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평론이란 무엇인가? - 유사성과 형틀 본문
[만약 옆동네 철수가 유사성을 엉뚱하게 파악한다면, 이 우아한 생명체는 헤엄치는 생체 솥뚜껑이 될 겁니다.]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은 솥뚜껑 보고 놀란다." 이 속담은 인간이 유사성을 파악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옆동네 철수가 자라에게 깜짝 놀랐다면, 철수가 솥뚜껑을 볼 때, 옆동네 철수는 솥뚜껑이 자라라고 생각할 겁니다. 옆동네 철수는 솥뚜껑에게 깜짝 놀랄 겁니다. 자라와 솥뚜껑 사이에서 유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라에게는 둥글고 넙적하고 거무튀튀한 등껍질이 있습니다. 사실 자라 등껍질은 상대적으로 딱딱하지 않습니다. 거북 등껍질과 달리, 자라 등껍질은 물렁물렁합니다. 그래서 영어 이름은 부드러운 등껍질 거북(softshell turtle)입니다. 하지만 둥글고 넙적하고 거무튀튀한 등껍질과 솥뚜껑은 닮았습니다.
아무리 자라 등껍질이 물렁물렁하다고 해도, 자라 등껍질처럼, 솥뚜껑 역시 둥글고 넙적하고 거무튀튀합니다. 그래서 자라와 솥뚜껑은 비슷합니다. 옆동네 철수가 자라에게 놀랐다면, 옆동네 철수는 솥뚜껑에게 놀랄 겁니다. 옆동네 철수가 솥뚜껑에게 놀란다면, 나중에 옆동네 철수는 아르켈론에게 놀랄지 모릅니다. 아르켈론은 4m짜리 대형 바다 거북입니다. 아르켈론에게 자라는 어린 아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옆동네 철수가 자라에게 놀라든, 솥뚜껑에게 놀라든, 아르켈론에게 놀라든,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라와 솥뚜껑 사이에 비단 유사성만 아니라 차이 역시 있기 때문입니다. 자라는 수생 파충류입니다.
자라에게는 머리와 두 앞다리와 두 뒷다리와 꼬리가 있습니다. 자라 등껍질에는 독특한 무늬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라와 솥뚜껑은 다릅니다. 자라와 솥뚜껑 사이에는 여러 차이들이 있습니다. 아르켈론과 솥뚜껑 사이에는 훨씬 많은 차이들이 있습니다. 사실 자라와 아르켈론 사이에도 많은 차이들이 있습니다. 자라와 솥뚜껑 사이에 많은 차이들이 있음에도, 왜 옆동네 철수가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솥뚜껑에게 놀라나요? 솥뚜껑에게 머리와 두 앞다리와 두 뒷다리와 독특한 무늬가 없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솥뚜껑이 자라가 아니라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옆동네 철수는 차이보다 유사성을 파악하고 놀랍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라에게 둥글고 넙적하고 거무튀튀한 등껍질이 근본적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철수가 자라를 볼 때, 철수는 탑-다운(top-down) 시점이나 아이소메트릭 시점을 이용해 자라를 봅니다. 철수가 솥뚜껑과 아르켈론을 볼 때, 철수는 똑같이 탑-다운 시점이나 아이소메트릭 시점을 이용해 솥뚜껑과 아르켈론을 볼 겁니다. 자라와 아르켈론과 솥뚜껑은 똑같이 둥글고 넙적합니다. 탑-다운 시점과 아이소메트릭 시점은 이런 형태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자라와 아르켈론 형태에서 둥글고 넙적한 등껍질은 상당히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자라와 아르켈론과 솥뚜껑 사이에서 차이보다 유사성은 훨씬 큽니다.
자라의 전체 면적 중에서 등껍질은 상당히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자라에게 등껍질은 근본적인 특징이 됩니다. 고대 아르켈론부터 오늘날의 자라까지, 거북 부류에게 등껍질은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이것을 위해 고대 거북 조상은 독특하게 진화했습니다. 등껍질과 솥뚜껑은 닮았습니다. 그래서 자라와 솥뚜껑(과 아르켈론) 사이에서 옆동네 철수는 차이들보다 유사성들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등껍질과 솥뚜껑이 닮았다고 해도, 이게 올바른 분류인가요? 분명히 옆동네 철수는 유사성들을 이용했으나, 이게 올바른 분류인가요? 비단 자라와 솥뚜껑만 아니라 뜨거운 국과 차가운 물, 해와 달, 불과 부지깽이 같은 사례들에도 유사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불과 부지깽이 사이에 유사성이 있을 수 있나요? 불과 부지깽이가 무슨 관계인가요? 자라와 솥뚜껑(과 아르켈론) 사이에는 시각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시각적인 유사성은 아주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반면, 불과 부지깽이 사이에는 시각적인 유사성이 없습니다. 불과 부지깽이 사이에 시각적인 유사성이 없음에도, 왜 불과 부지깽이가 비슷한 부류가 되나요? 대답은 용도(用途)입니다. 우리가 아궁이 불을 피울 때, 우리는 부지깽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불과 부지깽이 사이에 시각적인 유사성이 없다고 해도, 용도 때문에, 불과 부지깽이는 비슷한 부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건 불과 부지깽이가 반드시 비슷한 부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부지깽이는 다른 용도일지 모릅니다. 깊은 던전 속에서 성직자가 철퇴로 해골 병사를 두들겨패는 것처럼, 만약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를 이용해 칼 포퍼에게 꿀밤을 먹인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 부지깽이는 철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게 부지깽이는 불보다 철퇴에 가깝습니다. 칼 포퍼는 사악한 해골 병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처럼, 다른 목적을 위해 우리는 부지깽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처럼, 어떤 사람들은 부지깽이를 이용해 사악한 해골 병사(?) 칼 포퍼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상황들에서 불과 부지깽이는 비슷한 부류가 됩니다. 보편적으로 부지깽이는 철퇴보다 불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유사성들을 분류하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올바른 분류인가요? 게다가 왜 제가 유사성들을 계속 언급하나요? 여기는 SF 덕질 블로그입니다. 저는 사이언스 픽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사이언스 픽션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저는 SF 소설들을 별로 많이 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는 SF 덕질 블로그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왜 이 게시글에서 제가 사이언스 픽션보다 유사성들, 자라와 솥뚜껑과 아르켈론, 불과 부지깽이를 이야기하나요?
