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홈시크>, 동물 권리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대립한다 본문
[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채집·사냥은 중요한 생존 활동입니다.]
이 장면은 <홈시크>의 스크린샷입니다. 이 게임 스크린샷은 생존자들이 열매들을 채집한다고 보여줍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현실에서 채집은 중요한 생존 활동이 아닙니다. 많은 농장들이 많은 먹거리들을 선사하기 때문에, 채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달리, 이 비디오 게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처럼, 이 비디오 게임에서 인류 문명은 무너졌습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많은 농장들은 많은 먹거리들을 선사하지 않습니다. 황무지 종말 세계에서 먹거리들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홈시크>에서 채집은 중요한 활동이 됩니다.
채집이 중요한 활동이기 때문에, 이 게임 스크린샷은 생존자들이 열매들을 채집한다고 보여줍니다. 채집처럼, 사냥은 생존 활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원시 사회가 수렵·채집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원시 사회가 수렵·채집 사회인 것처럼, 비단 채집만 아니라 사냥 역시 중요한 활동입니다. 현실에서 사냥은 생존 활동이 아닙니다. 사냥 없이, 인류 문명은 많은 먹거리들을 얻습니다. 현실과 달리, <홈시크>는 사냥꾼 오두막을 묘사합니다. 비단 이 비디오 게임만 아니라 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역시 비슷합니다. <홈시크>처럼, <엔드존>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양쪽은 비슷한 범주입니다.
<홈시크>처럼, <엔드존>에서 인류 문명은 무너졌습니다. (<홈시크>가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인 것처럼, <엔드존>은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입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많은 농장들은 많은 먹거리들을 선사하지 않습니다. 황무지 종말 세계에서 먹거리들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엔드존>에서 사냥은 생존 활동입니다. <홈시크>처럼, <프로스트펑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양쪽은 비슷한 범주입니다. <홈시크>처럼, <프로스트펑크>에서 인류 문명은 무너졌습니다. (<홈시크>가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인 것처럼, <프로스트펑크>는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입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많은 농장들은 많은 먹거리들을 선사하지 않습니다. 황무지 종말 세계에서 먹거리들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프로스트펑크>에서 사냥은 중요한 활동이 됩니다. <홈시크>처럼, <서바이빙 애프터매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양쪽은 비슷한 범주입니다. <홈시크>처럼, <서바이빙 애프터매스>에서 인류 문명은 무너졌습니다. (<홈시크>가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인 것처럼, <서바이빙 애프터매스>는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입니다.) 더 이상, 많은 농장들은 많은 먹거리들을 선사하지 않습니다. 종말 세계에서 먹거리들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서바이빙 애프터매스>에서 사냥은 중요한 활동이 됩니다. 노라 제미신은 <석조 하늘>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이 소설은 아주, 아주 웅장한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아무리 <석조 하늘>이 아주 웅장한 판타지라고 해도, <홈시크>처럼, 이 소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많은 농장들은 많은 먹거리들을 선사하지 않습니다. 황무지 종말 세계에서 먹거리들을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 사이언스 판타지가 아주 웅장하다고 해도,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사냥은 중요한 활동이 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생존자들이 열매들을 채집하는 것처럼, 생존자들은 동물들을 사냥합니다. <엔드존>부터 <석조 하늘>까지, 비단 <홈시크>만 아니라 다른 사례들 역시 이것을 증명합니다. 노라 제미신처럼, 만약 어떤 소설가들이 종말 세계 설정을 계획한다면, 이 소설가들은 사냥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현실에서 사냥은 중요한 생존 활동이 아닙니다. 채집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사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풍요로운 가을,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도토리들을 채집한다고 해도, 이건 생존보다 취향(취미)일 수 있습니다. 채집처럼, 사냥은 생존보다 취향(취미)이 됩니다.
고기는 좋은 영양분들입니다. 아무리 고기가 좋은 영양분들이라고 해도, 고기를 얻기 위해 인류 문명에게 사냥이 필요한가요? 21세기 초반 오늘날, 고기를 얻기 위해 인류 문명에게 사냥이 필요한가요? 사냥 없이, 인류 문명이 고기를 얻지 못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많은 목장들이 많은 고기들을 선사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인류 문명에게는 사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냥 없이, 인류 문명은 많은 고기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목장들 덕분에, 사냥은 그저 취향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이건 죽은 동물이 재미라고 느낍니다. 만약 인류에게 사냥이 필요하지 않다면, 왜 사냥꾼이 동물을 죽이나요?
