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과 무지의 장막 본문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는 외계 우주선을 탐험하는 인류 탐사대를 이야기합니다. 인류 탐사대는 거대한 우주선 내부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과연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우주선을 만들었는지 논의합니다. 물론 한낱 인류 탐사대는 거대 우주선을 만든 자들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그저 압도적인 크기와 구조, 성능에 놀랄 뿐입니다. 라마 우주선은 인류에게 그 어떤 암시나 정보도 주지 않고, 탐사대는 의문과 서글픔으로 우주선을 바라볼 뿐이죠.
비록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으나, 독자는 탐사대와 함께 라마인들이 누구일지 끊임없이 상상합니다. 사실 이건 SF 소설의 가장 고유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벗어나고, 다른 존재를 상상하는 것. 이거야말로 SF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일 겁니다. 덕분에 독자는 인식의 지평선을 한층 넓힐 수 있고, 좀 더 파격적이고 근본적인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만 아니라 수많은 SF 소설들이 그런 인식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다른 세계, 다른 사건, 다른 존재를 통해서 그럴 수 있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SF 소설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상상하기 좋은 장르입니다. 이 '다른 존재'는 외계인, 돌연변이, 인공지능, 개조 생명체 등이 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작가가 제시한 상황과 설정 속에서 외계인이 되거나 돌연변이가 되거나 인공지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존재들이 어떻게 느끼고 살아가는지 대략적으로 체험할 수 있죠. <라마와의 랑데부>를 보면, 독자는 어떤 거대하고 강력한 문명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리우스>를 보면, 독자는 개조 동물이 인간 세상에서 어떤 고통을 느끼는지 알 수 있습니다.
<파괴된 사나이>를 보면, 초인들이 인간들 틈에서 나름대로 얼마나 적응하려고 애쓰는지 엿볼 수 있어요. <사소한 정의>는 인간에 근접한 인공지능이 인공 존재들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시를 계속 든다면, 한도 끝도 없겠죠. 물론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SF 장르만의 고유 영역이 아닙니다. 판타지 역시 얼마든지 이렇게 시도할 수 있어요. 인간이 엘프나 드워프가 되거나, 언데드가 되거나, 다른 기이한 존재가 되는 걸 상상할 수 있겠죠.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아웃사이더>는 딱 그런 소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판타지 소설보다 SF 소설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상상하기에 좀 더 알맞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SF 장르는 논리적인 설정을 추구하니까요. 장르 이름답게 논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애쓰죠. 뭐, 어차피 SF 장르도 환상 소설에 속하고, 판타지와 SF 모두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SF 소설이 자랑하는 논리적인 상상력도 완전히 현실과 부합하지 않아요. 때때로 이런 상상력은 너무 멀리 나갈 수 있고, 아예 판타지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활극을 중시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나 스팀펑크는 판타지와 크게 다르지 않죠. 그런 점을 감안해도 SF 장르는 판타지 장르보다 좀 더 논리적이라고 봅니다. 도토리 키재기일 수 있으나, 그런 차이도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하튼 중요한 점은 이런 장르 소설들이 서슴없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솔직히 '다른 존재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주 어려운 일이죠. 우리는 다른 존재야 둘째치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상상하기 어려우니까요.
생명체는 주위의 영향을 강하게 받습니다. 우리 인류도 그렇고, 따라서 다른 환경과 그 환경에 속하는 존재의 입장을 곧잘 이해하기 힘듭니다. 열대 우림에 사는 사람은 혹한의 빙판과 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상상하기 어렵겠죠. <듄>에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아라키스 원주민들이 침을 뱉었는데, 다른 행성 사람들은 그게 커다란 모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라키스는 사막 행성이고, 그래서 원주민들은 물을 소중하게 여기고, 침을 뱉는 행위는 더없이 명예로운 행위였죠.
눈물을 흘리는 행위는 어디에서나 고귀한 의미지만, 아라키스 행성 원주민들은 눈물을 특히 소중하게 여깁니다. 물이 워낙 귀하기 때문이죠. 이런 사례처럼 주변 환경은 그 존재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양식, 신체 구조까지 규정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은 물론이고, 다른 존재의 입장을 생각하기 어렵겠죠. 굳이 외계인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동물들의 생각조차 쉽게 파악하지 못하죠. 동물을 인간이나 기계처럼 대하는 경우가 있죠. (사실 동물은 우리가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다른 존재'입니다.) 동물은 사람도, 기계도 아니지만, 그렇게 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SF 소설은 그런 상상력을 시도하고, 그래서 SF 소설은 짜릿합니다. 인간적인 시각, 지구적인 시각, 단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독자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고, 다른 행성을 볼 수 있고, 미래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이 한 걸음 더 나간다면, 나 자신과 다른 존재의 위상까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가령, 허버트 웰즈의 <우주 전쟁>이 딱 그런 사레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지구의 정복자라고 생각하고, 수많은 야생 동물들을 학살했습니다.