SF 평론가는 SF 장르를 분류해야 합니다. '장르'는 교집합입니다. 평론가가 창작물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동안, 평론가는 유사성들을 이용해 교집합을 만듭니다. 이런 교집합은 장르가 됩니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는 <마일즈의 전쟁>을 썼습니다. 데이빗 웨버는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을 썼습니다. 앤 레키는 <사소한 정의>를 썼습니다. 존 스칼지는 <노인의 전쟁>을 썼습니다. 이런 소설들에는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미래 문명, 우주 항해, 첨단 기술은 유사성들입니다. 독자들이 <마일즈의 전쟁>과 <바실리스크 스테이션>과 <사소한 정의>와 <노인의 전쟁>을 읽기 원한다면, 독자들은 다른 무엇보다 미래 문명, 우주 항해, 첨단 기술을 읽기 원할 겁니다.
SF 하위 장르들 중에서 네 소설들은 스페이스 오페라, 밀리터리 SF 장르에 속합니다. <마일즈의 전쟁>, <바실리스크 스테이션>, <사소한 정의>, <노인의 전쟁>은 전쟁, 군대, 병영, 함선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것들은 주된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전쟁 소설이라고 해도, 이 소설에는 우주 구축함이 없습니다. <마일즈의 전쟁>, <바실리스크 스테이션>, <사소한 정의>, <노인의 전쟁>과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는 유사성들(전쟁, 군대, 병영)이 있으나, 이런 유사성들보다 미래 문명, 우주 항해, 첨단 기술은 훨씬 근본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보다 <마일즈의 전쟁>에 훨씬 가깝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보다 <노인의 전쟁> 및 <스틱스>에 훨씬 가깝습니다.]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은 비단 <마일즈의 전쟁>만 아니라 이르지 네트르발이 쓴 단편 소설 <스틱스>에도 가깝습니다. 단편 소설 <스틱스>는 우주 탐사물입니다. 이 소설에는 전쟁, 군대, 병영이 없습니다. 주연 등장인물들은 과학자들입니다. 그들은 학술적인 논의들을 펼칩니다. 단편 소설 <스틱스>에서 과학자들이 주연 등장인물임에도, 왜 밀리터리 SF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보다 <스틱스>에 가까울 수 있나요?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이 일반적인 전쟁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이고, 그래서 언제나 지배 계급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고대 문명부터 전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애석하게도 전쟁 이야기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정부는 가장 거대한 저항 운동이었으나, 심지어 지배 계급 전쟁은 가장 거대한 저항 운동조차 고립시켰고 타락시켰습니다. 세계 대전이라는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 가장 거대한 저항 운동은 몰락합니다. 전쟁은 너무 막강하고 너무 끔찍합니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전쟁 이야기는 기나긴 역사를 자랑합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이런 유구하(고 애석)한 역사에 속합니다. 반면,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은 이런 역사에 속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아직 인류 문명이 우주 함선을 건조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특징입니다.
아무리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이 <혼블로워>를 모방한다고 해도, <바실리스크 스테이션>과 <혼블로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혼블로워>는 범선을 이야기하고, 현실 속에서 인류 문명은 수많은 범선들을 건조했습니다. 수많은 범선들과 달리, 아직 인류 문명은 우주 함선을 건조한 적이 없습니다. 우주 함선처럼, 아직 인류 문명은 외계 행성으로 과학 탐사대를 보낸 적이 없습니다. 이건 아주 결정적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바실리스크 스테이션>과 <스틱스> 사이에는 결정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스틱스>에 괴짜 용병 부대 지휘관이 없다고 해도, <스틱스>와 <마일즈의 전쟁> 역시 비슷한 부류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일즈의 전쟁>에 미래 문명, 우주 항해, 첨단 기술이 있는 것처럼, <스틱스>에도 미래 문명, 우주 항해, 첨단 기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미래 문명, 우주 항해, 첨단 기술이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기준은 절대적인 기준이 반드시 되지 않습니다. 만약 독자가 함선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독자는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이 <스틱스>보다 <혼블로워>와 비슷하다고 간주할 겁니다. SF 장르를 분류하기 위해 평론가가 유사성들(미래 문명, 우주 항해, 첨단 기술)을 제시한다고 해도, 이건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영화 <아바타>가 개봉했을 때, 많은 관객들은 <아바타>와 <포카혼타스>가 비슷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어라, 어떻게 <포카혼타스>와 <아바타>가 비슷할 수 있나요? <포카혼타스>는 대항해 시대와 북아메리카 인디언 이야기입니다. 반면, <아바타>는 스페이스 오페라, 우주 탐사물입니다. 대항해 시대와 인디언, 스페이스 오페라와 우주 탐사물이 비슷해질 수 있나요? <아바타>에 장거리 우주선과 외계 거대 호랑이가 있음에도, <포카혼타스>와 <아바타>가 비슷한가요? 네, 두 가지는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 10월 1일 게시글에서 이웃집 영희는 <언클레임드 월드>가 대항해 시대와 비슷할지 모른다고 열불을 냈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포카혼타스>와 <아바타>가 비슷하다고 평가한 것처럼, <언클레임드 월드>와 대항해 시대 사이에서 이웃집 영희는 유사성들을 찾았습니다.
