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21세기의 빨갱이는 좌빨 본문
예전에 듀나가 <가린의 살인 광선>을 소개할 때, '빨갱이 SF'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빨갱이. 꽤나 향수 어린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사람들은 빨갱이라는 말을 그리 자주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구 세력들 역시 이 말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빨갱이라는 말은 과거의 잔재입니다. 영화 <박열>에서 '사회주의 빨갱이들' 같은 자막이 나오더군요. 이런 시대극에 어울리는 단어죠. 빨갱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졌기 때문일 겁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자타공인 사회주의의 큰 형님이었고, 사회주의는 곧 소련이었습니다.
수많은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생태주의는 이에 반발했으나, 소련의 영향력이 워낙 컸기 때문에 저런 반발은 제대로 먹히지 않았죠. 사실 우파들도 소련을 사회주의의 전부인 것처럼 포장하기 원했을 겁니다. 소련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곧장 사회주의로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들은 사회주의자를 욕하는 단어 빨갱이에 소련의 이미지를 덧씌웠을 겁니다. 사회주의는 빨갱이고, 소련은 사회주의의 대표이고, 그래서 빨갱이는 소련입니다.
하지만 소련은 무너졌습니다. 소련은 나름대로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런저런 교훈을 남겼으나,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컸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소련이 인민들을 억압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소련의 환경 오염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자연 환경을 대규모로 오염시키는 체계는 절대 사회주의 체계가 될 수 없습니다. 자연 환경을 보존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평등한 체계를 추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소련은 무기 경쟁이나 산업 개발에 매달렸고, 솔직히 이건 자본주의 체계와 하등 다를 바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개발에만 매달릴 거라면, 뭐하러 힘들게 투쟁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나요. 그냥 자본주의 체계에서 그 놀라운 생산력을 계속 만끽하면 장땡이죠. 소련의 붕괴는 사회주의 체계가 발전과 개발만을 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어요.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 소비에트의 유산을 어느 정도 간직했고, 그래서 저는 소비에트 연방이 잘한 것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개발과 경쟁에만 매달리는 체계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국과 유럽이 너무 쪼았기 때문에 소련 역시 자연 환경에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었겠으나, 결국 그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될 수 없었어요.
소련이 무너졌기 때문에 빨갱이라는 단어 역시 함께 무너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소련이 빨갱이라는 이미지를 워낙 독식했기 때문에 빨갱이라는 단어 역시 더 이상 쓰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수구 세력들은 다른 단어를 내세워야 했습니다. '종북'은 21세기의 빨갱이입니다. 빨갱이가 소련을 포함한다면, 종북은 순수하게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만을 가리키죠. 정말 북한의 주체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 좌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좌파들이 북한과의 대화를 원하는 이유는 그게 훨씬 안전하고 덜 자극적이고 보다 현실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좌파들이 대화를 원할 때, 수구 세력들은 좌파들이 북한을 추종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문제는 수구 세력들이 뭐라고 떠들든 종북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좌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가령, 녹색당은 어떻게 봐도 종북이라는 단어와 잘 이어지지 않습니다. 수구 세력들조차 녹색당을 종북과 연결시키기 어려워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좌빨'이라는 신조어가 튀어나왔을 수 있죠. 종북이라고 부를 수 없고, 빨갱이라고 부를 수 없고, 그래서 양쪽을 크로스오버한 결과가 좌빨.
이 좌빨이라는 단어는 북한과 별로 인연이 없는 해외의 좌파들까지 싸잡아 비하할 수 있습니다. 아마 현재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자 좌파 사상가 중 하나는 슬라보예 지젝일 겁니다. 지젝은 유럽 철학자이고, 덕분에 지젝을 종북이라고 부르기 좀 어색하죠. 지젝이 북한을 방문하거나 김일성과 이야기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좌빨이라는 말을 이용하면, 이런 유럽 좌파 철학자 역시 비난할 수 있습니다.
만약 미래에 어떤 좌파 사상이 사라진다고 해도 좌빨이라는 용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든 좌파들을 광범위하게 비판할 수 있는 편리한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좌빨이라는 용어는 소련이 무너졌음에도 여전히 좌파 사상은 자본주의 체계와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중이라는 현실을 반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건 우리나라의 사정이고, 해외 사정이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해외에서 좌파를 욕하는 단어들도 바뀌었을지…. 이런 걸 이야기하는 사회주의 책은 없나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