재미를 위해 사냥꾼은 야생 동물을 죽입니다. 죽은 야생 동물은 재미가 됩니다. 사냥꾼은 죽음이 재미라고 느낍니다. 죽음이 재미가 되기 때문에, 사냥은 부정적인 취향입니다. 사냥이 부정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동물 권리와 사냥은 대립합니다. 만약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인다면, 이건 윤리가 아닐 겁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다른 많은 동물들처럼, 인간은 동물입니다. 작은 다람쥐부터 거대한 고래까지, 인간과 이 동물들에게는 본질적인 교집합이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이 비슷하기 때문에, 만약 인간이 동물을 죽인다면, 이건 비극일 겁니다. 사냥꾼이 동물을 죽이기 때문에, 이건 비극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동물 권리가 사냥에 반대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사냥이 비극이기 때문에, 이게 윤리가 아니기 때문에, 동물 권리는 사냥에 반대합니다. 동물 권리가 반대하는 것처럼, 사냥은 사라져야 합니다. 이건 모든 사냥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국가 정부가 해로운 동물들을 몰아내기 원한다면, 사냥은 부정적인 취향이 아닐 겁니다. (아무리 이게 부정적인 취향이 아니라고 해도, 왜 어떤 동물들이 해로운 동물들이 되나요? 이게 편견이 아닌가요? 정말?) 아무리 모든 사냥이 나쁘지 않다고 해도, 취향(취미)으로서, 사냥은 윤리가 아닙니다. 사냥이 윤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건 사라져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사냥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사냥만 아니라 목장 역시 똑같습니다.
작은 다람쥐부터 거대한 고래까지, 만약 인간과 야생 동물이 비슷하다면, 인간과 가축은 비슷할 겁니다. 닭, 오리, 염소, 돼지, 젖소. 인간과 이 동물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이 닭, 오리, 염소, 돼지, 젖소를 죽인다면, 이건 윤리가 아닐 겁니다. 목장은 가축들을 키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목장이 가축들을 키우나요? 대답은 고기들입니다. 고기들을 얻기 위해 목장은 가축들을 키웁니다. 이건 목장이 오직 고기만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치즈처럼, 목장은 비단 고기만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얻습니다. 아무리 목장이 치즈를 얻는다고 해도, 적어도, 고기들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고기를 위해 목장은 가축을 죽입니다.
비록 목장이 염소를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목장은 치즈를 얻을 수 있습니다. 치즈와 달리, 고기를 얻기 위해 목장은 돼지를 죽입니다. 인간과 돼지가 비슷하기 때문에, 만약 인간이 돼지를 죽인다면, 이건 비극일 겁니다. 고기는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육식은 윤리가 아닙니다. 고기처럼, 치즈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목장과 감옥은 다르지 않습니다. 감옥이 죄수들을 가두는 것처럼, (치즈를 얻기 위해) 목장은 젖소들을 가둡니다. 목장에서 젖소들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특히, 많은 우유들을 얻기 위해 목장은 젖소들을 커다란 고통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커다란 고통 때문에, 고기처럼, 치즈는 윤리가 아닙니다.
비록 치즈가 윤리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치즈를 얻기 위해 목장은 염소를 죽이지 않습니다. 만약 염소가 죽는다면, 치즈를 얻기는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치즈와 달리, 고기를 얻기 위해 목장은 돼지를 죽입니다. 만약 돼지가 죽지 않는다면, 고기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고기가 죽음이기 때문에, 치즈보다 고기는 훨씬 나쁜 비극입니다. 동물 권리가 사냥에 반대하는 것처럼, 동물 권리는 이 비극에 반대합니다. 사냥이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육식은 사라져야 합니다. 아무리 육식이 죽음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육식을 지지하는지 모릅니다. 이 사람들은 고기가 아주, 아주 중요한 영양분들이라고 주장할 겁니다.
고기가 아주, 아주 중요한 영양분들이기 때문에, 채식주의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비록 육식이 비극이라고 해도, 이 사람들은 채식주의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의견이 타당한가요? 인간에게 육식이 필요한가요, 아니면 필요하지 않은가요? 저는 영양분 전문가가 아닙니다. 비록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도, 승려부터 환경 활동가까지, 많은 사례들은 인간에게 육식이 필요하지 않다고 보여줍니다. 승려부터 환경 활동가까지, 오직 채식만으로, 이 사람들은 그들의 건강들을 유지합니다. 인간에게 육식은 필요하지 않은지 모릅니다. 만약 육식이 중요하지 않다면, 채식은 타당할 겁니다.