만약 <포카혼타스>와 <아바타>가 비슷하다면, <모아나> 역시 <아바타>와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포카혼타스>와 <아바타>와 <모아나> 사이에는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모두 자연 복원, 자연의 여신, 부족 사회, 부족장 딸, 환경과의 교감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포카혼타스>와 <모아나>에는 냉동 수면 기술과 장거리 우주선과 외계 거대 호랑이가 없으나, 여러 유사성들(자연 복원, 자연의 여신, 부족 사회, 부족장 딸, 환경과의 교감)이 주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것들이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포카혼타스>와 <아바타>와 <모아나>는 비슷합니다. 이런 기준 위에서 <아바타>와 <스틱스>는 비슷하지 않습니다. <스틱스>에서 과학자들은 외계 호랑이와 교감하지 않습니다.
만약 미래 문명, 우주 항해, 외계 행성이 기준이 된다면, 영화 <아바타>와 단편 소설 <스틱스>는 비슷한 부류가 될 겁니다. 만약 자연의 여신, 환경과의 교감, 부족 사회가 기준이 된다면, 영화 <아바타>와 애니메이션 <모아나>는 비슷한 부류가 될 겁니다. <아바타>는 <스틱스>와 비슷한 부류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아바타>는 <모아나>와 비슷한 부류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모아나>가 사이언스 픽션이라면, 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아나>는 고대 신화 판타지입니다. 어떻게 고대 신화 판타지와 우주 탐사물이 비슷해질 수 있나요? 장르보다 주제가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바타>와 <모아나>는 비슷한 장르가 아니나, <아바타>와 <모아나>에는 비슷한 소재들과 주제가 있습니다.
관객들이 비슷한 소재들과 주제를 유사성이라고 간주한다면, <아바타>와 <모아나>는 비슷한 부류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소재들과 주제가 비슷하기 때문에, 어떤 관객들은 <아바타>와 <모아나>와 <포카혼타스>가 새로운 장르를 형성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심지어 이웃집 영희는 <언클레임드 월드>와 <모아나> 사이에 비슷한 특징들이 있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비록 <모아나>가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고, <언클레임드 월드>가 '빈 땅'을 개척한다고 해도, 두 가지는 똑같이 항해, 탐험, 신비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합니다. SF 소설 <사소한 정의>와 SF 비디오 게임 <언클레임드 월드>에는 똑같이 우주 항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소한 정의>가 사이언스 픽션임에도, 이 소설은 신비로운 자연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만약 관객들이 <아바타>와 <포카혼타스>와 <모아나>가 비슷하다고 느낀다면, 평론가는 왜 세 가지가 비슷한지 설명해야 할 겁니다. 영화 <아바타>와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 및 <모아나>가 비슷하기 때문에, SF 평론가는 <포카혼타스>와 <모아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아니, 잠깐. 정말 'SF' 평론가가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와 <모아나>를 이야기해야 하나요? <포카혼타스>와 <모아나>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두 애니메이션에는 우주선이 없습니다. 아무리 관객들이 <아바타>와 <포카혼타스>와 <모아나>가 비슷하다고 느낀다고 해도, 왜 'SF' 평론가가 <포카혼타스>와 <모아나>를 이야기해야 하나요?
SF 평론가가 완전히 선을 그어야 하지 않나요? "아이고, 세상에. 멍청한 관객들아! <포카혼타스>와 <모아나>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야! 다들 헛소리를 좀 작작 떠들어!" 이렇게 SF 평론가가 호통을 쳐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시고니 위버는 관객들이 오직 SF 매니아만 되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관객들이 비단 SF 장르만 아니라 다른 것들(자연 환경 복원)을 보기 원할 겁니다. 영화 <아바타>에는 오직 SF 요소들만 있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는 다른 요소들(자연 환경 복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가 고대 신화 판타지를 싫어한다고 해도, SF 평론가는 모아나 와이알리키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바다가 우주라고 해도, 얼마나 멀리 모아나 와이알리키가 떠나기 원하든, 카누는 우주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이건 좀 이상합니다. SF 평론가가 '고대 신화 판타지' <모아나>를 이야기한다면, 이게 SF 평론이 되나요? 만약 <아바타>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SF 평론가가 '고대 신화 판타지' <모아나>를 구체적으로 분석한다면, 이게 SF 평론이 되나요? 아무리 <아바타>를 설명하기 위해 SF 평론가가 <모아나>를 분석한다고 해도, <모아나>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여러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행성과 자연 환경을 의인화하고, 테 피티 역시 의인화한 자연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모아나>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모아나>를 열심히 분석한다면, 어떤 SF 팬들은 이의를 제기할 겁니다.
"이의 있습니다! <모아나>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닙니다! 왜 SF 평론가가 <모아나>를 분석해야 하나요? 이건 오류입니다!" <역전 재판>처럼, 이렇게 SF 팬들은 벌떡 일어나고 삿대질하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건 타당한 이의입니다. 하지만 이게 타당한 이의라고 해도, SF 평론가가 <모아나>를 저~ 멀리 랄로타이 속으로 집어던져야 하나요? <모아나>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기 때문에, SF 평론가가 <모아나>를 포기해야 하나요? 하지만 많은 관객들이 <아바타>와 <포카혼타스>를 비교한 것처럼, 시고니 위버가 <아바타> 대본을 받았을 때, 시고니 위버는 <아바타>와 <포카혼타스>가 비슷하다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어떤 인터뷰에서 시고니 위버는 <아바타>와 <포카혼타스>가 비슷하다고 인정했는지 모릅니다. 시고니 위버가 두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비슷하다고 인정했다고 해도, 이건 무리가 아닐 겁니다. 어쩌면 시고니 위버는 제임스 카메론에게 영화 설정이 <포카혼타스>와 너무 비슷하다고 이의를 제기했는지 모릅니다. 관객들이 두 가지가 비슷하다고 느낀 것처럼, 시고니 위버 역시 이것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감독 조던 보트로버츠는 영화 <콩: 해골섬>이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콩: 해골섬>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반면, <모노노케 히메>는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어떻게 판타지가 사이언스 픽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장르가 완전히 다름에도, <콩: 해골섬>이 <모노노케 히메>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나요? 네, 이건 가능합니다. 설정들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콩: 해골섬>은 거대한 자연 위상을 이야기합니다. <모노노케 히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콩: 해골섬>과 <모노노케 히메>에서 거대한 자연 위상은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티타누스 콩은 신적인 존재이고, 시시가미와 다른 거대 야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콩: 해골섬>은 몬스터버스에 속하고, 몬스터버스에서 티타누스 모수라, 티타누스 베헤모스, 티타누스 스킬라 같은 거대한 자연 위상들 역시 신적 존재입니다. 몬스터버스에서 자연 복원은 핵심 주제이고, 거대 괴수들은 환경 오염들을 정화합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티타누스 모수라는 환경 오염들을 정화하지 않았으나, 원작 <모스라>에서 모스라는 방사선 오염을 막았습니다. 만약 판타지(에 가까운) <모노노케 히메>가 사이언스 픽션 <콩: 해골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판타지 <포카혼타스>와 사이언스 픽션 <아바타>는 닮을 수 있을 겁니다. <포카혼타스>와 <아바타>가 닮을 수 있다면, <모아나>와 <아바타> 역시 닮을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이건 사소한 유사성일지 모르나, <모스라>와 <모노노케 히메>와 <포카혼타스>와 <아바타>와 <모아나>와 <콩: 해골섬>은 여자(소녀)가 자연 위상과 접촉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소미인, 산, 포카혼타스, 네이티리, 모아나, 메이슨 위버는 모두 여자입니다.
