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날씨의 아이>, 착취 사회, 침수된 도시, 기후 피해자들 본문
[맑음 소녀, 가난한 사람들, 이상 기후 그리고 재난 편승 자본주의.]
아마노 히나는 허구적인 등장인물(캐릭터)입니다. 이건 아마노 히나가 가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등장인물과 달리, 신카이 마코토는 진짜 인간입니다. 만약 이 애니메이션 감독이 창조하지 않았다면, 아마노 히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자체로서, 이 등장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카이 마코토(진짜 인간) 때문에, 아마노 히나(허구적인 인간)는 존재합니다. 이 등장인물은 이 애니메이션 감독에게 종속됩니다. 아마노 히나처럼, 그 자체로서, 신카이 마코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이 등장인물을 창조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 감독보다 현실은 우선합니다.
만약 현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카이 마코토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 감독은 아마노 히나를 창조했습니다. 현실 없이, 이 등장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마노 히나가 신카이 마코토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이 감독보다 현실이 우선하기 때문에, <날씨의 아이>를 해석하기 위해 극장 관객들은 현실에게 기반할 수 있습니다. (극장 관객들보다 현실은 우선합니다.) <날씨의 아이>는 2019년 애니메이션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히나는 '맑음 소녀'가 됩니다. 만약 이 등장인물이 맑음 소녀가 되지 않는다면, <날씨의 아이>는 성립하지 않을 겁니다.
아마노 히나는 무녀입니다. 적어도, 이 등장인물은 무녀에 가깝습니다. 특히, 아마노 히나는 폭우를 멈추고 맑은 날씨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등장인물은 맑음 소녀가 됩니다. 아무리 이 등장인물이 폭우를 멈춘다고 해도, 만약 모리시마 호다카가 제안하지 않았다면, 아마노 히나는 맑음 소녀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노 히나가 모리시마 호다카를 만나기 전에, 이 소녀는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마노 히나가 모리시마 호다카를 만난 이후, 적극적으로, 이 등장인물은 맑은 날씨를 소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이 놀라운 능력은 많은 돈들로 이어집니다.
왜 아마노 히나가 맑은 날씨를 소환하기 시작했나요? 왜 모리시마 호다카가 맑음 소녀 사이트를 개설하자고 제안했나요? 대답은 '돈'입니다. 아마노 히나는 가난합니다. 이 소녀에게는 돈들이 필요합니다. <날씨의 아이>는 아마노 히나가 말랐다고 묘사합니다. 아마노 히나가 가난했기 때문에, 아아…, 이 소녀는 충분한 영양분들을 섭취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노 히나가 충분한 영양분들을 섭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소녀는 성숙하지 못했을 겁니다. 모리시마 호다카는 다르지 않습니다. 이 소년에게는 돈들이 필요합니다. <날씨의 아이>는 이 등장인물이 경제적인 위기에 빠진다고 묘사합니다.
아마노 히나가 가난하기 때문에, 심지어 이 소녀는 위험한 돈벌이조차 고민합니다. 아마노 히나가 위험한 돈벌이를 고민하는 것처럼, <날씨의 아이>에서 경제적인 위기는 커다란 비중입니다. 만약 아마노 히나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만약 모리시마 호다카가 경제적인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성립하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경제적인 위기는 아마노 히나, 모리시마 호다카, 맑음 소녀를 연결하기 위한 중요한 다리가 됩니다. 경제적인 위기가 커다란 교집합이었기 때문에, 이 소녀와 이 소년은 이어졌습니다.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닙니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것을 의도했을 겁니다.
이 애니메이션 감독은 경제적인 위기가 중요한 다리가 된다고 의도했을 겁니다. 현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인 위기에 빠집니다.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돈, 돈, 돈, 돈, 돈, 돈을 걱정합니다. 언론 매체들에서 경제적인 위기는 아주 커다란 비중입니다. 아니, 이건 가장 커다란 비중인지 모릅니다. 이건 절대적인 경제 규모가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은 너무 많은 재화들을 만듭니다. 이 많은 재화들 때문에, 환경 사회학은 이른바 물질 발자국이 위험한 수준을 넘어섰다고 경고합니다. 비단 물질 발자국만 아니라 기후 변화 역시 비슷합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은 너무 많은 재화들을 만듭니다. 이 많은 재화들을 만들기 위해 인류 문명은 너무 많은 석탄들, 석유들, 천연 가스들을 태웁니다. 이 연료들은 너무 많은 온실 가스들을 배출합니다. 지구 대기 중에서 이 가스들은 너무 많습니다. 이 가스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지구 평균 기온은 상승합니다. 지구 평균 기온이 상승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위험한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이게 위험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극단적인 기후들을 발생합니다. 살인적인 폭염, 기록적인 홍수, 역사적인 산불처럼, 극단적인 기후들은 생물 다양성을 학살합니다. 경제 규모는 너무, 너~무 거대합니다.