2023년 오늘날, 육식은 사라져야 합니다. 동물 권리는 육식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육식처럼, 사냥은 사라져야 합니다. 동물 권리와 사냥은 대립합니다. 아무리 양쪽이 대립한다고 해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동물 권리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먹거리들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존자들에게 고기는 중요한 영양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생존자들이 사냥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좋은 영양분들을 얻지 못할 겁니다. 생존자들이 좋은 영양분들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가지 못할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동물 권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이 부흥하기 때문에, 동물 권리는 성립합니다. 그 자체로서, 동물 권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굶주린다면, 인간과 동물이 비슷하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굶주린다면, 동물 권리보다 인간 중심주의는 우선할 겁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채식을 편든다고 해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이 사람들은 사냥을 인정할 겁니다. 어쩌면 채식주의에게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불편한' 문화·예술일 수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채식주의가 성립하지 못한다고 설정합니다. 심지어 식인조차 가능합니다. 어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이것을 묘사합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먹거리들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어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식인을 묘사합니다. 심지어 식인조차 가능하기 때문에, 동물 권리는 그저 엉터리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이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식인이 정당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인류 문명이 무너졌다고 해도, 살인은 윤리가 아닙니다. 비록 살인이 윤리가 아니라고 해도, 더 이상, 질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 세상에…, 고기를 얻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야만에 빠집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안정적인 먹거리들이 아주 중요하다고 보여줍니다. 안정적인 먹거리들 없이, 아…, 사람들은 야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무너진 문명이 비극으로 이어진다고 보여줍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식인을 비판한다고 해도, 식인과 달리, 사냥을 비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안정적인 먹거리들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에게 동물은 고기, 먹거리가 됩니다. 게다가, 어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사이언스 판타지들에 가깝습니다. 이것들은 돌연변이들을 묘사합니다. 외계인 침략, 기후 변화, 방사능 오염은 오직 인류 문명만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자연 생태계를 바꿉니다. 자연 생태계가 바뀌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체들은 나타납니다. 어떤 새로운 생명체들은 너무 무섭습니다. 만약 공격적인 말벌이 1m를 넘어선다면, 생존자들은 이 돌연변이를 물리쳐야 합니다.
만약 생존자들이 이 거대 말벌을 물리친다면, 이 말벌은 먹거리일 수 있습니다. 비록 이 말벌이 먹거리가 된다고 해도, 동물 권리는 반대하지 못할 겁니다. 공격적인 말벌이 1m를 넘어서는 것처럼, 만약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사이언스 판타지에 가깝다면, 생존자들과 돌연변이들은 대립할 겁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인류는 야수들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인류는 야수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동물 권리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아니, 동물 권리가 1m 말벌을 편들 수 있나요? 동물 권리가 돌연변이 거대 말벌에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비록 돌연변이 말벌이 그저 사이언스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건 중요한 고민을 암시합니다. 2023년 오늘날, 호랑이는 인류 문명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달리,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호랑이는 생존자들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생존자들이 호랑이를 물리치지 않는다면, 아…, 이 위험한 야수는 생존자들을 죽이는지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동물 권리가 이 야수를 편들 수 있나요? 이 사례처럼, 동물 권리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대립합니다. 이건 언제나 양쪽이 대립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민더 달리왈은 <우먼 월드>를 그렸습니다. 이 만화는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고 묘사합니다.
<홈시크>부터 <석조 하늘>까지, 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처럼, <우먼 월드>는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고 묘사합니다. 비록 이 만화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해도, 이 종말 세계에서 동물 권리를 주장하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비록 돌연변이 거미들이 습격한다고 해도, 이 세계에서 채식을 주장하기는 쉬울 겁니다. 아무리 채식을 주장하기가 쉽다고 해도, 사실, <우먼 월드>는 '진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닙니다. 이 만화는 페미니즘 유토피아에 가깝습니다. 페미니즘을 위해 <우먼 월드>는 가부장 제도를 파괴합니다. 가부장 제도가 무너지기 때문에, 이 만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내가 깨어났을 때>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페미니즘 유토피아입니다. 사실, <홈시크>보다 <우먼 월드>와 <내가 깨어났을 때>는 가깝습니다. 이 만화처럼, 만약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유토피아에 가깝다면, 이 종말 세계와 동물 권리는 공존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 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가부장 편견들은 채식주의를 모욕하지 않을 겁니다.) <우먼 월드>와 달리, <홈시크>는 '진짜'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엔드존>부터 <석조 하늘>까지, 이 세계들은 '진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입니다. 이것들은 동물 권리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대립한다고 보여줍니다.
