지, 많은 환경 운동들은 환경 오염들을 비판합니다. 비단 이런 환경 운동들 이외에 세계 지도자들 역시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을 토론합니다. 시골 할머니부터 강대국 지도자까지, 다들 환경 오염들이 심각하다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왜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이 계속 심각해지나요? <청의 6호>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만약 <청의 6호>가 제대로 대답하기 원한다면, <청의 6호>는 사회 구조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지 않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거대 자본가들은 지배 계급이 됩니다. 거대 자본가 계급은 엄청난 생산 수단들(토지, 강물, 호수, 산맥, 해안, 바다, 창공, 공장, 건물, 선박, 기타 등등)을 차지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외계 행성까지 노립니다. 자본가 계급이 엄청난 생산 수단들을 이용해 무엇을 하나요? 그들은 이윤을 극대화합니다. 그들은 이윤을 만들고, 이윤을 다시 투자하고, 이윤을 다시 만들고, 이윤을 또 다시 투자하고, 이윤을 또 다시 만듭니다.


쳇바퀴처럼, 이윤 창출 과정은 계속 굴러갑니다. 이건 멈추지 않습니다. 이윤 창출 과정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윤은 계속 커져야 합니다. 이윤은 커지고, 커지고, 커지고, 커지고, 다시 커지고, 계속 커지고, 끝없이 커져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국적 기업 간부들이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을 외치나요? 그들이 제로 성장을 좋아하나요? 아니, 그들은 경제가 훨씬, 끝없이 발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윤을 계속 만들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상품들을 판매해야 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상품들, 많은 상품들, 훨씬 많은 상품들, 많고 많은 상품들, 아주 많은 상품들을 판매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자본가 계급은 자원들, 많은 자원들, 훨씬 많은 자원들, 많고 많은 자원들, 아주 많은 자원들을 얻어야 합니다. 어떻게 자본가 계급이 자원들을 얻나요? 그들은 자연 환경을 가공합니다. 이윤을 계속 만들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자연 환경을 가공하고, 다시 가공하고, 또 다시 가공하고, 훨씬 많이 가공하고, 너무 많이 가공합니다. 이건 멈추지 않습니다. 자연 생태계에 한계가 있다고 해도, 자본가 계급은 멈추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이 없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멈추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이건 가공이 아닙니다. 이건 수탈과 오염입니다. 나중에 시장 경제가 포화 상태가 될 때, 이런 시장 경제 속에서 자본가 계급은 이윤을 극대화하지 못합니다.


만약 시장 경제가 포화 상태가 된다면, 점차 거품은 커질 겁니다. 언젠가 거품은 터질 테고, 이건 엄청난 경제 공황이 될 겁니다. 자본가 계급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시장 경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본가 계급이 새로운 시장 경제를 만들 때, 대상은 자연 환경이 됩니다. 토건 회사들이 열대 밀림을 파헤치고 관광 명소를 만든다면, 이건 새로운 시장 경제가 될 테고, 새로운 시장 경제는 이윤을 만들 겁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그들은 토건 회사들을 막지 못합니다. 자본가 계급이 열대 밀림을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자본가 계급이 열대 밀림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해도,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열대 지역 사람들은 시장 경제에 들어가야 합니다.



환경 운동가들은 엄청난 생산 수단들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환경 운동가들이 열대 밀림을 보호할 수 있나요? 만약 열대 지역 사람들이 다국적 기업들을 거부한다면,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열대 지역 사람들을 짓밟고, 탄압하고, 학살하고, 고립시킬 겁니다. 이른바 제3세계 사람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거부할 때,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반동적인 쿠데타들을 지원하고, 제국주의 침략들을 저지르고, 제3세계 사람들을 고립시킵니다. 여전히 이런 수탈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렇게 자연 환경은 세계화 자본주의에 들어갑니다. 자본가 계급은 비자본주의 영역을 접수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합니다.


세계화 시장 경제 속에서 비자본주의 영역은 상품이 됩니다. 더 이상 열대 밀림은 자연 환경이 아닙니다. 열대 밀림은 그저 상품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 보호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환경 오염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심지어 이건 행성급 환경 범죄, 지질학적인 단위의 재앙이 됩니다. 만약 최악의 예상이 옳다면, 기후 변화는 정말 지질학적인 단위의 재앙이 될지 모릅니다. 만약 가장 가벼운 예상이 옳다고 해도, 이미 환경 범죄들은 너무 심각합니다. 그래서 <청의 6호>가 이것을 설명하나요? <청의 6호>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나요? 아니, <청의 6호>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을 운운합니다.



근대적인 환경 오염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함에도, 애니메이션 <청의 6호>는 헛다리를 짚습니다. <청의 6호>가 헛다리를 짚는다고 해도,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소설,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이 현실을 반드시 정확하게 반영해야 하나요? 언제나 정확한 반영이 반드시 미학이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 미학을 위해 창작물은 얼마든지 현실을 왜곡하고 축소하고 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의 6호>가 헛다리를 짚기 때문에, 자본가 지배 계급은 이런 주장을 아주 좋아할 겁니다. 이런 사이언스 픽션은 사회 구조와 지배 계급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이언스 픽션은 자본주의 체계, 지배적인 관념에게 복종합니다.


