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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SF 소설과 '비가시적'이고 비일상적인 상상력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SF 소설과 '비가시적'이고 비일상적인 상상력

OneTiger 2019. 9. 29. 20:22

독자가 소설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독자가 에밀리 브론테 소설을 펼치고, 하퍼 리 소설을 펼치고, 실비아 플래스 소설을 펼치고, 도리스 레싱 소설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새로운 세상을 만납니다. 에밀리 브론테와 하퍼 리와 실비아 플래스와 도리스 레싱은 다양한 소설들은 썼으나, 이런 소설들에는 근본적인, 아주 아주 아주 아주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런 소설들은 글자 매체입니다. 독자가 소설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글자 세상을 만나고 글자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독자가 다른 작가들을 찾는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언어가 무엇이든,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우리처럼, 만약 외계인들이 소설들을 쓰고 읽는다면, 외계인 소설들 역시 글자 매체일 겁니다. 반면, 우리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우리는 시각을 중시합니다. '두 눈을 뜬다'는 문구는 깨달음을 가리킵니다. "이웃집 영희는 페미니즘 포르노 소설들을 읽고 새로운 성애를 향해 두 눈을 뜬다." 같은 표현처럼, 우리에게 시각은 아주 중요한 의미입니다. 고전적인 심봉사부터 주제 사라마구가 쓴 포스트 아포칼립스까지, 많은 문학들은 시각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시각적인 정보들을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시각적인 동물이라고 해도,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소설은 글자들을 동원합니다. 글자들은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림이 단순하다고 해도, 그림은 시각적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설프게 낙서한다고 해도, 현실과 낙서 사이에서 우리는 시각적인 유사성들을 찾고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대 혈거인들이 벽화를 그렸다고 해도, 고대와 21세기 초반 사이에 아무리 거대한 시대적인 격차가 있다고 해도, 벽화와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시각적인 유사성들을 찾고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대 혈거인들이 표범을 향해 감탄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고대 혈거인들이 그림보다 글자들을 썼다면, 글자들을 해석하기 위해 고고학자들은 아주 애를 먹을 겁니다. 글자들이 시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림이 시각적이기 때문에, 현실과 그림 사이에 시각적인 유사성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림을 상대적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6,000년 전의 고대 벽화를 보자마자, 우리는 고대 벽화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 글자들이 시각적이지 않기 때문에, 글자들을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낯선 글자들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는 글자들을 교차 검증해야 합니다. 단서들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글자들을 해석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그림이 단순하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그림은 시각 정보입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는 두 눈으로 그림을 바라봅니다. 현실과 그림 사이에서 우리는 시각적인 유사성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4월 22일 <지구의 날> 게시글(링크)이 간단한 실러캔스 그림을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리 그림이 간단하다고 해도, 그림에서 우리는 시각적인 유사성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이런 시각적인 유사성들이 공식이라고 해도, 이런 공식은 단순한 그림이 현실을 시각적으로 모방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림 속의 귀여운 실러캔스와 현실 속의 실러캔스 사이에는 많은 차이들이 있습니다.


평론가가 귀여운 실러캔스 그림을 까고 싶다면, 평론가는 수많은 차이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평론가는 이런 차이들 때문에 실러캔스 그림이 현실 속의 실러캔스를 제대로 모방하지 못하고 반영하지 못한다고 신나게 깔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론가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귀여운 실러캔스 그림과 현실 속의 실러캔스 사이에 너무 많은 차이들이 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사이에 너무 많은 차이들이 있음에도, 왜 우리가 그림 속의 물고기가 실러캔스라고 해석하나요? 우리가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는 누군가가 그림을 그렸다고 간주합니다. 화가는 뭔가를 표현하기 원했을 겁니다.



아니면 그림 속의 익숙한 패턴들, 공식들은 우리 시선을 이끌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을 (다른 뭔가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인식합니다. 우리가 물고기를 그릴 때, 우리는 특정한 패턴들, 공식들을 따릅니다. 적어도 어떤 공동체에는 상당히 보편적(이거나 지배적)인 그림 패턴들, 공식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패턴들, 공식들은 패러다임으로 확장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물고기를 그릴 때, 흔히 우리는 물고기 측면을 그립니다. 우리는 물고기 전면이나 후면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림 시점은 물고기 측면을 보여줍니다. 그림 시점은 물고기 등이나 물고기 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물고기를 그릴 때, 왜 그림 시점이 물고기 측면을 강조하나요?