물질 발자국이 위험한 수준을 넘어서는 것처럼, 비단 이것만 아니라 지구 가열화 역시 위험한 수준을 넘어서는 것처럼,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은 너무 많은 재화들을 만듭니다. 아무리 이것들이 너무 많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돈, 돈, 돈, 돈을 걱정합니다. 어라,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무리 경제 규모가 너~무 거대하다고 해도, 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위기에 빠지나요? 대답은 자본주의입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경제입니다. 현실처럼, <날씨의 아이>에서 이건 지배적인 경제입니다.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 계급을 착취합니다. 이 착취 없이, 이 지배적인 경제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위기 때문에, 아마노 히나, 모리시마 호다카, 맑음 소녀는 이어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은 지배 계급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입니다. 만약 자본가 계급이 임금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지 않는다면, 자본가 계급은 훨씬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지 못할 겁니다. 이 계급에게 훨씬 많은 이윤들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훨씬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임금 노동자 계급을 착취해야 합니다.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건 필연적인 법칙입니다. 이 법칙(착취) 없이, 자본가 계급은 훨씬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지 못합니다. 필연적으로, 자본가 계급은 임금 노동자 계급을 착취합니다. 이게 필연적인 법칙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착취 사회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인 위기에 빠집니다.
자본주의가 착취 사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인 위기에 빠집니다. <날씨의 아이>는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신카이 마코토가 자본주의를 착취 사회라고 인식하지 않았다고 해도, 비록 이 애니메이션 감독이 <자본론>을 읽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현실은 자본주의가 착취한다고 보여줍니다. 자본주의가 착취하기 때문에, <날씨의 아이>는 이것을 반영합니다. <자본론>이 자본주의가 착취한다고 분석하기 때문에, 비록 신카이 마코토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관점에서 <날씨의 아이>는 <자본론>이 타당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노 히나는 가난합니다. 그래서 모리시마 호다카는 경제적인 위기에 빠집니다. 네, 맞습니다.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신카이 마코토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원했나요? <날씨의 아이>에서 이게 핵심 주제인가요? 비록 이 애니메이션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비록 이 애니메이션 감독이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날씨의 아이>는 <자본론>이 타당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극장 관객들은 이것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노 히나처럼, 어떤 극장 관객들은 경제적인 위기를 걱정하는지 모릅니다. 모리시마 호다카처럼, 어떤 극장 관객들은 돈, 돈, 돈, 돈, 돈, 돈을 걱정하는지 모릅니다. 아마노 히나가 위험한 돈벌이를 고민할 때, 모리시마 호다카가 경제적인 위기에 빠질 때, 어떤 극장 관객들, 아니, 많은 극장 관객들은 깊은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현실에서 극장 관객들은 <날씨의 아이>를 해석합니다. 현실에서 세계화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경제입니다. 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을 착취합니다. 아무리 인류 문명이 너무 많은 재화들을 만든다고 해도, 세계화 자본주의가 착취 제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인 위기를 걱정합니다. 그래서, 아마노 히나가 위험한 돈벌이를 고민할 때, 많은 극장 관객들은 깊은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비단 경제적인 위기만 아니라 환경 재앙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날씨의 아이>는 환경 아포칼립스에 가깝습니다. 기록적인 폭우가 도쿄를 습격하기 때문입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뉴욕 2140>을 쓰는 것처럼, <날씨의 아이>에서 도쿄, 이 도시는 침수됩니다.
새시 로이드가 <카본 다이어리 2015>를 쓰는 것처럼, <날씨의 아이>는 도시가 침수된다고 묘사합니다. <뉴욕 2140>, <카본 다이어리 2015>가 환경 아포칼립스인 것처럼, <날씨의 아이>는 환경 아포칼립스에 가깝습니다. 이건 <뉴욕 2140>,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날씨의 아이>가 똑같은 범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뉴욕 2140>에서 뉴욕, 이 도시는 침수됩니다. 이건 비극적인 재앙입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이것을 의도했습니다. <날씨의 아이>는 어떤가요? 이 애니메이션에서 침수된 도시가 비극적인 재앙인가요? 타치바나 후미는 과거 도쿄가 바다였다고 설명합니다. 200년 전에, 이 도시는 바다였습니다.