영화 <콩: 해골섬>에서 어떤 등장인물은 메이슨 위버가 여자 이름인지 반문하나, 브리 라슨은 여자입니다. 어떤 관객들은 브리 라슨의 풍만한 몸매에 가부장적인 편견을 주입하고 음담패설을 나불거리나, 그렇다고 해도 (몸매가 보여주는 것처럼) 브리 라슨은 여자입니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여자들이 거대한 자연 위상들과 접촉한다면, 이건 우연이 아닌지 모릅니다. 브리 라슨이 이런 사실, 이런 유사성을 파악하나요? 브리 라슨이 메이슨 위버를 연기하고 티타누스 콩과 접촉하는 동안, 브리 라슨이 이런 유사성을 인식하나요? 비록 브리 라슨이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SF 평론가는 이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SF 평론가는 여자와 거대한 자연 위상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평론가가 여자와 거대한 자연 위상을 연구하기 원한다면, SF 평론가는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모노노케 히메>, <포카혼타스>, <모아나> 같은 판타지들을 건드려야 합니다. SF 평론가가 <식물 아내>와 <서브머지드>와 <시드 마이어의 알파 센타우리>와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를 함께 연구한다고 해도, SF 평론가는 <모노노케 히메>, <포카혼타스>, <모아나>를 제외하지 못할 겁니다. 적어도 특정한 서구 대중 문화와 동아시아 대중 문화에서 <모노노케 히메>, <포카혼타스>, <모아나>는 아주 유명합니다. <모노노케 히메>, <포카혼타스>, <모아나>는 여자와 자연 위상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여자와 거대한 자연 위상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거나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것을 밝히기 위해 SF 평론가는 판타지들을 건드려야 합니다. 만약 <아바타>와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와 <콩: 해골섬>을 분석하기 위해 SF 평론가가 <모노노케 히메>와 <포카혼타스>와 <모아나>를 참고한다면, 이게 SF 평론이 되나요? 분명히 <모노노케 히메>에는 스팀펑크 요소가 있고, 스팀펑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서 스팀펑크는 산업 문명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상징합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판타지에 가까우나, 그렇다고 해도 이건 어느 정도 사이언스 픽션인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는 산업 문명보다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너무 커다란 실수입니다. 환경 오염 주범은 산업 문명보다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게 유일한 목표는 오직 이윤 극대화뿐이고, 이것을 위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자연 환경을 파괴합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이것을 외면했고,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에는 커다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태 철학이 근대적인 환경 오염을 비판하기 원한다고 해도, 생태 철학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생태 철학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를 겁니다. 여러 생물학 교과서들과 과학 학습 만화들과 소설 <우주의 개척자>와 애니메이션 <청의 6호>는 멍청한 헛소리들을 주절거립니다.
이런 멍청한 헛소리들처럼, <모노노케 히메>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산업 문명 속에서 계급 투쟁이 치열하게 일어난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다른 헛소리들처럼, <모노노케 히메>는 계급을 무시하고 얄팍한 흑백 논리를 제시합니다. 만약 창작물이 근대적인 생태 철학을 이야기하기 원한다면, 창작물은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사라진다고 해도, 분명히 산업 문명은 자연 생태계를 가공해야 합니다. 아무리 산업 문명이 자본주의를 타파한다고 해도, 산업 문명은 자연 생태계를 가공해야 합니다. 스팀펑크는 이것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팀펑크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가 사이언스 픽션이 되나요?
[포경 산업과 거대 고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는 이런 서구 근대적인 뻥튀기 측면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모든 스팀펑크는 똑같지 않습니다. 소설 <모털 엔진>은 스팀펑크입니다.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독자들은 <모털 엔진>이 스팀펑크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생체 비행선 소설 <레비아탄>은 스팀펑크입니다.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독자들은 이것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소설 <파반>은 스팀펑크입니다.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 <마술사가 너무 많다>는 스팀펑크(이른바 가스등 판타지)입니다.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나요? 영화 <반 헬싱>은 스팀펑크입니다. 이 영화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지 않는 것 같으나, 동시에 이 영화는 사이언스 픽션 같습니다.
