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레비아탄>의 부유 고래와 괴수라는 정체성 본문
[생체 비행선의 함교 내부. 몇몇 개조 도마뱀이 보인다고 해도, 이런 모습은 일반적인 괴수와 거리가 멀어요.]
스콧 웨스터펠드가 쓴 소설 <레비아탄>은 말 그대로 레비아탄을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이 가리키는 레비아탄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저 유명한 바다 괴수가 아닙니다. 그보다 생체 비행선이죠. 소설 속에서 인류는 유전자 조작 기술을 발달시킵니다. 그래서 인류는 다양한 동물들을 만들 수 있고, 산업과 전쟁을 위해 온갖 개조 동물들을 이용합니다. 레비아탄은 그런 동물들 중 하나이고,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고래입니다.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공룡 따위는 감히 깝치지 못합니다. 15m짜리 스피노사우루스는 감히 몇 백 m짜리 레비아탄에게 깝치지 못할 겁니다.
레비아탄에 비한다면, 공룡만 아니라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조차 상당히 초라할 겁니다. 뭐, 고지라는 꽤나 튼튼하고, 킹기도라를 날려버리는 방사열선도 뿜고, 핵 폭탄이 직격해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죠. 반면, 레비아탄은 그저 거대한 고래일 뿐입니다. 신체적인 능력을 따진다면, 고지라가 레비아탄에 비해 훨씬 우월하죠. 재래식 함포를 잘못 맞으면, 레비아탄은 골로 갈지 모릅니다. 레비아탄은 몸집만 거대한 동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크기는 정말 장엄하고, 고지라조차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듄>에서 폴 무앗딥이 소환하는 저 거대한 모래벌레 같은 괴수가 레비아탄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처럼 개조 고래는 웅장하고 어마어마한 동물입니다. 그렇다면 이 개조 고래를 '괴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솔직히 겉모습만 따진다면, 개조 고래는 괴수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스피노사우루스와 고지라와 모래벌레가 괴수로 불린다면, 개조 고래 역시 괴수로 불려야 할 겁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개조 고래를 괴수로 부르지 못한다고 말할지 모르겠군요. 스피노사우루스, 고지라, 모래벌레와 달리 레비아탄은 생체 비행선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레비아탄을 개조한 이유는 비행선의 기낭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레비아탄은 바다가 아니라 하늘을 누비는 부유 고래입니다. 엄청난 가스를 뿜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고래입니다. 인류는 부유 고래에게 선체를 장착하고, 그래서 생체 비행선을 완성합니다. 소설 설정에 따르면, 이런 생체 비행선은 체펠린 같은 비행선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사고가 잘 나지 않습니다. 생체 비행선을 이용하는 사람들 역시 가스 누출을 점검하기 위해 개조 탐지견을 이용하나, 적어도 생체 비행선은 체펠린 같은 비행선보다 안전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부유 고래는 그 어마어마한 몸집에서 엄청난 가스를 뿜고, 다른 비행선보다 훨씬 빠릅니다.
이렇게 레비아탄은 부유 고래라는 정체성보다 생체 비행선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강합니다. 스피노사우루스나 고지라나 모래벌레는 그 자체로서 존재합니다. 프레멘 전사들은 모래벌레를 타고 돌아다니거나 적들을 습격하나, 그렇다고 해도 모래벌레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죠. 반면, 소설 속에서 레비아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보다 생체 비행선의 기낭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레비아탄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기낭에 불과합니다. 부유 고래는 하늘에 둥실둥실 떠있을 뿐입니다. 스스로 어딘가로 이동하거나 뭘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유 고래는 선체를 하늘에 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선체에서 함장들과 승무원들은 항로를 결정하거나 상대 비행선이나 함선을 공격하기 위해 화살 박쥐들을 내보냅니다. 부유 고래는 그런 과정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부유 고래는 뭔가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살아있으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의 다른 거대 개조 동물, 가령, 베헤모스는 스스로 결정합니다. 비록 인간에게 명령을 받으나, 적어도 베헤모스는 스스로 움직이고 다른 전함이나 잠수함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부유 고래는 살아있는 기낭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부유 고래가 '괴수라는 정체성'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똑같이 상상 속의 거대한 동물이라고 해도 부유 고래와 모래벌레는 정체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흠, 사이언스 픽션에서 '괴수'는 뭘까요. 상상 속의 거대한 동물은 모두 괴수가 될 수 있을까요. 분명히 유명한 거대 괴수들은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들입니다. 소설이든 영화든 비디오 게임이든, 괴수들은 스스로 움직입니다. 인간에게 명령을 받는 거대 생체 병기들 역시 스스로 움직이고, 그런 거대 생체 병기는 괴수라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죠. 고전적인 소설 <잃어버린 세계>부터 최신 블록버스터 영화 <콩: 해골섬>까지, 괴수들은 그런 정체성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레비아탄>의 부유 고래는 이런 괴수들과 너무 다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몸집만 클 뿐이고, 그저 살아있을 뿐이고, 스스로 뭔가를 하지 않습니다. 과연 이런 생명체를 괴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런 생명체를 볼 수 있습니다. 미국삼나무, 레드우드, 세콰이어죠. 비록 레드우드는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나, 어쨌든 어마어마한 생명체이고 이동력이 없고 (동물과 같은) 판단 능력이 없습니다. 부유 고래가 괴수일 수 있다면, 레드우드 역시 괴수가 될 수 있을까요? 어마어마한 꿀버섯 군집은?
개인적으로 부유 고래가 괴수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기낭에 불과하나, 어쨌든 부유 고래는 본질적으로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동물입니다. 레드우드나 꿀버섯 군집 같은 식물이나 균류와 다르죠. 하지만 소설 속에서 분명히 부유 고래는 괴수가 아니라 그저 어마어마한 생체 기낭입니다. 그래서 괴수라고 부르기에 뭔가 좀 아쉬운…. 그런 부분들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