과거 도쿄가 바다였기 때문에, 만약 현재 도쿄가 침수된다면, 이건 진짜 도쿄가 나타난다는 뜻인지 모릅니다. 진짜 도쿄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건 재앙이 아닙니다. 이게 재앙이 아니기 때문에, <날씨의 아이>는 환경 아포칼립스가 아닌지 모릅니다. 적어도, 이 애니메이션에서 환경 아포칼립스보다 아마노 히나와 모리시마 호다카의 관계는 훨씬 중요합니다. <날씨의 아이>는 이 소녀와 이 소년의 관계가 훨씬 중요하다고 암시합니다. 아무리 이 애니메이션이 환경 아포칼립스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기록적인 홍수는 도쿄를 습격했습니다. 이 홍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위기에 빠졌습니다. 국가 정부는 이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위험한 재앙이 민중들을 습격할 때, 국가 정부는 민중들을 도와야 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은 지배 계급입니다. 그래서 국가 정부는 자본주의를 위한 관리자가 됩니다. 이 지배 계급에게 훨씬 많은 이윤들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국가 정부가 자본주의를 위한 관리자이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오직 훨씬 많은 이윤들만 중시하기 때문에, 비록 위험한 재앙이 민중들을 습격한다고 해도, 국가 정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지구 가열화조차 다르지 않습니다. 아마노 히나가 돈, 돈, 돈, 돈을 걱정하는 것처럼,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많은 온실 가스들을 배출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과 달리, 부유한 영리 기업들은 많은 온실 가스들을 배출합니다. 이 가스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극단적인 기후들은 인류 문명을 습격합니다. 이 기후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위기에 빠집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훨씬 커다란 위기에 빠집니다. 이 사람들은 기후 피해자들입니다. 이 피해자들과 달리, 부유한 영리 기업들이 많은 가스들을 배출하기 때문에, 이 기업들은 기후 악당들입니다. 환경 운동들은 이 기업들이 많은 가스들을 배출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악당들은 세계화 자본주의에게 기반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기후 악당입니다.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이 애니메이션에서 (이상) 기후는 핵심 주제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훨씬 커다란 위기에 빠집니다. 기후 변화가 자본주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기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이 기후 악당은 많은 돈들을 지불해야 합니다. 이건 기후 정의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세계화 자본주의가 많은 돈들을 지불하나요? 자본주의가 기후 정의를 실천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기후 악당은 이 정의를 실천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행성급 환경 재앙, 기후 불평등을 외면합니다. 훨씬 많은 이윤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후 피해자들을 위해) 자본주의가 많은 돈들을 지불한다면, 훨씬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비록 세계화 자본주의가 기후 악당이라고 해도, 훨씬 많은 이윤들을 위해 이 악당은 기후 피해자들을 외면합니다. COP28은 이것을 보여줍니다. 위험한 홍수는 아프리카 민중들을 습격합니다. 이 기후 회의는 이 수재민들을 돕지 않습니다. <날씨의 아이>는 다르지 않은지 모릅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국가 정부는 자본주의를 위한 관리자일 겁니다. 신카이 마코토는 <날씨의 아이>가 자본주의를 묘사한다고 의도했을 겁니다. 이 애니메이션이 자본주의를 묘사하기 때문에, 비록 도쿄가 침수되었다고 해도, 비록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위기에 빠졌다고 해도, 국가 정부는 이것을 외면했을 겁니다.
일곱 번째 문단이 추측하는 것처럼, 타치바나 후미는 과거 도쿄가 바다였다고 설명합니다. 200년 전에, 이 도시는 바다였습니다. 과거 도쿄가 바다였기 때문에, 만약 현재 도쿄가 침수된다면, 이건 진짜 도쿄가 나타난다는 뜻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건 진짜 재앙이 아닙니다. <날씨의 아이>에서 이상 기후(기록적인 홍수)는 진짜 재앙보다 가짜 재앙입니다. 적어도, 이건 표면적인 재앙입니다. 도쿄는 그저 과거로 돌아갈 뿐입니다. 비록 기록적인 홍수가 습격한다고 해도, 이 표면적인 재앙보다 아마노 히나와 모리시마 호다카의 관계는 훨씬 중요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수재민들입니다.
도쿄가 침수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수재민들이 되었을 겁니다. 국가 정부가 이 피해자들을 도왔나요? 국가 정부가 자본주의 관리자이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오직 많은 이윤들만 중시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극장 관객들은 긍정적인 대답보다 회의적인 대답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신카이 마코토가 긍정적인 대답을 의도했다면, 이건 <날씨의 아이>가 자본주의를 미화한다는 뜻일 겁니다. 일본 기시다 정부가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버리는 것처럼, 이게 해양 생태계를 향한 테러인 것처럼, 자본주의 관리자로서, 국가 정부는 피해자들을 외면합니다.