만약 <반 헬싱>이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거나 가까운 이웃 사촌이 된다면, <모노노케 히메> 역시 가까운 이웃 사촌이 될 수 있지 않나요? <모노노케 히메>에서 스팀펑크는 그저 배경 설정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산업 문명, 산업 발전은 환경 보호 주제로 다이렉트하게 이어집니다. 설정은 주제를 향해 곧바로 이어집니다. 스팀펑크는 비단 배경 설정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상징, 주제입니다. 반면, 어떤 SF 팬들은 <모노노케 히메>가 스팀펑크가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육중한 증기 기관 기계가 주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설 <레비아탄>과 달리, <모노노케 히메>에서 쿵쾅거리는 보행 함선은 주된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스팀펑크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스팀펑크는 대규모 산업 도시, 거대한 공장 단지, 비행선과 증기 선박과 보행 전차와 자동 인형이 됩니다. 스팀펑크는 19세기~20세기 초반 산업 문명을 뻥튀기합니다.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는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그저 초기 산업 문명을 보여줄 뿐입니다. 하지만 소설 <아누비스의 문> 역시 대규모 산업 도시, 거대한 공장 단지, 비행선과 증기 선박과 보행 전차와 자동 인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누비스의 문>에 이런 것들이 없음에도, <아누비스의 문>은 스팀펑크 소설입니다. 사실 <아누비스의 문>은 원조 스팀펑크입니다.
만약 <아누비스의 문>이 원조 스팀펑크라면, <모노노케 히메> 역시 스팀펑크에 속할 수 있지 않나요? 아니, 잠깐. 만약 <아누비스의 문>과 <모노노케 히메>가 스팀펑크에 속한다고 해도, 두 가지가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흑마술, 저주와 늑대인간, 신비로운 자연 위상, 시시가미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나요? 창작물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근대 산업 발전을 강조한다면, 이게 스팀펑크가 되고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나요? <아누비스의 문>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근대 산업 발전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아누비스의 문>보다 <모노노케 히메>가 스팀펑크, 사이언스 픽션에 훨씬 가깝나요?
만약 논의가 여기에 이른다면, 평론가는 골치가 너무 아프다고 느낄 겁니다. 언제나 SF 평론가들은 이런 문제에 부딪힙니다. 게다가 문제는 비단 이것만이 아닙니다. 자, 다음 평론을 봅시다. "비디오 게임 <엑스컴>은 턴 전략 게임이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턴 전략 게임을 싫어한다. 턴 전략 게임들이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스타크래프트> 같은 실시간 전략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실시간 전략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유닛들을 계속 조작해야 한다. 이건 너무 피곤하다. <엑스컴> 같은 턴 전략 게임은 너무 느리고, <스타크래프트> 같은 실시간 전략 게임은 너무 빠르다.
<엑스컴>과 <스타크래프트> 사이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이 대안을 찾을 수 있는가? 두 가지 사이에서 타협점이 있는가? <매스 이펙트>는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매스 이펙트>는 실시간 정지 게임이다. 게임 플레이어는 진행 상황을 멈추고, 예약 명령들을 지정하고, 다시 상황을 진행할 수 있다. <매스 이펙트>가 실시간 정지이기 때문에, <매스 이펙트>는 너무 느리지 않고 너무 빠르지 않다. 만약 SF 전략 게임들이 실시간 정지를 활용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SF 전략 게임들에 훨씬 쉽게 적응할 터이다. SF 전략 게임들은 <매스 이펙트>를 참고해야 한다."
위 문단의 평론은 SF 평론입니다. 비디오 게임 <엑스컴>과 <스타크래프트>와 <매스 이펙트>가 사이언스 픽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평론을 볼까요. "비디오 게임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은 턴 전략 게임이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턴 전략 게임을 싫어한다. 턴 전략 게임들이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같은 실시간 전략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실시간 전략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유닛들을 계속 조작해야 한다. 이건 너무 피곤하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같은 턴 전략 게임은 너무 느리고,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같은 실시간 전략 게임은 너무 빠르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과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사이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이 대안을 찾을 수 있는가? 두 가지 사이에서 타협점이 있는가? <아이스윈드 데일>은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이스윈드 데일>은 실시간 정지 게임이다. 게임 플레이어는 진행 상황을 멈추고, 예약 명령들을 지정하고, 다시 상황을 진행할 수 있다. <아이스윈드 데일>이 실시간 정지이기 때문에, <아이스윈드 데일>은 너무 느리지 않고 너무 빠르지 않다. 만약 판타지 전략 게임들이 실시간 정지를 활용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판타지 전략 게임들에 훨씬 쉽게 적응할 터이다. 판타지 전략 게임들은 <아이스윈드 데일>을 참고해야 한다."
자, 어떤가요? 비디오 게임 <엑스컴>과 <스타크래프트>와 <매스 이펙트>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아무리 장르를 정확하게 규정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해도, 분명히 <엑스컴>과 <스타크래프트>와 <매스 이펙트>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까다로운 웹진 alt.SF는 <엑스컴>과 <스타크래프트>와 <매스 이펙트>가 그저 전략 게임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alt.SF 역시 세 게임들에 외계 문명과 첨단 과학 기술이 없다고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외계 문명과 첨단 과학 기술은 전형적인 SF 설정입니다. 솔직히 <아누비스의 문>보다 <엑스컴>은 훨씬 전형적인 SF 장르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SF 평론가가 <엑스컴>과 <스타크래프트>와 <매스 이펙트>를 분석한다고 해도, 이게 반드시 SF 평론이 되나요?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과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와 <아이스윈드 데일>은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평론(적갈색 평론과 녹색 평론)은 형식적으로 똑같습니다. <엑스컴>과 <스타크래프트>와 <매스 이펙트>가 사이언스 픽션이고,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과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와 <아이스윈드 데일>이 판타지라고 해도, SF 평론과 판타지 평론은 형식적으로 완전히 똑같습니다. 심지어 평론가는 <엑스컴>과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와 <매스 이펙트>와 <아이스윈드 데일>을 이용해 똑같이 평론할 수 있습니다.
[게임 <스텔라리스>가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해도, SF 게임 평론은 판타지 게임 평론과 똑같을지 모릅니다.]