비디오 게임 <코이>가 보여주는 것처럼, 시점은 탑-다운(top-down)이 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코이>는 물고기 측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 게임 시점은 탑-다운입니다. 반면, 흔히 우리가 물고기를 그릴 때, 우리는 탑-다운 시점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참다랑어처럼, 많은 물고기들은 방추형입니다. 참다랑어처럼, 물 속에서 헤엄치고 수중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많은 물고기들은 방추형입니다. 온코프리스티스 같은 물고기들은 예외 사례이나, 우리는 온코프리스티스 같은 물고기들보다 방추형 물고기들을 훨씬 많이 봅니다. 방추형 물고기들이 훨씬 뛰어난 수영 선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코프리스티스 같은 물고기들보다 참다랑어 같은 방추형 물고기들이 대표적이라고 간주합니다.



측면 시점은 방추형 물고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측면 시점은 방추형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과거 일본에서 어탁(魚拓)들은 측면 시점이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어탁들은 측면 시점입니다. 물론 비디오 게임 <코이>가 보여주는 것처럼, 탑-다운 시점이 물고기를 묘사한다고 해도, 우리는 물고기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많은 잉어(koi) 그림들은 측면 시점보다 탑-다운 시점에 가깝습니다. 총명한 규수가 싱그럽고 아늑한 정원을 산책하는 동안, 규수가 맑은 연못 속의 잉어들을 구경한다면, 규수는 잉어들을 내려다볼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규수는 잉어들을 내려다볼 겁니다.


총명한 규수가 잉어 그림을 그린다면, 이런 그림(링크)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림 시점은 측면 시점보다 탑-다운 시점이 될 겁니다. 그래서 비디오 게임 <코이>는 탑-다운 시점을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게임 제작자들이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전통적인 잉어 그림들과 <코이>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처럼, 흔히 우리가 측면 시점을 이용해 물고기들을 그린다고 해도, 측면 시점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측면 시점을 이용해 참다랑어를 그리거나, 오토두스 메갈로돈을 그리거나, 초거대 바다 괴수 아방을 그린다고 해도, 이런 시점은 고정적인 공식이 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예술 표현 사조에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면, 더 이상 예술 사조는 흐르지 못할 겁니다. 예술 사조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에, 예술 사조는 전형적인 공식을 깨고 흐를 수 있습니다. 누가 아나요? 600년 이후, 물고기를 그리기 위해 사람들은 측면 시점보다 탑-다운 시점을 선호할지 모릅니다. 600년 이후, 미래 사람들은 측면 시점보다 탑-다운 시점을 이용해 물고기를 그릴지 모릅니다. 심지어 탑-다운 시점은 개복치를 그릴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여러 문화들에서 물고기를 그리기 위해 사람들은 탑-다운 시점보다 측면 시점을 선호합니다. 측면 시점은 패턴, 공식입니다. 시점(視點)이라는 단어처럼, 이런 표현 형식은 시각적입니다.


귀여운 실러캔스 그림에는 이것을 비롯해 다른 많은 공식들이 있고, 우리는 이것들을 이용해 실러캔스 그림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현실 속의 실러캔스와 그림 속의 귀여운 실러캔스 사이에 많은 차이들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차이들보다 유사성들(패턴들, 공식들)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이 그림이 실러캔스라고 해석합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패턴들, 공식들이 오류라고 느낄 겁니다. 그들은 이런 공식들을 부정하고 다른 공식들을 제시할 겁니다. 평론가들이 이런 공식들을 호평하거나, 이런 공식들이 널리 퍼진다면, 이건 새로운 표현 형식, 예술 사조가 될 겁니다.



[탑-다운 시점은 연꽃을 강조하고 전통적인 잉어 그림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분위기는 참 싱그럽네요.)]



'시각적인 정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하늘에서 구름이 우연히 실러캔스 형태가 된다면, 우리가 이런 구름이 실러캔스 '그림'이라고 간주해야 하나요? 그림과 구름 형태 사이에 어떤 비슷한 패턴들, 공식들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구름을 그림이라고 간주해야 하나요?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어머, 구름은 실러캔스를 닮았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머, 저건 실러캔스 그림이야."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와, 구름은 실러캔스를 그렸어."라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런 문구가 그저 비유에 불과하거나 발언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실러캔스 형태 같은 구름은 예술이 아닙니다.


