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거대 괴수를 조종한다는 정복 욕구 본문
[만약 이런 엄청난 거대 괴수를 조종한다면, 그건 정말 정복 욕구를 강하게 충족할지 모릅니다.]
소설 <듄>에서 폴 무앗딥은 프레멘을 이끄는 지도자로 상승합니다. 프레멘은 아라키스 원주민들이고, 폴 무앗딥은 칼라단 행성에서 온 외부인이었죠. 하지만 폴은 여러 업적들을 남기고, 결국 원주민들을 이끕니다. 그런 업적들 중 하나는 샌드 라이더, 모래 기사입니다. 프레멘들은 거대한 모래벌레를 타고 사막을 누비고, 폴 무앗딥 역시 모래벌레를 부르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원주민들은 폴이 소환한 모래벌레가 상당히 거대하다고 이야기해요. 지도자에 걸맞는 아주 거대한 모래벌레였죠.
폴은 그 모래벌레에 올라타고, 두 갈고리를 이용해 조종합니다. 이때 폴은 모래벌레 위에서 격렬한 기쁨을 느낍니다. 자신이 아주 거대한 야수를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기쁨이었죠. 비단 폴만 아니라 다른 프레멘들 역시 모래벌레를 처음 조종할 때 커다란 흥분에 휩싸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젊은이는 모래벌레 위에서 신나게 재주를 부렸고, 그 덕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죠. 그렇다고 해도 저는 그 젊은이가 철딱서니가 없다고 함부로 비난하지 못하겠습니다. 100m짜리 거대한 절지류 괴수를 마음대로 조종한다….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모래벌레는 일개 야생 동물이 아닙니다. 몇 십 m짜리 거대한 절지류 괴수입니다. 단순한 화기나 폭발물은 모래벌레를 죽이지 못합니다. 프레멘들은 모래벌레를 거대 괴수 병기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적군이 기갑 부대를 끌고 나온다고 해도 프레멘들의 모래벌레는 기갑 부대를 집어삼키거나 깔아뭉갤 수 있습니다. 그런 괴수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크나큰 흥분에 휩싸이겠죠. 이는 로봇이나 자동차 같은 기계를 조종하는 감성과 많이 다를 겁니다. 거대 로봇을 조종하는 흥분 역시 범상하지 않겠으나, 로봇은 죽은 것입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없죠. 기계에게는 실존이 없어요.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기계는 존재합니다. 결국 기계는 도구에요. 아무리 거대 로봇이 멋지게 보여도 결국 도구에 불과해요.
괴수는 다릅니다. 괴수는 생명체이고, 생명체에게는 실존이 있죠. 생명체가 유전자를 퍼뜨리는 도구라고 해도 유전자 그릇만이 생명체의 전부는 아니죠. 당연히 실존적인 생명체를 조종한다면, 게다가 그 생명체가 거대한 절지류 괴수라면, 프레멘 전사는 또 다른 차원의 흥분을 맛볼 수 있을지 모르죠. 어쩌면 이는 철딱서니 없는 정복 욕구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아니, 사실 정복 욕구가 맞을 겁니다. 하지만 아주 거대하고 강력한 동물을 조종한다는 권력과 감성은 수많은 사람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칠지 몰라요. 현실에 그런 거대 괴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거대 괴수 3종 세트(?)가 등장합니다. 공성벌레(시즈웜), 크라켄, 제노 타이탄이죠. 이들 중 제노 타이탄은 천연적인 괴수가 아니라 인공적인 괴수 병기입니다. 조화 분파가 만드는 결전 병기죠. 공성벌레나 크라켄과 달리 게임 플레이어는 제노 타이탄을 마음대로 생산하고 개량하고 조종할 수 있습니다. 게임 속의 다른 두 분파, 순수 분파와 우월 분파 역시 결전 병기를 만들 수 있어요. 공중 부양 구축함과 4족 보행 병기 엔젤이죠.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들이 공유하는 스크린샷들을 살펴보면, 제노 타이탄이 훨씬 많은 비중을 자랑합니다.
똑같은 결전 병기라고 해도 공중 부양 구축함과 엔젤은 별로 비중이 없어요. 이유는 뻔합니다. 제노 타이탄이 훨씬 징그럽고 흉악하게 보이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이유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노 타이탄이 생명체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뭔가를 지배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죠. 만약 <비욘드 어스>가 소설이었다면, <듄>이 그런 것처럼 <비욘드 어스>는 떡대 갯가재 괴수를 조종하는 감성을 이야기했을 겁니다. 흠, <비욘드 어스>가 그런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쉽군요.
물론 모래벌레와 제노 타이탄은 달라요. 모래벌레는 천연적인 야수입니다. 프레멘 전사들은 모래벌레를 잠시 이용할 뿐이고, 모래벌레를 직접 만들거나 개량하지 않았어요. 반면,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제노 타이탄은 인공적인 생명체입니다. 설정에 따르면, 제노 타이탄은 생물적인 욕구가 없는, 문자 그대로 생체 기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래벌레를 조종하는 감성과 제노 타이탄에게 지시를 내리는 감성은 서로 다르겠죠. 똑같이 거대 절지류 괴수를 부린다고 해도 프레멘 모래 기사와 제노 타이탄 조종사는 서로 다른 느낌을 받겠죠.
제노 타이탄 조종사는 거대 괴수를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쾌감에 휩싸일지 모르나, 모래벌레에 올라타는 프레멘 전사와 다른 느낌을 받을 겁니다. 자연적인 생명체들과 달리 제노 타이탄에게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고, 그런 괴수를 조종하는 감성은 정복 욕구보다 파괴 욕구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군요. 제노 타이탄 조종사는 자신이 어떤 생명체를 정복했다는 느낌보다 아주 강력한 생명체를 조종한다는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제노 타이탄 같은 괴수를 조종하는 느낌은 분명히 공중 부양 구축함이나 4족 보행 병기를 조종하는 느낌과 다를 겁니다. 저는 만약 <비욘드 어스>가 소설이었다면 그런 부분을 논의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SF 소설이 생체 괴수 병기를 이야기한다면, 이런 점을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요. 떡대 괴수가 로봇을 부수고 도시를 부수고…. 그것만 이야기하기에 괴수 병기는 너무 아까운 소재입니다. 생체 괴수 병기를 논할 때, 저는 이런 감성을 빼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생체 괴수 병기가 인기를 끄는 이유들 중 하나는 이런 정복 욕구 때문일지 몰라요. (나중에 이런 감성을 좀 더 길게, 깊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