자, 이런 평론을 볼까요. "(생략) <엑스컴> 같은 턴 전략 게임은 너무 느리고,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같은 실시간 전략 게임은 너무 빠르다. <엑스컴>과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사이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이 대안을 찾을 수 있는가? 두 가지 사이에서 타협점이 있는가? <아이스윈드 데일>과 <매스 이펙트>는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생략)" 이 평론에는 SF 게임 <엑스컴>과 <매스 이펙트> 및 판타지 게임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와 <아이스윈드 데일>이 함께 있습니다. 게다가 <엑스컴>은 외계인 침략 이야기이고, <매스 이펙트>는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이고,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는 고대 신화 판타지이고, <아이스윈드 데일>은 전형적인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비디오 게임 <엑스컴>과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와 <매스 이펙트>와 <아이스윈드 데일>는 모두 다른 장르들에 속합니다. 네 가지 장르들이 다름에도, 평론가가 네 게임들을 평가한다면, 이런 평론은 SF 평론 및 판타지 평론과 형식적으로 완전히 똑같을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어쩌면 alt.SF 같은 까탈스러운 팬은 <엑스컴>과 <아이스윈드 데일>이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에 평론 형식이 똑같아진다고 비아냥거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매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론가는 <레 미제라블>과 <붉은 화성>과 <반지 전쟁>이 모두 똑같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거대한 서사를 진행한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주류 문학 평론과 SF 평론과 판타지 평론은 형식적으로 똑같아질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어떻게 주류 문학 평론과 SF 평론과 판타지 평론이 형식적으로 똑같아질 수 있나요? 주류 문학과 SF 소설과 중세 판타지 소설 사이에 '유사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 미제라블>과 <붉은 화성>과 <반지 전쟁>에는 모두 똑같이 전지적 작가 시점과 거대한 서사라는 아주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평론가가 마음을 먹는다면, 평론가는 훨씬 많은 유사성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빅토르 위고는 파리 코뮌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빅토르 위고는 파리 코뮌을 동정했습니다. <레 미제라블>은 붉은 혁명을 주장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 역시 파리 코뮌을 동정할지 모릅니다.
<붉은 화성> 역시 붉은 혁명을 주장합니다.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심지어 평론가는 어슐라 르 귄 같은 다른 SF 작가들을 빅토르 위고와 줄줄이 엮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평론가가 유사성들을 찾는다면, 주류 문학 평론과 SF 평론과 판타지 평론은 형식적으로 완전히 똑같아질 겁니다. <사소한 정의>와 <스틱스>가 닮은 것처럼, <스틱스>와 <아바타>가 닮은 것처럼, <아바타>와 <모아나>가 닮은 것처럼, 브리 라슨과 모아나가 닮은 것처럼, <콩: 해골섬>과 <모노노케 히메>가 닮은 것처럼, <모노노케 히메>와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이 닮은 것처럼,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과 기타 등등….
이런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SF 평론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평론가가 SF 그림, SF 소설, SF 만화, SF 영화, SF 비디오 게임을 평가한다고 해도, 이건 SF 평론으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평론가가 SF 소설을 열심히 떠든다고 해도, 이건 SF 평론이 아닐지 모릅니다. 어떤 SF 팬들은 적갈색 평론이 오직 형식(비디오 전략 게임)에만 치우쳤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이런 비판은 옳습니다. 하지만 <엑스컴>은 사이언스 픽션이고, 비디오 전략 게임은 <엑스컴>을 구성합니다. 형식(비디오 전략 게임) 없이, <엑스컴>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비단 <엑스컴>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이라는 형식 없이, <붉은 화성>과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 존재할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형식 없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은 존재하나, 사이언스 픽션이 창작물이 될 때, 창작물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특정한 형식들에 기반해야 합니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비단 사이언스 픽션일 뿐만 아니라 SF '소설'입니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쓰기' 위해 어슐라 르 귄은 '문학 장치들'을 반드시 동원해야 합니다. 게다가 영화 <아바타>와 애니메이션 <모아나>가 보여주는 것처럼, 평론은 형식과 매체를 건너뛰고 다른 방향들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평론가가 SF 소설들을 깊고 자세하게 분석한다고 해도, 이건 SF 평론이 아닐지 모릅니다.
이 블로그에서 저는 <노인의 전쟁>을 이용해 포장지와 알맹이가 다르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전쟁>은 윤리 교과서보다 밀리터리 SF 소설입니다. 밀리터리 SF 소설은 싸우고, 부수고, 죽이고, 난리법석을 부려야 합니다. 어떻게 제가 이런 밀리터리 SF 소설을 이용해 포장지와 알맹이를 이야기할 수 있나요? 비디오 게임 <코이>는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하지만 저는 <코이>를 이용해 비단 잉어 그림 공식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제가 환경 아포칼립스를 이용해 비단 잉어 그림 공식을 이야기할 수 있나요?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저는 사례로서 던전 탐험 게임 <솔라스타>를 떠들었습니다.
어떻게 던전 탐험 게임이 사이언스 픽션과 비일상적인 상황을 강조할 수 있나요? SF 장르 물신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저는 롤플레잉 장르를 규정했습니다. 어떻게 롤플레잉 장르 규정이 SF 장르 물신주의를 비판할 수 있나요? 제가 소설 <공룡과 춤을 (멸종)>을 이야기했을 때, 저는 트리세라톱스보다 1:1 결혼 생활을 지적했습니다. 어떻게 제가 공룡 소설을 이용해 1:1 결혼 생활을 지적할 수 있나요? 저는 <쥬라기 공원>을 이용해 브래지어와 생리 때문에 여자들이 고통을 겪는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제가 공룡 소설을 이용해 비열한 자본주의가 여자들에게 정말 필수적이고 원초적인 생리대조차 상품화한다고 비판할 수 있나요?
이것들 이외에 저는 사이언스 픽션들을 이용해 다양한 비(非)사이언스 픽션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오직 저만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저 같은 평범한 SF 독자들부터 전문적인 SF 작가들까지, 다들 사이언스 픽션들을 이용해 다양한 비(非)사이언스 픽션들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오직 특정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SF 평론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같은 매체들에 기반합니다. 소설 같은 매체는 인생을 광범위하게 반영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특정한 목적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광범위합니다.
