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평론가들은 SF 생산 조건을 비평해야 한다 본문
소설 <신비의 섬>은 무인도 생존 이야기입니다. 무인도 섬에서 생존자들은 많은 것들을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다행히 만물 박사 덕분에, 생존자들은 작은 문명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문명이 아주 놀랍고 안락하고 뛰어나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생존자는 무인도 문명이 스팀펑크 판타지로 발전할 거라고 꿈꿉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는 찬란한 진보로 이어질 겁니다. 과학, 논리, 이성, 계몽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무인도 문명은 철도를 깔고, 기차를 만들고, 스팀펑크 판타지가 되고, 찬란한 진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생존자는 이런 멋진 꿈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꿈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존자가 멋진 스팀펑크 판타지를 꿈꾸고, 찬란한 진보를 떠들고, 19세기 서구 근대화를 찬양한다고 해도, 이런 멋진 스팀펑크 판타지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어린 소년부터 만물 박사까지, 무인도 문명에는 오직 남자들만 있으나, 아무도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만물 박사조차 여자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무인도 문명, 멋진 스팀펑크 판타지, 찬란한 진보는 오직 서구 백인 남자들만을 위한 유토피아입니다. 소설 <신비의 섬>에는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비단 <신비의 섬>만 아니라 다른 쥘 베른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신비의 섬>은 놀랍습니다. 무인도 문명은 굉장합니다. 아무 근거 없이, 생존자는 스팀펑크 판타지를 꿈꾸지 않습니다. 생존자들이 무인도에 닿았을 때, 그들은 비참하고 초라한 몰골이었으나, 무인도에서 그들은 풍요로운 문명을 이룩합니다. 이건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존자들이 모든 것을 뚝딱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인도에는 도깨비 방망이가 없습니다. 생존자들은 자원들과 재료들을 얻고 가공해야 합니다. 아무리 만물 박사가 똑똑하다고 해도, 만물 박사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빵을 먹지 못합니다. 그들은 빵을 먹기 원했으나, 무인도에는 밀알이 없습니다.
무인도에는 먹거리 재료들이 풍부하나, 무인도에 밀알이 없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빵을 먹지 못합니다. 그들은 빵을 정말 간절히 원하나, 밀알 없이, 그들은 밀 농사를 짓지 못하고, 밀가루를 얻지 못하고, 빵을 반죽하지 못하고 굽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존자들이 밀알 하나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밀알을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만약 밀알이 썩거나, 새가 밀알을 먹는다면, 밀 농사는 영원히 수포로 돌아가고, 생존자들은 빵을 절대 입에 대지 못할 겁니다. 땅에서 빵이 불쑥 솟아오르지 않는 것처럼, 밀알에서 빵이 나오는 것처럼, 요리에는 재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요리 프로그램들은 재료들을 이야기합니다.
수많은 요리 프로그램들에서 요리사가 요리 과정을 보여주기 전에, 먼저 요리사는 재료들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무(無)를 이용해 요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무를 이용해 다쿠앙을 만들 수 있으나, 우리는 무(無)를 이용해 아무것도 만들지 못합니다. 요리사에게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요리에는 재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펠슈트루델에는 사과가 필요하고, 키비악에는 바다 표범이 필요하고, 다코야키에는 문어가 필요하고, 수르스트뢰밍에는 청어가 필요하고, 순대에는 돼지 부산물이 필요합니다. 비단 요리사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재료는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무에서 유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재료들이 필요합니다. SF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작가들 역시 '재료들'을 가공해야 합니다. SF 작가들에게 재료들은 외계인, 우주선, 인공 지능, 로봇, 보행 차량 같은 것들입니다. SF 작가에게 우주선은 밀일과 같습니다. SF 작가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하고 직접 SF 소설을 쓰지 못합니다. SF 작가들은 재료들을 가공하고 소설들을 써야 합니다. 20세기 후반 작가는 우주선 항해를 쓸 수 있으나, 13세기 후반 작가는 우주선 항해를 쓰지 못합니다. 13세기 후반 작가에게 재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13세기 후반 작가는 우주선을 알지 못합니다.
