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살아있는 함선들과 살아있는 포탄들 본문
아마 사람들이 괴수물을 보는 이유들 중 하나는 괴수가 파괴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주 거대한 야수가 도시를 부수고 사방을 돌아다니는 광경은 강렬한 감성을 불러 일으키겠죠. 하지만 SF 소설 속에는 거대 괴수 이외에 어마어마한 파괴를 저지를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이 많습니다. 거대 로봇은 거대 괴수의 아주 강력한 경쟁자이고, 초중전차나 첨단 순양함이나 잠수함 역시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어요. 전략 병기를 장착할 수 있다면, (별로 거대하지 않은) 폭격기 역시 도시를 끔찍한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겠죠.
하지만 작은 폭격기가 도시를 참혹한 폐허로 불태운다고 해도 그걸 거대 괴수와 동일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사람들이 괴수물을 보는 이유는 그저 단순한 파괴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괴수물에서 독자들이 원초적인 야성을 보기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거대 로봇이 수많은 관절들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거대 로봇은 동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멋진 거대 로봇조차 뭔가 야성적인 감수성을 소환하지 못해요. 설사 거대 로봇이 동물처럼 생겼고, 건물을 물어뜯거나 할퀸다고 해도, 결국 로봇은 야성이 아닙니다.
초중전차나 첨단 잠수함이나 전략 폭격기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무리 그것들이 혼자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다고 해도, 그것들은 강렬한 야성을 풍기지 않습니다. 게다가 전차나 잠수함이나 폭격기는 물어뜯거나 할퀴는 역동적인 동작을 배제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거대 괴수와 훨씬 더 다르게 보이겠죠. 저는 사람들이 괴수물에서 대대적인 파괴를 보는 동시에 야성을 느끼기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괴수들은 뾰족한 이빨이나 날카로운 발톱을 자랑합니다.
설사 그 괴수들이 물어뜯거나 할퀴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이빨이나 발톱은 필수적인 장식입니다. 사람들에게 야성을 풍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거대 괴수가 토끼처럼 생겼다면, 그 거대 괴수는 농담거리가 될 겁니다. (그리고 정말 토끼 괴수들은 농담거리가 되곤 하죠.) 검마 판타지의 드래곤들이 허구한 날 불만 뿜고 다님에도 이빨들이나 발톱들을 자랑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야성을 풍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초식동물이 불을 뿜는 광경을 보기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육식동물이 용맹한 전사라고 생각하고, 그런 전사가 뭔가를 부수거나 죽이기 원하는 듯합니다.
예전에 말한 것처럼 육식동물은 용맹한 전사가 아닙니다. 자연 생태계는 하나의 거대한 순환이고, 용맹한 전사 따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살생에 멋진 관념을 불어넣습니다. 특히, 전쟁을 주도하는 지배 계급은 그런 관념을 좋아할 겁니다. 피지배 계급을 쉽게 전쟁으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전투 병기에 티거나 레오파르트나 이글이나 랩터 같은 명칭을 붙이는 이유는 그것 때문일지 모르죠. (이런 논의도 재미있을 것 같으나, 저는 별로 아는 바가 없군요.)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들은 살생을 멋지고 명예로운 행위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육식동물을 용맹한 전사로서 대접합니다. SF 및 판타지 창작가들은 그런 관념을 거대 괴수에게 불어넣고, 거대 괴수들은 육식동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을 생체 함선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피터 해밀튼이나 이안 뱅크스, 스티븐 백스터 같은 작가들은 생체 우주선이라는 설정을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 역시 그랬고, 스팀펑크 소설들은 생체 비행선이나 생체 잠수함을 보여주죠. 생체 우주선, 생체 비행선, 생체 잠수함은 모두 거대 괴수가 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거대한 동물들이죠.
설정을 훨씬 확장하겠습니다. 만약 이런 생체 함선들이 이빨로 상대 함선을 물어뜯는다면? 아니면 발톱으로 상대 함선을 할퀸다면? 일반적으로 함선들은 상대에게 포탄들을 날립니다. 하지만 생체 함선이 포탄을 날려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충각 돌격은 낯설지 않은 해상 전술이죠. <해저 2만리>에서 노틸러스가 증기 함선을 충각으로 들이받은 것처럼 생체 우주선이 기계 우주선에게 달려들고 물어뜯을 수 있을 겁니다. 작가가 근사한 필력을 선보일 수 있다면, 그런 장면은 별로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양상은 일반적인 함대 전투가 아닐 겁니다. <혼블로워>를 읽든,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을 읽든, 함대 전투를 읽는 독자는 함선들이 포탄들을 쾅쾅 날리는 장면을 좋아하겠죠. 따라서 야성적인 생체 함선을 구상하는 작가는 일반적인 함대 전투를 원하는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할 겁니다. 야성적인 생체 함선은 독특한 느낌을 풍길 수 있으나, 일반적인 함대 전투를 원하는 독자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겠죠. 일반적인 함대 전투를 충족하고 싶다면, 생체 함선 역시 포탄들을 쾅쾅 쏴야 할 겁니다. 독특한 설정만큼 생체 함선은 여러 독자들을 쉽게 만족시키지 못할 듯합니다.
뭐, 방법이 아예 없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포탄 대신 '야성적인 포탄'을 사용할 수 있겠죠. 생체 우주선이 작은 육식 날짐승들을 상대 우주선에게 뿌리고, 작은 육식 날짐승들이 상대 우주선을 물어뜯는다면, 그건 일반적인 함대 전투와 비슷할지 모르죠. 아니면 '살아있는 포탄'을 사용할 수 있겠죠. 질척거리는 종양 포탄이나 치명적인 맹독 포탄 같은 설정을 구상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검마 판타지에서 드래곤 역시 범선에게 불덩어리를 날립니다. 다들 그런 장면을 좋아하죠.
따라서 생체 우주선이 무조건 살아있는 포탄을 날리거나 상대 우주선을 물어뜯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예를 들어, 고지라 역시 (이빨로 물어뜯기보다) 걸핏하면 방사열선만 날리죠. 거대 괴수가 꾸준히 불만 뿜는 상황에서 구태여 생체 함선이 상대를 물어뜯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떤 방법을 이용하든, SF 창작가가 생체 함선을 구상한다면, 육식동물과 생체 함선이 무슨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고민해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거대한 생체 함선이 아주 작은 생물들을 뿌린다거나 날카로운 가시들을 발사한다는 개념이 마음에 드는군요. 그게 뭔가 생체적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