우리가 실존주의 철학을 참고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인생에 특정한 목적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특정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인생은 광범위합니다. 소설은 이런 광범위한 인생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소설은 아주 다양한 것들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오직 특정한 대답만 내놓기 위한 방정식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소설에 기반한다면, SF 소설 역시 아주 다양한 것들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사이언스 픽션이 반드시 소설 같은 매체에 기반해야 하나요? 왜 사이언스 픽션이 과학보다 문학에 속하나요? 왜 사이언스 픽션이 설명보다 '반영'인가요? 서구 근대화와 문화 충격은 대답이 될지 모릅니다.
[이건 오직 외계 식생만 도출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현실 속의 자연을 비롯해 다양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SF 전형을 완전하게 합의하지 못한다고 해도, 서구 근대 산업화 동안, 전형적인 SF 특징들은 나타났습니다. 서구 근대 산업화 동안, 메리 셸리는 인조인간을 썼고, 쥘 베른은 만능 잠수함을 썼고, 허버트 웰즈는 미래 자연 생태계를 썼고, 샬롯 퍼킨스 길먼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썼습니다. 이런 서구 근대화는 절대 조용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서구 문화는 엄청난 변화와 과도기를 거칩니다. 과학과 종교는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흔한 오해와 달리, 중세 1,000년 동안, 종교가 문화를 장악했기 때문에, 종교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하루 아침에 문화는 바뀌거나 사라지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학과 종교가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에, 서구 문화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비단 과학과 종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한 측면들에서 서구 근대화는 일상과 문화를 뒤흔듭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아주 복잡한 혼란들과 충격들을 이야기하기 원한다면, 소설을 비롯해 문학은 효과적인 도구일 겁니다. 문학이 광범위한 인생을 담기 때문에, 문학은 아주 복잡한 혼란들과 충격들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찰스 디킨스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으나, <올리버 트위스트>는 얼마나 자본주의가 비열한지 '반영'할 수 있습니다. 설명보다 반영은 쉽습니다. 설명보다 반영은 빠릅니다. 그래서 과학보다 신화와 문학은 우선합니다.
그래서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소설, 문학에 기반했을 겁니다. 그래서 소설에서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출발했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SF '소설'은 가장 기본적인 SF 매체입니다. 이런 이유가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문학은 인생을 반영하고, 서구 근대화 충격을 반영하기 위해 소설 작가들은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쓰기 시작했을 겁니다. 결국 사이언스 픽션은 문학, 창작물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문학, 창작물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아주 다양한 것들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문학보다 비디오 게임 같은 다른 매체들이 된다고 해도, 이런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은 게임이나, 동시에 비디오 게임은 문학적인 측면들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언클레임드 월드>에는 문학적인 측면들, 텍스트, 비유, 신화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클레임드 월드>는 <모아나>와 만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언클레임드 월드>는 경영/건설 게임입니다. 그래서 <언클레임드 월드>는 <배니시드> 같은 경영/건설 게임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에는 아주 다양한 측면들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는 오직 SF 요소들(비일상적인 상상력, 시대 격차, 계몽과 과학)만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가 사이언스 픽션을 평가한다고 해도, SF 평론가는 아주 다양한 것들, 비(非)사이언스 픽션들을 도출할지 모릅니다. SF 평론가는 SF 소설을 이용해 얼마나 장수 거북이 우아한지 찬양할 수 있습니다. SF 평론가는 SF 소설을 이용해 심쿵심쿵한 저녁 데이트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아한 장수 거북과 심쿵심쿵한 저녁 데이트가 SF 요소들이 아니라고 해도, SF 평론가는 찬양하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SF 평론을 반드시 도출하지 않는가?" 사이언스 픽션에 아주 다양한 측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SF 평론가가 여러 창작물들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동안, SF 평론가는 잘못된 교집합을 구성할지 모릅니다. 결국 SF 평론가는 '유사성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형식, 매체, 소재, 주제, 설정, 기타 등등에서 평론가가 유사성들을 찾기 때문에, SF 평론과 판타지 평론은 형식적으로 똑같아집니다. 그래서 SF 평론가에게 '유사성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은 아주 중요합니다. 평론가가 SF 장르를 분류하기 전에, 평론가는 어떻게 유사성들이 장르를 분류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평론가가 어떻게 유사성들이 장르를 분류하는지 파악하기 원한다면, 평론가는 '유사성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유사성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 SF 평론가에게 이건 선행 조건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장르이고, 장르가 교집합이기 때문에, 이건 아주 중요한 선행 조건입니다. SF 평론가가 이것을 잘못 파악한다면, SF 평론과 판타지 평론은 형식적으로 똑같아질 겁니다. 이 게시글에서, 첫째 문단부터 넷째 문단까지, 저는 어떻게 옆동네 철수가 유사성을 파악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SF 평론가에게 '유사성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이 아주 중요한 선행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문제가 됩니다. SF 평론가에게 '유사성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이 아주 중요하다고 해도, 이게 SF 평론이 되나요? 아니, 이건 SF 평론에 속하지 않습니다.