13세기 후반 작가에게는 SF 소설을 쓰기 위한 재료가 없습니다. 그래서 13세기 후반에는 SF 소설들이 없습니다. 13세기 후반 작가와 달리, 20세기 후반 작가는 재료들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작가는 우주선이 항해하고, 인공 지능이 고민하고, 보행 차량이 쿵쿵거리며 걸어다니고, 외계인과 인간이 키스하고 애무하고 섹스한다고 쓸 수 있습니다. 왜 13세기 후반 작가에게 SF 소설을 쓰기 위한 재료가 없고, 왜 20세기 후반 작가에게 재료가 있나요? 왜 13세기 후반 작가가 우주선 항해를 쓰지 못하고, 왜 20세기 후반 작가가 우주선 항해를 쓸 수 있나요? 어떻게 이런 '재료들'이 나타났나요?
허공에서 이런 것들이 뚝 떨어졌나요? 도깨비 방망이가 바닥을 두드렸기 때문에, 땅에서 우주선, 외계인, 인공 지능, 보행 차량이 불쑥 솟아올랐나요? 그건 아닙니다. 13세기 후반 작가와 20세기 후반 작가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서구 근대화입니다. 13세기 후반 작가는 서구 근대화를 거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13세기 후반 작가가 서구 문명에 속한다고 해도, 13세기 후반 서구 문명은 아직 근대화를 거치지 못했습니다. 근대화는 17세기 계몽주의를 거치고, 18세기 자본주의 발달을 거치고, 19세기 산업 혁명을 거치고, 20세기에 자리를 잡습니다. 13세기 후반 서구 작가는 서구 근대화를 알지 못합니다.
왜 서구 근대화가 17세기 계몽주의, 18세기 초기 자본주의, 19세기 산업 혁명을 거쳐야 하나요? 왜 13세기 후반 서구 문명이 계몽주의, 초기 자본주의, 산업 혁명을 거치지 못했나요? 13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과학, 논리, 이성, 진보를 외쳤다면, 13세기 작가들은 인조인간이 돌아다니고 우주선이 항해한다고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왜 13세기 후반 유럽 작가들이 쓰지 못했나요? 19세기 메리 셸리가 인조인간이 돌아다닌다고 썼고, 허버트 웰즈가 화성 로켓이 지구로 날아간다고 쓸 수 있었음에도, 왜 13세기 서구 작가들이 쓰지 못했나요? 유전적으로 13세기 서구 작가들과 19세기 서구 작가들이 다른가요? 분명히 유전 형질들은 다를 겁니다.
하지만 13세기 서구 작가들과 19세기 서구 작가들은 똑같이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유전 형질들이 다르다고 해도, 생물적인 기반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회 생물학자들은 13세기 작가의 유전 형질과 19세기 작가의 유전 형질이 다르기 때문에 19세기 작가가 우주선 항해를 쓴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이건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대답이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대답이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얄팍한 엉터리 사회 생물학입니다. 이런 엉터리 사회 생물학은 우생학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화 생물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생학은 온갖 차별들을 저지릅니다. 사람들은 이런 우생학이 진화 생물학이라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사회 생물학이랍시고 이런 우생학을 믿습니다. 이건 그 자체로서 사회 생물학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저는 사회 생물학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사회 생물학 그 자체가 나쁜가요? 솔직히 제가 사회 생물학을 부정한다면, 이 블로그는 명분을 잃을 겁니다. 이 블로그는 생태학 SF 장르를 이야기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생체 잠수정, 소행성 버블월드, 초거대 우주 고리 생태계, 거대 괴수는 생태학 SF 장르에 속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유전 공학, 진화 생물학, 생태학과 필수적인 관계들을 맺습니다. 소설 <레비아탄>에서 생체 비행선에는 다윈주의 과학자가 있습니다.