제국주의는 약소국을 침범하고, 자본가는 빈민들을 착취하죠. 하지만 화성인이 침공했을 때, 이런 관계는 전혀 다르게 바뀝니다. 인간이 동물을 학살하고, 제국이 약소국을 공격하고, 자본가가 빈민을 착취하는 것처럼 화성인 역시 지구인을 사정없이 짓밟습니다. 지구인들은, 특히 소설에 나오는 유럽 중산층은 이제 야생 동물이나 빈민이나 약소국 원주민과 같은 처치로 몰락합니다. 인간의 영역, 제국 시민의 영역, 중산층의 영역은 절대로 고유하거나 불변하지 않습니다.
<혹성 탈출> 같은 소설도 그런 점을 시사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주인공 일행은 유인원 행성에 불시착합니다. 그 행성에서 인간은 그저 가축이나 야생 동물에 불과했고, 유인원들이 진정한 문명인처럼 행동하죠. 주인공은 그 광경을 보는 동안 인간의 절대적인 지위가 얼마나 미약하고 허망한지 상상합니다. 사실 지금 이 순간, 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위상이나 위치, 계급 등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사고와 재해, 기타 여러 사건들 때문에 누군가는 한순간에 몰락하거나 좌초할 수 있습니다. 남 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중산층 가정이 모종의 사고와 재해 때문에 빈민으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무섭고 끔찍한 일이죠. 하지만 그런 일은 분명히 이 현실에서 벌어집니다. (아마도) 화성인의 보행 병기가 유럽 중산층을 짓밟을 일은 없겠지만, 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히 한 순간에 재난으로 몰락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런 불운을 당하지 않은 사람도 그렇게 불운한 사람들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만 아니라 동물들을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동물들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니까요.
세계 식량 조사관이자 사회학자인 장 지글러는 '운이 존재를 결정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그저 주어집니다. 그 누구도 자기 인생을 처음부터 설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잘 나가는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야지."라고 생각하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빈민가에서 태어나기 싫어. 빈민가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호랑이가 싫어. 호랑이가 된다면, 밀렵꾼들에게 쫓겨다니겠지." 호랑이가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아니죠, 호랑이도 그냥 태어났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가 강조했듯 모든 존재들은 그저 태어났을 뿐입니다. 운에 따라서. 장 지글러는 자신이 원했기 때문에 유럽 스위스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말리나 부르키나파소의 굶어죽는 아이들도 자신이 원했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밀렵꾼에게 쫓기는 호랑이도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그저 태어났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외계인이 되는 것'을 상상하기보다 '소말리아의 아이가 되는 것'을 상상하기가 더 쉽겠죠.
이 글을 쓰는 저도 무슨 사고를 당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사고를 당한다면, 장애인이 되거나 아주 비참한 지경까지 떨어질 수 있겠죠. 그런 상황에서 목숨을 구걸하기 힘들 수 있겠죠. 이런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네 삶, 우리네 공동체를 좀 더 안정적인 곳으로 바꿔야 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누가 무슨 일을 당하든, 누가 어떤 존재로 태어나든, 이 공동체는 그 존재를 보살피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이게 존 롤스가 말한 '무지의 장막'과 비슷한 개념일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장 불행하고 억압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어요.
그래서 공동체의 행보를 결정할 때, 그런 존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죠. 문제는…. 작금의 자본주의 체계가 그걸 방해한다는 점입니다. 이상 기후는 대대적인 위기라고 불리고 그 때문에 고통을 받는 약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는 이상 기후를 무시하거나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합니다. 과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경고하지만, 정치인들이나 자본가들은 오직 돈벌이에만 충실하죠. 당연히 자본주의 체계는 다른 사람의 생존이나 환경 따위 무시합니다. 오직 자유로운 경쟁, 그래서 강자만이 승리할 수 있는 경쟁을 부르짖죠. 그래서 롤스는 '무지의 장막'을 이용했고, 상호 보완적인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무지의 장막'은 어려운 개념일까요. 글쎄요, 저는 이게 비교적 쉬운 사고 실험이라고 봅니다. 위에서 말했듯 '외계인이 되는 것'을 상상하기보다 쉽죠. 어쩌면 SF 소설을 읽을 때마다 이런 '무지의 장막'을 체험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바로 개념 돌파, 고정 관념 타파, 인식의 지평선과 비슷한 개념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