만약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창작물이 지배적인 관념을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강화하고 재생산할 겁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창작물에게 영향을 미치고, 창작물은 지배적인 관념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강화합니다.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훨씬 단단하게 고정합니다. 평론가는 이게 문제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만약 평론가가 생태 사회주의를 이용해 사이언스 픽션을 평가하기 원한다면, 이렇게 평론가는 내용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건 가장 간단한 방법입니다. 문제는 이게 새로운 형틀(frame)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지적은 새로운 비평 이론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문학계에는 이미 여러 비평 이론들이 존재합니다. 당연히 지배적인 관념은 이런 비평 이론들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 비평 이론들은 지배적인 관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태 사회주의는 지배적인 관념과 대립합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지배적인 관념을 전복시켜야 합니다. 아니, 비단 생태 사회주의만 아니라 여러 저항 사상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전복시켜야 합니다. 저항 사상들은 전복적인 비평 이론, 새로운 비평 이론을 제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평론가가 오직 줄거리들, 등장인물들, 설정들, 주제들만 비판한다면, 이게 새로운 비평 이론이 될 수 있나요? 이 게시글은 애니메이션 <청의 6호>를 비판했습니다. 이런 비판이 새롭고 고유한 비평 이론인가요?


아니, 이건 새로운 비평 이론보다 변형된 비평 이론입니다. 솔직히 이건 SF 비평보다 경제학 비평, 생태학 비평에 훨씬 가깝습니다. 냉면 범주 안에서 요리사가 새로운 냉면을 만드는 것처럼, 생태 사회주의 평론가는 지배적인 비평 이론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배적인 비평 범주 안에서 생태 사회주의는 사이언스 픽션을 비판해야 합니다. 이런 비평 작업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게 전부인가요? 생태 사회주의가 정말 전복적이라면, 생태 사회주의가 고유한 비평 이론을 제시해야 하지 않나요? 루카치 죄르지, 베르톨트 브레히트, 테오도어 아도르노 같은 좌파들은 비단 20세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미학자들일 뿐만 아니라 20세기에서 아주 굵직한 미학자들입니다.



이런 미학자들은 새로운 비평 이론을 고민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인가요? 글쎄요, 많은 평론가들, 예술가들, 철학자들, 미학자들은 고개들을 저을 겁니다. 어쩌면 오늘날 가장 전복적인 비평 이론은 마르크스주의보다 페미니즘에서 비롯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페미니즘 비평이 너무 집요하게 따지기 때문에, 페미니즘 비평은 비평보다 집착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문제는 아직 페미니즘 비평이 형틀을 제대로 짜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성 해방 운동은 너무 따가운 가시밭길을 걸어왔고, 형틀을 제대로 짜기 위한 여유는 없었습니다. 아니, 마르크스주의 역시 비슷한지 모릅니다.


1차 세계 대전, 적백 내전, 2차 세계 대전, 냉전 동안, 마르크스주의는 제국주의 침략들을 막느라 급급했고, 루카치 죄르지는 방랑자가 되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대안이 무엇인가요?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이 가장 대표적인 저항 사상임에도, 두 사상이 새로운 비평 이론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생태 사회주의 평론가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솔직히 이런 덕질 블로그에게 이런 물음은 너무 어렵고 거창합니다. 이 블로그는 그저 가장 초보적인 기술들을 이용해 지배적인 관념에게 시비를 걸 뿐입니다. 이 블로그가 좀 더 멀리 나간다고 해도, 이 블로그는 생산 조건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상당히 근시안적입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원인, 과정, 흐름, 변화, 발생, 인과 관계, 연역을 파악하지 않습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뭔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땅에서 불쑥 솟고, 허공에서 번쩍 나타난다고 믿습니다. 만약 평론가가 어떻게 생태학 SF 장르가 나타나는지 파악한다면, 생태학 SF 장르에게 생산 조건이 무엇인지 평론가가 파악한다면, 이건 지배적인 관념을 비판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 역시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미약합니다. 이건 새로운 비평이 아닙니다. 이 블로그에서 저는 그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미약한 이론을 이용해 장거리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덕질할 뿐입니다.


비록 저는 그저 일개 덕후에 불과하나, 저 같은 덕후와 달리, 아무리 전문적인 평론가가 학술 논문을 쓴다고 해도, 평론가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만약 평론가가 학술 논문을 쓴다면, 학술 논문이 고유한 생태 사회주의 비평을 제시할 수 있나요? 페미니즘 비평이 너무 따가운 가시밭길을 걸어야 함에도, 루카지 죄르지 같은 대단한 지식인이 방랑자에 되어야 했음에도, 고유한 생태 사회주의 비평이 가능한가요? 억압적인 체계 속에서 저항 운동들은 숱한 어려움들에 직면합니다. 저항 운동들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항 운동들은 쉽게 몰락합니다. 저항 (운동에 기반하는) 평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유한 생태 사회주의 비평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평론가가 기발하고 독창적인 학술 논문을 쓴다고 해도, 고유한 생태 사회주의 비평은 쉽게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만약 고유한 생태 사회주의 비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이언스 픽션을 평가하기 위한 생태 사회주의 비평 역시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생활 속의 예술, 노동과 예술의 결합을 이야기했습니다. 만약 이게 생태 사회주의 예술 사조라면, 생태 사회주의 비평 역시 생활 속의 비평, '노동과 환경 보호 운동과 비평의 결합'이 되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노동과 환경 보호 운동과 비평이 결합하고 새로운 형틀을 제시할 수 있나요?


먹고 살기 바쁜 비정규직 주부 사원이 운동권이 되고 생활 속의 비평을 실천할 수 있나요? 이건 너무 어려운 과정입니다. 지배적인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비정규직 주부 사원은 다른 무엇보다 상품화에 매달려야 합니다. 노동이 상품이 되고, 환경 보호 운동이 상품이 되고, 비평이 상품이 되는데도, 어떻게 고유한 생태 사회주의 비평이 나타날 수 있나요? 어쩌면 이건 오직 미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닌지 모릅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서 전위적인 예술들이 나온 것처럼, 사회 구조가 대대적으로 바뀔 때, 새로운 비평들 역시 나올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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