아니, 이게 정말 예술이 아닌가요? 인간이 뭔가를 그릴 때, 이게 미술이 되나요? 우연히 구름이 멋진 실러캔스 형태가 된다면, 이게 미술이 되지 못하나요? 만약 우리가 작자 미상 그림을 본다면, 우리가 화가를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자 미상 그림이 미술이 되지 못하나요? 작자 미상 그림은 인간이 그린 그림이 아닐지 모릅니다. 세월의 풍파가 바위에 어떤 흔적을 남겼음에도, 우리는 고대 사람들이 그것을 그렸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미술이 되나요? 우리가 미술을 절대적으로 규정할 수 있나요? 이런 사례들은 미술이 고정적인 울타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뭔가를 그림이라고 인식할 때, 우리는 시각적인 유사성들, 패턴들, 공식들을 확인합니다. 반면, 글자들에는 시각적인 유사성들, 패턴들, 공식들이 없습니다. '木'은 상형 문자입니다. '木'은 나무를 시각적으로 모방합니다. 귀여운 실러캔스 그림과 현실 속의 실러캔스 사이에 시각적인 유사성들이 있는 것처럼, '木'과 나무 사이에는 시각적인 유사성들이 있…나요? 많은 사람들은 '木'이 나무를 닮지 않았다고 반박할 겁니다. '木'이 글자가 되었기 때문에, '木'과 나무 사이에는 시각적인 유사성들이 너무 적거나 없습니다. 이렇게 글자들은 시각적인 유사성들을 잃습니다. 글자들에는 시각적인 유사성들이 없습니다.


글자들은 보편적인 기호,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아무리 그림과 글자가 똑같이 기호에 속한다고 해도, 시각적인 기호로서 그림은 글자와 다릅니다. 주제 사라마구가 쓴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처럼, 문제는 우리가 시각적인 동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독자가 소설책을 펼칠 때, 시각적인 동물 독자는 보편적인 기호 세상, 글자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표현 형식이 바뀌는 동안, 독자는 새로운 세상(글자 매체)에 적응해야 합니다. 독자가 시각적인 세상에 아주 익숙하다면, 적응하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만약 이런 소설이 주류 문학이라면, 적어도 독자는 현실 속의 시각적인 정보들을 소설 속의 글자 세상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면?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는 현실 속의 시각적인 정보들을 소설 속의 글자 세상에 대입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시각적인 정보들을 소설 속에 대입할 수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어려울지 모릅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쓴 <먹이>에는 메이 창(Mae Chang)이라는 현장 생물학자가 있습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메이 창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소설 <먹이>는 노골적으로 메이 창이 예쁘다고 암시합니다. 현장 생물학자로서 메이 창은 나노 로봇들과 동물들을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커다란 활약을 펼칩니다. 성격 역시 침착하고 이성적입니다.


나노 로봇 테크노 스릴러에서 메이 창은 주연 자리를 얼마든지 맡을 수 있습니다. 이름처럼, 메이 창은 아시아 계열입니다. 만약 <먹이>가 실사 영화가 된다면, 실사 영화 <먹이>에서 유명한 아시아 계열 배우들이나 중국 배우들은 메이 창을 연기할 겁니다. 사람들이 <먹이>를 읽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탕웨이 같은 배우가 메이 창을 연기한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한국 배우나 일본 배우 역시 메이 창을 연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상은 어렵지 않습니다. 남한 독자들이 유명한 중국 여자 배우들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남한 독자들은 '지적이고 침착하고 아름다운 아시아 계열 여자'를 메이 창에게 대입할 수 있습니다.