동물 권리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대립하기 때문에, 동물 권리에게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불편한' 문화·예술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따금, 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불편하다고 느낍니다. 이따금, 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문화·예술이라고 느낍니다. 아니, 이건 그저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하지 않을 겁니다.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건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좋은 핑계가 됩니다. "사냥꾼들은 야생 동물들을 죽여야 해! 이건 폭력이 아니야! 이건 폭력보다 생존 활동이야!"
이 주장은 타당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사냥은 비극보다 생존 활동입니다. <엔드존>부터 <석조 하늘>까지, 이 세계들은 사냥이 비극보다 중요한 활동이라고 보여줍니다. 비록 사냥이 비극이라고 해도, 동시에, 이건 생존 활동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사냥, 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불편하다고 느낍니다. 다행히, 이건 사이언스 픽션(SF)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우주 호위함은 포탄들을 날리지 않습니다. 아무도 우주 함대 전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다르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다르지 않습니다. 다행히,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현실이 아닙니다. 2023년 오늘날, 인류 문명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농장들은 많은 먹거리들을 선사합니다. 비록 사냥꾼이 야생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인류는 많은 먹거리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달리, 위험한 야수들은 인류 문명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아니, 생물 다양성이 커다란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야생 서식지들은 확장해야 합니다. 야생 서식지들이 확장하는 것처럼, 많은 농장들이 먹거리들을 선사하는 것처럼, 2023년 오늘날, 동물 권리는 성립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SF)는 현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동물 권리는 성립할 수 있습니다. 우주 호위함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홈시크>부터 <서바이빙 애프터매스>까지, 이 암울한 세계들은 현실이 아닙니다. 아니, 아니, 잠깐.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현실이 아닌가요? 정말? 2023년 오늘날, 세계화 자본주의는 '너무 대규모 불평등'에게 기생합니다. 17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서구 제국주의는 제3세계를 수탈했습니다. 300년 이상, 서구 제국주의는 제3세계를 짓밟았습니다. 20세기 후반, 아무리 제3세계가 독립했다고 해도, 신자유주의가 확장했던 것처럼, 군사적인 침략은 경제적인 종속이 되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제3세계를 수탈하기 때문에, 세계화 남반구(글로벌 사우스)에서 많은 사람들은 너무 가난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현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비단 식민지 수탈만 아니라 지구 가열화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지구 가열화가 위험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이건 전대미문의 행성급 생태학 재앙입니다. 지구 가열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위기에 빠집니다. 특히, 세계화 남반구 사람들은 훨씬 커다란 위기에 빠집니다. 그들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전대미문의 재앙에 대비하지 못합니다. 이건 기후 불평등입니다. 어라, 왜 이게 불평등인가요?
지구 대기 중에서 온실 가스들은 너무 많습니다. 온실 가스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지구 가열화는 위험한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많은 가스들을 배출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달리, 부유한 기업들은 너무 많은 가스들을 배출합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이 가스들을 배출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사람들은 기후 피해자들이 됩니다. 지구 가열화가 전대미문의 행성급 생태학 재앙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행성급 생태학 피해자들입니다. 비록 부유한 기업들이 지구 가열화, 이 행성급 생태학 재앙을 저지른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부유한 기업들을 떠받듭니다.
기후 변화처럼, 세계화 자본주의는 불평등에게 기생합니다. 기후 피해자들에게 현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일 겁니다. 극단적인 홍수가 마을을 파괴하기 때문에, 살인적인 폭염이 농장 작물들을 죽이기 때문에, 대규모 메뚜기 무리가 습격하기 때문에, 굶주린 사람들이 무서운 전염병에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에, 식량 위기가 내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너무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됩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동물 권리가 성립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비단 제3세계만 아니라 제1세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물 권리는 헛소리일 겁니다.
동물 권리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대립합니다. 양쪽은 공존하지 못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너무 대규모 불평등에게 기생하기 때문에, 현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다르지 않습니다. 우주 호위함과 달리, 이미 현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게 수렴합니다. 특히, 너무 가난한 사람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게 수렴합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동물 권리는 그저 엉터리 헛소리에 불과할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동물 권리를 편들기 원한다면, 동물 권리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대립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세계화 자본주의, 너무 심각한 대규모 불평등을 비판해야 합니다.
※ 게임 <HOMESEEK> 스크린샷 출처: The Scarlet Seeker,
https://www.youtube.com/watch?v=ePvwOuHmOls
※ 사진 <Deer, Gazelle, …> 출처: Nel_Botha-NZ,
https://pixabay.com/photos/deer-gazelle-buck-herbivore-impala-4897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