아무리 환경 운동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일본 기시다 정부는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버리기 원합니다. 이 사례는 국가 정부(자본주의 관리자)가 피해자들을 외면한다고 보여줍니다. 핵 오염수처럼, <날씨의 아이>에서 국가 정부는 수재민들을 외면했을 겁니다. 아무리 국가 정부가 수재민들을 도왔다고 해도, 이건 충분하지 않았을 겁니다. 극장 관객들은 이것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피해자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악랄한 제도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기후 정의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기후 정의를 위해 인류 문명은 이 제도를 통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핵 융합 동력을 기대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이건 지구 가열화를 해결하는지 모릅니다. 핵 융합 동력은 기후 변화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게 열쇠라고 해도, 언제 이게 가능한가요? 10년 이후, 핵 융합 동력이 가능한가요? 2033년, 핵 융합 동력이 짜자잔~ 나타나고 지구 가열화를 해결하나요? 과학자들이 이 낙관적인 미래를 확신하나요? 10년 이후, 필연적으로, 핵 융합 동력이 가능한가요? 그건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이 낙관적인 미래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 미래는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건 그저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핵 융합 동력이 그저 가능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이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핵 융합 동력은 구체적인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인류 문명은 오직 이 기술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아무리 핵 융합 동력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건 기후 정의를 외면할 겁니다. 2022년 12월, 미국은 핵 융합 실험이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기후 정의를 주장했나요? 많은 언론 매체들은 핵 융합 실험이 성공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래서 이 언론 매체들이 기후 정의를 주장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핵 융합 실험이 성공했다고 해도, 기후 정의는 뒷전이었습니다.
2033년, 어쩌면 핵 융합 동력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건 지구 가열화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게 지구 가열화를 해결한다고 해도, 이건 기후 정의를 외면할 겁니다. 아무리 미국이 핵 융합 동력을 개발한다고 해도, 미국은 기후 피해자들을 돕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이건 또 다른 상품이 되는지 모릅니다. 비록 자본주의가 기후 악당이라고 해도, 이 악당은 재생 에너지들을 판매합니다. 기후 변화 시대에서 재생 에너지들은 좋은 상품들이 됩니다. 자본주의는 이 상품들을 판매하고 많은 돈들을 법니다. 어휴~, 기후 악당에게 지구 가열화는 많은 돈들을 벌기 위한 기회가 됩니다.
[비록 이 애니메이션과 <카본 다이어리>가 다르다고 해도….]
자본주의가 재생 에너지들을 판매하는 것처럼, 핵 융합 동력은 비싼 상품이 되는지 모릅니다. 자본주의가 기후 악당이기 때문에, 미국이 세계화 자본주의를 주도하기 때문에, 미국은 기후 악당입니다. 만약 이 악당이 핵 융합 동력을 개발한다면, 이 악당에게 지구 가열화는 비싼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기회가 될 겁니다. 이 악당은 비싼 상품을 판매하고 많은 돈들을 벌 겁니다. 이건 재난 편승 자본주의입니다. 현실에서 재난 편승 자본주의를 목격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재생 에너지들을 판매하기 위해 많은 기업들은 환경 친화를 외칩니다. <날씨의 아이>, 이 애니메이션은 어떤가요?
현실에서 재난 편승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경제입니다. <날씨의 아이>가 자본주의를 묘사하기 때문에, 신카이 마코토가 이것을 의도했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에서 재난 편승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경제인지 모릅니다. 비록 <날씨의 아이>가 이것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 애니메이션에서 자본주의에게 이상 기후, 기록적인 폭우는 비싼 상품들을 판매하고 많은 돈들을 벌기 위한 기회가 되는지 모릅니다. 비록 신카이 마코토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극장 관객들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극장 관객들은 현실에 속합니다. 그리고, 현실은 재난 편승 자본주의입니다.
※ <너의 이름은>처럼, <날씨의 아이>는 가부장 편견들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모리시마 호다카는 주된 시점이 됩니다. 이 등장인물 시점에서 극장 관객들은 <날씨의 아이>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모리시마 호다카는 성숙한 여자 가슴을 바라봅니다. 어떤 극장 관객들은 이 장면이 불편하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이 장면이 가부장 편견들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관객들은 이게 그저 사춘기 소년을 표현할 뿐이라고 해석하는지 모릅니다. 모리시마 호다카가 사춘기 소년이기 때문에, 이 등장인물은 그저 여자 가슴을 바라볼 뿐입니다. 음, 어떤 해석이 타당한가요?
이 장면이 가부장 편견들을 반영하나요? 아니면 이 장면이 그저 사춘기 소년을 표현할 뿐인가요? <날씨의 아이>에게는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비록 모리시마 호다카가 성숙한 여자 가슴을 바라본다고 해도, 이건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속합니다. 아무리 이게 창작,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극장 관객들은 <날씨의 아이>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경제입니다. 페미니즘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와 가부장 제도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가부장 제도에서 극장 관객들은 모리시마 호다카가 여자 가슴을 바라본다고 해석합니다.
※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 예고편 출처:
http://www.youtube.com/watch?v=rzKcrJ77wBY
http://www.youtube.com/watch?v=VGksHFs04Rc