남한 독자에게 아시아 계열 여자들은 일상적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아시아 계열 여자는 비일상적일지 모릅니다. 만약 아드리아네라는 어떤 고대 로마 사람이 아시아 계열 사람들을 절대 구경한 적이 없다면, 고대 로마 사람 아드리아네는 아시아 계열 여자를 메이 창에게 쉽게 대입하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아드리아네는 유럽 계열이나 아프리카 계열 여자를 메이 창에게 대입할지 모릅니다. 아드리아네가 아시아 여자를 구경한 적이 없다면, 어떻게 이 사람이 아시아 여자를 메이 창에 대입할 수 있나요? 고대 로마 사람은 태블릿 컴퓨터를 쉽게 상상하지 못합니다. 이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태블릿 컴퓨터처럼, 아시아 계열 여자라는 시각적인 정보를 메이 창이라는 글자 표현에 쉽게 대입하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아드리아네에게 태블릿 컴퓨터와 아시아 계열 여자는 다르지 않습니다. 두 가지는 똑같이 비일상적입니다. 물론 마이클 크라이튼은 (아시아 사람을 구경한 적이 없는) 고대 로마 사람 아드리아네가 <먹이>를 읽는다고 상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소설 작가들이 그러는 것처럼, 마이클 크라이튼은 '특정한 독자들'을 상정했을 겁니다. 21세기 초반 일본 독자가 나가사와 마사미를 메이 창에게 대입한다면, 아드리아네와 달리, 이런 독자는 (마이클 크라이튼이 상정한) '특정한 독자들'에 속할 겁니다.



이런 독자에게 나가사와 마사미를 비롯해 아시아 계열 여자들은 일상입니다. 하지만 소설 <먹이>에서 중점은 현장 생물학자 외모보다 나노 로봇들입니다. <먹이>에는 나노 로봇 설비들이 있습니다. 나노 로봇 설비들은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일본 독자가 나가사와 마사미를 메이 창에게 쉽게 대입할 수 있다고 해도, 이런 독자가 나노 로봇 설비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나요? 나가사와 마사미보다 나노 로봇 설비들은 훨씬 비일상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들은 일상이고, 온갖 광고들에는 온갖 연예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가사와 마사미는 일상이 됩니다. 반면,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나노 로봇 설비들을 쉽게 만나지 못합니다.


SF 독자가 포털 사이트 검색 프로그램을 이용해 나노 로봇 설비들을 검색한다고 해도, 검색 결과는 전문적인 지식들을 늘어놓을 겁니다.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가 나노 로봇 설비 사진을 보여준다면, 독자가 이런 시각적인 정보를 소설에 대입할 수 있나요? 이게 오류가 아닌가요? 시각적인 정보(나노 로봇 설비 사진)를 소설에 대입하기 위해 독자에게 전문 공학 지식들이 필요하지 않나요? 독자가 SF 소설을 읽는 동안, 이건 문제가 됩니다. 솔직히 SF 독자에게 이건 아주 커다란 난관입니다. SF 소설이 비일상적인 사물을 묘사하는 동안, 독자는 "아니, 이게 무슨 노리마키 속에서 지단과 우엉이 애무하고 섹스하는 헛소리야?"라고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물론 어제 9월 28일 게시글이 설명한 것처럼, SF 소설에는 아주 커다란 장점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이언스 픽션(장르)과 소설(매체)은 가장 잘 어울리는 한쌍인지 모릅니다. 외계 행성 생태계는 '가시적'이고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글자 매체는 이것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구현하지 못합니다. 평론가는 글자 매체로서 SF 소설이 외계 행성 생태계를 정교하게 묘사하지 못한다고 신나게 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태학이 외계 행성에서 수많은 생물 다양성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한다고 설명한다면, 이런 외계 행성 생태학은 '비가시적'이고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됩니다. 글자 매체로서 SF 소설은 비가시적인 외계 생태학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글자 매체로서 SF 소설이 비가시적인 측면을 멋지게 설명한다면, 평론가는 SF 소설을 까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평론가가 SF 소설이 터무니없는 뻥튀기라고 싫어한다고 해도, 평론가는 SF 소설을 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어가 사고, 감성,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매체인가요? 많은 철학자들은 반박할 겁니다. 호랑이를 생각하기 위해 우리에게 단어 '호랑이'가 필요한가요? 언어 배후에는 또 다른 뭔가가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인쇄된 글자보다 현장 속의 목소리를 숭배하는지 모릅니다. 두꺼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두껍다'보다 '두껍다'라는 글씨체를 우대할지 모릅니다. 만약 본질적으로 언어가 그저 비유에 불과하다면, 언어는 논리적인 사고를 방해할 겁니다.



이렇게 언어에는 많은 단점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언젠가 글자보다 또 다른 매체는 비가시적이고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훨씬 제대로 표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가시적이고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글자 매체, SF '소설'을 이용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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