'유사성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은 SF 평론보다 기호학, 해석학에 속합니다. 이 게시글에서 저는 (아~~~~주 초보적인) 기호학을 이용해 여러 창작물들을 분류했고 정리했고 비교했습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유사성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다면, SF 평론가는 기호학을 이용해야 할 테고, SF 평론가는 평론가보다 기호학자, 해석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SF 평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론적으로 SF 평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SF 팬들은 SF 평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애석하게도 이건 환상입니다. SF 평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SF 평론가는 그저 기호학과 해석학을 특정한 창작물들에 적용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SF 평론은 '자라와 솥뚜껑(과 아르켈론)' 사례와 형식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SF 평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용적인 측면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SF 평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SF 평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완전하게 단언하지 못합니다. 많은 작가들, 독자들, 평론가들은 SF 평론(과 비슷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반박할 겁니다. 장르가 고정적이지 않다면, 평론 역시 고정적이지 않을 테고, 어떤 평론들은 SF 평론에 훨씬 가까울 겁니다. 아무리 SF 평론가가 그저 기호학과 해석학을 특정한 창작물들에 적용할 뿐이라고 해도, 이런 '특정한 적용 그 자체'는 SF 평론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SF 평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완전하게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만약 SF 평론가가 그저 기호학과 해석학을 특정한 창작물들에 적용할 뿐이라면, SF 평론보다 기호학, 해석학은 훨씬 상위 범주가 될 겁니다. 특정한 기호학, 해석학은 SF 평론을 흡수하고 소화할지 모릅니다. SF 평론은 이런 부담과 위험을 마주해야 합니다. SF 평론에는 (형식적으로) 부족한 측면이 있습니다. SF 평론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SF 평론은 기호학, 해석학에 기대야 합니다. 솔직히 비단 SF 평론만 아니라 전반적인 문학 평론 역시 이런 부담과 위험을 마주해야 합니다. 많은 주류 문학들 역시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 평론가는 주류 문학 평론이 무엇인지 규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문학 평론은 존재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이건 내일 당장 SF 평론가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장르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유사성이 SF 장르를 평가하기 위한 가장 커다란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이 블로그에서 저 역시 유사성들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유사성들을 많이 이용할 겁니다. 하지만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유사성 기준은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나,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유사성 기준이 상당히 유용한 방법임에도, 만약 이게 전부가 아니라면, 어떻게 SF 평론가가 SF 평론을 보완할 수 있나요?
[만약 이런 'SF' 게임에 문학적인 측면들이 있다면, 어떻게 SF 평론가가 이것들을 분류하고 도출하나요?]
"SF 평론이 무엇인가?" 이게 너무 거창한 물음이기 때문에, 이런 덕질 블로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비록 이 게시글 제목이 <SF 평론이란 무엇인가?>라고 해도, 이 게시글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크고 작은 방법들을 이용해) SF 평론이 무엇인지 계속 자문자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며칠 전에 9월 25일 게시글(링크)이 말한 것처럼, '생산 조건'은 SF 평론을 보완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유사성들이 유용한 방법이라고 해도, SF 평론가가 유사성들을 파악하기 전에, SF 평론가는 '어떻게 SF 장르가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할 겁니다. 더 정확히 SF 평론가는 '어떻게 특정한 유사성들이 SF 분류 기준이 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SF 평론가는 SF보다 SF 분류 기준을 설명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에게 어떤 유사성들이 있다고 해도, 갑자기 하늘에서 이런 유사성들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평론가가 '어떻게 특정한 유사성들이 SF 분류 기준이 되는지' 파악한다면, 평론가가 SF 그 자체보다 SF 배후를 파악한다면, 평론가는 SF 평론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겁니다. 어쩌면 이건 그저 인문학 속의 계통 분류학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비록 이런 작업이 SF 평론을 특정한 기호학에서 구원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런 작업이 그저 인문학 속의 계통 분류학에 불과하다고 해도, 적어도 이런 작업은 주류 문학 평론과 SF 평론과 판타지 평론을 똑같이 취급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SF 평론가가 어떻게 특정한 유사성들이 SF 분류 기준이 되는지 파악할 때, 출발점은 서구 근대 산업 문명이 되어야 할 겁니다.
26번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우리가 SF 전형을 완전하게 합의하지 못한다고 해도, 서구 근대 산업화 동안, 전형적인 SF 특징들은 나타났습니다. 서구 근대 산업화 동안, 메리 셸리는 인조인간을 썼고, 쥘 베른은 만능 잠수함을 썼고, 허버트 웰즈는 미래 자연 생태계를 썼고, 샬롯 퍼킨스 길먼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썼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허공에서 서구 근대 산업 문명은 번쩍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근대 문명에서 가장 심각한 오해는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갑자기 허공에서 서구 근대화가 번쩍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문명 속에서 우리가 살아감에도, 우리는 어떻게 근대 문명이 나타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서구 근대화가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근대 문명이 엄청난 폭력을 휘두름에도, 우리는 근대적인 폭력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합니다. 두 눈 앞에 뭔가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저 그것을 나불거릴 뿐입니다. SF 평론가가 SF 장르를 근본적으로 평가하고 싶다면, SF 평론가는 이런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어떻게 SF 평론가가 서구 산업 문명을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나요? 9월 25일 게시글이 지적하는 것처럼, 서구 근대화는 식민지 수탈에서 비롯했습니다. 세계 체제 이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서구 문명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불하고 1등석 기차표를 얻습니다. 서구 문명이 1등석 기차표를 얻은 이후, 특등석을 얻기 위해 서구 문명은 다른 식민지들을 무참하게 수탈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식민지 수탈 문제와 SF 평론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건 '생산 조건의 함정'인지 모르나, 저는 여기에 논리적인 하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SF 평론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너무 거창하기 때문에, 이제까지 제가 논리를 전개하는 동안, 저는 몇몇 부분을 너무 성급하게 설명했는지 모르나, 저는 제가 억지를 부리거나 논리적으로 비약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블로그에는 다른 많은 게시글들이 있고, 만약 제가 몇몇 부분을 너무 성급하게 설명했다면, 다른 게시글들은 이 게시글을 보충할 수 있을 겁니다. 이 게시글이 다소 성급하게 설명했다고 해도, 식민지 수탈 문제와 SF 평론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 필연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가 식민지 수탈 문제를 파악하고 싶다면, SF 평론가는 마르크스주의, 에코 페미니즘, 세계 체제 이론을 참고해야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에코 페미니즘, 세계 체제 이론은 식민지 수탈 문제를 가장 구체적으로 논의합니다. 20세기 초반에 서구 문명이 식민지 수탈을 미화하고 왜곡하고 은폐하는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레닌은 서구 식민지 수탈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들이 식민지 수탈을 파악하기 원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에코 페미니즘, 세계 체제 이론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됩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레닌과 마리아 미스와 밸 플럼우드와 프란츠 파농과 이매뉴얼 월러스틴 없이,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SF 평론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