다윈주의 과학자들은 거대 부유 고래를 키우고 생체 비행선을 만듭니다. 다윈주의 과학자들이 생체 비행선을 만드는 것처럼, 생태학 SF 장르를 덕질하기 위해 저는 진화 생물학을 떠들어야 합니다. 사회 생물학과 진화 생물학 사이에는 단단한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생태학 SF 장르와 사회 생물학은 모두 진화 생물학에서 비롯합니다. 만약 제가 사회 생물학을 부정한다면, 저는 생태학 SF 장르를 부정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사회 생물학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지배적인 관념이 사회 생물학을 우생학으로 왜곡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여자가 조신하고 순종적이라고 오해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사회 생물학보다 지배적인 관념, 가부장적인 편견입니다. 엉터리 사회 생물학은 이런 가부장적인 편견에 들러붙고 우생학이 됩니다. 제가 사회 생물학을 비판한다고 해도, 저는 사회 생물학 그 자체보다 이런 엉터리 사회 생물학(우생학)을 비판하기 원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13세기 작가의 유전 형질보다 19세기 작가의 유전 형질이 진화했기 때문에 19세기 작가가 우주 항해를 쓴다고 주장한다면, 이것 역시 엉터리 사회 생물학(우생학)이 될 겁니다. 생물적인 기반에서 13세기 서구 작가와 19세기 서구 작가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호모 사피엔스에 속합니다.
심지어 생물적인 기반에서 원시 혈거인과 21세기 초반 도시 시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원시 혈거인이 우주선 항해를 쓰지 못하고 21세기 초반 도시 시민이 우주선 항해를 읽을 수 있나요? 생물적인 기반이 이유가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기에는 여러 대답들이 있을 겁니다. 물질적인 조건 역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고대부터 인류 사회들은 재화들을 꾸준히 생산했습니다. 어떤 재화들은 사라지고, 어떤 재화들은 잉여 생산물들이 됩니다. 잉여 생산물들로서 재화들은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계속 쌓입니다. 재화들이 쌓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훨씬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생산 과정 속에서 인류 사회들은 계속 바뀝니다. 재화들이 쌓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조건은 바뀝니다. 13세기 후반 유럽과 20세기 후반 유럽에서 물질적인 조건은 완전히 다릅니다. 7세기 동안 엄청난 재화들, 잉여 생산물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물질적인 조건은 인류 사회를 바꾸고, 20세기 후반 작가는 우주선이 항해한다고 쓸 수 있습니다. 이런 물질적인 조건이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물질적인 조건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20세기 후반 작가가 우주선 항해를 쓰는 이유는 인류 사회가 계몽되고, 이성을 깨닫고, 사상을 발달시키기 때문이 아닙니다.
계몽, 이성, 진보, 사상. 이런 것들은 그저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고귀한 존재라고 포장하나, 인간은 별로 고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고귀한 존재였다면, 하루 아침에 인간은 이성을 깨달았을 테고 유토피아를 실천했을 겁니다. 이건 계몽과 이성과 진보가 길바닥 쓰레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인간이 천사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인간은 계몽과 이성과 진보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과학 기술을 실험하고 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개호주는 똑같이 지구 거주민이고, 인간과 개호주에게는 많은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개호주 언어를 알지 못하고, 개호주가 인간 언어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심지어 생물적인 기반 위에서 인간과 개호주는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인간 여자가 젖꼭지를 내민다면, 배고픈 개호주는 인간 여자의 젖꼭지를 빨 겁니다. 인간 여자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배고픈 개호주는 젖꼭지를 빨 겁니다. 인간과 개호주는 똑같이 지구 거주민, 척추 동물, 고등 포유류이고, 인간은 개호주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 역시 동물입니다. 동시에 '인간적으로' 인간은 동물입니다. 아무르 호랑이는 과학 기술을 연구하지 못하고 철학적으로 사고하지 못합니다. 저와 달리, 이런 블로그에서 아무르 호랑이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덕질하지 못합니다.
과학자들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속의 타이가 구역에 아무르 호랑이를 집어넣는다고 해도, 아무르 호랑이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머나먼 우주 항해를 떠난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아무르 호랑이는 이 블로그가 빨갱이들을 찬양하기 때문에 언제든 이 블로그가 쌍욕들을 퍼먹어야 한다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아무르 호랑이와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에게는 '인간적인' 고귀함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고귀함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조건이 쌓이기 때문에, 고귀함은 나타납니다. 등이 따시고 배가 불러야 예의를 아는 것처럼, 물질적인 조건은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 더 물을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조건이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왜 이런 물질적인 조건이 다른 무엇보다 서구 근대화로 이어지나요?
넷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서구 근대화 이후, SF 소설들은 나타납니다. SF 작가가 서구 근대화를 거치기 때문에, SF 작가는 우주선이 항해한다고 쓸 수 있습니다. 왜 서구 근대화가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요? 왜 중국, 인도, 이슬람, 이집트, 아즈텍보다 유럽이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요? 산업, 무역, 인구에서 유럽은 중국과 인도를 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유럽보다 중국과 인도가 발달했다면, 왜 중국과 인도가 SF 소설을 쓰지 못했나요? 왜 다른 지역들보다 유럽에서 SF 소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나요? 왜 중국 근대화, 인도 근대화, 이슬람 근대화, 아즈텍 근대화보다 서구 근대화가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으나, 식민지 수탈은 아주 커다란 이유가 될 겁니다. 식민지 수탈이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식민지 수탈은 아주 커다란 이유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문명들이 바다를 건너고 새로운 대륙을 수탈할 수 있었나요? 오직 유럽 문명만 그럴 수 있었습니다. 인류 문명에서 대항해 시대는 오직 한 번뿐입니다. 그래서 북~남 아메리카는 '신대륙'입니다. 대항해 시대 때문에, 식민지 수탈 때문에, 유럽은 막대한 부를 얻었고 서구 근대화를 주도했습니다. 이런 서구 근대화 속에서 SF 소설들은 나타납니다. 서구 근대화는 생산 조건입니다. 서구 근대화는 SF 소설들을 만들었습니다.
서구 근대화는 식민지 수탈에 기반합니다. 결국 SF 소설들(의 생산 조건)은 식민지 수탈에 기반합니다. 엔코미엔다 제도, 플랜테이션 모노 컬쳐, 열대 밀림 파괴, 야생 동물 멸종, 마녀 사냥, 흑인 노예 무역, 아동 노동자 착취 같은 비극들 때문에, 유럽은 서구 근대화를 주도했고, 서구 근대화는 SF 소설들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SF 평론가들이 이것을 반성하고 청산하기 원하나요? SF 평론가들이 식민지 수탈이 그저 과거에 불과하다고 나불거리지 않나요? 21세기 초반이 포스트(후기) 식민지 시대라고 SF 평론가들이 주장하지 않나요? 미국 정부가 남아메리카 좌파 정부를 고립시킨다고 해도, SF 평론가들이 식민지 수탈이 사라졌다고 지껄이지 않나요?
SF 평론가들은 SF 장르를 분류해야 합니다. 하지만 SF 평론가들이 장르를 분류하기 전에, SF 평론가들은 어떻게 장르가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마가렛 캐번디시든, 메리 셸리든, 쥘 베른이든, 에드거 앨런 포든, 허버트 웰즈든, 샬롯 퍼킨스 길먼이든, 평론가들이 장르를 분류하기 전에, 평론가들은 SF 생산 조건(서구 근대화)을 비평해야 합니다. 땅에서 빵은 불쑥 솟아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빵을 먹기 원한다면, 그게 에크멕이든, 바게트든, 차파티든, 요우티아오든, 호빵맨이든, 우리는 밀알을 심어야 합니다. 밀알 없이, 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